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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 피한 안동 만휴정
안동은 조선시대 목조건축의 보고다. 한옥의 참 멋을 안동만큼 풍부하게 보여주는 곳은 없다. 경상북도의 새 도청 유치를 위해 경주시와 안동시가 치열하게 경쟁할 때 경주시가 내세운 것 중 하나가 문화재가 많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안동시는 우리도 적지 않다며 누가 많은지 세어보자고 했다. 국가지정문화재는 경주가 단연 많았지만 지방지정문화재를 포함하면 안동이 3점 더 많았다.
현재도 경주 320점, 안동 323점이다.
안동에 이처럼 문화재가 많은 것은 전통 있는 가문마다 한 마을에 종택宗宅.정자亭子·재실齋室·서원書院 등을 경쟁적으로 갖추었고, 그 후손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목조건축들을 보존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벼슬하던 선비가 낙향하여 한 마을의 입향조大祖가 되면 그 후손들이 재실과 서원을 세우면서 가문을 일으키는 과정은 길안면의 묵계서원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
안동 시내에서 길안천을 따라 영천으로 내려가는 35번 국도는 요즘 세상에선 보기 드문 호젓한 옛길이다.
더 먼 옛날에는 내륙 속 오지여서 묵계리에 있던 역 이름이 거무역 居無驛, 즉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다. 이 궁벽한 산골의 입향조는 안동김씨 보백당白堂 김계행金係行(1431~1521) 이다.
보백당은 나이 50세에 등제하여 삼사三司의 청직淸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점필재 김종직과 교분이 깊었던 탓에 무오사화 때 심한 고초를 겪었고, 나이 70세 때 또 구금됐다가 5개월 만에 풀려나자 이곳 묵계리로 내려와 우거해버렸다.
이 집이 묵계종택이다.
보백당은 앞산 깊은 계곡에 아슬아슬한 외나무다리를 걸쳐놓고 만휴정晩休亭이라는 환상적인 정자를 짓고는 이름 그대로 만년의 휴식처로 삼아 나이 87세까지 여기서 지냈다. 그는 “우리 집엔 보물이 없다.
있다면 청렴이 있을 뿐이다.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라는 유훈을 남겼다. 보백당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 묵계서원이다.
이리하여 사람도 살지 않던 묵계리가 오늘날에는 보백당의 종택, 정자, 서원 모두가 문화재로 지정된 비경의 답사처가 되었다.
안동은 이런 마을이 수십 곳이나 되는 살아 있는 한옥박물관이자 전시장이다.
만휴정 조선 1500년 ·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집 · 경북 안동 묵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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