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김 하 정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창원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다.
2020년《경남신문》 신춘문예에
시조 「백화점」 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E-mail: silverbell830@hanmail.net
www.youtube.com/@서꽃등
시인의 말
처음 들어선 백화점에서 물건을 산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신기하다.
그래서 나는 머뭇거린다.
세계여!
2025년 2월
김하정
파피루스
바람의 손 부르트도록 역사를 새겨왔다
쉽게 사위어 갈 시간들 끌어모아
수없는 자맥질 속으로 문자 향을 담았다
우거진 늪 속에 구름 피륙 펼치면
첨필을 입에 물고 날아오는 참새들
발자국 다 옮겨놓고 물 한 모금 들이켠다
바느질
평생, 바다 물결을 손질하며 살던 노인
어망 풀어 까마득한 수평선을 홈질한다
선홍빛 아가미 하나로
숨결을 고른다
주름 잡힌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
뱃고동 소리가 시간을 재단하면
바람은 억센 손놀림으로
까치놀을 쓰다듬는다
홀치기로 완성한 청새치 한 마리
굽은 등의 외로움은 언제쯤 잠재울까
항구의 불빛을 엮어
박음질하고 있다
겨울비
-르네 마그리트에게
빗방울 떨어져 양철지붕 두드린다
두드리면서 소리들은 고요 깊은 음률이 되고
음률은 스텝을 밟으며
뿔뿔이 흩어지네
지상의 한숨과 탄식 모두 들이키고
갈 곳 잃어 떠도는 날빛의 한숨처럼
겨울비 중절모 쓰고
쓸쓸함을 뿌리네
설치미술 1
노을은 적색 벽돌 층층이 쌓아놓고
능선 위로 높다란 갤러리를 꾸미고 있다
푸드덕 꼬리 붓으로
덧칠을 하는 새들
조용히 다가오는 달빛 도슨트는
관목 숲 사이로 속삭이며 걸어간다
은막에 뜨는 별빛들
기억들이 돋아나는
푸른 통역사들
딱딱한 조어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완곡어법을 사용하는 산을 동경한다
수없이 내 귀를 자극하는 이름 모를 새소리
행인들의 숨소리를 품고 사는 깊은 골짝
꼬부랑 글씨처럼 엉킨 세로로 들어서면
토박이 억양을 내뿜는 저 싱싱한 입김들
새로운 언어 습득에 빠져 있는 나를 위해
바람도 숨죽여 귀 기울이는 이 시간
숲속을 통역해 주느라 새들은 쉴 틈이 없다
해설
번역된 파피루스와 상상하는 감각
신상조(문학평론가)
문학은 “숨은 실제를 찾아가는 수수께끼와 같은 과정이거나, 언표된 것, 언명된 것을 넘어서는 언어의 바깥”이다. 그런 맥락에서 김하정의 시조가 암시적 은유로 풍부하다는 것은 그의 문학이 현실과 상상을 한데 이어 현실을 벗어남으로써 실제적 현실을 드러내는 방식에 능함을 보여준다. “논두렁에 작업용 면장갑이 버려져 있다//해종일 내린 비로 온몸이 젖어 있어도//주인의 따스한 지문을 꽉 움켜쥐고 있다//혹여 지나가는 발길에 차일까 봐//한 귀퉁이 모로 누워 하늘을 보고 있다//쓸쓸히 잠을 청한다, 노숙의 밤이 길다”란 「면장갑」은 논두렁 작업을 할 때 사용하는 사물에 농민의 노동과 노숙자의 비애를 한꺼번에 겹쳐놓는다. 앰프슨(W. Empson)이 모호성을 시적 가치로 내세운 것은 시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다의성을 존중해서다. 시어는 본질적으로 가능한 많은 느낌과 의미를 환기하는 함축성을 지향한다. 시에서의 ‘면장갑’이 노동의 도구로서는 1:1의 지시적 언어라면 내장된 느낌과 의미에서는 다의적이다. 마찬가지로 언어의 다의성이 더욱 풍요롭게 확장되고 있는 「파피루스」를 읽어보자.
바람의 손 부르트도록 역사를 새겨왔다
쉽게 사위어 갈 시간들 끌어모아
수없는 자맥질 속으로 문자 향을 담았다
우거진 늪 속에 구름 피륙 펼치면
첨필을 입에 물고 날아오는 참새들
발자국 다 옮겨놓고 물 한 모금 들이켠다
- 「파피루스」 전문
파피루스(papyrus)는 종이인 paper의 어원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 갈대과의 식물 줄기를 압착하고 이를 얇게 발라내어 종이의 역할을 하도록 만든 고대의 기록 매체다. 사위어 가는 시간 속에서 파피루스에 손이 부르트도록 역사를 기록한 주체는 바람이다. 늪에 비친 구름은 피륙이 되고, 참새들은 첨필을 물고 온 후 물 한 모금으로 갈증을 달랜다. 첨필(尖筆)은 점토나 왁스판 위에 글자를 쓸 수 있도록 고안된 딱딱한 침 모양의 필기구다. 첨필로 대자연에 아름다운 문양을 새길 주체는 “잡지도 가두지도 못할/시간”(「구름의 오후」)이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파피루스가 천지의 창조주와 함께 태초부터 존재하는 자연 즉, 인간 문명의 바깥에 존재하면서 시인이 그리고 바라는 자연의 근원적 표상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작동하는 시인의 의식 활동에는 은유적 상상으로 풍성하다.
“빗줄기 방아쇠 천지에 쏘아대면/하늘엔 먹구름도 뒤엉켜 달아나고/삼팔선 가로지르며/떠도는 피난민들”(「천둥 번개」)이라거나, “찬바람이 굴뚝 연기에 손을 쬐고”(「귀가」) “맥박이 뛰는 곳마다/폭죽처럼 꽃은 피”(「꽃양귀비」)고 있다는 데서 드러나듯, 김하정 시조의 대부분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미학적으로 예찬하기보다 자연의 빛을 마음껏 향유하는 재기발랄한 상상력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