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빌드 업!
김열규 교수, 열정적 책 읽기 「독서」
어떤 것이 포개어 여러 번 쌓는 것을 누적이라고 한다. 누적은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모두 가질 수 있다. 힘의 총합이랄까. 내가 회피했던 만큼 내가 누려야 할 것들이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단순히 쌓기(accumulate)만 한다고 좋은 것은 아닐 듯 싶다. 실력과 관련해서는 빌드 업(build up)이 필요하다. 최근에 읽은 헤르만 헤세에 받은 감동은 김열규 교수로 이어지면서 지식의 빌드 업을 선명하게 인식시켰다.
요즘은 꽤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향해 욕심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욕심 중에 책읽기가 자리잡고 있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어떤 방향을 잡아야 한다는 것과 깊이 있는 바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삶의 문제와 몸에 생긴 이상들로 인해 답답한 한 주를 보냈지만 틈틈이 못 다 읽은 김열규 교수의 「도서」는 삶과 궤를 같이하면서 나에게 말을 걸어 온다.
1. 비빌 언덕
고민이 있어 새벽에 잠을 설칠 때면 창 밖을 내다보면 생각에 잠긴다. 그렇게 한 동안 서 있다 보면 멈춘 공간 속에 삶이 움직이고 있다. 그렇다. 저 속에 또 다른 우주가 움직이고 있다. 각자의 삶이 단절된 공간 속에서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이제 곧 이사를 가야하는데 여러 가지 고민들이 많다. 아이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아빠, 밖은 추운데 집은 따뜻해요.” 그렇지. 추운 바람을 막고 발을 뻗을 수 있는 공간이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러나 이렇게 해맑은 아이에게 나의 고민을 알릴 이유가 전혀 없다.
인생을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것을 거부했던 저자는 네비게이터를 의지할 일말의 이유도 없었다. 방랑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모르는 길을 가는 것이 비로소 길다운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지를 깨치는 과정에서 읽기는 그에게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삶의 길잡이기도 했다. 할머니의 ‘이바구 데바구 강떼바구’에서 포에지의 눈을 떳다. 어머니의 제문에서는 한의 정서를 느꼈다. 그의 조모와 어머니는 헤르만 헤세가 누렸던 할아버지의 서재가 되어 소리로 구성된 말을 배우며 ‘보기 공부’의 든든한 비빌 언덕이 되었다.
2. 아니, 이렇게 재산을 늘렸구나
코로나가 극성을 부리다 잠시 잠잠해졌다. 사실 나라 밖은 난리가 여전하니 잠잠한 것도 아니다. 한국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몸에 이상이 생기면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병원을 가기도 두렵지만 이게 혹시하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몇 일을 아닌 척, 문제가 없는 척 가장 노릇을 하다가 몸에 탈이 생겼나 보다. 몸살을 겪으며 정신을 차리기가 어렵다.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와 증상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이사 갈 문제가 해결되었다. 감사한 일이다.
부동산에서 이런 저런 얘기들이 오고가다가 갑자기 문리가 트였다. 자기 자녀들을 위해서 집을 매입한다고 했는데 실제 수중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으로도 가능한 것을 알았다. 아 ... 이렇게 사는구나. 사역자가 돈에 눈이 밝아서 뭐하나 싶었는데 이렇게 바보같이 살아도 되나 싶었다. 가족들을 보니 더 그랬다. 지식이 쌓여서 지혜가 생길 텐데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는 언제나 숙제로 남는다.
그 사이 김열규 교수는 지식의 부를 쌓고 있었다. 문자를 알고 ‘유사시대’에 접어들었다. 단순히 보는 행위에서 깊이가 더해지면서 읽기가 되었다. 그에게 글 읽는 기쁨은 인생이었다. 소리 내면서, 외우면서 두 눈을 통해서 책을 탐독했다. 시대는 아팠으나 캠퍼스의 교정은 바깥 세상과 괴리가 있는 것처럼 풍자를 배우고 눈물을 배웠다. 시대는 암울해도 소년의 글읽기는 수준을 더해갔다. 이렇게 보니 나도 세상 속에서 고립됐기에 어쩌면 수준 이상의 묵상이 가능했던 것 아닐까.
3. 앉기가 힘든데 앉고 싶다.
큰 마음의 짐을 덜고 나니 몸이 고되다. 갑자기 꼬리뼈가 아파서 앉아있기가 힘들다. 야속하게도 나의 몸 상태와 상관없이 강의, 설교, 육아 등 모든 일들은 나만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가장 야속한 것은 책을 보지 못함이다. 너무 많은 지식이 있고 그 앞에서 나는 너무 초라하고. 따라잡겠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버렸다. 내가 갈 길을 찾기에도 버겁기 때문이다. 잠시의 여유가 사치스럽다.
조국은 해방을 맞았다. 그와 함께 청소년 김열규도 문학 읽기에 해방을 맞았다. 다양하게 누적된 독서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겠으나 무엇보다 부러운 것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디에 관심이 없는지를 발견한 일이다. 이미 대학에서 무엇을 공부할지를 정하다니. 더욱 부러운 것은 그를 도와주는 스승을 만난 것이다. 그런 도움은 더욱 자신을 읽기의 운명에 빠지게 했다. 뒤에서 지켜보는 내 입장에서는 여간 부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긴 하루에 비해서 일주일은 너무나 짧다. 하루에 충실했기에 스스로 격려하고 싶다. 인문서적들을 보는 나의 읽기는 ‘도대체 핵심이 뭐야!’ 였다. 김열규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아직 보는 행위에 머물러 있음이 아닐까. 요즘 글을 읽는 재미는 이렇다. 단순히 꾸미기 위해서 문장이 길어지지 않음을 느꼈다. 지식의 ‘콜라보레이션’ 이랄까, 프란스 요한슨의 ‘메디치 효과’ 랄까, 이것도 너무 거창하다면 지식의 ‘교차점’ 이 아닐까 싶다. 머릿속에 넘치는 지식들이 자연스럽게 넘쳐서 서로 엮이는 모습인 것 같다. 수식은 그런 것 아닐까. 사실 우리 정도의 수준도 보면 알 수 있다. 속 빈 화려함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그래서 빌드 업하고 싶다. 삶의 지혜도 지식을 통해서 얻어지듯 가르치는 소명을 받은 자로서 널려져 있는 지식들을 엮어서 필요한 영혼들에게 전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