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믿음은?(롬3:21-28, 약2:14-26)
갈등
1. 사람들이 살아온 환경과 신학을 보면 반복되어온 것들이 있습니다. 바울과 마틴 루터는 두 시대를 가로질러 신앙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바울이 살던 1세기와 루터가 싸웠던 16세기, 무려 1500년의 시차를 두고도 이 두 사람은 마치 같은 풍랑에 휘말린 배와 같았습니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불꽃 같은 열정으로 각자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바울은 유대교의 가장 엄격한 바리새인으로, 루터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경건한 사제로서 모두 탁월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들의 영혼 속엔 지식과 열정의 불꽃이 타올랐지만, 결국 그 불은 새로운 빛에 의해 꺼져야 했습니다. 그 빛은 바울에게는 부활하신 예수님이셨고, 루터에게는 성경 속 진리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만난 찬란한 빛-그리스도의 빛은 그의 눈을 감기게 했지만, 영혼의 눈을 활짝 열어주었습니다. 이후 아라비아 광야에서 그는 새롭게 열린 하늘을 바라보며 구약성경을 다시 읽고 복음을 정리했습니다. 루터는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서재 한 구석에서 롬1:17을 읽을 때, 마치 깊은 숲속에 흩어진 햇살이 단번에 쏟아지는 듯한 경험을 했습니다. 이 한 구절,“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은 그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돌려놓았습니다. 이 말씀은 합2:4을 바울이 인용한 것입니다. 바울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발견한 복음을, 1500년 뒤에 루터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발견했어요.
2. 사도 바울과 루터가 발견한 복음은 당시 기존 체제와 충돌했습니다. 유대교의 법은 거대한 돌벽과 같았고, 사람들은 그 벽을 넘어 의로움에 도달하려 애썼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은 마치 사막에서 물을 찾으려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끝없이 규정을 따르고 의무를 지켜도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이런 약점을 발견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롬3: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바울 자신도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과거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이제는 복음이라는 생명수로 그 목마름을 해결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루터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발견한 그는 마치 억눌렸던 감옥 문이 활짝 열리는 것과 같았고, 그 문을 열고 새로운 세상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과 비교하여 하나님의 의에 대해 말했어요. 롬3:21-22절,“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이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유대교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얻는다고 여겼습니다.(사람이 자력으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하나님의 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바울과 루터가 모두‘하나님의 의’를 말한 의미가 무엇일까요?
갈등 심화
3. 야고보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약2: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믿음이 마치 깨어진 나침반처럼 방향을 잃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에 불과하다고 경고합니다. 배가 바다 위에 떠 있되 돛을 내리지 않으면 어떻게 항해하겠습니까? 야고보는 한 가지 예를 들었어요. 15-16절,“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야고보는 이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고 말했습니다. 야고보는 계속해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말했어요. 18-19절,“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고 믿고 떠느니라.”지식적 동의와 믿음은 귀신도 한다. 하지만 귀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대적한다는 말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추구하는 자는 허탄한 사람이라고도 말합니다. 허탄하다는 것은 어리석다, 공허하다는 말이고 실질적인 내용이 없는 사람을 말해요.
4.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잘 정리해주었습니다. 22절,“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믿는 자는 행함이 따르기 마련이고, 그의 행함으로 온전한 믿음이 된다는 말입니다. 로마서와 차별이 되는 야고보의 독특한 믿음 이해입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믿음과 행함이 함께 가야 함을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를 경험하였다.(창15:6)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나의 벗-친구라고 부르시기도 했다.(사41:8) 야고보는 24절,“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선언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로 여김을 받았지만, 그 믿음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순종의 행함을 통해 온전해졌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그 자체로 움직이고,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은 마치 겨울 속에서 움트는 봄의 새싹과 같습니다. 아무리 땅이 얼어붙어 있어도 새싹은 결국 뚫고 나옵니다. 야고보는 기생 라합의 경우도 믿음과 더불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라고 했어요. 26절,“영혼 없는 믿음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야고보의 복음과 로마서의 바울의 복음이 다른 것 같습니다. 오늘 종교개혁 507주년을 맞아, 오직 믿음(Sola Fide)을 따르는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해야 할까요?
실마리
5. 우리는 성경이 각각 다른 시대의 필요에 따라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 시대와 야고보 시대, 그리고 루터 시대가 모두 달랐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시대도 다릅니다. 1500년 뒤 루터의 상황이 달랐고요, 오늘 우리의 상황도 다릅니다. 우리는 이 시간적-공간적 차이를 염두에 두고 접근을 해야 성경과 신학 이해를 올바로 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루터는 각기 다른 시대에 살았지만, 상황이 비슷했습니다. 유대교가 할례를 받고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성 어거스틴 이후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 신학도 변질되어 반펠라기우스주의로 흘러갔습니다. 믿음으로 말이암은 구원이 아니고 행위(공로)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입니다.
바울과 루터는 모두 자기가 몸담고 있던 공동체에 대항하였습니다. 전에는 누구보다도 유대교와 로마 카톨릭교회의 탁월한 인물들이었지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을 통해서 복음을 발견한 이후는 전혀 달라졌어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이신칭의 사상을 따랐습니다. 두 사람 모두‘의’를‘하나님의 의’라고 표현했습니다. 의는 사람이 스스로(노력으로) 얻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칭의)입니다. 전혀 다른 의의 개념입니다. 바울의 칭의 개념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는 오직 믿음(이신칭의)을 강조하였습니다.
6. 바울이 처음에 복음을 전할 때는 이렇게 말했지만, 이후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마땅히 행할 도리를 말했습니다. 빌2:12,“너희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며 구원받은 자들이 긴장감을 풀지 말고 살 것을 권했어요. 엡4:13,“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라.”예수님과 같이 되라.(인격과 사역에서 모두) 고후5:9-10,“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 있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구원받은 자가 삶의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바울과 야고보가 싸웠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을 시작한다고, 야고보서의 경우는 그 구원은 행함으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미 믿음으로 구원받은(이신칭의) 성도들이 믿는 자-하나님의 나라 시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함을 설교했습니다. 그것을 야고보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믿는 자는 행함으로 그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믿음이 없는 가짜 믿음, 무늬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의 초기 서신이 구원의 시작을 말했다면, 야고보는 구원 이후 열매를 강조했습니다.
7. 마틴 루터 이야기를 해봅니다. 루터는 평생 로마 카톨릭교회 신학과 싸웠어요. 그는 전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교황의 여러 위협에도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프리드리히 제후의 보호도 있었고) 그렇게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오직 믿음(Sola Fide)을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야고보와 같이 행함으로 온전한 믿음을 말할 겨를(여유)이(가) 없었어요. 루터는 전투적 상황에서 급기야,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루터의 큰 실언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상황과 야고보서의 상황이 전혀 달랐는데, 성서해석의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루터의 오직 믿음을 취하지만, 500년 전 상황과 지금 상황은 전혀 달라요. 16세기 루터는 영적 암흑 속에서“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횃불을 높이 들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그 믿음을 일상의 작은 행동들 속에서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이 아니라, 야고보와 같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르치고 따라야 합니다. 이때 빛을 발하는 교회-소금이 되는 교회가 됩니다. 이렇게 할 때 오늘의 부패와 침체를 면하고 다시 부흥의 시대를 맞이할 것입니다.
복음 제시
8. 사도 바울을 말합니다. 롬3:23-24,“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우리 모두는 죄의 늪에 빠진 채 허우적거렸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건져 올리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마치 어두운 밤하늘에 떠오른 밝은 별과 같습니다. 길을 잃은 우리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단지 머리로 동의하는 지식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새벽녘에 부는 바람처럼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나뭇가지와 풀잎을 흔들며 그 존재를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작은 행위와 결정이 그 믿음의 흔적이 됩니다.
25-26절,“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간과하다(paresis)는 말은 유예하다, 보류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희생제물이 되시기 전에 지은 죄(구약시대 성도들의 죄)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의 구속이 완성되기까지 하나님께서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의 죄를 그냥 지나치신 것처럼 보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그 죄를 완전히 해결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 은혜를 받지만, 그 믿음이 우리 삶에서 빛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기대
9.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 507주년과 우리 교회 창립 8주년을 맞이합니다. 이 기념일이 축제가 아니라 반성의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마치 어둠이 짙게 깔린 밤처럼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야고보의 말처럼 행함 있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세상 속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 다시 교회의 부흥을 맞이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은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내가 행함으로 드러내야 할 믿음의 영역은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는 단순히 성장의 숫자를 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고 누리고 전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이름을 빛내리 교회로 정하게 하셨어요.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에 비추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함께 손을 맞잡고 야고보의 믿음을 실천해 나갈 때, 우리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15주년, 20주년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