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은
오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고생스럽지만 그만큼
아름다운 자연과 추억을 안겨주는 곳.

강릉 오죽헌烏竹軒
오죽헌烏竹軒은 조선 초기 강릉의 선비 최치운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우리나라 가옥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이다.
5만 원 권과 5천 원 권 도안 인물인 신사임당과 율
곡 이이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5만원 지폐에 나오는 겨레의 어머니 신사임당

5천원 지페에 나오는 겨레의 스승 율곡 이이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은 조선시대 예술
가로 자수, 시, 글씨, 그림 등 여러 방면에 재능이
뛰어났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자 경세가인 율곡 이이
의 어머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는 조선 성리학에
서 이황과 쌍벽을 이룬 사상가, 철학자이자 정치
가이다.
병조판서(현 국방장관) 때 일본, 중국의 침략에 대
비해 ‘십만 양병론’ 을 주창하였으며, ⌜격몽요결」
을 비롯해 많은 저서를 남겼다.
어머니인 신사임당에게서 학문을 배워 13세에 진
사 초시에 합격하고, 29세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
길에 올랐다.
오죽헌을 들어서면 율곡 이이 동상을 만난다.

율곡 이이 선생 동상 앞에서 아내와 한컷.

見得思義 견득사의
이득을 보거든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
암, 공짜 점심은 없다 했거늘.
자경문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면 조선초기에
지어진 별당건물 오죽헌이다.

오른쪽 방 몽룡실夢龍室 에서 율곡 선생이 태어났다.
이곳 몽룡실夢龍室에서 1536년 율곡 선생이 태어났다.
신사임당이 용꿈을 꾸고 율곡 선생을 낳은 연유로 몽룡실夢龍室 이라
명명命名 하였다.
3살에 말과 글을 익혀 10살에 ‘경포대부鏡浦臺賦’를 지었으며, 16살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시묘한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20살에 오죽헌에 돌아와 ‘자경문自警文’ 을 지어 입신행도(立身行道)
할 것을 결심 하였으며, 22살에 혼인하였다.
13살 진사초시에 장원한 것을 시작으로 21살 한성시(漢城試)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23살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그 이름을 외국까지 떨쳤다.
아홉 번의 크고 작은 과거에 모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계를 떠난 후에는 고산구곡에 은병정사(隱屛精
舍)를 세우고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는데, 이 때
‘격몽요결擊蒙要訣’과 ‘학교모범學校模範’을 저술하
였다.

율곡 선생의 '격몽요결'
오죽헌 앞마당에는 율곡 선생 당시에도 있었던
600년 된 ‘율곡매(栗谷梅 천연기념물 제484호)가 방
문객을 맞고 있다.

오죽헌 앞 뜰에 있는 600년 된 배롱나무
그 옆에는 율곡 이이가 그토록 좋아했다는 소나무
가 절개를 드러내놓고 있다.

율곡이 좋아했다는 앞 마다의 소나무
율곡송(栗谷松)
소나무는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군자
(君子) 식물이다.
곧은 덕과 굳센 절개에 대하여 옛사람
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소나무의 기이한 형상을 보니 천공
(天工)의 오묘한 조화를 빼앗았다.
한참을 바라 보노라면 청아한 운치를
느낄 것이다.
소나무가 사람을 즐겁게 하는데 어찌
사람이 즐겨할 줄 몰라서야 되겠는가
- 율곡 이이의 소나무 예찬에서 -

율곡 이이 선생은 1584년 49세에 세상을 떠났는
데, 40년 뒤인 1624년 인조대왕이 율곡에게 ‘문
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문성文成은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이 없이 통
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政事의 근본을
세웠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죽헌 오른쪽에는 율곡 이이의 영정을 모신 사당
문성사文成祠 가 있는데, 기둥이 무척이나 반질반
질하다.

율곡 선생의 영정을 모신 '문성사',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관광객들이 율곡 이이의 기를 받으려고 하도 만
져서 그런 거란다.
문성사의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율곡 선생이 태어난 ‘오죽헌烏竹軒’ 방 옆에는 대
나무 숲인데, 줄기의 빛깔이 까마귀처럼 검은색이
어서 오죽이라 부르다가 그것이 그대로 집 이름이
되었다.

율곡 선생이 태어난 '몽룡실' 옆 대나무 숲.
대나무는 첫해 초록색이었다가 다음해에 검게 되
는데 60년을 살고 꽃이 피면 죽는다하니 어쩜, 사
람의 일생과 비슷할까.

신사임당이 태어난 생가 앞 입지문에는 백일홍이 만발이구나.
입지문을 들어가면 안채와 바깥채가 있는데, 이 안채에서 ‘겨레의 어
머니’ 신사임당이 태어났다.

바깥채인 사랑채는, 주로 바깥주인이 거처하면서 외부 손님들을 접대
하던 곳이다.

바깥 기둥의 주련은 정조 때의 명필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1) 得閒多事外(득한다사외) 한가로움은 많은 일 밖에서 얻고,
(2) 知足少年中(지족소년중) 흡족함을 젊은 시절에도 알더라.
(3) 種花春掃雪(종화춘소설) 꽃씨는 봄눈을 쓸고 심으며,
(4) 看籙夜焚香(간록야분향) 밤에 책을 읽으니 향기가 풍겨온다.
(5) 有客來相訪(유객래상방) 나를 찾아온 손님이 있어
(6) 通名是伏羲(통명시복희) 만나보니 역시 훌륭한 선비님.
(7) 酒國有長春(주국유장춘) 술 있는 곳에 늘 봄이 깃들어 있고,
(8) 硏田無惡歲(연전무악새) 선비의 마음속에는 풍흉을 모른다.
(9) 感慨甘捿遯(감개감서둔) 고요함을 찾아 삶을 깊이 느껴보니,
(10) 環往破寂蓼(환왕파적료)그것을 깨는 것은 오고 감이라네.
강릉에서 태어난 사임당과 율곡 모자(母子)는 화페인물로 등장할 만
큼, 수백 년의 세월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우리 민족 전통문화정신의
뿌리로 자리 잡고 있다.

겨레의 어머니 '신사임당' 동상
아,
이 모자(母子)와 견줄 인물은 정녕,
어느 만큼의 세월이 흘러 나타날 것인가.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잘보고갑니다..ㅎㅎ
더위 어떻게 이겨내고 계시나요?
나도 작년에 오죽헌을 다녀왔지만 이렇게 친구의 글을 보니
난 수박 겉핧기로 보았는데... 친구는 상세히도 보고 글을 썼구려
글을 쓰려고 하면 해설사 한마디라도 놓치질 않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