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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믿음 · 희망 · 사랑 : 희망의 촛불 밝히기 (1) 기초 편
지난주까지 차동엽 신부님의 저서 『믿음·희망·사랑』 속에서 믿음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희망입니다. 바로 올해 우리가 보내고 있는 ‘희망의 희년’의 핵심, 바로 그 희망입니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15)
누군가가 ‘희망’에 대해 묻는다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을 찾기 위해 ‘희망’의 줄기가 인류 역사 속에서 어떻게 뻗어 왔는지 살펴볼까 합니다.
희망의 첫 번째 갈래는 ‘그때로 돌아갔으면’의 희망입니다. 과거지향적 희망, 곧 회복의 희망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선포하신 희망도 바로 이 ‘회복’의 희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첫 번째 구원을 선포하셨을 때 그 내용은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에 기록된 ‘희년 선포’였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참조)
‘묶인 자’가 다시 풀려나고, ‘눈먼 이’가 다시 보게 되고, ‘억눌린 자’가 다시 해방되는 ‘은총의 해’ 곧 ‘희년’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회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내고 있는 희망의 희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희망의 두 번째 갈래는 ‘반드시 그날은 오리라’의 희망입니다. 미래지향적 희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희망에 대한 기막힌 표현이 성경 속에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히브 6,19)
여기서 닻은 내비게이션과는 다릅니다. 내비게이션은 가다가 길을 헤매 다른 곳으로, 또는 엉뚱한 곳으로 가게 할 수도 있지만, 닻은 갈고리가 달려 고정적으로 박혀 있으며 연결된 줄만 있다면 헤매지 않게 할 수 있지요. 참 신기하게도, ‘희망’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티그바’(tikvah)의 원래 뜻은 밧줄입니다. 그러니 희망은 바로 이렇게 붙잡을 수 있는 ‘밧줄’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닻에 연결된 그 밧줄을 잡아당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방향을 몰라도 닻은 이미 박혀 있기에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희망의 세 번째 갈래는 ‘지금은 희망할 때’의 희망입니다. 이는 현세중심적 희망을 가리킵니다. 희망에 대해 총망라된, 차동엽 신부님의 『뿌리 깊은 희망』 (위즈앤비즈, 2009)에는 “희망이야말로 절망을 이겨내는 유일한 대안이며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게 해 주는 최후의 보루”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역경이 닥쳤을 때, 무조건 ‘희망’을 품는 것이 살아남을 수 있는 외길입니다. 희망만이 바로 살 길인 것입니다.
희망은 그 자체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2025년 희년을 보내며 하느님을 향해 걷는 길에서 우리 모두 뿌리 깊이 희망을 심을 수 있기를, ‘희망’만이 희망임을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성찬 전례(Liturgia eucharistica)
성찬 전례는 미사의 후반부입니다. 전반부에 해당하는 ‘말씀 전례’ 역시 미사의 본질적 요소지만, 미사에만 말씀 전례가 있는 건 아닙니다. 대부분의 다른 예식에도 말씀 전례 또는 이와 비슷한 예식이 있습니다. 따라서 미사 전례만이 지니는 고유한 특징은 성찬 전례에서 명확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찬 전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전에 “신자들의 미사” 또는 “봉헌미사”라고 불리곤 했습니다. “신자들의 미사”라는 말은 말씀 전례가 끝나면 세례받지 않은 예비 신자들이 돌아가고 오직 신자들만 남아서 이 전례를 거행하였기에 붙은 명칭입니다. 또한 “봉헌미사”라는 말은 성찬 전례가 교우들의 예물 ‘봉헌’에서 시작하고 감사기도에서 십자가 제사가 재현되면서 참된 제물이신 그리스도께서 ‘봉헌’되시기에 붙은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두 명칭이 성찬 전례의 의미와 내용을 반영하기는 하지만, 그 특성을 전적으로 드러내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전례 예식서에서는 초 세기의 명칭을 따라 “성찬 전례” 또는 라틴어를 그대로 옮긴 “감사 전례”라는 표현을 씁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고, 이를 통해 십자가의 제사가 교회 안에서 언제나 지속되게 하셨습니다. 사제는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분께서 스스로 행하셨고 당신을 기억하여 행하도록 제자들에게 맡기신 바를 재현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① 빵과 잔을 들고 ② 감사를 드리신 다음, ③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말씀과 행동에 따라, 성찬 전례는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① 빵과 잔을 들다 (예물 준비) : 공동체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손에 드셨던 빵과 포도주와 물을 제단으로 가져가 봉헌하고, 사제는 이를 받아 제대 위에 놓으며 성찬례를 준비합니다.
② 감사를 드린다 (감사기도) : 사제는 공동체를 대표해 감사기도를 바치면서 하느님의 모든 구원 업적을 기념하고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때,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어 성부께 봉헌됩니다.
③ 나누어 주다 (영성체 예식) : 사도들이 예수님에게서 그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셨듯이,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배령(拜領)합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고, 같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신 공동체 모두는 하나의 친교를 이룹니다
[교회사에서 희년을 보다] 교황 클레멘스 6세와 우르바노 6세의 희년
아비뇽 유배 시대의 교황 클레멘스 6세(1342~1352)는 1343년 1월 27일, 희년 주기를 100년에서 50년으로 단축하고, 1350년에 두 번째 희년을 기념한다는 칙서 「Unigenitus Dei Filius」를 반포했습니다. 이는 로마 사절단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로마는 1309년 클레멘스 5세가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긴 이후 혼란과 빈곤 속에 방치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로마 주교들은 교황에게 로마로 돌아올 것을 계속 요청했고, 아울러 방치된 로마시를 위해 희년을 1400년이 아니라 1350년으로 앞당길 것을 청원했던 것입니다. 이에 클레멘스 6세는 로마로 돌아가는 대신 희년 선포를 통해 로마를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칙서 「Unigenitus Dei Filius」은 ‘대사(大赦)’의 초기 역사에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 대사의 교리적 기초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대사의 기초가 되는 보화의 주된 원천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며 인류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모 마리아 및 성인들의 공로이며, 이 보화는 베드로와 그의 대리자가 대사의 형태로 신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를 공경하며 그들의 보호를 청하기 위해 성 베드로 대성전과 성 바오로 대성전,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 방문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 칙서에는 대사를 “죄에 마땅한 잠벌에 대한 용서”로 정의하면서도, “모든 죄에 대한 용서”로도 표현하며, 대사 교리 발전의 중대한 단계를 보여줍니다.
또한, 칙서는 희년 주기를 50년으로 줄인 근거를 인간의 짧은 수명과 성경에서 찾고 있습니다. 레위기(25,11)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50년째 되는 해를 사면과 기쁨의 희년으로 삼으라고 명하셨으며, ‘50’이라는 숫자가 구약과 신약에서 특별히 존중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클레멘스 6세는 1348년 흑사병 대유행의 위험에도 희년을 연기하거나 취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는 순례자들 사이에서 감염이 확산되고, 귀로 중 전염병이 퍼졌다는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한편, 교황좌를 로마로 되돌린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후임자이며, 그의 재임기에 서구 대이교가 시작된 교황 우르바노 6세(1378-1389년)는 1389년 4월 8일 교서 「Salvator noster Unigenitus Dei Filius」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33년간 살았던 것을 근거로, 1390년을 첫 번째 희년으로 기념하고 이후 희년 주기를 33년으로 정했습니다. 교황은 또한 사람들의 수평이 예전보다 점차 짧아지고 있음을 고려하며, 많은 이가 50년 주기의 희년을 맞을 수 없다는 점에서 사람들이 더욱 희년의 은총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본래 1400년에 거행되어야 했던 희년이 1390년으로 앞당겨졌습니다. 또한, 성 베드로 대성전과 성 바오로 대성전,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 외에 성모 대성전(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을 방문 성지로 추가했습니다. 그러나 우르바노 6세가 1389년 10월 15일 서거하면서, 그의 후임자인 보니파시오 9세(1389~1404년)가 1390년 희년을 기념했습니다.
[교회의 언어] Long day(힘든 하루)
집(home)으로 가는 길은 때론 너무 멀어 보입니다. 특히 힘든 하루(Long day)를 보내고 난 후에 더욱 그렇습니다. 저녁 무렵 연산역, 환승하는 많은 사람들은 초점없는 눈으로 스마트 폰을 바라보며 이어폰을 낀 채 저마다의 무인도를 향해 표류하는 듯합니다. 각자 지고 온 하루의 무게는 누가 알아줄까요? 누군가의 마음을 알아주는 데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 참 힘들었군요?” 그걸 영어로 “Long day?”
공항을 몇 개 거쳐 시골 신학교로 돌아가는 밤 비행기. 한 승무원이 한숨을 쉽니다. 제가 “오늘 힘들었군요(Long day)?” 그러자 폭풍우로 비행 스케쥴이 다 틀어져서 연착의 연속이었다며 하소연합니다. 그러고는 들어줘서 고맙다며 기내 스낵을 한주먹 가져다줬습니다. “Long day?”는 마법 같은 말입니다.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으니까요. 때론 이 낯선 동양인 아저씨에게조차.
여러분은 힘든 하루를 보내면 누구에게 위로 받으십니까? 하루를 마무리하며 십자가를 올려다 보세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물어보실 겁니다. 오늘 하루 힘들었지? Long day? 십자성호(sign of cross)를 그으며 하루의 무게를 예수님께 맡겨드리시길.
[가톨릭 신학] 용서받지 못하는 죄
죄란 무엇이고,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나요? 그리스도교에서 ‘죄’란 우선 하느님께 지은 죄입니다. 하느님 뜻을 거스르고, 외면하는 것이 죄입니다. 다음으로 나와 내 이웃에게 짓는 죄입니다.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고,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해를 끼치고, 누군가의 영혼을 아프게 하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이웃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라 하신 것처럼, 하느님과 이웃에게 죄짓는 것은 잘못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죄지을 때도 있습니다. 가장 큰 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무엇일까요?
그 죄는 바로 절망입니다. 자신의 구원에 대해 희망을 잃어버리고, 포기하는 것이 절망입니다. 지옥이란 절망 가득한 곳입니다. 유다는 예수님 배신 후 절망했고, 스스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갔습니다. 베드로 역시 배신했지만, 예수님을 완전히 떠나지 않고, 믿는 이들과 함께 머물며 참고 견뎠습니다. 결국 자기 힘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모든 죄는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 단 한 가지,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마태 12,31-32; 마르 3,28-29; 루카 12,10 참조) 모든 죄는 용서받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 서로 모순되는 말 아닌가요? 예수님이 뭔가 잘못 말씀하시거나,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모든 죄에 포함되지 않나요?
모든 이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 마음, 모든 이의 죄를 씻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마음을 생각한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진정 회개한다면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 예수님 말씀을 믿지 못한 채, 자기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스스로 단죄하거나, 저 사람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단정한다면, 이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인간이 보기에 용서받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죄가 있지만, 하느님의 용서는 모든 죄에 해당합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마태 18,22)하라고 인간에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용서 못 하실 죄가 뭐가 있겠습니까?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믿음입니다. ‘회개’(悔改)라는 단어는 ‘회두’(悔頭), 즉 ‘고개를 돌리다’, ‘하느님께 향하다’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신앙’(믿음)과 동일한 의미이고, 죄의 반대말입니다.
특히 우상을 멀리하십시오. 하느님이 아닌 것을 하느님처럼 여기거나 인간에게 바랄 수 없는 것을 인간에게서 찾지 마십시오. 무속은 인간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주지만, 신앙은 인간이 들어야 할 말을 해 줍니다. “믿음 대로 살지 않는다면, 사는 대로 믿게 될 것이다.”(풀턴 쉰 주교)
[“저 여인은 누구실까?”]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먼동이 트이듯 나타나고, 달과 같이 아름답고, 해와 같이 빛나며, 진을 친 군대처럼 두려운 저 여인은 누구실까?” 레지오 단원들이 세상 곳곳에서 날마다 바치는 기도입니다. 까떼나를 함께 바치면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뭘까요? 목소리가 점점 우렁차게 커진다는 겁니다. “먼동이 트이듯” 할 때 잔잔하던 목소리가 “달과 같이” 커지고 “해와 같이” 힘을 내다 “군대처럼” 막강해집니다.
어린 시절 복사단 레지오를 할 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린이들이 함께 입을 모아 기도하는데, 처음에는 나지막하게 시작하다가 “저 여인은 누구실까?” 하면, 모두가 상기되어 목소리는 높아지고 얼굴은 붉어져 있었습니다. 한참 뒤 보좌 신부 시절 어린이 쁘레시디움에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함께 묵주기도를 드리고 또 까떼나를 바치는데, “저 여인은 누구실까?” 이 대목에 이르면 어린 학생들의 목소리가 왜 그렇게 큰지 회합실이 떠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지난달 본당에서 꾸리아 연차 총친목회가 있었습니다. 어르신들이 성전에 모여 기도하며 까떼나를 바치는데, 제 기억 속의 어린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우렁찬 목소리로 “저 여인은 누구실까?” 외치는 겁니다. 평소에 들어보지 못한 힘찬 목소리였습니다. 성모님을 사랑하는 레지오 단원들이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일까요? 성모님 앞에서 성모님을 바라보며 “저 여인은 누구실까?” 하면 남녀노소 모두가 힘이 납니다.
단원들의 물음에 성모님께서 화답이라도 하시듯, 곧바로 성모님의 찬미가 이어집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이 찬미가는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 드린 기도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하여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하며 성모님을 찬송했고, 성모님은 이 찬미가를 부르며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렸습니다.
성모님의 믿음과 사랑이 너무나 잘 담긴 ‘네페쉬’
그런데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성모님은 “제가 주님을 찬송합니다.”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하필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하고 기도하셨을까요? 또, 영혼은 무엇이고, 마음은 무엇일까요?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것 같기도 한데, 까떼나를 바칠 때는 기도하는 게 바빠 그냥 넘어가기 쉽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영혼’은 라틴어로 ‘아니마’(anima)이고, ‘찬송하다’는 ‘마니피캇’(magnificat)입니다. 그레고리오 성가에 관심 있는 분들은 성모님의 찬가 “마니피캇 아니마 메아 도미눔”(Magnificat anima mea Dominum)을 잘 아실 겁니다. ‘마니피캇’은 성가로 찬미를 드리는 성가대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어서 성가대 이름으로도 많이 사용했습니다. 27년 전 제가 보좌 신부로 지내던 본당도 마니피캇 성가대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성모님께서 왜 ‘영혼’으로 주님을 찬송한다고 하셨을까, 내 몸과 마음으로, 내 생명을 다 바쳐 찬미한다고 하셨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희랍어 성경은 ‘아니마’를 ‘프쉬케’(psyche)라고 하는데, ‘프쉬케’를 그저 심리학 관련 용어로 생각하던 저는 여전히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어느 정도 명확해졌습니다. 성모님은 ‘시온의 딸’로서 유다교의 토양 안에서 성장하셨으니, 성모님의 기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성경을 충분히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창세기는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2,7)라고 전합니다. ‘생명체’는 히브리어로 ‘네페쉬’, 본래 목구멍을 뜻하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이 살아가도록 양식을 마련해 주시고 숨을 불어넣어 주시는데, 모두 목구멍(네페쉬)으로 받아들여야 하니 유다인들은 목구멍을 아예 생명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네페쉬’는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인간 생명체이고, 성모님께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찬미하며” 하실 때 ‘영혼’이 바로 이 ‘네페쉬’였습니다.
성모님은 스스로를 ‘네페쉬’라고 고백하며, “저는 주님 때문에 살아있고, 주님 때문에 살아왔고, 주님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저는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당신의 피조물입니다. 당신의 사랑과 은총으로 살아가는 제가 당신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당신만이 저의 모든 것입니다.” 하고 기도하신 겁니다. 성모님의 믿음과 사랑이 ‘네페쉬’에 너무나 잘 담겨 있구나 싶은데, 이것을 그저 ‘영혼’이라고 하니 밋밋한 느낌이 듭니다.
주님을 찬송하는 것은 주님께서 머무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
‘마니피캇’(magnificat)도 좀 더 알아보면 좋겠습니다. ‘마니피캇’은 라틴어 ‘마그누스’(magnus, 큰)와 ‘파키오’(facio, 만들다)의 합성어로 본래 ‘크게 하다’는 말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미하며…”는 “내 영혼이 주님을 크게 하며…”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성모님이라 해도 어떻게 주님을 크게 할 수 있을까요? 성모님은 유한한 인간 피조물이고, 주님은 무한하신 창조주 하느님이신데 말입니다.
우리들 안에 주님을 모시는 자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근심 걱정이나 욕심에 찌들어 있으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 머무실 자리가 그만큼 줄어듭니다. 세상 재물이나 쾌락에 정신 팔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생각, 내 경험만 앞세우고 주님의 뜻을 찾지 않으면, 글쎄요, 주님께서 과연 얼만큼 내 안에 머무실 수 있을까요?
주님을 찬송하는 것은 내 안에, 또 우리 공동체 안에 주님께서 마음껏 머무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주님의 사랑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응답하며 자기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였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성모님 안에 머무실 자리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과연 주님께서 성모님 안에 온전히 머무르시니, 성모님은 주님의 거처가 되어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도 강력한 기도입니다.
레지오 단원은 성모님 앞에서 성모님을 바라보며 날마다 기도합니다. 성모님께서 함께 기도하시니 단원들이 힘이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여인은 누구실까?”, 이 기도는 성모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성모님을 더욱 깊이 알고 싶어 드리는 사랑의 기도입니다. 성모님께서 누구이시고 어떤 분이신지 겸손하게 묻는 물음에 답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우리의 신심도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금년 한 해 성경과 교회 가르침을 따라 성모님의 신비에 조금씩 접근해 보겠습니다. 이번 달에는 성모님께서 당신 자신을 ‘네페쉬’라고 고백했음을 알아보았습니다. 성모님과 함께 주님을 찬송하는 복된 사람이 되도록 마음을 모으면 좋겠습니다.
[가톨릭 교리] 왜 마리아가 중요한가요?
마리아는 예수님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후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두 여인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적극 협조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마리아를 만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의심하지 않았고, 본인의 경험에 근거해서 하느님이 개입하셨음을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된 분이라는 축복의 말을 전합니다(루카 1,42).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중에는 뱃속의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만남도 이루어집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 준비시킨 사람입니다. 그의 사명은 하느님 백성이 주님을 맞이하도록 준비시키는 선구자 역할입니다.
두 여인의 만남을 통해 선구자와 메시아의 만남, 주님의 백성과 주님의 만남이 시작됩니다. 엘리사벳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구약의 옛 하느님 백성을 상징합니다. 엘리사벳과 요한을 통해 옛 하느님 백성이 새 하느님 백성과 연결됩니다. 마리아는 새 하느님 백성의 시작을 알립니다. 마리아의 잉태와 출산은 새로운 계약, 즉 신약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극적으로 이뤄지는 시점에 두 여인의 적극적인 응답과 협력은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의미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신앙이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바라고 돕는 것이 신앙입니다. Non mea, sed Tua!(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수난 전날 밤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것처럼, 내가 이해할 수 없어도 하느님의 말씀과 뜻이 분명하다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 신앙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하리라는 천사의 말에 몹시 놀랐고, 두려워하였으며,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복음서는 전하고 있습니다(루카 1,29-30). 그래서 마음속에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9)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도할 시간, 그리고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합니다. 신앙인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분명하다면, 하느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언제나 “예!”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는 방법은 순종, 순명하는 것
사제서품식에서 서품 후보자들은 ‘정결’과 ‘순명’을 서원합니다. 수도자들은 이 두 가지에다가 ‘청빈’ 서원까지 합니다. 정결과 순명과 청빈, 이 세 가지 모두 실천하기 어려운데, 저 역시 사제로 살다 보니 세 가지 모두 쉽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합니다. 특히, 처음에는 순명 서원이 비교적 지키기 쉽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순명은 겸손에서 출발합니다. ‘겸손’이라는 뜻의 라틴어 단어인 ‘후밀리타스(humilitas)’의 어원은 ‘흙’을 의미하는 ‘후무스(humus)’입니다. 즉 겸손이란 인간의 본질이 흙에서 왔다는 것을 기억하고, 흙처럼 가장 낮은 바닥에 위치해서 다른 모든 것을 우러러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즈카르야처럼, 엘리사벳처럼, 그리고 마리아처럼 하느님 말씀에 “예!”하고 신앙적으로 겸손하게 순종했을 때 하느님의 구원 은총이 우리 안에 자라게 됩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주님 탄생 예고’(=성모영보, 개신교에서는 ‘수태고지’)를 들으셨을 때 성모님은 스스로 가난하고 비천한 종이라 고백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방법,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는 방법이 바로 이렇습니다. 하느님 말씀 앞에서 겸손하게 신앙적으로 순종, 순명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아브라함이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선택과 약속을 받게 된 것처럼, 마리아도 믿음을 통해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14).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주어진 구원 약속이 신약의 마리아를 통해 성취됩니다. 예언이 실현되고, 구원의 새 시대가 시작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는 이 말씀은 예수님 탄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혀 주는 것이고, 동시에 마리아의 미래, 그리고 믿는 이들의 미래가 어떠할지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는’(임마누 Immanu) ‘하느님’(엘 El)이십니다. 인간과 함께하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은 구약에서도 하느님의 사명을 부여받은 이들에게 내려주신 말씀입니다(참조 판관 6,12; 1역대 22,11.16). 마리아를 통해서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확약하십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는 마리아의 응답이었고, 동시에 믿는 이들과 교회의 응답이어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주님 탄생 예고 중 이루어진 마리아의 “예!”를 설명합니다. 구약의 하와와 신약의 마리아, 죄와 구원, 불순종과 순종, 죄와 자유의 관계를 비교하면서 인류 전체의 역사 안에서 마리아가 지닌 중요함과 탁월함을 이야기합니다(‘교회헌장’ 56항).
성모님의 모습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핵심 발견
마리아를 통해 이루어진 구세주의 탄생 사건 전체의 주인공은 당연히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처녀를 선택하셔서 그 처녀를 어머니가 되게 하시고, 그 여종을 모든 이들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은총이란 무엇이고, 구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대답에서 마리아는 우리에게 중요한 모범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은총 앞에서 우리는 마리아처럼 ‘신앙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구원의 시작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혼자서도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으시지만, 인간의 순응하고 협력한다면 은총을 체험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과 신심은 대단합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 내에서 성모 마리아는 신앙적으로도, 특히 신학적으로도 중요합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하는 곳인가에 대한 대답을 가톨릭교회는 어머니이자 동정녀이신 마리아의 모습에서 찾습니다. 마리아가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를 품었던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신앙과 세례로 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가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른 것처럼, 교회는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따라야 합니다.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고 기른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을 낳고 기릅니다. 이처럼 오직 그리스도만을 추종하는 동정녀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교회의 본질과 역할은 마리아의 모습에서 해답을 찾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몸에 품고, 평생 예수님과 함께하며 따르는 마리아의 모습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범이고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가톨릭교회는 성모님의 모습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핵심을 발견하고 있고, 성모님을 통해 더 깊은 신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