시방세계 Ⅰ
현대 세계불교㉒
섬 숲속 불교학파
내 젊은 시절 남방불교 체험과
서구 출신 학승들
나는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불교에 관한 일관된 생각은 구도적(求道的) 일념이라고나 할까,
뭔가 불교의 진수를 수행경험을 통해서 체득해보고자 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이론적이고 관념적으로 불교를 인식하는 입장보다는 실질적인 수행을 통한 인식을 선호해 오고 있다.
사실, 상좌부에 대한 인식도 막연하게 책만을 통해서 알려고 하는 자세보다는 직접 명상도 해보고 수행도 해 보는 입장이었다. 일본불교인의 눈으로 보는 남방불교 또는 관념불교의 극치인 한국적 대승불교의 편견으로 보는 정통상좌부의 폄하적인 냉소주의를 떠나서 상좌부의 진면목을 한번 직접 눈으로 보자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남방불교에 대한 경험을 직접 출가해서 승가공동체에 몸담아서 체험을 통해서 인식하고자 했다.
이런 관점에서 내가 젊은 시절 직접 남방불교지역에 가서 체험을 한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 실론에 갔을 때, 운 좋게 와지라라마 사원에서 비구 보디스님을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한수 배웠는데, 그로부터 섬 암자 불교학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직접 이 섬을 찾아갔던 일이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80년대 초여서 주력 비구들은 안계시고, 스리랑카 출신 제자 비구가 암자를 지키고 있었다. 이 무렵 냐나포니카( Nyanaponika) 대장로 스님은 캔디의 숲 속 암자로 옮겨간 이후였고, 비구 보디스님은 그의 후계수업을 밟고 있는 중이었다.
실론불교의 근대화와 부흥의 과정에서 일단의 서구 출신 학승 몇 분을 거명하고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름을 섬 숲속 암자학파로 명명했는데, 그것은 이 분들이 주로 섬과 숲속에서 수행하면서 저술활동을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자기 나라를 떠나서 타국에서 그 나라의 문화와 종교 등을 연구해서 큰 업적을 내는 분들이 종종 있게 된다. 실론불교의 부흥과 근대화 과정에서 실론 자체 내에서의 승가활동도 큰몫을 했지만, 실론 불교의 근대화 과정에서 올코트 대령 같은 실천적 운동가의 영향이라든지, 서구출신 비구들의 보편적 불교학 연구를 통해서 실론불교의 수준을 높였다. 이런 서구출신 비구가운데서 리더로서 조실격인 분이 냐나티로카(Nyanatiloka Mahathera 1878〜1957) 대장로 비구이다. 참으로 이 분의 일생을 보노라면, 종교란 이런 것인가 하는 감동을 받게 되고 이처럼 한 인간의 인생행로를 바꿔놓는가를 절감하게 된다. 그리고 초지일관해서 처음 마음을 변치 않고 끝까지 수행자의 초심을 지켜내고 있는 냐나티로카 큰 스님의 신념과 정신은 정말 본받을 만 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동북아의 불교 풍토라면 종정은 물론 조실 방장을 하셔도 남을 분이다.
냐나티로카 비구는 1878년 독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방 김나지움의 교장이면서 교수였고, 어머니는 왕립극장에서 피아노 연주가 및 가수였다.
그래서 그는 일찍이 음악수업을 받고 음악이론과 작곡공부를 하고 여러 악기를 다룰 정도로 예능에 뛰어났다. 독일과 파리에서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한때는 기독교 수도원에 가서 수사가 되려고 출가한 적도 있었다. 그는 차차로 범신론적 신관을 갖게 되었고, 채식주의자가 되면서 금주 금연가가 되었다. 한편 그는 음악가로서 성장했고, 철학자들의 책을 탐독했으며 채식식당에 갔다가 우연히 신지학(神智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바이올린 선생이 건네준 수바드라 비구의 저서와 다른 불교서적을 탐독하고 나서는 아시아에서 불교승려가 되겠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아시아에 가서 비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나서도, 그는 음악가로서 프랑스 알제리 터키 등지에서 활동했다. 1902년 비구가 되겠다는 작정을 하고 이집트 카이로에서 여비를 모았고, 인도 봄베이를 거쳐서 실론으로 향했다.
당시 실론은 브리티시 직할 식민지였고, 독일과는 외교관계가 긴밀하지 않았다. 비구계를 받는데
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어서 버마로 향했다. 그곳에는 영국 출신인 아난다 메떼야(1872〜1923) 비구가 있었는데, 그는 영국 출신으로는 역사상 두 번째 비구의 경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비구가 되기 전에는 황금여명회(黃金黎明會:Hermetic Order of the Golden Dawn) 멤버였다. 이 단체에 대한 이야기만 하려고 해도 소개가 길어진다. 간단히 말하면 일종의 신비단체로서, 영국에서 19세기 말에 성립한 신흥종교의 일종이다.
그는 영국의 신비주의자인 알레이스터 크롤리(Aleister Crowley,1875~1947)와 가까웠는데, 그는 잉글랜드의 오컬티스트, 신비, 의식 마법사이자 시인, 등산가였다.
아난다 메떼야 비구는 영국에 처음 불교 전도를 한 비구이기도 했는데, 냐나티로카는 아난다 메떼야 비구의 안내로 1903년 사미계를 받고 행자 수업을 끝내고 1904년 정식으로 구족계인 비구계를 수지하고 냐나티로카란 법명을 받았는데, 계사는 우쿠마라 마하테라였고 그는 아비담마(구사론)의 대가였다. 냐나티로카는 그로부터 아비담마와 빨리어를 배우고, 버마의 여러 지방을 만행하고 고승들을 친견하는 등, 당대 아라한으로 알려진 선승에게 위빳싸나 명상수행을 지도받기도 했다. 버마에서 비구가 되었지만, 빨리어와 빨리어 경전을 습득하고 연구하기 위해선 실론으로 가야 했다.
버마의 승단이 인도 원형불교의 적통종가라고는 하지만, 어학이나 경전 연구는 실론이 한 수 위였다. 게다가 실론이 버마보다는 언어 소통면에서도 더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실론 섬으로 향했고, 시암(태국) 왕자출신 비구 지나와라왕사와 함께 조그마한 절에서 함께 명상수행을 하면서 서서히 실론에서 정착해 가는 적응력을 기르면서 빨리어 경전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 분의 자서전을 읽어 보면, 정말 파란만장하다. 낯 선 이국에서 한 외국인 비구가 구도적 열정으로 이루어낸 업적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실론 불교 더 나아가서는 상좌부 불교와 세계불교에 기여한 공로는 크다고 할 것이다. 국적이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브리티시 직할 식민지 실론에서 두 번이나 추방되어야 했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에서도 꿋꿋하게 지켜낸 구도자의 일관된 신념과 수행자적 정신은 본받아야할 모델이다. 이 분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좀 더 소개하기로 하고 이 분의 뒤를 이은 냐나포니카 비구에 대해서 언급을 해보자.
냐나티로카 大 장로 비구이신 조실의 대를 이어서 제 2대 조실로 활동하셨던 냐나포니카 비구는유태계 독일인으로서 22세 때, 가족과 함께 베를린으로 옮겨서 생활할 때, 독일의 불교도들과 만나게 되고 불교를 접하게 되는데, 섬 암자에서 불교학파를 주도하고 계시던 냐나티로카 대장로 비구의 저작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냐나티로카 비구는 섬에 암자를 세우고 유럽의 비구들과 수행을 하고 있다는 뉴스를 듣고, 그는 이내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몇 차례 편지를 냐나티로카 비구에게 보내서 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부모님을 봉양해야할 입장이어서 당장 섬으로 갈 수 없었으나, 부친이 사망하자, 1936년 실론으로 향했고, 드디어 섬 암자에 도달해서 비구계를 받고 불문에 들어가게 되었다.
1939년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하자, 그는 그의 어머니와 일부 친척들을 실론으로 옮기도록 했다. 이런 결과로 나치에 의해서 자행된 홀로코스트(Holocaust)를 면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나치당이 독일 제국과 독일군 점령지 전반에 걸쳐 계획적으로 약 6백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사건이 홀로코스트다. 그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9백만 명의 유태인 중 약 3분의 2가 죽임을 당했다. 유태인 어린이 약 백만 명이 죽었으며, 여자 약 2백만 명과 남자 약 3백만 명이 죽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유태인과 기타 피해자들은 독일 전역과 독일 점령지의 약 4만여 개의 시설에 집단 수용, 구금되어 죽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유럽의 많은 유태인들은 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정신적 트라우마가 너무나 크다.
이들 중에는 유대교의 신을 믿지 않는다. 왜 유대교의 신은 이런 악의 상황을 그냥 지켜봤느냐는것이었다. 이들에게 유대교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강한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유럽의 많은 유태인들이 불교에 심취한 경우를 보게 되는데, 비구들도 제법 되고, 이곳저곳에 명상센터를 운영하는 오너들도 제법 된다. 지금 말하는 냐나포니카 비구나 비구 보디 등이 다 유태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