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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급입니다.” 1년 뒤에 재검사 받았습 니다. 스무 살 때는 1급이었건만 하나의 상처로 4급이 되어버렸습니다.
받은 뒤 다시 대학에 복학을 신청하고 또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친구들이 군대에 입대하고, 먼저 입대했던 선배들이 전역하고 그럴 때마다 술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말없이 술잔을 들어야만 했고 그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음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 니다. 무엇보다 괜스레 위축되고 당당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답답했습니다.
공익근무를 마치고 난 뒤에도 지금과 같은 느낌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수술한 무릎이 낫기만 기다렸습 니다. 2~3년 흘러 24살이 되던 해에 다시 MRI를 찍고 병무청으로 향했습니다. 2012년부터 신검을 받은 뒤 5년 이상 군복무나 공익 근무를 하지 않은 자들에 한하여 재검을 시행하였습니다. 급수를 왜 올리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공익근무를 하느니 차라리 급수를 올려 어차피 한번 갈 거 대한의 아들로 육군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직원분이 내 마음대로 급수를 높게 올려주지 못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결과는 3급이었습니다. 판정을 받고 난 뒤 치료 후 해병대를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1순위 수색, 2순위 수색, 3순위 기타 이렇게 지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체력검성 후 2주 뒤 결과가 나왔습니다. 3순위 기타로 했던 것이 운전병으로 합격이 되었습니다. 21개월의 시간동안 운전이나 정비를 하며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조금이나마 편한 군 생활을 하기 위해 재검을 받은 것이 아니었고, 기왕 군 생활을 하는 거라면 제대로 하고 싶었습니다. 해병대 입대를 취소한 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체력을 더 길러서 다시 지원을 해야 하는 것일까?’ ‘더 나이 들어 군대에 가면 내가 적응을 잘 할 수는 있을까?’라는 생각에 잠시 방황을 하였습니다.
받았습니다. 한 편으로는 그래도 잘됐다. 조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육군에서 제대로 해보자라는 생각에 306보충대로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상하게 발걸음이 더뎠습니다. 306보충대 앞 삼거리에는 사람들이 북적였고 몇 대의 차량이 지나가고 짧은 머리의 사내들이 행단보도를 건넜습니다. 입대에 앞서 정리해서인지 평소보다 가벼워진 주머니가 어색했습니다. 담배 연기가 허공에 흩어지고 애써 웃으며 보충대로 향하는 이들. 그들의 뒤를 따라 조용히 걸음을 옮겼습니다. 가족들과 함께와 눈물어린 고별을 보내는 이들과 이미 전역을 하고 예비군복을 입은 친구들과 온 이들. 저도 그들 사이에서 가족과 이야기를 마치고 방송에 따라 사열대 앞에 섰습니다.
“선봉”앞에 선 장정을 따라 경례를 하고 사열대 우측의 강당으로 모였습니다. 작은 목욕탕 의자를 하나씩 들고 줄지어 보충대에 입소한 장정들이 앉았습니다. 나라 사랑카드 미소지자들을 검사한 뒤 어학병이나 특기를 가지고 입소한 이들을 따로 차출하고 구대장 들의 통솔하에 하나 둘 분류되어 하나의 구대를 구성했습니다. 가물가물한 기억 가운데 저도 구대장의 말을 따랐고, 생활관에 낯선 동기들과 함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반쯤 기운 나무 관물대를 보며 내가 군대 입대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침상 앞에 어색하게 앉은 스무 명 안팎의 청년들이 ‘요’자를 써가며 어색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처음으로 불침번이란 것을 서보고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은 화장실에서 세면세족도 해 보고, 긴장된 채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화요일 입소에 금요일 퇴소까지 306보충대의 구대장의 말에 따라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또 보급품을 하나 둘 받았습니다. 의류백을 앞에 메고 속옷, 군복, 양말 등을 받으며 정신없이 이튿날을 보낸 뒤 저녁에 종교행사를 따라갔습니다. 초코파이와 초콜릿을 받았으나 사회에서 들었던 것만큼 욕심이 들지 않아 ‘아 나는 군 생활 동안 먹을 거에 크게 연연하지 않겠구나.’싶었습니다. 종교행사를 마치고 다음 날 자대배치에 대한 이야기로 생활관이 시끄러워졌습니다. 3사단 백골이니 6사단은 강원도이니 누군가 주워들은 이야기로 우리의 마음이 들떴습니다. 내심 전방의 수색대를 기대했던 만큼 생활관 동기들과는 다르게 전방의 부대에 들어가길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306보충대에서 마지막 날. 동기 중 몇 명의 이름이 불리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임시로 군번을 차고 몇 개의 숫자를 조합하여 자대가 분류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면회 온 사람들이 먼저 훈련소와 자대가 정해지자 박수소리와 함께 북적였습니다. 3사단이 되어 힘들겠느니 17사단이라 꿀 빨겠다느니 동기들의 대화 속에서, 그들과는 반대로 저는 혹여나 후방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하는 걱정을 했습니다. 열맞추어 동기들과 함께 생활관에 복귀하고 짐을 싸던 중 분대장에 의해 훈련소와 자대에 대해 알수 있었습니다. ‘5사단 신병교육대’ 그렇게 열쇠부대와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동기들과 버스에 오르고 의정부를 떠나 연천으로 향했습니다. 버스 안에서 신병 교육대가 의외로 시내와 인접해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버스에서 내린 뒤 306과는 다른 시설에 놀랐습니다. 철제 관물대와 깨끗한 외관, 또 조교들이 쓰는 침대 등은 들은 바처럼 전방일수록 시설이 좋구나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조교들의 인솔에 따라 소대가 나뉘고 다시 생활관이 나뉘며 장정이 아닌 훈련병으로서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1주 차는 무던히 많은 설문을 쓰고 입소식에 처음으로 얼차려라는 것을 받았으며, 또 전우조 활동으로 나이 어린 동기들과 친분을 다질 수 있는 계기를 가졌습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열심히 하자란 생각을 가지고 1주차를 마쳤습니다. 이후 사격을 하고 수류탄을 던져보고 7주간의 고되지만 흥미로운 훈련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신교대대에서 GOP근무 용사를 선발한다고 하여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몇 가지 면접을 본 뒤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자대를 전입 받고 생소한 선임들과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대 전입을 받은 뒤 나이 어린 선임들에 대한 걱정과는 다르게 계급이 높으면 어른으로 보인다는 말을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선임들에게 배우고 뛰어다니다 보니 어느새 이병 약장을 떼어내고 일병을 달았습니다.
있었지만 현재 GOP 경계작전에 대한민국 최전방을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지고 열심히 군 복무를 하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은만큼 남은 군 생활을 부끄러움이 없는,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발전해 자긍심을 가지고 조국을 위해 열심히 나라를 지키자 다짐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장병으로 커서 더 나은 조국 발전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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