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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37) 살아있는 전례를 위하여 ①
전례 목적은 하느님 현존 체험하고 신앙 올바로 살게 하는 것
포스트 팬데믹
사회적 거리두기 규정이 사라진 후 미사 참여 숫자가 회복되고 있다. 본당들은 잃었던 활력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사제들의 표정도 밝아져 간다. 다른 한편으로 코로나19 이전의 미사 참여 숫자로 돌아가기 위해서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완전 회복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하지만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정말 중요한 일은 ‘복구’(restoration)가 아니라 ‘쇄신’(renewal)일 것이다.
팬데믹의 시간은 교회와 신앙의 삶 전 영역에 많은 도전과 질문을 제기했다. 성사와 전례가 어떻게 거행되고 있는지, 성사와 전례가 신앙인들에게 실제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떤 역할과 기능을 담당했는지 다시 돌아보게 했다. 성직자들의 사목과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어떻게 수행되어 왔는지, 본당이라는 공동체적 공간을 통해 이루어지는 가톨릭 신앙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성찰하게 했다. 포스트 팬데믹의 시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정직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다시 새롭게 시작할 것인지 말이다.
제의(ritual)와 전례(liturgy)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종교는 신화(myth)와 제의와 윤리적 가치체계를 통해 구성된다. 어떤 종교에 소속된다는 것은 그 종교가 선포하는 신성한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그 종교의 제의에 참여하며, 그 종교가 가르치는 사회문화적 가치체계를 수용하고 실천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세 행위 가운데 제의에 참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제의 안에서 신성한 이야기가 선포되고 가치체계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진다. 종교적 삶은 곧 제의적 삶을 의미한다.
제의는 종교가 행하는 의례와 예식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전례는 제의적 특성을 포함하지만, 신자들을 위한 더 공적인 성격을 지닌다. 신앙의 삶에 있어서 전례는 정점이며 핵심이다. 신앙은 전례 안에서 시작되고 성장한다. 교회 공동체 역시 전례 공동체이다. 전례 안에서 공동체가 시작되고 전례를 통해 공동체는 성장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신학적이고 종교학적인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 신앙생활의 모습을 솔직하게 돌아보면 쉽게 발견하고 알 수 있다. 우리 신앙생활의 대부분이 전례 참여로 구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전례 안에서 신앙 교육이 이루어지고, 신앙적 가치와 윤리를 실천할 힘을 얻고, 기도와 영성의 자세와 태도를 배운다.
전례의 성사화
가톨릭교회에서 전례는 성사와 맞물려 있다. 성사의 전례적 거행이 가톨릭 신앙생활의 핵심이다. 전례의 성사화 또는 성사의 전례화는 가톨릭 신앙생활의 기본토대를 형성한다. 하지만 성사의 전례적 거행은 간혹 성사 전례를 지나치게 엄숙하고 엄격한 프레임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전례의 의미를 살아내게 하기보다는 전례 예식 그 자체를 정확하게 거행하는 데 초점을 맞출 위험이 많다는 뜻이다.
성사 전례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성사 전례는 전례적 예식이며 동시에 은총의 표징이며 통로다. 성사에 대해 동사적으로 접근해도 두 개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성사를 ‘거행하다’(celebrate), 성사를 ‘집전하다’(administer), 성사에 ‘참여하다’(participate in)라고 말할 때 성사는 전례 예식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성사를 ‘주다’(give), 성사를 ‘받다’(receive)라는 표현 속에는 성사가 은총(grace)과 은사(gift)와 관련이 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성사에 관한 이 동사적 표현을 보면 성사는 공동체가 거행하는 것이지만, 성사 안에서 집전자와 참여자, 주는 자와 받는 자가 구별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자칫 이러한 구별은 성사 전례 안에서 참여자(받는 자)와 집전자(주는 자) 사이에 위계적 서열이 발생할 위험을 낳을 수 있고, 성사 전례가 집전자를 중심으로 구성될 위험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성사 전례에 대해 신학자는 은총의 표징으로서 중요성과 의미를 강조한다. 이러한 경향은 성사 전례를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방향으로 변하게 할 위험을 내포한다. 교회법 학자는 성사 전례가 유효하고 합법적으로 거행되었는가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는 성사 전례를 규범적 울타리에 가둘 위험이 있다. 전례학자는 성사 전례적 예식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에 방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이는 성사 전례를 형식적으로 만들 위험을 낳는다. 성사 전례가 추상적, 규범적, 형식적인 모습으로 변해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참여자 중심의 전례
전례 성사의 보이지 않는 은총과 구원의 힘(성사의 사효성)에 대해서는 많은 신학적 설명을 할 수 있다. 교회는 오랫동안 전례가 가진 아름다움과 숨겨진 힘과 시간을 초월하는 장엄함에 관해 설명해왔다. 우리가 전례 성사의 깊은 의미와 힘을 잊었기 때문에 전례와 신앙생활이 연결되지 않고 따로 놀았다. 전례 안의 경문과 상징과 동작들은 풍요로운 신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진정한 전례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단순히 가르치는 교육만으로 되지 않는다. 실제 전례 안에서 그 깊은 의미와 효과와 힘을 느끼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즉, 전례의 신학적 의미와 효과에 대한 인식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 전례 안에서 신자들이 느끼고 공감하고 변화되는 정서적 차원의 문제다.
성사 전례의 신학적 의미와 효과뿐만 아니라 사회학적 의미와 효과에 대해서 성찰해야 한다. 전례의 실제적 모습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팬데믹의 시간은 집전자인 성직자 중심의 전례보다 참여자인 신자 중심의 전례로 전환해야 할 때가 도래하고 있음을 예감한다. 기존의 전례가 신자들에게 과연 어떤 모습과 의미로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요청하고 있다.
신자들이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형태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방식과 태도로 전례에 참여한다면 하느님의 현존을 더 깊이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전례의 중요한 목적은 전례 예식을 올바르게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신앙의 삶을 올바르게 살게 하기 위해서다. 오늘의 가톨릭 전례가 정말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구체적으로 느끼게 하고 있는지, 전례를 통해 신자들이 삶의 모든 자리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표현하고 실천하고 수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는지 정직하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전례 안에서 생각과 마음과 몸의 모든 감각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전례가 우리의 신앙 감각을 성장하게 하고, 하느님을 향한 그 감각으로 우리의 일상과 삶을 기쁘고 즐겁게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의 우리 전례가 과연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가?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38) 살아있는 전례를 위하여 ②
삶을 미사로 봉헌하는 건 그리스도 닮은 방식으로 산다는 것
미사의 중요성
“전례는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전례헌장, 10항) 가톨릭 전례의 핵심은 미사(성체성사)다. 사제들에게 미사는 사목 활동에 있어서 중심의 자리를 차지한다. 강론을 잘 준비하고 정성을 다해 미사를 드리는 일이 사제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사목의 영역 안에는 다양한 일과 역할과 직무들이 있지만, 미사가 사목 행위의 정점이라는 뜻이다. 신자들에게도 미사는 핵심이다.
신앙생활은 여러 형태로 수행된다. 다양한 신심 행위들에 참여하기도 하고, 레지오마리애, 꾸르실료, 성경 공부 등 교회 안의 숱한 단체에 가입해서, 친교와 교육과 봉사의 삶을 산다. 하지만 신앙생활의 정점 역시 미사 참여다. 사목과 신앙생활이 이루어지는 핵심 장소인 본당의 중요한 기능과 역할은 그 지역 공동체의 미사 거행이다. 이처럼 미사는 사제의 사목, 신자들의 신앙생활, 본당 공동체의 중심이자 핵심이다.
미사에 대한 참교육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난 글에서 말했듯이, 미사에 대한 인식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정서적 차원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아는 것과 실제로 느끼는 것은 다르다. 앎은 느낌을 촉발하고 도와주는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정서적인 측면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미사가 신학적으로 이러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고, 경문과 동작과 상징 안에 이러저러한 의미가 담겨있다고 아무리 교육을 해도, 실제 미사의 현장에서 그것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면 그저 피상적인 앎으로 끝나고 만다.
미사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신학적(이론적) 설명과 교육보다 실제 미사의 현장에서 거행자(집전자와 참여자)들이 어떻게 미사를 머리와 마음과 몸으로 체험하고 있는지에 대한 현상학적 관찰과 분석이 더 절실히 요청된다.
미사의 현실과 풍경
오늘날 우리가 거행하는 미사가 정말 생생하고 역동적인 모습일까? 솔직히 말해보자. 실제 미사의 자리에서 성직자들이 무엇을 느끼고 체험하는지, 신자들이 어떻게 체험하고 반응하는지. 미사 안에서 생각과 마음과 몸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있는지. 즉, 미사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은총을 온 마음과 온몸으로 느끼고, 그 은총의 힘으로 일상의 자리로 돌아가서 삶을 하느님께 드리는 미사로 봉헌하고 있는지.
전례의 모습이 신앙의 모습이다. 미사의 모습은 신앙의 모습을 반영한다. 실제 미사의 풍경이 형식적이고 추상적이면 신앙의 모습도 추상적이고 형식적일 가능성이 많다. 미사 참여가 능동적이면 신앙생활의 모습도 능동적일 확률이 크다. 우리의 신앙이 혹시 형식적이고 관습적인 모습이라면 아마도 우리는 습관적이고 의무적으로 미사에 참여하고 있을 것이다. 미사의 모습과 신앙의 모습은 늘 함께 간다. 오늘날 우리가 거행하는 미사의 현실과 풍경이 정말 생동감 있고 역동적인 모습일까? 우리 미사의 구체적 현실을 조금 더 냉정하게 분석하고 진단할 필요가 있다.
머리와 가슴과 몸으로 참여하는 미사
어느 저명한 가톨릭 전례 학자의 설명에 따르면, 미사는 하느님의 현존과 우리의 현존이 교차하고, 하느님의 이야기와 우리들의 이야기가 만나는 장이다. 주님의 현존과 주님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존과 우리의 이야기도 중요하다. 생각과 마음 없이 그저 빈 몸으로 행하는,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미사 참여만으로는 부족하다. 생각과 마음과 몸으로 미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갖고 참여한다는 의미다. 미사 안에서 우리의 이야기는 네 군데서 표현된다. 성가, 참회 예절, 신자들의 기도, 강론이다. 성가와 강론은 정말 중요하다. 인간은 노래를 통해 정서를 표현하고 공감과 연대를 체험한다. 한국교회는 신자들의 삶과 사연을 담아내는 성가를 만들어야 한다. 사제는 강론 안에서 하느님의 이야기와 신자들의 이야기가 만날 수 있게 해야 한다.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이 개별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참회와 기도다. 한 주간을 돌아보며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에 대해 성찰하고, 주님께 올리는 자신만의 간절한 기도를 갖고 미사에 참여할 때, 그 미사는 생동적인 미사가 된다. 그저 가슴을 세 번 치며 습관적으로 경문을 외기보다는,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한다. 미사 안에서 용서의 은총을 깊이 체험할 것이다. 신자들의 기도 시간에 자기 내면의 기도를 올릴 수 있어야 한다. 감사, 탄원, 청원, 전구, 그 어떤 형식의 기도이든 그 기도가 하느님과 우리를 깊이 연결한다. 자기 성찰과 내면의 기도, 이 두 준비만으로도 미사가 달라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미사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지, 아니면 그저 습관적이고 형식적으로 참여하고 있는지, 한번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일상의 예식화(ritualization), 삶의 성사화(sacramentalization)
미사는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는 일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67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사건과 신비를 기억하고 기념한다. 미사의 출발은 신비와 사건이다. 예식은 신비와 사건을 기념하는 형식이다. 즉, 미사의 핵심은 신비와 사건에 있는 것이지 예식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 안에서 최후의 만찬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미사 안에서 예식과 사건과 신비는 언제나 연결된다.
형식(예식)은 중요하다. 보이지 않는 내용은 언제나 보이는 형식을 통해 그 의미와 신비를 드러낸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 같은 것이다. 형식은 언제나 내용(의미, 지향, 목적)을 담고 있을 때 살아있는 것이 된다. 형식 그 자체에만 얽매이면, 즉 형식 그 자체를 유지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지면, 형식은 자칫 굴레와 억압이 되기도 한다. 형식은 늘 변화되고 쇄신되어야 한다.
형식(예식)은 필요하다. 사건과 신비는 예식을 통해서 선포되고 전달된다. 형식을 갖추지 못한 내용은 제멋대로 되기 쉽다. 삶의 형식을 놓쳐버리면 방종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의미와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예식이 필요하다. 삶에 있어서 생각과 마음과 욕망과 의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예식(의례)이 필요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자기 일상의 삶을 예식화 하는 일은 중요하다. 삶의 예식화는 부정적인 의미의 형식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인에게 일상을 예식화 한다는 것은 자신의 말과 행동과 태도를 예수를 닮은 모습으로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예식, 형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거행한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우리 삶을 주님께 드리는 미사로 봉헌한다는 뜻이다. 보편 사제직의 진정한 의미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40) 공부하는 신앙 – 두 번째 이야기
하느님 앞에서 자기 삶과 신앙 돌아보는 공부 모임 필요하다
‘신학서원’에 관한 사소한 이야기
신자들과 함께 공부 모임을 하고 있다. 지난 5월부터 두 그룹의 신자들과 한 달에 한 번, 공동 사제관 빈방을 이용해서 진행하고 있다. 처음의 내 계획은, 신학서원과 신앙 공부 모임(혜연공동체)을 별개의 형태로 구성하는 것이었다. 신학서원은 내가 직접 개입해서 함께하는 형식으로, 혜연공동체는 자료만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할 생각이었다. 신학서원은 신앙과 교회에 대해 학문적 관심을 가진 신앙인들이 신학을 집중적으로 함께 탐구하는 공부 모임이다. 혜연공동체는 교회의 신심 모임과 세속의 독서 클럽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신학서원과 혜연공동체, 둘 다 신앙의 올바른 의미와 수행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신앙 운동, 공부를 통해 신앙과 영성의 성숙을 추구하는 신학 운동, 공부하는 공동체의 형성을 통해 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꿈꾸는 교회 운동을 지향한다. 강의 중심이 아니라 함께 읽고 토론하고 대화하는 방식을 택한다.
지방 소도시에서 학문적인 모임을 함께 할 구성원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우선 신학서원과 신앙 공부 모임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모임을 시작했다. 모임의 전반부에는 짧은 신학 강의를 내가 하고, 후반부에는 기도와 독서 모임 형식의 토론과 대화의 시간을 갖는 형태로 시간표를 구상했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신앙과 신학에 관한 공부에 목말라 있었던 신자들이 예상외로 많았다. 대도시 교구와는 달리 농촌 교구에는 신앙 공부의 기회 자체가 부족하다. 도시 교구에는 다양한 성경 공부 모임이 개설되고 교리 신학원 형태의 신학 공부 모임도 있다. 하지만 지방 소도시에는 성경과 신학에 관한 기본적인 공부와 배움의 공간이 제대로 갖춰있지 못하고, 인문적 교양에 대한 지적 훈련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도 잘 없다. 도시중심의 삶이라는 자본주의 문명의 폐해가 신앙의 현장에서도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다.
본당의 현실과 신앙 공부
본당이 수행해야 할 여러 가지 기능 가운데, 전례와 성사를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일은 신앙교육이다. 물론 전례 안에 신앙교육 기능이 존재한다. 하지만 신앙의 교육과 성숙은 다른 여러 방식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오늘날 본당은 미사 거행하는 곳으로만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저 미사만 참여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다양한 형태로 사람들이 모여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던 본당의 모습은 이제 옛 추억이 되었다. 본당 안에 제대로 된 신앙교육이 부재하고 있다. 단순한 사회적 친목이 아닌 진정한 공동체적 친교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로를 향한, 이웃과 세상을 향한 헌신과 봉사 모습도 점점 옅어지고 있다. 본당에서 전례와 성사, 관리와 행정만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
본당 공동체는 당연히 전례 공동체다. 하지만 전례 외에 다른 기능들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 본당은 활력을 잃어갈 위험이 있다. 본당 공동체 안에 다양한 작은 공동체 모임이 활발해져야 전체로서의 본당 공동체는 활기를 갖는다. 본당의 기초 소모임 역할을 담당했던, 레지오와 구역 반 모임이 점점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 대안으로 추진되었던 소공동체 모임도 여전히 확산되지 못하고 있다. 총체적 난국이다. 사람들이 모여야 어떤 일을 수행할 수 있는데, 본당 공동체 안에 사람들이 예전처럼 잘 모이지 않는다.
새로운 형식의 본당 소모임이 필요하다. 속지주의적 원칙만을 고수할 것이 아니라, 취미와 취향과 기질의 동질성을 고려하는 모임도 구성할 필요가 있다. 성경 공부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신앙 공부 모임도 요청된다. 사실, 공부를 통해 신앙과 삶의 성숙을 추구하는 신자들도 많다. 신앙 공부에 대한 갈증을 본당 공동체가 채워주지 못하니, 이웃 종교의 공부 모임에 참여하기도 한다. 어떤 신자들은 온라인을 통해 유명 스님의 경전 공부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다양한 형식의 신앙 공부 모임이 활발하게 존재하는 본당을 상상하고 희망한다.
가톨릭교회는 신자들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신앙을 수행하기가 쉽지 않은 구조다. 많은 부분이 성직자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신자들의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참여 공간이 부족하다. 자발적인 신앙 공부의 방식보다 전례에 피동적 참여 형식으로 신앙 수행이 이루어지는 경향도 강하다. 가톨릭교회의 종교적 신앙의 수행은 사유와 공부와 체험보다는 삶의 형식을 강조한다. 단순 범주화의 위험과 오류를 내포하지만, 깨달음의 사유와 공부를 강조하는 불교, 신앙 체험을 강조하는 개신교, 종교적 삶과 형식을 강조하는 가톨릭으로 구분해볼 수도 있다. 물론 모든 종교는 사유(이성, 인식, 공부)와 체험(마음, 감정, 정서)과 몸(의지, 삶, 종교적 행위)의 차원을 포함하지만 말이다.
개별적 자유와 자율적 개체성을 강조하는 시대다. 공통의 관심사와 공동체적 비전이 사라진 세상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타자의 인정을 추구하고 친밀성과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작은 공동체를 여전히 요청하고 있다. 개인주의 시대이기 때문에, 공동체 운동이 역설적으로 더 필요하다는 뜻이다. 본당이 활성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본당 안의 소모임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기존의 본당 모임들이 친밀성과 소속감을 제공하지 못하고, 건강한 인정 욕망을 채워주지도 못하고, 신앙 성숙과 자기 계발에도 별로 도움이 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공부하는 신앙은 성찰하는 신앙이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수행해온 신앙방식의 변화와 쇄신이 필요하다. 신앙생활의 기쁨은 규범과 의무에 따르는 수동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참여와 노력 안에 있다.
감정과 욕망의 시대를 살고 있다. 차분한 생각과 성찰보다는 조급한 감정과 물질적인 욕망의 이해관계가 더 중요시되는 세상이다.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반응으로서의 감정과 물질문명 속에서 타산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은 사람들에게서 성찰하는 힘을 빼앗고 있다. 오늘의 우리는 생각할 시간과 여유를 잘 갖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느님 앞에서 잠시 멈추는 시간, 즉 기도의 시간을 가질 마음의 여유도 갖지 못하고 있다. 그저 감정의 만족과 욕망의 채움에만 몰두하며 살아간다.
성찰하는 신앙인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 삶과 신앙의 모습을 돌아보는 사람이다. 세상 모든 것들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 섬세한 시선을 가진 사람이다. 즉, 일상 안에서 초월성을 발견하는 사람이다. 신앙은 희망과 사랑 속에서 그 본질을 드러낸다. 성찰하는 신앙인은 숱한 의심과 어려움과 힘듦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믿고 희망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성찰하는 신앙을 위해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신앙 공부 모임이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시절이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43) 젊은 세대에 대한 하나의 생각
심각한 외로움과 각자도생… 청년 현실은 미래사회의 우리 모습
- 공무원 시험 등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청년들이 몰려있는 지역에 위치한 서울 노량진동성당에서 정순택 대주교가 청년들에게 묵주를 선물하고 있다. 양극화된 세상 속에 힘들게 살아가는 청년 세대를 위한 새로운 이해와 접근이 필요하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세대 논쟁
신학교 선생으로 살아서인지, 젊은 신부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다. 젊은 동료들과 신앙과 교회와 세상의 삶에 대한 정직한 고민과 성찰들을 편하게 나눌 수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요즘 사제로 살아가면서 가장 즐거운 대화 상대들은 제자 신부들이다. 그들의 사유와 삶을 듣고 배우면서 내가 확장되는 느낌을 받는다. 물리적 나이와 사회적 세대의 차이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제로서 목적과 지향의 공유와 관심 주제들의 공감대가 젊은 신부들과 나를 연결한다.
최근 세대 논쟁, 세대 담론이 유행이다. “사람들을 세대의 틀로 분류하고, 분열시키고, 또 결집하고, 대립시키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난다.”(신진욱 「그런 세대는 없다」) 사실, 세대에 관한 담론은 모든 시대에 존재한다. 새로움과 변화에 대한 갈망이 세대 담론에 깔려있다. 하지만 최근 한국 사회에서 세대 논쟁은 변화와 혁신에 관한 세대 담론이라기보다는 불평등을 둘러싼 갈등과 논쟁에서 파생되고 있다. 젊은 세대가 세대 담론을 주도하기보다는 기성세대가 주도권을 갖고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세대 담론의 두 축은 86세대와 MZ세대다. 지난 시절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충돌이 이념적 측면에서 발생했다면, 86세대(민주화 세대)와 MZ세대의 갈등은 경제적 불평등과 인정투쟁의 문제와 깊이 결부되어 있다. 정직하게 말해, 세대 담론과 논쟁에 대한 사회학자들의 견해들을 평가하고 판단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다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불평등과 차별의 문제가 세대 문제로 축소 환원되는 현상과 “마치 세대가 단순한 하나의 집합체인 듯이 추상화되고 사물화되는 경향”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사회학자 신진욱 교수의 주장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우리는 이렇게 범람하는 세대 담론에 둘러싸여 우리 사회의 중대한 문제들인 계층·젠더·지역 격차와 이념 갈등을 말할 언어를 잃어버리고 있는지 모른다.”
오늘날 청년 세대가 겪고 있는 불평등과 차별은 세대라는 단순한 하나의 요인 때문이 아니다. 물론 “특정 세대가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혹은 세대의 기회(운)를 통해 이 위계 구조의 상층을 ‘과잉 점유’하면서 세대와 위계가 얽히게 된”(이철승 「불평등의 세대」) 측면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세대’가 아니라 ‘세습’에 있다. 세습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 구조에 있다. “오늘날 20대가 경험하는 불평등의 본질은 부모 세대인 50대 중산층이 학력(정확히는 학벌)과 노동시장 지위를 바탕으로 그들의 자녀에게 동일한 학력과 노동시장 지위를 물려주는 데 있다.”(조귀동 「세습 중산층 사회」) 이러한 세습의 역학 때문에 “청년 세대는 생애주기의 이른 단계에서부터 이미 고용, 소득, 사회보장, 부동산 자산 등 많은 면에서 심각하게 양극화되고 있다.”(「그런 세대는 없다」)
가난한 청춘들의 노래
세습도 능력처럼 여겨지는 세상이다. 능력마저 세습된다. 물적 자본뿐만 아니라 문화적, 상징적 자본마저 대물림되고 있다는 의미다. 소수의 젊은 계층을 제외한 대다수의 젊은 세대는 힘든 현실을 살아내야 한다. 이러한 세상에서 가난한 청춘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인, 오늘의 청년 세대는 절망적 현실 앞에서 좌절과 분노를 경험한다. 희망을 갖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린 세대의 무력함은, 종종 미디어와 사회적 왜곡의 환경 속에서,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혐오의 감정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슬픈 현실이다.
올봄에 발간된 최지인의 시집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는 비정규직 청년 세대의 일과 사랑과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회사 생활이 힘들다고 우는 너에게 그만두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기다리는 사람’) “월세를 못 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세입자는 그 공포 때문에 적은 월급을 받고도 야근하고 부당한 요구에도 침묵하고 집에 돌아오면 드라마를 몰아 보며 캔맥주를 홀짝이다 잠이 드는 생활에 빠진다.”(‘언젠가 우리는 이 원룸을 떠날 테고’)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돈 버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이 있다고 믿었다 갓 서른을 넘겼을 뿐인데 다 늙어버린 것 같다.”(‘이번 여름의 일’) 시집 도처에서 가난한 청춘 세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절망적이고 슬픈 현실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다짐하고 결심한다. “그 무엇도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 있다. 일하고 사랑하고 희망할 것이다.”(‘시인의 말’) 이 가난한 젊은 세대에게 우리 사회는 어떤 대답을 들려주고 있을까.
이용훈의 시집 「근무일지」와 천현우의 노동 에세이 「쇳밥일지」 역시 가난한 젊은 세대의 삶과 현실을 증언한다. “노동자가 머물고 있는 객실은 여전히 구겨지고 흐트러져 있어서 당신들이 떠나는 그날까지 나는 당신들이 묵고 있는 객실의 청소를 마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끝내지 못한 나의 노동은 당신들이 짊어지고 나르는 화강석보다 가볍다 생각들고 당신 수첩에 끄적인 인력사무소 목록 한줄에도 미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미안한 노동’) 가난한 젊은 세대의 글쓰기는 작가로서의 꿈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생존을 향한 몸부림이다. “구닥다리 청춘 예찬 늘어놓는 꼰대들이 싫었다. 돌이켜보면 당시의 배배 꼬인 생각은 청춘으로서 누린 혜택이 없기에 나온 억하심정이었다.”(「쇳밥일지」)
세대를 넘어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은 일반알현에서, 삶을 나이와 세대로 구분하고 세대 간의 경쟁을 부추기는 것은 해롭다고 비판했다. 교황은 세대 간의 동맹을 강조한다. 노인과 어린이, 노인과 젊은이의 동맹과 유대가 인류를 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대를 넘는 동맹은 어떻게 가능할까?
산업화 세대, 베이비붐 세대, 민주화 세대는 이제 지나갔고 지나간다. 머지않아 지금의 청년 세대들이 우리 사회를 짊어지게 될 것이다. 사회적 기회가 많았고 꿈과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었던 어제의 청년 세대와 공고화된 사회적 체계 속에서 세습적 자본에 의해 많은 것들이 좌우되는 세상을 살아가는 오늘의 청년 세대는 서로 다르다. 오늘의 젊은 세대들은 궂은일은 하지 않으려 하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왜 미래를 설계하지 않고 현재의 쾌락에만 몰두하느냐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탓이 아니다. 지금의 교육과 성장과 생존의 환경과 문화는 기성세대의 산물이다. “이제는 청년 세대의 삶을 들여다봐야 할 때다. 청년층의 높아지는 우울증과 자살, 저출생, 심화되는 외로움과 각자도생 등은 곧 우리 사회의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정지우 문화평론가) 청년 세대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접근이 필요하다. 오늘의 청년 세대 현실이 미래의 우리 사회 모습일 것이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35) 연대, 시(詩), 성체성사
세상 슬픔과 아픔 공감하지 못하면 참된 그리스도인 될 수 없다
혐오와 연대의 풍경
인간은 어디까지 타락하고 악해질 수 있을까? ‘가로세로연구소’가 어느 전직 장관의 딸이 근무하는 곳으로 찾아가 영상을 찍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타인의 고통과 힘듦마저도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자신들의 혐오 감정을 배설하는 통로로 삼고 있다. 추악한 일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시위에 관한 뉴스가 자주 등장한다. 우리 사회는 소수의 희생을 담보로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다수의 편안함과 공리라는 이름으로 소수를 궁지로 모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소수의 약자들에게 점점 더 무심하고 잔인해져 가는 오늘의 사회가 무섭고 슬프다.
양궁 국가 대표 선수 안산이 전장연에 후원금을 기부했다. ‘국가대표선수’라는 사회적 상징이 지닌 책임의 무게를 질 줄 알았고,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가 갖는 아름다움을 체득한 모습이었다. “비장애인이 불편함을 감수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 오기를.” “저는 광주여대 초등특수교육과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의 발언은 또 얼마나 분명하고 통쾌했는지. 늙은 내가 젊은 청춘에게 많이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참다운 선생은 나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절감한다.
페이스북에서 팔로우하는 한 사회학자의 글을 읽었다. 사회 현상들을 섬세하게 통찰하면서 따뜻한 시선이 담긴 글을 쓰는 학자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일주일 커피 한 잔 값 3000원, 한 달 1만2000원으로 미얀마를 돕는 미얀마연대파주시민모임이 꼭 1년이 되었습니다. …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다른 곳을 돕더라도 고마운 일입니다. 형편이 허락하는 분들은 미얀마 호핀고아원을 계속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뭉클해졌다. 아, 세상은 일상의 사소한 자리에서, 이렇게 보이지 않게 연대하는 사람들 덕분에 그래도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고맙고 미안했다. 기억과 연대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제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기억과 기록의 연대
세상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픔과 상처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지금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신철규의 두 번째 시집 「심장보다 높이」를 읽었다. 첫 시집인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에서 신철규 시인은 세월호의 슬픔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슬픔의 과적 때문에 우리는 가라앉았다/ 슬픔이 한쪽으로 치우쳐 이 세계는 비틀거렸다// 신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그것이 일반명사인지 고유명사인지 알 수 없어 포기했다/ 기도를 하던 두 손엔 검은 물이 가득 고였다//… 해변은 제단이 되었다/ 바다 가운데 강철로 된 검은 허파가 떠 있었다.”(‘검은 방’)
그 슬픔의 깊이를 두 번째 시집에서 다시 저릿하게 기록한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 전기가 나갔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녹슨 슬픔들이 떠오른다/ 어두운 복도를 겁에 질린 아이가 뛰어간다// … 심장은 자신보다 높은 곳에 피를 보내기 위해 쉬지 않고 뛴다/ 중력은 피를 끌어 내리고/ 심장은 중력보다 강한 힘으로 피를 곳곳에 흘려 보낸다// … 우리가 죽을 때 심장과 영혼은 동시에 멈출까/ 뇌는 피를 달라고 아우성칠 테고/ 산소가 부족해진 폐는 조금씩 가라앉고/ 피가 몸을 돌던 중에 심장이 멈추면 더 이상 추진력을 잃은 피는 머뭇거리고/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고/ 할 말을 찾지 못해 바싹 탄 입술처럼/ 그때 내 영혼은 내 몸 어딘가에 멈춰 있을까.”(‘심장보다 높이’)
타인의 고통과 아픔에 예민한 시인은 여전히 세상의 상처를 기록하고 있었다. 제주 4·3사건의 유적을 보면서 그는 또 이렇게 기록한다.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앞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폭도가 된다// 서로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누워 있는 해골을 보았다/ 얼굴에서 살이 없어지면/ 모두 저렇게 표정이 사라질까/ 텅 빈 웃음만 남기고// 서로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참아낼 만큼 그들은 사랑했던 걸까.”(‘세화’)
그의 시는 타인의 고통과 슬픔과 상처의 기록이다. 시인은 기억과 기록을 통해 슬픔의 사람들과 연대한다. 기억과 기록은 살아있는 시인을 죽은 희생자들과 연대하게 한다. 이처럼 기억과 기록은 삶과 죽음을 연결한다.
기억과 기념의 연대
어느 주간지에서 한 인류학 연구자가 냉동인간에 관해 성찰하는 글을 읽었다. 그는 의례(ritual)의 매개적 의미와 가톨릭 성체성사의 제의적 의미에 대해 서늘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산 자는 자신의 몸 안에 죽은 자의 몸을 받아들임으로써 개인과 공동체의 아픔을 치유하기도 한다. 예컨대 가톨릭 신자들이 매우 중시하는 성체성사를 떠올려볼 수 있다. 인류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의 몸과 피를 ‘내 안에’ 받아 모심으로써 내 영혼이 곧 나으리라는, 그 믿음은 개인의 안녕을 넘어 이웃과 공동체의 아픔에 공감하고 개입하는 원동력이 된다.”(송병기)
교회와 신앙인은 성체성사를 살아간다. 성체성사는 그저 거행하는 종교적 예식이 아니다. 성체성사는 전례 성사이며 동시에 삶의 성사다. 성체성사는 최후의 만찬을 ‘재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재현’하는 것이다.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가 받아 모시는 몸은 죽은 몸이 아니라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는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된다. 성체성사의 연대는 구체적 물질성의 연대이며, 종말론적으로 실현된 성사적 연대다. 성체성사의 연대는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다.
성체성사는 진정한 연대의 정치학이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인종과 민족과 성별과 빈부와 문화의 차별 없이 모두가 형제요 자매요 이웃이다. 성체성사의 신비를 살아가는 신앙인은 당연히 세상 모든 고통과 아픔과 상처와 연대한다.
애도와 연대
기억과 기록을 통한 연대가 문학의 일이라면, 기억과 기념의 연대는 종교의 일이다. 문학이 기억과 기록의 방식으로 슬픔을 애도한다면, 종교는 기억과 기념의 방식으로 슬픔을 위로한다. 때때로 그 애도와 위로는 슬픔을 견뎌내야 하는 슬픔이다. “그 슬픔은 타자를 위로하는 사람도 슬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슬픔이다.”(알폰소 링기스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 자들의 공동체」)
세상의 슬픔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의 고통과 타인의 상처에 무심한 사람은 (탁월한 시인은 될 수도 있지만) 참된 시인이 될 수 없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기록의 연대와 제의의 연대를 실천하는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 그 자리에서, 기억하고 기념하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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