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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하지 말찌니라
20: 13
13. 살인하지 말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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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의 총검이 수많은 광주 시민을 무참하게 학살하던 1980년 5월, 그래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던 그 공포 정치 아래서, 어떤 목사님은 ‘하나님은 아신다!’는 제목의 설교를 한 바 있습니다. 5. 18 당시 저는 화순 능주 교회에 시무하고 있었는데, 그때 붉은 글씨로 쓰여진 ‘살인마 전두환 물러가라’는 벽보를 본 기억이 아직까지 새롭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학살한 살인마들은 언젠가 반드시 역사의 단죄를 받을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아직도 국민들의 기억에 잊혀지지 않는, 살인 공장을 차려 놓고 살인 범죄를 일삼았던 ‘지존파’ 일당의 엽기적인 살인극이나, 20여명의 여성들을 토막 살인하여 암매장을 했던 유영철의 잔인무도한 살인극, 3000여명의 희생자를 냈던 미국의 9. 11 테러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자살 테러 사건 등은, 어쩌면 인간이 이토록 악마적일 수가 있을까 참으로 몸서리 처지게 하는 사건들이었으며, 지금도 흔히 일어나는 부모를 살해하는 패륜 살인 사건, 보험금을 노려 처자식을 살해하는 짐승보다 못한 살인 사건 등은, 과연 이 시대가 말세지말임을 실감케 하는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극도로 생명이 경시되고 있는 잔인하고 무서운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살인 사건을 대할 때마다 느꼈던 것은 비록 도적질을 하고, 강도짓을 하고, 또 다투고 싸울지라도, 제발 죽이는 짓만은 하지 말았으면 하는 안타까운 소망을 품어 본 적이 많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이 무색해진 오늘날 이 계명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소년의 동상을 하나 만들어 세웠습니다. 그리고 밝은 전구를 밑바닥에 설치하여 비취게 했더니, 너무 바보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전구의 위치를 바꾸어 위에서 비취게 했더니, 천사의 얼굴같이 보였다고 합니다. 이와 꼭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우리의 낮고 좁은 소견으로 보면, 하나의 동물처럼 가치 없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에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눈으로 인생을 내려다보십니다. 그가 혹 아무리 가난하고, 못생기고, 병약하고, 수십억 인구 중 한 사람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천하보다 귀중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비록 문장은 짧지만 가장 강력한 계명인 것입니다. 이 사회는 무신론자나, 우상 숭배자나, 주일을 범하는 자나, 불효하는 자를 용서해 줍니다. 그러나 타인의 생명을 고의적으로 빼앗을 경우에는, 온 세상이 이것을 가장 큰 죄로 취급합니다. 창 9:6에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살인은 항상 최악의 죄가 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I. 이 계명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들
극단적 생명 경외주의자들은 동물을 죽이는 것도 살인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유명한 슈바이처 박사도 이러한 입장을 취했고, 불교에서도 살생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욕을 할 때도 혹시 눈에 띠지 않는 벌레가 다칠까봐 빗자루로 쓸고 목욕을 했고, 비가 올 때에는 걷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혹시 벌레들이 밟혀 죽을까 해서였습니다. 이런 사상은 원래 힌두교에서 시작이 되었고, 불교를 통하여 동양의 전체적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에게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과 함께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창 9:3에 보면 “산 동물은 너희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지상에 계실 때 유월절 양을 잡수셨고, 친히 물고기와 함께 조반을 준비하여 시장한 제자들로 하여금 먹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동물의 살생은 이 계명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경우라 해도 어떤 때는 살인죄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 있으니,
1)방어적 전쟁은 살인이 아니다
기독교회는 역사적으로 전쟁이나 폭력을 언제나 반대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20장을 보면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혹은 하나님이 없는 무신의 세력들을 멸하기 위한 싸움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싸움에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며....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세례 요한은 군병들이 찾아와 교훈을 요청했을 때, 더 이상 싸우지 말라, 징집을 그만 두라, 군복을 벗어버리라 명하지 않고, 대신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한 군대의 백부장이 주님께 나왔을 때도 주님은 그의 군인 신분을 비난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의 큰 믿음을 칭송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공산당이 우리나라를 공격해 온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떳떳한 마음으로 전쟁에 나아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증인 같은 사람들은 입영을 거부하기도 하고, 집총을 거부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잘못된 교리인 것입니다.
2)정당방위는 살인이 아니다
출 22:2에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라고 했습니다. 만일 도적이 우리의 재산을 강탈하기 위해서 침입했을 때 정당방위의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도적을 발견하는 대로 죽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만일 강도가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해하려고 할 때, 부득이한 형편에서의 정당방위는 살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정당한 재판에 의한 사형은 살인이 아니다
재판관이 사형을 언도하였을 경우 그것은 범죄자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살인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II. 살인의 성경적 의미
1. 직접 살인
1)타살-
타인에 대한 살인은 가장 극악무도한 범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살인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가장 무서운 도전입니다. 이 살인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마귀의 일입니다.
요 8:44에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자요”라고 마귀를 살인자로 규정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한 부패가 후손에게 유전되어, 가인에 의해 최초의 살인이 자행되었습니다. 가인처럼 직접 자기 손으로 동생을 죽인 것이나, 공범이나, 살인을 청탁한 자, 빌라도처럼 악한 살인에 동의한 것도 모두 살인죄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생명을 죽이지만 사실 살인은 먼저 자신을 죽이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살인 수법이 잔인하기로 유명한 1979년 종로구 금당 골동품상 살해범 박철웅의 ‘내 목에 밧줄이 놓이기 전에’라는 옥중 수기를 보면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남을 죽여야 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살인을 하고 난 후에 비로소 나는 남을 죽인 것이 아니고 내 자신을 죽인 것이라는 걸 뼈아프게 느껴야만 했습니다. 살인 후에 나에게 성난 파도처럼 일시에 덮쳐 온 죄의식과 공포와 두려움은 죽음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나는 사전에 이런 것을 예측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내 의지로 견디어 낼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죄의식에서 오는 공포와 두려움을 나는 무엇으로 달랠 수도 피할 수도 이겨낼 수도 없었습니다.”라고 뼈를 깎는 듯한 후회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2)자살-
1978년 미국의 ‘인민사원’이라는 이단 집단에서, 교주의 사주에 의해서 900여명이 집단 자살을 했던 비극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사울 왕과, 아히도밸, 시므리, 그리고 가룟 유다가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어 버리고 자살한 사람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많은 자살자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혹은 신병을 비관하여, 혹은 생활고를 비관하여, 또는 실연을 비관하여, 자신의 목숨을 끊는가 하면, 철없고 죄 없는 어린 자식들의 목숨까지 함부로 끊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살은 오죽하면 자기 목숨을 끊었을까 하여 동정을 받을 만한 일이 아니고, 용서받지 못할 크나 큰 범죄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살은 다시 회개할 수도 없는 무서운 죄악인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성도 여러분!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아무리 가난이나 질병으로 고통을 당해도, 아무리 억울하고 화나는 일이 있어도, 절대로 자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3)태아 살해-
불법적인 낙태, 소파 수술은 역시 크나 큰 범죄 행위입니다, 단순히 원하지 않았던 임신이라 하여, 또는 자녀수를 조절하기 위하여, 임산부와 태아가 다 건강한대도 함부로 하는 낙태 행위는 분명한 범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에게 결코 죄 없다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죄는 은밀하게 행하여지나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2. 간접 살인
1)유해 식품-
돈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이나 건강은 전혀 상관치 아니하고 갖가지 유해 식품을 만들어 파는데, 이것은 간접적인 살인죄가 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2)음주운전-
술 취한 운전사의 교통사고는 분명히 살인죄에 해당되는 중대한 범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음주 운전을 한 사람은 단 한 번만 적발되어도, 평생 운전면허를 해주지 말았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음주운전으로 인하여 자기 한 사람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일으키면 무고한 사람이 죽고, 그리하여 순식간에 가정의 행복이 파괴되고, 일생 동안 어두운 그늘에서 살게 되는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3)방탕한 생활-
하고 불순종한 생활로 말미암아, 부모님이나 배우자가 병이 들게 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간접 살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살인하는 마음
우리는 사람을 사살하지 않고서도 살인자가 될 수 있으며 피투성이 살인마처럼 심판대 앞에 설 수도 있습니다.
마 5:21-22에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구원 여부를 알고 싶어 합니다.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요일 3:15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에게 영생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III. 영혼 살해
1)이것은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지도 않고 교회에 데려가지도 않았기에, 결국은 언젠가 지옥에서 서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를 향하여 “우리가 여기 있게 된 것은 당신네들의 불신 생활이 우리의 영혼을 죽였기 때문”이라는 비난을 퍼붓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의 교회 출석 문제에 대하여 등한히 하는 부모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2)이것은 학교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청소년들이 불신 선생님과 불경건한 교육의 영향으로 인하여, 영원히 하나님과 등지게 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3)이것은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 목사는 성경을 무시하고, 동정녀 탄생을 부정하며, 천국이니, 지옥이니, 심판이니 하는 말들을 비웃습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고 그의 설교를 듣는 자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올 수 없게 되고, 결국은 탕자가 되며 그들의 영혼은 살해되고 맙니다.
4)신자답지 못한 우리의 생활 때문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거 예수 믿고 싶은데, 아무개 때문에 믿기 싫다’ 이런 이야기를 참 많이 듣습니다. 형제를 실족케 하고, 전도의 문을 가로막고, 그리해서 어떤 사람이 주님과 교회를 아주 떠나게 되었다면, 이것은 영혼에 대한 살해 행위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IV. 최대의 살인
이 살인은 2천년 전에 일어났습니다. 그 금요일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해되었습니다. ♪주님 십자가 못 박히실 때, 그 때 그곳에 간 일 있느뇨. 오 그 생각 떠오를 때 이 몸 떨려오네. 그때 그곳에 간 일 있느뇨?♪ 여러분은 말할 것입니다. “나는 거기 없었습니다. 그때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걸요.” 그러나 여러분과 저는 바로 거기 있었습니다. 우리의 죄가 아니었더라면 그 십자가는 결코 세워질 리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죄가 주님의 몸에 채찍질을 했고, 주님의 손과 발에 못을 박았고,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살해했고,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을 때 흘리게 했던 그 피가 우리 죄를 속하여 주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살인죄는 끔찍하고 실로 무서운 죄악입니다. 누가 이러한 살인죄를 짓고 싶어 살인을 하겠습니까? 순간적인 잘못된 생각에서 살인을 하게 되고, 불의한 생활, 탐욕스런 생활을 하다가 살인까지 하게 됩니다.
사람을 죽이는 데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분노입니다. 분노는 살인의 첫걸음입니다.
창 49:6에 보면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라고 했습니다. 분노는 사람을 죽입니다. 살인자를 분석한 심리학자들은 말하기를 “그 사람은 살인할 당시 이미 분노로 자기 정신을 잃었을 때였다.”고 진단합니다. 인간이 분에 복받치면 사람 죽이는 것쯤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분노는 가정을 파괴시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러한 격정적인 것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화를 내버리는 것, 이것이 나를 주장할 때는 이미 살인의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 말합니다.
“나는 화를 잘 내긴 하지만 뒤끝이 없다!” 우리는 한 번 욱하고 화를 냈고 화를 낸 나는 뒤끝이 없지만, 그 뒤끝은 이미 당해버린 사람의 마음속에 계속 머물러 있습니다. 나는 편안합니다. 잊어버렸으니까요. 그러나 이미 당한 사람은 깊은 가슴앓이를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화내는 것 을 조절해야 합니다. 분노는 살인의 첫걸음입니다. 분노는 살인의 오십보백보입니다. 동기에 있어서는 꼭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이 분노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분을 잘 냈던 인물이 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 이 두 형제는 분노를 잘 냈습니다. 그래서 별명이 우뢰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우뢰의 아들들이란 말은 악을 잘 쓰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들이 육신으로는 화를 잘 냈지만, 그의 삶이 성령 충만을 받을 때, 야고보는 가장 어려운 첫 순교의 제물로 영광스럽게 하나님께 드려졌고, 요한은 사랑의 사도로 바뀌어서 백세가 되었을 때까지 살아 강단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소아시아 지방에서 가눌 수 없을 만큼 노쇠한 몸으로 지탱하기조차도 어려웠지만, 강단에 세워만 주면 입을 열어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 이 한 마디 말씀으로 성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저들의 마음속에 사랑 없음을 회개케 했을 뿐만 아니라, 사랑의 사도로서 요한 1서를, 그 사랑 장을 쓴 아름다운 신앙 인격으로 그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고 죽이는 것을 마땅히 여겼던 사울이, 성령의 능력에 붙잡힐 때 그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쓸 수 있는 인격으로 바뀌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바뀔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은 시기와 질투, 이것이 사람을 죽이는 원흉입니다. 가인은 시기 끝에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시기해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다음은 증오입니다. 증오는 분노, 시기와 더불어 살인하게 하는 원흉이고 이 셋은 그야말로 삼총사입니다. 증오와 미움이 점점 커지면 마침내 피를 부르고야 끝을 냅니다. 이 미움이 계속 자라서 급기야는 피를 보게 되고 그래야 끝이 납니다.
“살인하지 말찌니라.”
타살, 자살, 태아 살해 등은 모두 살인죄에 해당되는 것이니, 우리는 이 무서운 죄를 범치 않도록 하십시다. 특별히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분노와 시기와 미움을 극복하도록 하십시다. 신자답지 못한 생활로 전도의 문을 가로막아서, 영혼을 살해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십시다. 이미 6계명에 해당되는 죄를 범했습니까? 지은 죄를 뼈저리게 참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용서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평생에 “살인하지 말찌니라.”는 계명을 범하는 일이 없는 복된 생애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