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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3. 묵상글 들 (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월요일. - 사랑으로 청하면 무엇이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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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3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으로 청하면 무엇이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청하는 것은 그분에게서 다 받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요한의 편지는 우리가 청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다 들어주신다고
얘기하는데 우리가 놓치거나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은
여기에 조건이 있다는 점입니다.
조건이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이고,
하느님의 계명이란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청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무조건 들어주신다는 믿음이 있고,
또 그렇게 해주시기를 바라는 희망이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믿음은 틀린 믿음이고, 그런 희망도 잘못된 희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떤 믿음이어야 하고 어떤 희망이어야 합니까?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믿음이어야 하고,
사랑의 희망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증오에서 비롯된 청은 절대 들어주시지 않을 뿐 아니라
욕심에서 비롯된 청도 하느님께서는 절대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어제 제가 영적 보조를 하고 있는 형제회에 선거 총회가 있었는데
봉사자로 선출된 분들에게 저는 이런 취지로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이 사랑의 하느님이시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능력의 하느님이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를 고르라면 사랑의 하느님을 고르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마찬가지십니다.
능력의 평의원이 아니라 사랑의 평의원이 되길 원하십니다.
이렇게 사랑의 평의원이 되시면 다음에 하느님께서 다 주십니다.
능력도 주실 것이고,
무엇보다 복을 주실 것이며 그래서 봉사하면서 행복할 것입니다.
봉사할 수 있는 손과 발이 있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고
무엇보다 봉사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사랑과 능력의 복을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한 탈란트를 묻어둔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고 하시며 그 한 탈란트마저 뺏으시고,
두 탈란트와 다섯 탈란트를 가지고 더 번 사람에게는
착하고 충실한 종이라고 칭찬하시며
그 곱절의 탈란트를 주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사실 시간과 능력을 움켜쥐고 있는 사람은 가진 것만큼만 행복하거나
더 나아가 그것마저 뺏겨서 불행해질 수도 있습니다.
둘이나 셋이 모여 청하면 다 들어주신다는 말씀도
우리는 이런 뜻에서 이해하면 좋을 것입니다.
사적인 욕심으로 청하지 말고 공적인 선을 위해서 청하라는 말씀으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도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하느님 나라가 우리에게 임했다면
우리의 움켜쥔 손은 펴는 회개를 하고
사랑을 나누라는 복음을 실천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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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3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이 큰 빛을 보았다.”(마태 4,16)
빛의 축제일인 주님 공현 후 월요일입니다. 오늘도 어제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또 하나의 빛의 공현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빛을 받으며, 빛 속에서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빛을 증언하러 왔던 요한은 물러가고, 참 빛이 세상에 왔습니다.’(요한 1,6-9).
오늘 <복음>은 이사야가 예언한 빛이 이미 도래했음을 선포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그 빛은 “즈불룬 땅과 납달리 땅,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에서부터 비추어왔습니다. 질곡의 땅 갈릴래아, 이곳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신 장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당신 사명의 내용을 밝혀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먼저 이방인의 압박, 곧 죽음의 그늘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먼저 선포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당신은 어두움 속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 빛으로 오시는 분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빛 안에서 걸어야 하는 첫걸음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밝혀줍니다. 곧 “회개하여라. 하느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슈브,שב)의 히브리어 원어의 뜻은 ‘돌이키다’, ‘돌아오다’라는 뜻인데, 원래의 그림문자의 뜻은 ‘집을 무너뜨리는 것’을 뜻합니다. 곧 자신이 ‘이전에 살던 집’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집’에 거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전에 살던 집’이란 우리가 거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더 넓은 의미로 우리가 이전에 행하던 행위나 지식까지도 포함합니다. 곧 우리의 행위와 앎으로부터 벗어나 새집으로 돌아와 하늘의 양식을 먹는 새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옛사람의 행위와 지식(옛집)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것(새로운 성전을 건축하는 것)”(콜로 3,9-10)이라고 말합니다. 곧 ‘우상의 집’을 무너뜨리고 하느님의 집인 성전으로 돌아가 하느님의 양식인 말씀을 먹으며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는 죄악을 버리는 것보다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에덴의 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에덴동산’은 하느님께서 사람과 함께 거하시기 위하여 만든 하느님의 처소(집)임과 동시에, 마지막 때에 다시 회복될 ‘새 예루살렘’(묵시 21,2)입니다.
‘회개’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이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호세 14,2-3)
하느님께서는 바빌론 유배에서 당신 백성을 돌이키실 때도 율법학자 겸 제사장인 에즈라를 보내시어 당신의 말씀을 가르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지켜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있게 하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요한 14,23 참조)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거처를 함께 하시면 우리 안에 ‘하느님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 안으로의 전환이 곧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건설되도록 수락하는 일입니다. 곧 우리의 말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이 건설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하늘나라를 받아들이는 일, 곧 그분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거처가 되는 일이 벌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마태 4,15)
주님!
당신께서는 어둠이 덮인 곳에 큰 빛을 비추셨습니다.
질곡의 땅, 핍박받는 이들에게 의로움의 빛줄기를 뿌리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는 어둠의 속박을 풀고 묶인 이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오늘, 저의 오류와 완고함을 뚫으소서.
무지와 어리석음을 밝혀, 진리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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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3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의 관심
예수님께서 공적인 일을 시작하신 곳은 갈릴래아, 사람들이 육지 속의 섬이라 부르는 변두리, 소외된 땅입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물이 풍부하여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살기 좋은 지역이었으나 가장 착취를 받던 곳이 또 갈릴래아지방입니다. 대부분의 땅은 부유한 사람들의 소유였고, 많은 사람은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과 억압을 강요당해야 했습니다. 고통스럽게 착취 받는 땅이 갈릴래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지역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첫 말씀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4,17).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착취한 부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주변에는 부자들은 멀리 사라지고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몰려왔습니다. 뒷전으로 밀려나 하느님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가르치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은 가르치는 일을 하는 교육기관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허약한 이들을 치료하는 병원을 운영하고 사회복지시설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부유한 사람, 힘 있는 사람, 잘나가는 사람, 멋진 사람, 편안한 사람에게 더 쏠립니다. 이러한 우리의 태도에 주님께서는 무어라 하실까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도둑질하는 사람이 회개했다면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길 원하십니다. 우리 삶의 자리가 어디든 어렵고 힘든 사람은 항상 있습니다. 힘겨워 지친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는 광고를 하지 않아도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모여듭니다. 향기가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든 것은 그분에게 넘치는 사랑이 있었고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다면 사람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할 소명을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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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3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우리는 진리의 영을 압니다(1요한 4,6)
“한 국가는 다른 국가에 대해 서로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되며, 국가들 간의 관계는 진리 · 정의 · 적극적 연대 · 자유 등을 존중하며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회칙 「지상의 평화」, 80항)
평화 문제에 대해 가르친 최초의 회칙은 요한 23세가 반포한 「지상의 평화」였고, 특히 80항의 가르침은 진리의 영에서 나온 혜안의 결과였습니다. 그 자신도 윤리신학자였던 요한 23세의 이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현대 가톨릭 윤리신학은 성경이 가르친 사랑의 진리를 사회적으로 번역해 내었습니다. 그것이 평등은 정의의 열매이며, 정의는 자유와 평등을 기초로 한다는 명제입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거짓 영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기보다는 권세나 지위, 재물이나 학력 등으로 억누릅니다. 자유와 평등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세속의 힘들로 억눌리면 차별로 이어져서 불평등한 처지로 내몰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셨으며, 낮은 자리로 내려가시어 꼴찌로서 사람들을 섬기심으로써 평등하게 하셨습니다. 섬김으로 평등한 세상을 이룩하는 일이 메시아 백성의 몫으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세상을 지배하는 거짓 영은 사람들을 의로움의 가치로 다스리지 못하고 기득권 카르텔의 이익을 도보하느라고 이익의 가치로 유혹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저마다 쥐꼬리만한 눈 앞의 이익을 좇느라고 의로움의 가치를 놓치게 되고, 그 결과로 사람들이 이익을 중심으로 갈리게 되고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다툼이 커지면 분쟁이요 분쟁이 나라 단위로 생기면 전쟁입니다.
요르단 강가에서 물로 세례를 주며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던 요한은 정의의 예언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의 뒤를 이어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하셨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었으니 그것은 정의를 넘어서는 사랑과 평화로 이룩되는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시고, 고통받는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주시어 메시아 백성에 합류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이들로 하여금 당신의 일을 계속하도록 사명을 주시는 한편, 성령으로 이들 안에 현존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평화를 선물로 받은 메시아 백성으로서, 세상 사람들의 평화 상태에 관심을 지니고 지켜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평화의 파수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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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3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세기 초, 미국 질레트사의 창업자 질레트는 세계 최초로 안전면도기를 개발했습니다. 당시의 면도기는 비싸기도 했지만, 사용 전에 칼날을 갈아야 했기에 매우 위험했습니다. 따라서 질레트는 자신의 발명품이 전 세계인의 선택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심각한 판매 부진이었습니다. 1년 동안 질레트사가 판 것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면도기 51개, 면도날 168개”
세계 제1차 대전이 시작되었고, 그는 곧바로 군수 물품 조달 부서에 연락해 면도기를 원가에 보급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원가에 판매하면 남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까지의 적자 역시 당연히 메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커다란 손해를 보는 이 결정이 질레트사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돈 한 푼 쓰지 않고 엄청난 광고 효과를 본 것입니다. 그래서 1917년, 한 해에만 1억 3천만 개의 면도기를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손해 보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손해 너머를 바라본다면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세상의 관점이 무조건 진리의 길은 아닙니다. 그보다 주님의 관점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관점을 따르게 되면, 어리석고 현명하지 못한 것처럼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근시안적인 생각입니다. 조금만 더 멀리 바라보면 사랑의 삶을 사는 주님의 관점이 하늘 나라를 차지하게 되는 가장 올바른 결정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감옥에 갇히고 나서야 회개를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는 요한에 의해 옛 계약이 끝나고, 새 계약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의 가르침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확인하듯이 요한의 가르침을 이어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우리의 회개로 주님께서 얻으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관점으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도 듣지 않고, 악으로 쉽게 기울어지는 우리를 보면 “꼴도 보기 싫다.”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의 관점을 따르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관점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죄를 고백하여 죄의 얼룩을 모두 씻지 않는 한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은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드러났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죄의 얼룩을 모두 씻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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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어려운 일을 겪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매일 경이롭고 아름다운 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더글러스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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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지 않은 말을 듣고 나서….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새벽 묵상 글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그로 인해 방송 출연과 외부 강의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선배 신부님을 만나 함께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조신부가 성실하게 글을 쓰는 것은 좋은데, 조신부 묵상 글은 깊이가 없어.”
나름 그 깊이를 만들기 위해 책도 많이 읽고, 묵상 시간도 늘려가고 있는데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분 나쁘다고 화를 내면, 막돼먹은 사람으로 비춰질 것 같고 또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속 좁은 사람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좋은 조언 감사합니다.”라고 말을 했지만, 솔직히 기분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나’를 보고 관찰하고 판단하는 사람들과 우리는 함께 살아갑니다. 따라서 자신이 원치 않는 판단이 이루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철학가 샤르트르의 말처럼 ‘타인은 지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좋은 말만 들으며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말도 들으며 나를 변화시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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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3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12월 8일에 서울대교구 교구장 착좌식이 있었습니다. 착좌식을 통해서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은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직을 공적으로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의 강론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정 대주교님은 강론을 통해서 전임 교구장님의 업적을 이야기하였고, 그 업적을 계속 이어가도록 노력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아울러 한국사회가 교회에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겠다고 하였습니다. 14대 서울대교구 교구장으로서 앞으로 이루고 싶은 사목의 방향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성서를 펼쳐 읽으면서 복음을 선포하셨던 모습과 같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수도자 출신인 자신에게 서울대교구장이라는 중책을 맡겨 주셨는데 그 이유는 서울대교구의 사제들을 잘 모르기 때문인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새로운 한 해를 선물로 주시듯이, 하느님께서는 자신에게 새로운 선물처럼 사제들을 보내 주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임 교구장님의 업적을 전하였습니다. 2014년 124위 순교복자의 시성식이 광화문 광장에서 이루어진 것은 전임 교구장의 혜안이었다고 하였습니다. 200년 전 순교와 고통의 장소였던 광화문 광장은 순교자들의 시복을 통해서 하느님의 축복과 영광이 드러나는 장소로 변모하였습니다. 그밖에도 북한 교회에 대한 관심과 지원, 생명 수호에 대한 열정, 서소문 순교 성지 조성,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의 교황청 인정대학 확정, 교구 홍보위원회 신설, 교구 행정의 전산화와 같은 업적을 전하였습니다.
정순택 대주교님은 14대 서울대교구 교구장으로서 앞으로 가야할 비전을 제시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영성’이었습니다. 영성이란 뿌리 깊은 나무와 같고, 영성이란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교구의 영성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이겨내신 것은 깊은 영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치면서 신앙을 지켜온 것도 영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젊은이’였습니다. 젊은이들의 고뇌와 아픔을 경청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젊은이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젊은 사제들이 열정과 패기로 사목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젊은이들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교구장님의 깊은 관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시노드’였습니다. 보편교회에서 시작된 시노드가 서울대교구에서도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시노드는 단순히 회의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노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을 함께 가는 것입니다.
서울대교구의 사제들, 수도자들, 평신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며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가겠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비록 교구를 떠나서 멀리 뉴욕에 있지만 14대 서울대교구 교구장이신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께서 가시는 길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 또한 서울대교구의 사제로서 교구장님께 순명을 서약하며 교구장님이 가지고 계신 비전에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날 많은 분들이 정순택 베드로 주교님을 위해서 ‘축사’를 하였습니다. 오늘의 제1 독서를 통해서 저도 축하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앞으로 서울대교구가 나가야 할 방향을 미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14대 서울대교구 교구장이신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과 교구민들이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간다면 서울대교구는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큰 빛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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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3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2년 새해 소원
- “어둠속의 빛” -
2022년 새해 소원이 어둠 속의 빛처럼 빛납니다. “2022년 새해 소원”, 오늘 강론 제목이자 새해 제 기도문 제목이기도 합니다.
“나
하느님이 되고 싶다
모세처럼
하느님과 대면하여 대화 나누고 싶다
오소서
주 예수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희망이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신망애信望愛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가
당신의 선이
당신의 아름다움이
당신의 진선미眞善美가 되게 하소서.”
그대로 어둠 속의 빛인 예수님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어제 읽은 어둠 속의 빛처럼 아름답게 느껴진 인터뷰 기사를 소개합니다.
-부모님의 러브 스토리도 낭만적이지만, 교수님의 결혼은 더 드라마틱할 것 같은데요?
“만나자마자 이 사람이라는 느낌이 와서 그날 바로 결혼하자고 했어요. 결혼만은 이것저것 재지 않고 직진하고 싶었어요. 내 아내도 일주일만에 오케이했어요”
-어떻게 만나자마자 ‘이사람이다’라는 느낌이 왔나요?
“나도 몰라요. 그냥 ‘안무티히, 쇠네 젤레’라는 느낌이 왔어요.”
나는 그 순간 내 귀에 들리는 그 달콤한 독일어 형용사에 뭉클해졌다. ‘안무티히(anmutig), 쇠네 젤레(schone Seele)’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의미의 독일어다. 누군가를 처음 보는 순간 그의 가장 순수하게 빛나는 어떤 본질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 아닐까.
-결혼식은요?
“주머니에 만오천원이 있길래, 그걸로 14케이 반지 하나 만들어 끼워주고, 성당가서 나 혼자 주례도 서고 서약도 하고, 우리 둘만의 결혼식을 올렸어요.”
-일반적인 결혼식은 전혀 안하셨어요?
“나중에 어쩔 수 없이 했죠. 너무 가난해서 유학비 마련하려고. 그날 모인 축의금으로 유학생활을 시작했지요. 하하”
참 유쾌한 인터뷰기사였습니다. 참으로 자랑스런 천주교 신자임이, 흡사 세상 어둠 속의 빛처럼 살아 가고 있는 분임이 분명합니다. 새삼 ‘사랑은 아무나 하나’, ‘결혼은 아무나 하나’라는 말마디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세상 어둠 속의 큰 빛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에서 예수님은 그대로 세상의 중심이자 세상의 빛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오늘 복음 장면에서, 또 세상에서 예수님이 없는 세상을! 아마도 캄캄한 어둠일 것입니다. 새삼 예수님께서 세상의 중심이자 의미요 빛임을 깨닫습니다. 요한이 잡히시자 바톤 터치하듯 등장한 예수님을 통해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하느님의 소원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즈불룬 땅과 답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4,15-16;이사8,23ㄴ-9,1))
참 아름다운 구원의 시詩같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그대로 큰 울림을 주는 현실성을 띄는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무지한 인간의 본질은 그대로 인 듯, 그래서 갈수록 죄도 많아지고 병도 많아지는 세상같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세상에 큰 빛으로 오신 주 예수님이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나 이제나 영원한 화두같은 말씀입니다. 끊임없이 회개하여 예수님처럼 하늘 나라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어둠속의 빛, 하늘 나라입니다. 이어 펼쳐지는 내용은 흡사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말씀의 빛이신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다.’
무지의 짙은 어둠을 밝히는 빛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의 근원적 무지의 병.무지의 죄, 무지의 악에 대한, 또 허무와 무의미, 절망에 대한 처방은 단 하나 주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회개로 하늘 나라의 실현이신 어둠속의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 닮아갈 때 비로소 치유의 구원에 참삶이 시작입니다. 그러니 제 “2022년 새해 소원”의 기도문은 절실할 수 뿐이 없습니다. 어떻게 세상 속의 빛으로 살 수 있을까요? 바로 그 구체적 처방을 사도 요한이 줍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주님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킬 때 주님과 상호내주 일치의 사랑이요 비로소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문득 어느 분이 세 아들에게 지어 주었다는 ‘밝힘’, ‘한길’, ‘누리’라는 순수한 한글 이름도 생각납니다. 새해 첫날 수도형제들의 신년하례新年賀禮후 원장 수사의 선창 “서로”에 이어 술잔을 들고 한데 모은 후, “사랑합시다!”라고 화답할 때의 장면도 눈에 선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때 하늘 나라의 실현이요 세상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빛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을 반사하는 사랑의 빛, 세상의 빛으로, 또 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영광의 존재로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보았네. 아버지의 외아드님,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분의 영광을 보았네.”(요한1,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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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3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월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4,17)
'예수님의 땀!'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 사가가 전하는 예수님 공생활 시작과 그 활동에 관한 말씀'(4,12-17.23-25)입니다.
그 시작의 첫 말씀은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에 복음을 선포하시며,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말씀입니다.
돌아가시기 3년 전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공생활은 '모두의 구원'인 '너를 살리는 일'이었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주어진 이 일에 충실하셨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는 모든 이들, 성직자들, 수도자들, 신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일을 하겠다고, 그래서 지금 여기를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독서(1요한3,22-4,6)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갔기 때문입니다."(4,1)
사도 요한의 이 권고는,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인,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느님의 영인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행해지는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적의 영인 악령'에 의한 움직임인지 한번 잘 살펴보라는 권고입니다.
우리는 하루의 삶 속에서 많은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합니다. 그리고 너보다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너를 쉽게 판단하거나 심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입니다."(1요한4,6)
나 자신과 우리나라와 그리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서, 하느님께 속한 사람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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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3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월요일. 주교회의 홍보국.
오늘의 묵상
어제 주님 공현 대축일 복음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는 동방 박사들의 방문을 전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함축하여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왜 예루살렘이 아니라 카파르나움일까요?
첫 번째 이유는 성경 말씀이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이 말씀은 구약 성경의 모든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즈불룬과 납탈리 지파는
갈릴래아 지역을 상속 재산으로 받았습니다(여호 19,10-16.32-39 참조).
그런데 이 지역은 이사야 예언자 시대에 아시리아에게 점령당하며
이민족들의 땅,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이 되고 맙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약속대로, 이 어둠의 땅에서
가장 먼저 하늘 나라의 빛이 떠오릅니다.
이 땅에 사는 이들이 참빛이신(요한 1,9 참조)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구원의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예수님의 선포는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미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익숙한 이 선포는
하느님의 구원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는 인간이 기다리고 받아들여야 올 수 있습니다.
높은 데서 오는 선포와 낮은 데서
이루어지는 응답이 만날 때에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의 선포에 앞서, 회개가 먼저 요청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회개 안에서 하늘 나라가 옵니다.
회개는 하느님께 돌아가 그분께 속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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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3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힌 것을 아시고 갈릴래아로 가신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우선은 때가 되었을 때, 수난하시기 위해서였고, 우리에게 유혹의 위험에서 피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는 주님께서 유혹을 두려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모든 유혹을 다 이겨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가 그분을 따를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유혹이라는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피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연히 위험에 빠졌을 때는 이겨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며, 유대 지도자들의 분노를 가라앉히시려고 카파르나움으로 가셨고 이사 9,1-2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즈불룬과 납탈리 지파는 맨 먼저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사람들이었다. 하느님의 분노가 내렸던 사람들이 먼저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영적 속박에서 풀려나야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율법에 가려져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율법 아래에서도 그들은 많은 빛이 있었다. 모세와 아론과 많은 예언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큰 빛이셨고 그 빛이 그 지방을 비추고 있다.
여기서 큰 빛은 우리 주 그리스도이시며 밝게 빛나는 복음의 가르침이다. 이 빛은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백성”(16절)을 즉 무지라는 오류 속에 있는 백성들을 비추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16절)는 죄로부터 오는 것인데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죄의 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아직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그들을 이미 그 빛이 비추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붙잡히자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17절)고 선포하셨다. 그 선포는 요한의 가르침을 확증해 주시는 말씀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참된 증인임을 알리고자 그의 가르침을 확인해 주신다. 여기서 하늘 나라는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상태를 말한다. 그 상태는 바로 하느님께서 그 가운데 함께 하시는 상태이다. 그래서 하늘 나라는 우리 “안에”(루카 17,21) 있다고 한다. 우리가 사랑할 때, 하늘 나라는 우리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악마에게 붙들린 육신을 풀어주시고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건강을 되찾아 주신다. “사람들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24절) 사람들을 그분께 데려왔다고 한다. 여기서 질병은 육체의 병을 뜻하고, 고통은 영적 질병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병은 신성의 권능으로 영적인 병은 자비의 말씀으로 낫게 해 주셨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우리도 그분을 따라야 한다. 그분에게 가서 죄의 용서를 청하자. 그리하여 나쁜 습관을 고치도록 하는 것으로 그분께 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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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3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빛이 떠올랐다.'(마태 4, 16)
어둠 속에
앉아 있던
우리가
떠오른 빛을
보았다.
회개와
하늘 나라
사이로
빛이 오셨다.
하늘 나라는
회개의
방식이며
또한 빛의
방식이다.
빛은 감출 수
없다.
우리를
비출 뿐이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의
문을 여신다.
우리의 현실을
치유하신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
우리의 일상을
이끌고 가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빛이다.
우리를
알아주시는
유일한 사랑의
빛이 뜨거워진다.
빛이 만들어내는
사랑이 복음이다.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이
우리들
어둠이었다.
빛을 통하여
아름다워지는
우리들 삶이다.
떠오른 빛이
우리를
치유하신다.
빛이신
사랑이
사랑을
치유하신다.
처음으로
빛다운 빛을
본 사람들은
빛을 따라간다.
빛의 소명
빛의 역사가
구원의
역사이다.
세상을 살리는
빛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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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3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
공현 대축일 후 한 주간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나타내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월요일은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 화요일은 ‘우리를 먹이시는 예수님’,
수요일은 ‘만물의 주님이신 예수님’, 목요일은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예수님’,
금요일은 ‘우리를 치유하시는 예수님’, 토요일은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예수님을 소개하는 이야기들이기도 하고,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으라는 초대(권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마태 4,12-17).”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하신 것은,
당신의 사명이 이스라엘만의 구원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의 구원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예루살렘이 있는 남부 유다 지역 사람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대단히 배타적이었지만, 북부 갈릴래아 지역 사람들은 비교적 개방적이었습니다.>
또 당신의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좀 더 잘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는 이사야서의 예언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말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의 예언들은 미리 만들어 놓은 계획표가 아니고,
무조건 따라야 하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움직이신 분이 아니라,
그 예언들 속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일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류 전체의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자리를 잡으신 것은,
그곳이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일하셨음을 잘 나타내는 이야기가
겟세마니에서 체포되실 때의 이야기입니다.
박해자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할 때,
베드로 사도는 그것을 막으려고 칼을 뽑았습니다(요한 18,10).
그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 26,52-54)”
여기서 ‘성경 말씀’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의 예언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뜻’은 당신의 외아드님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주어서
인류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니 칼로(무력으로) 인간들을 제압하려고 하셨다면
금방 그렇게 하셨겠지만,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정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그렇게 예언되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신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주는 큰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신 일입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라는 말은,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는 인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죽음의 그림자’는, 메시아께서 구원해 주시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류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큰 빛’은, 멸망을 향해서 가고 있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입니다.
죄와 죽음과 멸망이 ‘어둠’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메시아는 ‘생명의 빛’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빛)을 주시는 분이고, ‘생명의 빛’ 자체이신 분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예수님께서 주시는 ‘빛’을 잘 받기 위해서 우리가 첫 번째로 할 일은,
자신이 어둠 속에 있음을, 또는 자신 안에 어둠이 있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입니다(루카 11,35; 마태 6,23).
위선자들의 “나에게는 어둠이 전혀 없다.”, 또는 “나는 어둠 속에 있지 않다.”
라고 말하는 교만은, 자기 스스로 장벽을 세워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빛’을 거부하는 짓입니다.
두 번째로 할 일은, 어둠에서 벗어나려고, 또 빛을 향해서 나아가려고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일입니다(요한 3,20-21).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예수님의 선포는,
표현으로는 세례자 요한의 선포와 같습니다(마태 3,2).
그러나 뜻은 다릅니다.
세례자 요한이 말한 회개는,
죄에서 벗어나서 메시아를 맞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개는,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삶을 일치시켜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말은,
메시아께서 곧 오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 라는 뜻입니다(루카 17,21).
(‘이미’ 시작되었으니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은(마태 4,23-25),
‘절망의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과 ‘생명의 빛’을 주신 일입니다.
치유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해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치유 자체가 곧 복음입니다.
(치유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을 믿고,
궁극적인 구원을 향해서 나아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몸의 치유’로만 만족하고 그냥 떠나버렸습니다.
영혼의 구원에 도달하지 않으면, 몸의 치유는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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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3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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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3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예수님의 얼굴에 비치는 강렬한 빛을 반영하는 얼굴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주제로 렉시오 디비나를 하던 중 유난히 제 눈길을 끄는 문장 두 개가 있었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백성’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입니다. 오늘따라 그 표현이 무척이나 가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백성’이요,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저기서 거대 악과 거짓이 선과 진리를 가리는 참담한 현실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릇되고 편향된 거대 메스미디어가 선량한 국민들의 눈을 흐리게 만들고, 큰 혼동 속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른바 ‘기레기’들의 선동과 농간이 하늘을 찌릅니다.
진실만을 보도해야 할 언론이 공룡의 모습으로 등장해 국민들을 우롱하고 어둠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희대의 바보 멍청이를 영웅으로 둔갑시키고, 유능하고 정직한 지도자를 끌어내리지 못해 안달입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 표현 역시 가슴을 치게 만듭니다. 얼마나 많은 이웃들이 죽음의 그림자에 휩싸여있는지 모릅니다. 죽음의 문화가 우리 사회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원인을 찾아 올라가 보면,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초고속 경제성장, 천박한 자본주의, 극단적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주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 후보의 말씀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일자리 창출이 다음 정부에게 요구되는 큰 화두인데, 일자리를 창출하는 노력 가운데, 홀로 외롭게 쓸쓸히 시들어가는 이웃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일자리 창출, 얼마나 의미 있는 노력이겠느냐는, 제안이었습니다.
그 옛날 짙은 어둠 속에 앉아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빛을 보았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있던 이들에게 큰 빛이 떠올랐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빛이 필요합니다. 적당한 빛이 아니라 강렬한 빛,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빛,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치는 강렬한 빛을 반영하는 얼굴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그래야 어둠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우리의 환한 얼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보여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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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3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수님 만나는 법: 별은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역에서 첫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당시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에서 멀어질수록 이방 민족에 가깝고 어둠과 오류 속에서 산다고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가졌건, 가지지 않았건 자신이 더 오류 속에 산다고 여기는 사람이 빛을 보는 것입니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예루살렘이 있는 유다 지방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른 지역 사람보다 더 선택받은 사람들이라 여겨 교만하여져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빛이시기에 자신이 빛이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다가가시지 않습니다.
어느 날, 원효대사가 외출했다가 분황사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갑자기 어떤 노스님이 길을 가로막더니 반갑게 아는 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반갑구려, 원효대사. 대사께서 쓴 글을 읽어보았는데 깊이가 정말 대단하더군요!”
“보잘것없는 글인데 송구스럽습니다.”
“대사!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저랑 같이 식사라도 하시지요.”
나이가 많아 보이는 그 스님은 원효대사를 데리고 천민이 사는 동네로 향했습니다.
솔직히 원효대사는 그때까지 천민이 사는 동네에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 화랑이었을 때는 당연히 갈 이유가 없었고, 출가해 스님이 된 뒤로는 공부하느라 갈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노스님은 어느 주막집에 이르러 자리를 딱 잡고 앉더니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어이, 주모! 여기 귀한 손님 오셨으니 술상 하나 봐주게.”
그 순간 원효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수행하는 사람이 술상이라니!’
원효대사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곧바로 뒤돌아 나와버렸습니다.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해버렸습니다. 이때 갑자기 그 스님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원효대사, 마땅히 구제해야 할 중생이 지금 여기 있거늘 어디 가서 별도의 중생을 구제한단 말이오!”
그 말을 듣는 순간 원효대사는 그 자리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은 빛이라고 생각하면서 빛은 더 밝은 빛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빛이 있을 곳은 어둠입니다. 그래야 참 빛이 됩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원효는 자신의 공부가 부족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노스님은 이론에만 머물던 자신의 자가당착을 밝혀주는 작은 빛이었던 것입니다.
원효는 승려들을 가르치던 스승 역할을 그만두었습니다.
남을 가르치고 글을 쓰는 대신, 머리를 기르고 신분을 숨긴 채 어느 절에 들어가 부목(負木)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부목 생활이란 사찰에서 땔나무를 마련하는 일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즉 젊은 승려들에게 무시당하며 땔나무를 구하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던 것입니다.
그 절에 꼽추 스님이 있었는데 다들 그 스님을 ‘방울 스님’이라 불렀습니다.
걸식할 때 아무 말 없이 방울만 흔들었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은 것입니다.
방울 스님은 공양 때가 되면 다른 스님들처럼 제때 와서 밥을 먹지 않고 꼭 설거지가 다 끝난 뒤에 부엌을 찾아와
남은 누룽지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목들은 그 스님을 귀찮아하고 무시하곤 했습니다.
하루는 원효 스님이 마루를 닦다가 학승(學僧)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보아하니 ‘대승기신론’을 공부하면서 논쟁을 펼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효가 그 논쟁을 들어보니 학승들이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원효는 자신도 모르게 “그건 이런 뜻입니다”라고 말하며 일깨우려 했습니다. 그러자 난리가 났습니다.
“아니, 일개 부목 주제에 어디 스님들 공부하는 데 와서 이러니저러니 아는 체를 하는 게냐?”
그제야 원효는 고개 숙여 사과하고 다시 일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공부 판이 깨진 스님들은 스승을 찾아가 ‘대승기신론’이 너무 어려워 이해하기 힘들다며 하소연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원효가 쓴 ‘대승기신론소’를 건네주며 공부해보라고 말했습니다.
학승들이 그 책을 읽어보니 깊이가 있음에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책에 나와 있는 똑같은 이야기를 한 원효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원효는 신분이 들통날 수 있다는 생각에 밤에 조용히 그 절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모든 스님이 잠든 시각 원효는 문을 살짝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이때 문간방에 있던 방울 스님이 방문을 탁 열고는 이렇게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원효, 잘 가시게.”
방울 스님의 이 한 마디에 원효는 그 자리에서 확연히 깨달았습니다.
그는 천민들 가운데서 깨달음을 얻었고, 그들 가운데로 내려가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가장 핍박받는 스님만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빛은 어둠을 향해야 하고, 더 나아가 어둠만이 빛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을.
[출처: ‘인생을 바꾸는 유일한 방법’, 유튜브, ‘북올림’]
이태석 신부님이 가난한 톤즈라는 마을 한센인들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마더 데레사는 목마르다고 외치는 한 노숙인에게서, 그리고 김하종 신부는 한 냄새나는 지하 방에 사는 사람을 끌어안을 때 “나다. 두려워 마라”라고 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저는 신학교 들어오기 전 떠들며 술 마시다가 잠시 화장실에 들어왔을 때 그 고요함 가운데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문득 느껴서 수도원에 가 있는 친구에게 “화장실에서 만난 하느님”이란 글을 편지로 보낸 적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빛이시다면 그분은 어둠 속에 계십니다. 별이 낮에 뜨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둠이라고 여겨지던 갈릴래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어둠만이 빛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고, 내가 알고, 내가 잘살고 있다고 여기는 이들은 절대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그 자체가 너무 밝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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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3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월요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묵상과 기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심을 경축합니다. 당신의 인류를 위한 자애와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또 하나의 '성탄 대축일'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방문, 경배한 날입니다. 이들을 통하여 인류의 구세주 아기가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성탄 대축일 전야부터 주님 세례 축일까지 성탄시기입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우리가 청하는 것을 받게 되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 계명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이는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께서도 그분 안에 머무신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서다. 하였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자렛을 떠나 카파르나움에 정착합니다. 그곳에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르치시고 하늘나라를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각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그분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사람들 모두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십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되돌아봅니다. 나와 이웃, 그들과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그리고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을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영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적’의 영입니다. 그 영이 오리라고 여러분이 전에 들었는데, 이제 이미 세상에 와 있습니다.
자녀 여러분, 여러분은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거짓 예언자들을 이미 이겼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그분께서 세상에 있는 그자보다 더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세상에 속한 것을 말하고 세상은 그들의 말을 듣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고,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진리의 영을 알고 또 사람을 속이는 영을 압니다. 1요한 3,22-4,6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러자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마태 4,12-17.23-25
실천
주님께 청하는 사람은 그분에게서 받습니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가 청할 때 받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따르고 그분의 마음에 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오는 모든 이들, 백성 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 모두를 고쳐주셨습니다. 모두의 영육의 병을 고치며 말씀을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의 명령을 따라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그분 말씀을 따라 살면서 그분 안에 머무르고, 또한 주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심을 압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고 또한 인간으로 그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시며 짊어지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사람들과 함께 사시고 그들의 고뇌와 아픔을 치료하시고 그들의 속박을 풀어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 구세주이십니다.
마침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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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3 주님 공헌 대축일 후 월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제1독서 (1요한3,22-4,6)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갔기 때문입니다." (1)
요한1서 4장 1-6절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신앙과 생활에 대하여 권면하는 요한1서 3장 1절 ~ 4장 6절 가운데 마지막 단락으로서, '그리스도의 적'(적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분별과 경계를 촉구하는 내용이다.
이것은 형제 사랑의 실천을 권면하는 3장 13-24절에 이어지며, 하느님의 사랑에 근거한 사랑의 계명 실천을 촉구하는 4장 7절 ~5장 3절에 앞서는 내용으로서, 참된 사랑의 실천을 위해서는 거짓 진리와 참된 진리를 분별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다.
요한은 이미 2장 18-29절에서도 그리스도의 적에 대하여 경계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그리스도의 적에 대한 정체와 오류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춘 반면, 본 단락은 그리스도의 적의 영을 분별하는 기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형제 사랑의 계명 실천을 촉구하는 단락 사이에 유독 이 내용이 나오는 것은 사랑의 실천 역시 하느님의 참된 진리에 기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초대 교회에는 거짓 영들에 의해 속는 성도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코린토 교회에는 신령한 언어나 예언을 하는 사람 중에 은사를 잘못 사용하여 덕을 끼치지 못하고 오히려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었다(1코린12장, 14장).
그러나 지금 요한이 지적하는 경우는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차원이 아닌 적그리스도의 영의 활동으로 인한 영적 혼란을 가리킨다. 이것은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갔기 때문입니다' 라는 요한의 이어지는 언급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그들은 참 성도들과 외형적으로는 잘 구분되지 않는다. 따라서 요한은 영들을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라고 권면한다.
'그 영'으로 번역된 '타 프뉴마타'(ta pneumata)는 '영들'로 번역해야 옳다. '영들'로 번역해야 하는 '프뉴마타'(pneumata)의 원형 '프뉴마'(pneuma)는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하느님의 거룩한 영인 '성령'(Holy Spirit)과 하느님과 친교하는 인간의 영인 '인영'(Human Spirit), 그리고 성도를 속이는 악한 영인 '악령'(Devil Spirit)이 그것이다.
인간의 영(Human Spirit)은 경험에서 오는 것으로, 진리에 속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거짓에 속할 수도 있다.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매우 달라진다.
본절에서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영'은 당시 교회를 크게 어지럽혔던 영지주의 이단이나 적그리스도의 영이다. 이러한 영은 하느님께 속해 있지 않다.
한편, '시험해 보십시오' 로 번역된 '도키마제테'(dokimazete)의 원형 '도키마조'(dokimazo)는 헤아려 '분별하다', 살펴 '확증하다' 라는 뜻으로서, 어떤 사실을 잘 검토하고 검증하여 진위 여부를 파악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당시에 통용되던 금화의 진위 여부를 시험해 볼 때도 사용되던 단어이다.
요한은 모든 영들을 다 믿지 말라는 명령 다음에 '영들을 시험해 보라'는 명령을 덧붙였는데, 시험의 내용은 바로 그들이 하느님께 속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의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지를 철저히 점검함으로써 그들의 교리가 위조 화폐와 같은 가짜가 아닌지를 잘 헤아려 살펴보라는 말이다.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갔기 때문이다'
이유 접속사 '호티'(hoti)로 시작하는 본문은 성도들이 왜 영들이 하느님께 속했는지의 여부를 시험해야만 하는가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에 나와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거짓 예언자'로 번역된 '프슈도프로페타이'(pseudoprophetai)의 원형 '프슈도프로페테스'(pseudoprophetes)는 '가짜', '거짓'이라는 뜻의 '프슈토'(pseudo)와 '예언자' 라는 뜻의 '프로페테스'(prophetes)의 합성어이다. 이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자들이다.
겉으로는 예언자의 모양을 갖추었지만, 실상은 양의 탈을 쓴 흉악한 이리이다.
특히 이들은 거짓의 영인 사탄의 도구로 이용된다. 당시 초대 교회 공동체에 나타난 거짓 예언자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데 있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교회 공동체에 속했다가 분리되어 나간 자들로서(1요한2,19)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 가현론자들(Docetists)이다. 요한은 이들을 '그리스도의 적'이라 불렀다(1요한2,22).
한편, '나갔기'로 번역된 '엑셀렐뤼타신'(ekselleythasin)의 원형 '엑세르코마이' (ekserchomai)는 '~로부터 밖으로'란 뜻의 전치사 '에크'(ek)와 '가다'라는 뜻의 동사 '에르코마이'(erchomai)의 합성어로서 '밖으로 나오다'라는 뜻이다.
즉 이것은 교회 공동체로부터 분리되어 세상으로 나갔다는 말이다(1요한2,19).
마치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가 사탄에게 사로잡혔을 때 그가 예수님을 팔기 위하여 마르코의 다락방을 떠났던 것처럼(요한13,27-30) 당시 거짓 예언자들은 사탄의 도구로서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서 분리되어 나온 것이다.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독서묵상
(요한1서 3,22-4,3)
22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 계명을 지킨 기도는 응답을 다 받는다하십니다. 9일기도,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 등 열심히 했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기도 못 들으셨답니다.
(요한 16,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 기도를 잘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4, 2)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마태6,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 기도란 하느님의 뜻이 땅(나)에서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 올바른 기도가 곧 계명 지킴입니다. 그 기도만 하느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며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그 기도는 다 들어 주신답니다. 죄인이 용서받아 구원을 얻는 다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땅의 존재가 하늘의 존재로 영원히 사는 것, 최고의 복입니다. 땅의 것을 구하면 영원히 땅에 같혀 살게되는 저주인 것입니다. 그곳이 땅(지) 감(옥)-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1요한2, 17)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 하느님의 뜻 실천~ 죄인들의 대속 그 하느님의 계명을 믿으면 영원히 삽니다.
23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 하느님의 계명~
(요한3,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14,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구원의 진리 그 예수님을 믿고 서로 사랑 하는 것 인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가 아닌 대속의 죽음으로 죄인들을 살리시는 그 예수님의 사랑을 서로 나누는, 그 서로 사랑하라가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구원의 계명이 그렇습니다. 인간의 사랑을 나누는 것은 진리가 아닌 땅의 계명일 뿐입니다.
24ㄱ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 나를 위해 대속하신 그분을 믿을 때 그분의 생명으로 내가 사는 것이니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사는 하나, 한 몸인 것입니다.
(요한14,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24ㄴ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알고 있습니다.
= 성령께서 일하십니다.
(요한14,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4,1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갔기 때문입니다. 2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을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
=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죄인들의 몸값을 위해 목숨을 바치러 오셨다 고백하면 하느님께 속한 하느님의 영입니다.
3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영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적’의 영입니다. 그 영이 오리라고 여러분이 전에 들었는데, 이제 이미 세상에 와 있습니다.
=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 그 십자가의 길이 구원(생명)의 길 진리로 믿지 않는 것,
그래서 십자가가 거저 주는 의로움보다 인간의 계명에 의한 자신의 의로움을 더 의지 하는 삶,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필리비 3, 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 교회(반 모임 등 복음 나눔)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뜻)을 말하는지~ 사람의 말(뜻)을 말하는지~
하느님의 말씀(뜻)을 말하고 들읍시다.
아멘♡♡
주님 공현 후 월요일 복음 (마태 4,12-17.23-2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15~16)
마태오 복음 4장 15절의 '즈불룬 땅'에 해당하는 '게 자불론'(ge Zaboulin; land of Zebulun)은 갈릴래아 호수 남서쪽의 지역으로서 즈불룬 지파가 거주하던 땅이며, '납탈리 땅'에 해당하는 '게 네프탈림'(ge Nephthalim; land of Naphtalim)은 갈릴래아 호수 북서쪽의 지역으로서 납탈리 지파가 거주하던 땅이다.
그리고 '바다로 가는 길'은 '즈불룬과 납탈리 지역에서 해변으로 펼쳐진 곳'이거나 '갈릴래아 해변'을 뜻하며, '요르단 건너편'은 갈릴래아 해안 동쪽 지역을 말한다.
또한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는 팔레스티나 가운데서도 이방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모든 지역들은 당시 정치, 경제, 사회, 종교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서, 한마디로 전통적으로 유대 사람들에게 소외되고 배척되었던 갈릴래아 주변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마태오 복음 4장 16절의 '어둠'으로 번역된 '스코테이'(skotei; darkness)의 원형 '스코토스'(skotos)는 '어두움','흑암'으로도 번역되는데, 신적(神的)인 것에 관계된 인간의 의무에 관한 무지, 그리고 거기에 따라오는 불신앙과 불경건, 부도덕, 비참한 결과 등의 의미를 갖는다.
또한 '앉아있는'으로번역된 '호 카테메노스'(ho kathemenos; living; which sat)에서 '카테메노스'(kathemenos)는 '앉다'는 뜻의 동사 '카테마이'(kathemai)의 현재분사형으로서, 현재 계속적으로 그런 상태에 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율법도 모르고, 불신앙과 불경건으로 하느님의 생명에서 떠나 계속적으로 비참한 운명에 처해 살고 있는 갈릴래아 지역의 주민의 영적 상태를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백성들만을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은 아니지만, 당시 그 지역은 보다 짙은 영적 어두움으로 덮여 있던 곳이기에, 주로 이곳에서 활동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큰 빛'으로 번역된 '포스~메가'(phos~mega; great light)에는 관사가 붙어 있지 않아 어떤 한정된 구체적인 빛을 의미하지 않고, 진리로서 온 세상을 비추는 메시야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마태오 복음 4장 16절(ㄴ)의 '고장'으로 번역된 '코라'(chora; the land; the reign)는 '땅','지역' 또는 '지방'을 의미하는 명사이다.
그러니까 본문은 '고장과 그림자가 모두 죽음에 속해 있다'는 뜻이다.
'고장'에 해당하는 '코라'(chora)와 '그림자'에 해당하는 '스키아'(skia; shadow)가 등위 접속사 '카이'(kai; and)로 연결되어 있고, 이 명사구 뒤에 '죽음'을 의미하는 명사 '타나토스'(thanatos; death)의 소유격 '타나투'(thanatou)가 나오기 때문이다.
한글 새 성경은 칠십인역(LXX)을 참고한 것 같은데, 이것은 '죽음의 그늘로 뒤덮여 있는 땅'이라는 의미로서, 앞의 '어둠 속에'라는 표현과 좋은 대구를 이룬다.
본문도 역시 하느님의 율법과 은혜도 모르며, 오직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심판만이 있는 죽음의 땅인 갈릴래아 지역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마지막으로 '빛이 떠올랐다'로 번역된 '아네테일렌'(aneteilen; has dawned; is sprung up)의 원형 '아나텔로'(anatello)는 해나 별 따위가 '떠오르다', '일어나다'는 뜻의 동사이다.
여기서는 부정 과거 능동형으로 쓰여서 갈릴래아 지역에 찬란한 빛으로 오신 메시야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지역 위에 떠올라 그들에게 구원과 생명의 빛을 비추었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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