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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29일부터 2013년 4월 7일까지 KBS 2TV에서 방영한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며 해피선데이라는 전체 프로그램의 한 코너였던 『남자의 자격(부제:죽기 전에 해야 할 101가지, 男子의 資格)』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101가지 특별한 미션 정해서 그 미션을 성취하는 것을 취지로 프로그램을 계속 만들었지만 시청률 저조와 소재 고갈로 인해 원래 계획했던 미션보다 4가지가 부족한 97가지 미션만 달성한 후 프로그램이 폐지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진짜 이런 것이 과연 ‘남자의 자격인가’라는 생각을 해보았지면 그래도 미션 하나하나를 이룰 때마다 뭔가 의미있는 일을 완수했구나라는 느낌을 주었던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 살펴본 마태복음 11장 앞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을 알아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그 세례 요한을 보면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비교하며 참 그리스도인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세례 요한의 위대함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을 통해 가르쳐주시는 하나님 백성의 위대함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첫째로 세례 요한보다 큰 자입니다.
마태복음 11장 7절입니다.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11장 7절에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라고 질문하십니다. 이것은 광야에 나간 유대인의 심정을 알고 계셨기에 가능했던 질문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는 예수의 질문은 “요한을 보기 위해 광야에 갔느냐? 갈대를 보기 위해 광야에 갔느냐?”라는 뜻입니다. ‘흔들리는 갈대’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은 헤롯을 의미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라는 문구와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라는 말에는 중요한 내용이 숨겨 있습니다. “광야”는 요단강 옆 지역을 의미하는데 그 요단강 옆에는 “갈대”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요한을 참수시켜 죽인 헤롯 안티파스가 주전 19년에 디베랴를 건설하고 이를 기념하는 동전에 갈대를 새겨넣었기 때문에 이 갈대는 헤롯 안티파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람들은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갈대는 길이가 길고 속이 빈 풀이었기에 바람에 쉽게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부드러운 옷”이라는 단어를 통해 낙타털과 가죽 허리띠를 착용했던 세례요한과 대조하면서 권력자의 화려한 옷, 옷감이 부드러운 옷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래서 헤롯 안티파스의 옷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부드러운 옷을 입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안티파스에 비교하면서 절제와 고난의 삶 속에서도 절대로 꺾이지 않는 선지자인 세례요한을 나타내는 의미가 숨겨 있습니다. 또한 이 질문은 인간 존재론에 대한 예수님의 문제제기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고민하며 존재론을 해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아줄 해결책을 가지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선지자라고 말씀하시며 오히려 이전 선지자들보다 더 큰 이라며 칭찬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9절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유대인들은 누구를 보러 갔습니까? 선지자를 보러 광야에 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보면 너무 슬픈 유대인의 현실을 보게 됩니다. 유대사회에 큰 성전이 있었습니다. 으리으리하고 엄청난 성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런 큰 성전을 놔두고 너희가 광야에 나왔느냐?”며 서글픈 현실을 책망하십니다. 수 많은 종교지도자들, 으리으리한 성전이 있으면서도 제대로 된 신앙이 서 있지 않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세례요한을 만나기 위해 광야로 나왔다는 것은 그 만큼 하나님의 역사를 느낄 수 없었던 유대사회의 신앙상태를 낱낱이 드러냅니다. 종교지도자라고 일컬어지는 바리새인, 사두개인은 세속에 찌들어 자기들 배만 채우며 자기 잘난 채하며 내로남불식으로 종교적인 책망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자기들 맘대로 맞춘 종교적 기준을 정해놓고 사람들을 모두 죄인으로 책망하며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돈을 내라고 죄를 해결하기 위한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값비싼 제물을 성전에 바치라고 말했습니다. 심지어는 소, 양, 염소, 비둘기같은 제물을 성전과 결탁하여 성전안에서 파는 것만 제물로 인정하는 행위를 하면서 각종 부당한 커미션을 받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성전을 찾지 않고 선지자를 찾기 위해 광야로 나갔고 세례요한을 선지자로 생각하며 따르고 있었습니다.
방금 읽은 9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과거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칭찬하신 이유는 뭘까요? 지금까지 그 어떤 선지자도 가르쳐주지 못한 것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 이전의 구약 선지자들은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실 것은 분명히 가르쳐줬습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가 바로 내 뒤에 오실 이 예수님이시다”라고 명확하게 성도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신 동시대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선지자보다 더 큰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1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1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천국에 가게 될 그리스도인들,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요한보다 크다는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은 작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속한 시대를 비교한 것이지 세례 요한이 작은 자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이 속한 구약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가시적으로 도래할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시대 차이를 비교한 것이지 세례 요한이라는 인물, 사람을 작다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나타내는 역할을 감당했기에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인물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옛 시대와 새 시대의 차이를 강조합니다. 사람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고 시대의 비교, 혹은 시대의 구별을 말씀하신 겁니다. 분명 요한은 새로운 시대를 연 인물이고 선지자, 선구자였습니다. 예수의 사역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하는 새로운 현실은 너무 영광스럽기 때문에 지나간 시대의 가장 위대한 자도 새로운 나라의 질서에 속한 가장 작은 자보다 하위에 속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비교하지 않았다는 게 중요합니다. 흙의 속한 형상을 입고서 천국을 선포한 구약 시대의 세례 요한보다 천국에 입성하여 부활의 몸을 입은 성도의 영광이 더 크고 가시적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성도 여러분, 구원 이전의 사람과 구원 이후의 사람은 존재 자체가 다른 사람이며 세례요한과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새로운 영광을 누리며 살아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어떤 영적 은사나 어떤 세상적 권력으로 우리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완전히 변화된 영혼이 된 것으로 우리의 가치가 달라진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이 바로 특별한 사람, 큰 사람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특별함으로 은혜받은 것을 감사하며 그 특별함을 누리며 담대한 인생, 은혜의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둘째로 천국을 바라보며 붙드는 자입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방금 읽은 마태복음 11장 12절은 성경의 대표적 난해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긍정적으로 해석 혹은 부정적 해석 모두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침노를 당하다”라는 뜻으로 쓰인 헬라어 단어는 βιάζεται(비아제타이)인데 이 단어가 중간태로 해석하면 ‘힘차게 온다’(come forcefully)라는 의미가 되고 수동태로 해석하면 ‘폭행을 당하다’(suffer violence)라는 뜻이 됩니다. 또한 “빼앗느니라”라고 해석된 헬라어 ἁρπάζουσιν αὐτήν(하르파주신 아우텐)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으로 쓰이면 ‘힘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게 되고 부정적으로 쓰이면 ‘폭력적인 자들이 그것을 강탈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말이 됩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βιάζεται(비아제타이)는 중간태로, ἁρπάζουσιν αὐτήν(하르파주신 아우텐)은 긍정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경에서도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천국이 폭행을 당한다”는 말은 요한이 헤롯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듯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듯 천국이 폭력적인 저항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강제로 빼앗는 악한 자들은 폭력적인 원수들로서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그 문을 닫고자 하는 자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23장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1장의 말씀과 지금 읽은 마태복음 23장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복음에 대한 저항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항은 천국이 오고 있다는 것, 아니 이미 왔다고 하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증거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1장 12절에서 “빼앗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ἁρπάζω(하르파조)는 13장 19절에서 이 단어가 악한 자가 뿌려진 씨를 빼앗는다는 구절에서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 듯이 하나님 나라는 결코 부서지거나 적들이 침략할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천국이 침략당하고 빼앗길 수 있다고 해석한다면 이건 도대체 하나님 권위가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누가복음 16장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오늘 본문과 누가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는 말씀은 적들에 의해서 ‘침노’, 즉 ‘침략을 당하는 천국’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동서남북에서 몰려들어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즉 자격도 없는 자들이 오직 왕의 은총을 입어 천국을 빼앗듯이 돌진하는 모습이 바로 이 ‘침노’라는 단어에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침노하는 자’라는 말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결단을 촉구하는 다짐을 ‘침노하는 자’로 표현한 것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침노’라는 단어가 무력적으로 강하게 쳐들어오는 것을 뜻하지만 그럼에도 오히려 천국문을 열어주시고 얼마든지 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말 놀라운 은혜, 어매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입니다.
로마서 10장 13절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히브리서 4장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구원의 문, 하나님앞에 나아가도록 우리는 그 문에 들어가기를 소망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주시려고 우리에게 은혜의 단비를 부어주실 때 여러분, 왜 거부합니까? 우리에게 어떤 힘든 일이 생기고 어떤 핍박이나 박해, 고난이 찾아와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그 구속의 은혜에 감격하며 하늘나라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셋째로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지난 주 살펴보았던 말씀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지난 주 말씀에서 보았듯이 헤롯에 의해 감옥에 갇혔던 세례요한은 그의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서 “오실 이가 당신이 맞습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며 자신이 외친 메시야, 자신이 기대하고 기다렸던 그리스도가 예수님이신지를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답을 주셨습니다. 지금 정황상 세례 요한은 곧 죽을 운명임을 직감했습니다. 이런 현실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메시야를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내가 계획하고 내가 목표로 했던 일을 이루지 못하고 뭔가 일이 종료될 때 이건 하나님 뜻이 완성되지 못한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역사속에 하나님의 뜻의 성취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완성되지 못한 것 같고 내가 생각하기에 불완전한 결과인 것 같지만 세상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다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일들이 어떤 결과가 나오든 사탄마귀가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한다고 해도 결국 사탄마귀보다 하나님께서 더 위대하시고 하나님께서 사탄마귀의 계략을 다 파하시고 승리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세례 요한 또한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놀라운 선지자였음에도 믿음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만한 자가 없다”라며 극찬하셨습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죽음의 위기, 사역의 종착시점에서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7절입니다.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예수님께서 “너희가 광야에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더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신앙적 상황, 요한의 믿음과 아울러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의 기대가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며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는 믿음을 책망하십니다. 요한의 믿음, 이스라엘의 기대가 흔들리고 요한의 믿음이 흔들릴 때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주시면서 심지를 굳건히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갈대처럼 흔들리는 신앙이 아닌 반석처럼 든든한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와 같아야 하고 샘이 깊은 물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예전부터 우리나라 고전시가중 용비어천가 2장 부분을 해석하면서 저는 그것을 조선왕조의 위대함으로 해석하지 않고 오히려 그 교훈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마치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기억하십니까? 그래서 ‘뿌리가 깊은 나무는 큰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꽃이 피고 열매 맺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안 멈추고 시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어 바다에 이르게 된다’라는 그 싯구가 오히려 우리 믿음이 어떠해야 할 지를 가르쳐준다고 생각합니다.
이사야 26장 2~4절을 보시겠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 /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온전한 믿음을 지키는 사람, 마음의 중심을 잘 잡고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이 참 신앙인이라는 사실, 참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담대한 마음으로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6,7절을 보시겠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사도 야고보는 이 말씀을 통해 요동하는 바다같은 사람, 흔들리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실 복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교훈합니다. 믿음이란 뚝심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뚝심’이란 잘 버티어 내거나 그 일에 대담함을 칭합니다. 묵묵하게 굳건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원래 ‘믿는다’는 말의 의미에 “굳게 작정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번 믿기로 작정하였으면 죽을 때까지 믿어야 합니다. 사실 인간 내면은 지, 정, 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성, 감정, 의지로 구성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 우리를 가장 크게 흔들어놓는 것이 감정입니다. 감정은 평상시에는 잔잔하다가도 바람이 불거나 배가 지나가거나 외부 충격을 가하면 파도가 일어나서 출렁거리는 바닷물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을 경험할 때, 질병 증세가 나타날 때, 온갖 일을 실패할 때, 각종 인간적 어려움을 접할 때 우리 감정이 흔들립니다. 마음에 기반을 둔 믿음도 함께 흔들립니다. 우리는 환경과 상황에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지난 몇 년간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사회가 많이 변했고 교회 사역도 엄청 위축되었습니다. 이 코로나 상황이 정말 우리를 많이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의 믿음도 엄청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우리들에게만 있는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 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외면하며 떠났습니다. 놀라운 기적을 보고도 다시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로 5천 명을 먹이시고 열 두 광주리를 남기는 놀라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을 경험했던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핍박과 고난당할 것과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될 것을 말씀하시니 예수님을 외면하며 떠나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권력을 주시고 민족해방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영혼구원,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가르치시며 천국을 가르치시니 그들은 그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후에도 예수님을 떠나 세상 속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상황을 보시면서 “너희도 가려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요한복음 6장 68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예수님께 있는데 우리가 누구를 찾아가냐?”라고 반문합니다. 온전한 말씀, 영생의 진리이신 예수님만 의지하면 우리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이나 의지, 혹은 자신의 지성에 믿음의 근거를 두면 우리의 신앙은 흔들립니다. 신앙의 기초, 기반은 주님의 말씀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 말씀만 의지해야 굳건한 믿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확실한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의지할 때 심지가 견고해지고 그 견고한 심지로 승리하게 되는 신앙이 될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만이 우리를 참 신앙인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깨닫고 말씀에 근거한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이 새 언약의 시대에, 새로운 존재가 되고, 새로운 사명을 얻은 것에 대해서 감사함으로 기뻐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불가능에 도전해서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나가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이기게 하십니다. 그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존재가치를 제대로 깨닫고 내가 어떤 가치가 있는 지 그 가치있는 신앙으로 내가 제대로 하나님 나라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만 전적으로 신뢰하는 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갈 때 이 땅에서도 천국 삶을 누리며 주님 다시 오실 그 날, 주님 다시 뵐 그 날에 천국에서 함께 살아가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