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전쟁 중 대구에서 출생… 이름의 ‘근’자는 ‘조국’ 상징
⊙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갖은 고생… 5·16 후 청와대 입성
⊙ 가장 좋아한 소설 주인공은 《삼국지》 속 조자룡… 스스로 ‘첫사랑’이라 여겨
⊙ 교수 꿈꾸며 떠난 프랑스 유학, 어머니 죽음으로 인생 바뀌어
⊙ 스물두 살의 퍼스트레이디에 접근한 최태민… 불행의 시작
⊙ 아버지의 죽음과 측근들의 배신으로 시작된 18년의 암흑기
⊙ 박정희·김재규·전두환·노태우도 해결 못 한 최씨 일가의 마수(魔手)
⊙ 1997년 정계 데뷔 후 전승(全勝) 거둔 ‘선거의 여왕’
⊙ 최씨 일가, 대통령의 눈 귀 막아 불통(不通) 이미지, 결국 국민의 분노 사
⊙ 숱한 경고에도 최씨 일가 국정농단 방치한 미스터리
⊙ 통진당 해산·한미연합사 전작권 전환 무기 연기·국정교과서 등 종북 세력에 대한 최후의 방파제
박근혜 대통령의 직무가 12월 9일 정지됐다. 이날 국회 본회의에서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통과됐기 때문이다. 12월 3일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및 무소속 의원 171명이 공동 발의해 8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탄핵안은 9일 재적 의원 300명 가운데 299명이 투표에 참여해 찬성 234명, 반대 56명, 기권 2명, 무효 7명으로 가결 처리됐다.
박 대통령은 18년간의 은둔을 끝내고 1997년 정치를 시작한 이후 18년 만에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됐다. 그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에게 살해되면서 18년 만에 권좌에서 내려온 것과 공교롭게도 정확히 일치한다. 《월간조선》은 박근혜 대통령이 살아온 65년을 전기(傳奇) 형식으로 정리해 본다.
1. 탄생
박근혜 대통령은 1952년 2월 2일 대구시 수성구 삼덕동 5번지에서 출생했다. 전날 밤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산통(産痛)을 느꼈을 때 함께 살던 동생 육예수와 장모 이경령 여사는 집에 없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산파(産婆)를 부른 뒤 아이를 낳는 순간까지 아내의 손을 잡고 곁을 지켰다. 새벽에 박정희 대통령의 두 번째 딸(첫딸은 박재옥) 박근혜가 태어났다.
2. 이름
박근혜라는 이름은 박정희가 직접 지은 것이었다. 옥편을 뒤져 무궁화 근(槿)자를 넣었는데 ‘근’은 조국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딸의 성장 과정을 담아두려고 사진을 많이 찍었으며, 점심때에는 일부러 집에 들러 근혜를 목욕시켜 주기도 했다.
3. 배다른 언니 박재옥
박정희 대통령이 첫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첫딸 박재옥은 박근혜가 태어났을 때 비로소 아버지가 재혼했음을 알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고향인 경상북도 선산군 상모동에서 구미여중을 다닐 때였다. 박재옥은 집안 어른들로부터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로부터 오래전부터 ‘아버지에게는 다른 여자가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박재옥은 아버지에게 원망 섞인 편지를 많이 썼다.
〈아버지, 제게는 부모님이 모두 계시는데 저는 왜 이렇게 남의 집에 얹혀살아야 합니까. 사촌 오빠가 저까지 데리고 살아야 하니 얼마나 귀찮고 성가시겠어요. 저는 또 얼마나 미안한지 아세요? 오빠도 고생스럽고 저도 힘들고요.…〉
이런 편지를 받을 때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도 못 사는 것이니 열심히 살아라’라는 요지의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
4. 잦은 이사
어린 시절 박근혜 대통령은 이사를 자주 다녔다. 아버지가 서울시 중구 신당동에 처음 내 집을 마련한 것은 1956년 4월이다. 대구에서 태어난 박근혜 대통령은 첫돌을 광주광역시 동명동 셋방에서 맞았다. 1953년 여름에 서울 종로구 동숭동으로 올라왔지만, 1954년 10월 다시 광주광역시로 내려가 1955년 7월 박정희가 사단장이 되기 전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1962년 5월 서울 장충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관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박정희 의장과 가족.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육영수 여사, 박정희 의장,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
195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강원도 인제에 있는 5사단 사단장으로 옮겼을 때 서울에 남아 있던 가족은 가장 비참한 시절을 보냈다. 광주에서 서울로 이사할 때 박정희 대통령을 제외한 가족은 일단 옥천으로 갔고 박정희 대통령의 당번병인 박환영과 운전병 이타관은 이삿짐을 기차에 싣고 청량리역에 내렸다. 수화물 창고에 짐을 넣어두고 일주일이나 기다렸는데 아무 연락도 없었다.
당시 사단 헌병부장이 나서 노량진 역전에 부엌도 없는 문간방 두 개를 구해줬다. 솥을 걸 데도 없어 풍로로 겨우 음식을 만들어 먹을 정도의 곳이었다. 집이 좁아 들여놓지 못한 짐은 청량리 부근에 살던 김종필 당시 중령의 집 처마 밑에 갖다놓았다. 당번병과 운전병 두 사람이 판자와 거적을 가지고 부엌을 만든 뒤에야 옥천으로 연락해 육영수 여사와 가족들이 올라왔다.
육영수 여사의 어머니 이경령씨는 노량진 문간방 시절이 가장 비참했다고 회고했다
“방엔 불도 들이지 못하고 방바닥에서 물이 줄줄 나서…. 그때 군인들이 비옷으로 쓰던 장옷을 방바닥에 깔면 축축하게 누기가 차서 도무지 앉지도 눕지도 못하여 밤이나 낮이나 서성거리고, 밥이라고는 풍로에다가 해서 끼니라고 때우고, 그때 참말로 고생을 말없이 하고요, 손녀딸 근혜는 아파서 울고요….”
육영수 여사의 동생 육예수씨는 광주로 내려가기 전 서울 고사북동에 살 때를 비참하다고 기억했다.
“말이 장성 집이지 최하층 빈민생활이었습니다. 장작 마련할 돈도 없었어요. 그때 우리가 지내던 방은 ‘뼈가 얼던 방’이었습니다.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추위를 어떻게 견뎠는지…. 그때 그 시절은 평생 잊히지 않습니다.”
5. 억양
박근혜 대통령의 억양에서는 잦은 이사 때문인지 경상도 사투리보다 충청북도 옥천군 출신인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영향을 받아 충청도 사투리가 살짝 섞여 있다.
6. 5·16 전야(前夜)
박정희 대통령이 거사를 위해 신당동 집을 나서던 1961년 5월 15일 밤 10시쯤 육영수 여사는 박정희가 있던 방으로 갔다. 육 여사는 남편이 장태화·김종필·이낙선과 함께 밖으로 나서려고 하자 “저 보세요”라고 불렀다. 육 여사는 남편을 부를 때 항상 “여보세요”라고 하지 않고 “저 보세요”라고 했다.
“근혜 숙제 좀 봐주시고 나가세요.” 박정희는 서슴없이 “어, 그러지” 하고 아내를 따라갔다. 박정희는 책상에 앉아 공부하고 있던 초등학교 5학년생 근혜를 굽어보고 윗목 외할머니 곁에서 잠들어 있는 근령·지만에게 눈길을 주고는 나왔다. 장태화가 “무슨 숙제입니까” 하고 물었다. “어, 뭐 그림 그리는 거야.”
박근혜 대통령도 이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날 아버님께서 들어오셔서 저를 한번 보고 나가신 것은 기억나는데 무슨 숙제를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아요. 어머님께서는 집안을 정리하고 계셨습니다. 그날은 집안이 평소와 다르게 긴장되어 있었으나 저는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하니 어머님께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주변을 정리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7. 장충초등학교 시절
박근혜 대통령은 1958년 3월 서울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시절의 생활기록부가 공개돼 있는데 특이한 점이 있다. 1학년 때는 ‘특정 아동들과만 노는 습관이 있음’, 3학년 때는 ‘자존심이 강한 어린이’, 4학년 때는 ‘약간 냉정한 감이 흐르는 편’이라고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는 6년 내내 성적이 우수하고 침착하고 겸손하다는 평가가 적혀 있다. 초등학교 시절 ‘행동발달 상황’ 평가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친절·예의, 사회성, 자율성, 근로성, 준법성, 협동성, 정직성 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 최우수인 ‘가’를 받았다. 다만 ‘명랑성’ 부문은 3학년을 제외한 나머지 학년 전부에서 ‘나’를 받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박근혜 대통령은 《삼국지》를 탐독했는데 등장인물 가운데 조자룡(趙子龍)을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돌이켜보건대 나의 첫사랑은 조자룡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그가 등장할 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었다”고 말한 적도 있다.
《삼국지》 못지않게 박근혜 대통령이 좋아한 것은 ‘전투 이야기가 나오는 역사소설’이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를 읽을 때마다 설렘과 흥분에 사로잡혀 도대체 몇 번을 읽었는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빠져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 독서 취향을 눈치챈 아버지가 “좀 어려울 거 같지만, 근혜가 좋아할 것 같다”며 권한 책이 바로 앞서 말한 《삼국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5·16을 일으킨 아버지가 2년 뒤인 1963년 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박근혜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큰 영애(令愛)’로 불리게 됐다. 영애 시절 박근혜의 퍼스낼리티는 검소한 육영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박근혜와 중·고 6년을 함께 다녔던 친구 서임정은 “근혜는 보리밥에 감자조림 반찬을 자주 싸 왔고 외제 학용품이 없었다. 친구들이 일제 학용품을 갖고 오면 ‘예쁘다’며 부러워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8. 성심여자중학교 시절
학창 시절의 박근혜 대통령(왼쪽에서 두 번째). 중학교 1학년 2학기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반장을 맡았다. |
박근혜 대통령은 성심여자중학교 1학년 1학기 때 부반장을 한 것을 제외하고 중학교 1학년 2학기부터 성심여자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내내 반장을 맡았다. 중학교 2학년 때 실시한 지능검사(IQ) 결과는 127이었다.
신당동에 살던 시절 박근혜 대통령은 모래주머니 놀이·공기놀이·고무줄놀이·숨바꼭질을 좋아했고 ‘골목대장’ 같은 성격이었다. 개구쟁이 같던 성격이 차분해진 건 청와대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성심여중 1학년 때 1년간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이를 통해 규율과 화합을 자연스럽게 익혔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중학생이던 시절 담임교사를 맡았던 서성숙(82) 교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학창 시절 정치와는 너무 거리가 먼 학생으로 느꼈다. 정치인이 될 거라고 상상도 못 했다”며 “오히려 동생(근령)의 성격이 확실하고 똑똑해 정치 성향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서씨는 최순실 스캔들에 대해 “뭔가 사람을 너무 믿고 있다가 속은 것 같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1964년 3월 성심여중에 입학했는데 당시에는 중학교 입시가 있었다. 원래 중학교 입시는 모든 과목을 봐야 했는데 1964년에는 국어, 수학 두 과목만 보는 것으로 축소됐다가 이듬해 다시 모든 과목으로 바뀌었다. 중학교 입시는 1969년 폐지됐다.
중학교 생활기록부에 나온 ‘부형의 희망’에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는 박 대통령이 중1 때는 ‘피아니스트’가 되길 바랐으나 중2·3과 고2 때에는 ‘교육자’를 희망했다. 박 대통령 본인은 고1 때 ‘교육자’라고 썼으나 2·3학년 때는 따로 희망을 적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성심여중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첫 정치적 행보는 1966년 10월 31일 존슨 미국 대통령의 방한(訪韓) 영접이다. 《동아일보》 1966년 11월 1일 자에는 워커힐에서 있었던 ‘한국의 밤’ 행사를 보도한 내용이 나온다. “검은 턱시도를 입은 존슨 대통령이 러스크 국무장관, 장기영 영접위원장과 함께 차에서 내리자 현관에선 대통령 내외와 장녀 근혜양(성심여중 3년)이 영접. 존슨 대통령은 근혜양에게 그 큰 몸을 구부려 무엇인가 말하고 손에 입 맞추기도.”
9. 성심여자고등학교 시절
수석으로 입학한 성심여고 시절 박근혜 대통령의 적성검사에는 ‘이과 및 사회과학 적성이 높다’고 적혀 있었다.
성심여고 시절 박근혜 대통령은 본격적으로 외교 무대에 등장한다. 1968년 5월 성심여고 2학년이었을 때 아버지와 삼부요인, 주한 외교사절과 함께 국빈으로 방한한 에티오피아 셀라시에 황제를 영접했다. 외국 원수의 방한이 드물었던 시절이어서 셀라시에 황제의 방한은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1968년 9월 아버지 박정희의 호주 방문에도 동행했다. 당시 언론은 “케이시 총독 내외와 고튼 수상 내외를 비롯한 오스트레일리아 삼부요인들이 박 대통령 내외를 영접했다. 환영객의 특별한 관심을 끌게 한 한복 차림의 부인 육영수 여사의 딸 근혜양을 비롯한 수행원들과 숙소인 칸베라렉스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고 보도했다.(《동아일보》 1968년 9월 16일 자)
고3 때인 1969년에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유조선 ‘유니버스 코리아’ 진수식에 참석해 테이프 커팅을 했다. 미국 ‘걸프’사 중역과 일본 관계자, 주일 한국대사 등과 함께 요코하마에서 가졌던 진수식에 대해 당시 《경향신문》 1969년 6월 21일 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세계 최대의 유조선 6척 중 하나인 ‘유니버스 코리아’호가 21일 낮 11시 이시카와지마 하리마 중공업조선소에서 박정희 대통령, 영애 근혜양이 샴페인을 터뜨리는 가운데 진수했다.”
10. 서강대학교 시절
박근혜 대통령(맨 앞)은 서강대 재학 중이던 1970년 개교 10주년 행사에서 전자공학과 깃발을 들고 가장행렬에 참여했다. |
박근혜 대통령은 1970년 3월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할 때는 이공계 수석이었다. 학부 졸업 시 학점은 4.0 만점에 3.8이었다. 특히 3학년 2학기부터 4학년 2학기까지는 올 A를 맞았다. 그가 전자공학을 전공한 이유는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공계 육성 의지 때문이었다고 한다.
청와대 2부속실 비서관을 지낸 정재훈(전 개포중 교장)은 “육 여사는 큰 영애가 역사학과에 가길 바랐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전자공학을 전공하겠다는 신념이 워낙 확고했다”며 “육 여사가 ‘근혜가 보통 여인들이 가는 평범한 길을 가지는 않을 것 같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서강대 1학년이던 시절 그를 좋아한 남학생의 일화가 인터넷에 유포돼 있다. 시골에서 자란 이 청년은 서강대생으로 박근혜에게 다가가 “저랑 빵 드시러 가지 않을래요?”라고 데이트 신청을 했다. 박근혜는 얼굴이 빨갛게 변하더니 “글쎄요”라면서 그냥 지나쳤다고 한다. 이 남학생은 그 후에도 매번 박근혜를 따라다니며 빵을 먹자고 했다. 어느 날 그가 다시 박근혜에게 “빵 안 드실래요”라고 말한 순간 건장한 사내 4~5명이 그를 에워싸더니 빵을 가득 담은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실컷 먹어!” 전날 박근혜가 아버지에게 무심코 “자꾸 빵을 먹자는 남학생이 있다”는 말을 해 벌어진 일이었다. 이 일화의 진위(眞僞)는 알 수 없다.
11. 박근혜식 외국어 공부법
박근혜 대통령은 외국을 자주 순방하면서 외국어 공부의 필요성을 느꼈다. 영어 공부법에 대해 그는 자서전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거나 방을 청소할 때 뜨개질을 하거나 양치질을 할 때 등 조금이라도 자투리 시간이 나면 새로운 단어가 포함된 문장을 암기하거나 테이프를 들었다”고 밝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셰익스피어, 《탈무드》 등의 유명한 명작들을 원서로 읽을 만큼 영어가 익숙해진 뒤에야 비로소 어느 정도 영어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붙자 프랑스어와 스페인서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 다른 나라 언어를 익힌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만날 수 있는 세상이 넓어진다는 의미였다. 언어는 내 삶의 질을 높여주는 수단이었다. 다른 나라 말을 구사할 수 있다는 성취감은 생각보다 컸다. 책을 통해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만족감은 맛있는 음식이나 새 옷이 주는 기쁨과는 다른 차원의 행복이었다.”
12. 프랑스 유학 시절
서강대를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박근혜 대통령은 프랑스 그르노블로 유학을 갔다. 정식 학위 과정은 아니고 어학 과정이었다. 다른 유학생들처럼 하숙 생활을 했는데 그는 평범한 가정의 삶을 꿈꿨다고 한다.
“아침 일찍 남편이 마을로 내려가 빵을 사가지고 올 동안 아내는 수프를 끓이고 따뜻한 우유와 커피, 신선한 샐러드를 준비했다. 식사가 끝나면 가족이 함께 뒷마무리를 도왔다. 가족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있었다. 식탁을 정돈하는 아이, 설거지를 하는 남편, 디저트를 준비하는 아내. 그 모습은 매우 합리적이고 따뜻해 보였다. 다과를 나누며 이야기를 주고받고 기타 연주에 맞춰 온 가족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참 평화로웠다. 곁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나의 미래를 그려보았다. 언젠가는 좋은 사람을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바람도 가져보면서….”
그러나 이 행복한 생활은 6개월 만에 끝난다. 어머니 육 여사가 문세광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박근혜의 삶은 이후 격랑(激浪) 속으로 빠져든다. 그는 이런 암시를 책에 남겼다.
“프랑스로 떠나온 지 6개월 만에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새로운 도전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디디며 한창 꿈에 부풀어 있는 사이, 내 인생의 가장 힘들고 거센 폭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13. 어머니의 죽음
1972년 12월 15일 부모와 함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투표를 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
“친구들과 여행 중이던 어느 날, 하숙집으로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 어머니께 무슨 일이 생겼다며 빨리 하숙집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혼자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어머니가 걱정되었다. 하숙집에 도착하니 대사관에서 나온 분들이 와 계셨다. 모두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을 받았다. 그들은 내게 급히 짐을 싸서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커다란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묻는 내 질문에 그들은 난처한 표정만 지으며 시원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짐도 챙기지 못한 채 서둘러 공항에 도착했다. 탑승수속을 하기 위해 바삐 걸어가다가 궁금한 마음에 신문 스탠드로 갔다. 한 신문에 실린 아버지, 어머니 사진 위 ‘암살’이라는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나는 급히 신문을 펼쳐보았다. 1면에 어머니 사진이 크게 실려 있었다. 온몸에 수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눈앞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 오듯 눈물만 쏟아졌다.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렇게 쉬지 않고 울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공항에 도착하니 아버지가 나와 계셨다. 굳게 다문 입술과 눈빛에서 아버지의 아픔이 느껴졌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았다. 온몸의 뼈마디가 저려 오는 듯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가족 모두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 두렵고 혼란스러운 밤이었다.”
14. 스물두 살의 퍼스트레이디
박근혜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 사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외국인 6·25 참전용사들을 접견하는 모습. |
“장례식을 치른 지 불과 엿새 뒤 나는 가슴에 상장(喪章)을 단 채 예정되어 있던 ‘영부인배 쟁탈 어머니 배구대회’에 퍼스트레이디 자격으로 참석했다. 울먹이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애써 눈물을 참았다. 그 자리는 인간 박근혜가 아닌 퍼스트레이디로서의 구실을 하는 ‘처음’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내 인생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프랑스 유학 후 강단에 서겠다는 내 꿈은 아득히 멀어졌다. 이는 어쩌면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학 시절 묘한 꿈을 꾼 적이 있다. 그 당시 대수롭지 않게 여겨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 꿈은 오랫동안 내 기억에 남았다.
성난 파도가 몰려오는 바닷가였다. 엄청난 파도가 몰아쳐서 사람들과 같이 등대 밑에 피해 있는데 그 순간 장면이 확 바뀌면서 태양이 비추고 탄탄대로가 펼쳐졌다. 길 건너 언덕에 태양이 솟아올랐다. 시뻘겋게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이었다.
그 꿈을 꾸고 며칠 뒤 또다시 이상한 꿈을 꾸었다. 파랗고 아름다운 고리에 둘러싸인 천체가 내 주위를 맴돌았다. 고리는 돌면서 점점 내게로 다가왔다. 그 천체의 총천연색 빛이 눈부시게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이 꿈은 환상적인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당시 일기장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든다고 적었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졸업을 하면 사회생활을 할 텐데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련이 닥칠 거라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내 삶을 그 꿈과 꼭 연관 지을 수는 없겠지만, 가끔 그 꿈과 어머니의 죽음, 달라진 내 인생의 한 지점이 맞물려서 떠오르곤 한다.”
15. 최태민의 등장
새마음궐기대회에 최태민 구국봉사단 총재와 함께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 |
육영수 여사 서거 후, 어린 퍼스트레이디 앞으로 몇 통의 편지가 왔다. 발신자는 최태민이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최태민은 돌아가신 육 여사가 꿈에 나타나 딸에게 당부하는 말을 남겼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근령·신동욱 부부에 따르면, 박근혜는 육 여사 피살 전부터 최태민과 알고 지냈다고 한다. 육 여사가 그런 사실을 알고 “그런 사람과 가깝게 지내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최태민은 1975년 박근혜에게 “죽은 육영수 여사가 꿈에 나와 박근혜를 구하라고 했다”고 편지를 보내고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심지어 최태민은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주기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고 말하거나 ‘아시아의 지도자’ ‘여성 대통령’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박근혜에게 주입했다.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이었다.
16. 중앙정보부 수사자료
1977년 중앙정보부는 최태민을 수사했다. “형식상 모든 업무는 박근혜가 관장하였으나 실질적으로 최태민이 전권을 위임받아 행정부, 정계, 경제계, 언론계 등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최태민의 존재가 청와대에 알려진 것은 1975년이었다. 김정렴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은 구국봉사단 총재 최태민에 대한 지원을 그에게 부탁했다.
“(큰 영애가) 한 건설업자에게 융자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 알아보면 최태민과 관련 있는 업자였다. 나는 박승규 민정수석에게 ‘큰 영애에 대해 오점이 생기면 안 되니 주의 깊게 관찰하라’고 시킨 뒤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큰 영애가 필요한 돈이 있다고 하면 각하께서 저한테 이야기해 주십시오. 소리 안 나게 돈을 만들어 각하께 드리겠습니다.’ 박 대통령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으나 최씨에 대한 정보 보고는 끊이질 않았다. 수석비서관 회의에서도 자주 거론됐다. 최씨는 구국봉사단을 이끌고 새마을사업의 하나로서 새마음 갖기 운동을 한다고 했기 때문에 새마을 담당 장관이던 김치열 장관도 최씨를 지원했다.”
17. 최태민을 조사한 경찰관의 증언
최태민을 조사했던 한 경찰 고위 간부는 박근혜・최태민의 인연을 이렇게 설명했다.
“최태민은 1975년 1월쯤 박근혜씨 앞으로 편지를 썼다. ‘어젯밤 꿈에 국모님을 뵈었습니다. 국모님 말씀이 내 딸을 보살펴달라고 부탁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근혜양의 비서실에서 이 편지를 넣어주었다. 박근혜는 편지를 다 읽고 최씨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때 나이 칠십을 바라보던 최태민은 늙은 아내와 장성한 여러 자녀를 두고 있었는데도 얼굴의 피부가 팽팽한 동안(童顔)이었다. 몸집은 작으면서도 다부져 보였다. 박근혜씨가 최초의 사회활동(구국여성봉사단)을 하게 된 계기는 최태민의 권고에 의해서였다.
1975년 2월 박근혜씨는 나에게 최태민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최태민을 만나러 갔더니 최씨는 당황한 모습이었다. 내가 근혜양의 부탁으로 왔다고 했더니 최씨는 갑자기 거만해졌다. 나는 뒷조사를 시켰다. 최씨가 자유당 시절에 경찰관을 지냈다는 것, 정규 과정을 밟은 목사가 아니라는 사실 등이 드러났다. 나는 직접 박 대통령께 이 사실을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이 정보를 근혜양에게 알려주고 주의를 주었다. 박 대통령은 으레 그러듯 ‘누가 그러더라’는 식으로 정보의 소스를 밝혔다. 박근혜씨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그럴 수가 있느냐’고 섭섭해했다. 나는 그 뒤로 대통령과 근혜양을 만날 수 없었다.”
18. 김재규의 개입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0·26 이후였다. 박 대통령을 죽인 김재규가 재판과 수사 과정에서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였다. 김재규가 직접 쓴 ‘항소이유 보충서’에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본인이 결행한 10·26 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는 박 대통령이나 유신체제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박 대통령의 가족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힐 수 없는 것이지만 꼭 밝혀둘 필요가 있으므로 이 자리에서 밝히고자 합니다.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양이었는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이 되어 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은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박승규 민정수석비서관조차도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전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시킨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 대통령은 근혜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 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하여,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놓은 일이 있었습니다. 중정본부에서 작성한 조사보고서는 현재까지 안전국(6국)에 보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당시 김재규의 변호를 맡은 안동일 변호사는 《신동아》 2005년 12월호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재규를 몇 번 접견하면서 우발범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 사람의 진정성이 느껴지잖아요. 꾸며서 말하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는데, 전혀 그런 게 없었어요. 김재규는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10·26 혁명을 일으킨 간접적인 동기가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과 가족, 즉 자식들 문제 때문이었다’고 주장했어요.”
― 구체적인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김재규는 큰 영애인 박근혜가 관련된 구국여성봉사단의 부정과 행패를 보고 분개했다고 해요. 이런 일들이 ‘대통령이나 박근혜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조사를 시켰다는 겁니다. 조사 결과 로비나 이권 개입 등 여러 가지 비행이 드러나자 박 대통령에게 그대로 보고했는데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이런 일까지 하느냐’면서 몹시 불쾌해했다고 해요. 박정희는 영부인 육 여사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자식들을 애지중지하고 철저히 감싸고 돌았다고 해요. 구국여성봉사단 문제만 해도 그래요. 당시 항간에서 말이 많던 최태민이 총재, 박근혜가 명예총재를 맡고 있었는데 김재규가 구국여성봉사단의 문제점을 보고한 후 박근혜가 총재, 최태민이 명예총재가 됐습니다. 박정희가 최태민의 실권을 뺏는답시고 두 사람의 자리를 맞바꾼 거지요. 김재규는 자기가 괜히 조사를 해서 오히려 ‘개악(改惡)’이 됐다면서 뒷조사한 걸 후회했대요.”〉
19. 정보부 수사국장의 진술
“김재규는 각하에게 최태민의 비위를 보고했으나 박근혜양이 비호, 각하 앞에서 대질 친국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천하의 정보부장이 김계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과 함께 사이비 목사와 나란히 앉아 우김질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굴욕이었다.”
다음은 정보부 수사국장의 진술이다.
〈김 부장은 ‘최 같은 자는 백해무익하므로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 없어져야 한다’고 증오를 표시했다. 새마음봉사단의 부총재(총재 박근혜)인 사이비 목사 최가 사기, 횡령 등 비위 사실로 퇴임한 후에도 계속 막후에서 실력자로 영향력을 행사하여 각 기업체 사장들을 운영위원으로 선임하고 성금을 뜯어내는 등 새마음운동 취지를 흐리게 해서 계속 동향을 감시하라는 김 부장의 지시를 받았다. 1979년 내사 결과 최의 이권 개입, 여자 봉사단원과의 추문 등 비리 사실을 탐지하여 김재규 부장에게 보고한 바 그렇게 말했다.〉
20. 선우연 당시 청와대 공보비서관의 비망록
〈1977년 9월 20일. 지난 9월 12일 밤 대통령은 근혜양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및 백광현 정보부 7국장을 배석시킨 가운데 구국봉사단 최태민의 부정부패와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 친국을 했다. 박 대통령은 오늘 나에게 큰 영애인 근혜양과 관련해 물의를 일으킨 최태민 구국봉사단 총재를 거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박 대통령이 나에게 지시한 내용은 세 가지였다. ‘최태민을 거세하고 향후 근혜와 청와대 주변에 얼씬도 못 하게 하라. 구국봉사단 관련 단체는 모두 해체하고.’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나는 곧장 근혜양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근혜양은 얼굴이 하얘지더니 낙담한 표정으로 눈물을 지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제가 각하께 다시 보고드릴 테니 기다려봐요.”
며칠 뒤 다시 박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근혜양 문제를 여쭈었다.
“각하, 큰 영애가 영부인이 돌아가신 뒤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리하고 있는데, 하고 있던 단체를 모두 해체하면 영애의 체면이 깎입니다. 구국여성봉사단만은 계속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박 대통령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침묵을 지키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네, 최태민을 가까이 안 하게 할 수 있나? 최를 근혜에게 접근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여서 자네에게 허락할 테니, 그건 따로 의논해서 계속 일하도록 하게. 사실 지난번에 특명을 내리고 나서도 근혜가 엄마도 없는데 일까지 중단시켜서 가엾기도 하고, 나도 마음이 아팠어. 내가 그간 새마음봉사단에 관해 최태민과 관련한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네. 늘그막에 애들이라도 잘돼야 내가 마음이라도 편안하지 않겠는가. 나를 좀 도와주게.”〉
21. 아버지의 죽음
10·26사태 후인 1979년 11월 21일 16년간 살았던 청와대를 떠나는 박근혜 대통령. |
〈또다시 비극은 소리 없이 찾아왔다. 1979년 10월 26일 이른 아침, 아버지는 “오늘은 삽교천 행사에 간다” 하고 인사를 건네며 청와대를 떠나셨다.… 그날 저녁 나는 텔레비전에서 삽교천 준공식 장면을 보았다. 배수갑문 스위치를 누르자 거세게 쏟아져나오는 물줄기를 보며 아버지는 몹시 흡족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아버지의 얼굴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흑백텔레비전으로 시청하는 건데도 아버지는 안색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이상하게도 이 세상 분이 아닌 것같이 느껴졌다. 나는 아버지의 건강에 무리가 온 것 같으니 좀 더 신경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함께 따라갔던 비서에게서 평소와는 다르게 심상치 않은 일이 몇 가지 일어났다는 얘기를 후에 들었다. 철저하게 준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제막을 하는 순간 기념탑에 씌운 커튼이 반쯤밖에 걷히지 않았고 행사를 끝낸 뒤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도고온천 관광호텔에 내릴 때 이 호텔에서 기르는 노루 한 마리가 아버지가 탑승한 헬리콥터 소리에 놀라 뛰다가 그만 나무에 부딪쳐 죽었다는 것이다.
새벽 1시30분쯤 되었을까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수화기 너머로 ‘일어나 몸차림을 해주십시오’라는 비서관의 말이 들려왔다. 순간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머릿속으로 번개처럼 어머니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 잠시 후 김계원 비서실장이 관저로 찾아왔다.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의 시신은 새벽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 청와대로 옮겨졌다. 5년 전 어머니의 시신이 눕혀졌던 병풍 뒤에 아버지의 시신이 안치되었다. 누가 내 등 뒤에 비수를 꽂는다 해도 그때만큼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아버지의 표정은 평온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치 편안한 잠에 빠진 것처럼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이미 온기를 잃은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께 못다 한 말이 너무 많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 오열하는 동생들이 보였다. 밖으로 비명이 새어나갈까 입을 틀어막고 우는 지만이의 모습에 가슴이 찢기는 것 같았다. 겉으로는 야무지고 강단 있어 보여도 마음이 여리고 섬세한 아이였다.…
나는 낮에는 아픔을 뒤로한 채 문상객을 맞아야 했지만 밤이 되면 참담한 고통이 밀려왔다.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가슴에 송곳이 박힌 것처럼 아파서 잠들 수가 없었다. 마치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 악몽에 쫓기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유 없이 팔다리가 부서질 듯 아파 상복을 걷어보니 팔 전체가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그것도 한두 군데가 아니라 부항이라도 뜬 것처럼 큰 멍자국이 어깨부터 다리까지 뒤덮었다. 내 걱정이 되었던지 잠시 방문을 열어본 근령이가 펄쩍 뛰며 병원에 가자고 했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잠시 의무실에 들르기로 했다.
“갑자기 너무 큰 충격과 정신적 고통을 당하면 피가 몰려 이런 증세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피 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빨면서 터져 나오는 오열을 참을 수 없었다. 비서실장이 전해준 아버지의 옷은 온통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수술한다고 여기저기 찢어놓아 처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옷을 보고 있자니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몇 년 전 어머니의 피 묻은 한복을 빨던 기억이 스쳐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 분도 아니고 부모님 모두 총탄에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가혹한 이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핏물이 가시지 않은 아버지의 옷을 빨며 남들이 평생 울 만큼의 눈물을 흘렸다. 죽을 만큼 힘든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22. 다시 돌아온 신당동 집
〈적막한 신당동 집을 보고 있자니 첩첩산중에 버려진 심정이 이렇게 막막하고 외로울까 싶었다. 누군가 틀어놓은 거실 텔레비전에서 코미디 프로를 하고 있었다. 나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시선이 갔지만 손톱만큼도 우습지 않았다. 끼니때마다 밥을 먹는 것도 곤욕이었다. 밥알이 모래알처럼 느껴져서 넘길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현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지 동생들도 점점 말을 잃어갔다.〉
23. 박근혜의 배신론(背信論)
〈청와대를 나온 이후 정권 차원에서 아버지에 대한 매도가 계속되었다. 우리 삼남매는 부모님의 기일(忌日)을 포함한 어떤 공식적인 행사도 엄두를 낼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결국 6년 동안 아버지의 추도식을 공개적으로 치를 수 없어 집에서 조용히 동생들과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아버지와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조차 싸늘하게 변해가는 현실은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온갖 비화가 봇물 터지듯 신문과 잡지를 장식했다. 비화를 증언한다면서 L씨, K씨, P씨 등 익명을 쓰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름을 밝히고 하는 얘기 중에도 거짓이 많은데 하물며 익명 아래 숨어 책임없이 증언하는 내용은 어떠할까. 더구나 내가 곁에서 지켜본 것도 과장되게 부풀려지고 비틀어져 마치 그것이 사실인 양 떠돌아다녔다.〉
〈사람이 사람을 배신하는 일만큼 슬프고 흉한 일도 없을 것이다. 상대의 믿음과 신의를 한번 배신하고 나면 그다음 배신은 더 쉬워지며 결국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한 상태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유신 때는 “유신만이 살길”이라고 떠들던 사람들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때 무슨 힘이 있어 반대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하는 것을 보니 인생의 서글픔이 밀려왔다.
그동안 나를 잘 알고 굉장히 아낀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자신의 손익계산에 따라 태도가 달라졌는가 하면 평소 덤덤하게 특별한 이야기를 나눈 바 없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러한 현실 속에서 사람의 안팎을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새삼 깨달았다. 고마운 사람은 나에게 물 한잔 더 준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시류에 따라 오락가락하지 않으며 진실한 태도로 일관된 사람들, 진정 빛나는 이들이었다.〉
24. 박근혜의 권력론(權力論)
〈한번 권력의 맛을 본 사람은 그 권력을 잃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며, 희생과 노력이 필요한 험난한 길보다는 지름길을 통해 하루빨리 스타가 되기를 원한다. 평생 손에 쥐고 있을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바람처럼 사라지므로 권력은 허무한 것이다. 그런 권력이 국민을 위해 쓰이지 않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 남용되었을 때 그 결과는 추악했다.〉
〈권력은 칼이다. 권력이 클수록 그 칼은 더욱 예리하다. 조금의 움직임으로도 사람을 크게 해칠 수 있다. 그러므로 큰 권력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지만 정작 그 큰 권세를 가장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그것을 소유한 당사자이다. 깊은 철학을 가지고 수양을 많이 한 사람, 하늘의 가호를 받은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자기의 큰 권세를 제대로 다룰 수 없다. 그 칼을 마구 휘둘러서 쌓이는 원망, 분노, 복수심 등은 되돌아와 그의 목을 조른다.〉
〈권력의 남용, 판단의 착오로 인해 빚어진 한 인간의 끊임없는 고통을 나는 보고 있다. 권력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정말 두려운 것이다. 아무 죄 없는 사람의 가슴에, 그 가족의 가슴에 영원히 지우기 힘든 상처를 남길 수도 있고 생사람을 잡을 수도 있는 것이다.〉
25. 박근혜의 간신론(奸臣論)
〈아첨을 잘하고 간사한 사람에게 사람들은 얼마나 속기 쉬운가. 그러나 그 달콤한 얘기들은 결국 독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 퍼져 멸망을 가져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관록은 인간을 평가할 수 있는 한 가지 척도는 분명히 된다. 사람을 돋보이게 한다. 그러나 관록은 사람을 훌륭하게 성숙시키기보다는 추잡하게, 비겁하게 만드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현실이다. 관록 없이 훌륭한 분들도 있다. 그러나 한국에선 그것이 안 통한다. 통탄스러운 일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몇 년 만나만 보아도 그 됨됨이를 훤히 알 수 있는 것이 사람이지만, 몇 년을 보아와도 그 진짜 모습을 모를 수도 있는 것이 또한 사람이다. 어수룩한 체하면서 속으로는 딴마음을 먹고 뒤로는 음모를 꾸미고 음흉했던 사람을 기억하게 된다. 말도 곧잘 하고 뱃심도 꽤 있다고 생각되었던 사람도 몇 번 가까이서 그 모습을 진실로 알고 보니 보통 주책이 아니고, 말도 그렇게 헤플 수가 없었다. 옛날 한 철학자는 진정 인간다운 인간을 찾겠다고 낮에 등불을 밝히고 찾아 돌아다녔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진실하고 슬기로운 인간이란 그렇게도 귀하고 희귀한 것일까.〉
〈간신의 말만 듣는 임금은 머지않아 자신과 나라를 망치고 만다. 그러나 충신의 말에 항상 귀 기울이고 그 말을 옳게 여기는 임금은 자신과 국가를 이끌고 흥하게 한다.〉
26. 박근혜의 칩거론(蟄居論)
박근혜 대통령은 1979년 청와대를 나와 정계에 입문한 1997년까지 18년 동안 세상의 이목을 피해 살았다. 이 시기를 박근혜 대통령은 이렇게 자평했다.
〈지금도 나는 내가 걸어온 18년이라는 세월이 은둔과 칩거로 치부될 때 쓴웃음이 나온다. 그때도 나는 대한민국의 하늘 아래 살고 있었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국민의 한 사람이었다.〉
27. 박근혜의 언론관(言論觀)
〈김대중 납치 사건, 정인숙 사건 등을 비롯해 나중에는 상식을 넘어서는 기사도 버젓이 실리기 시작했다. 이런 가십성 기사를 처음 접했을 때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독재자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오지 못하게 하여 외국 방문을 못 했다는 기사를 본 어느 날 아침에는 기가 막혔다.
매스컴의 위력은 대단했다. 사람들은 아무 의심 없이 잘못된 기사의 내용을 믿고 받아들였다. 한번 말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잠자코 있으면 악성 소문도 사그라질 거라고 여겼지만, 시간이 흘러도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시절 나는 거대한 벽과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 잡지 기사를 읽으면서 여론 또는 민심이 어떻게 반영되며 어떤 힘을 갖고 있는가를 배울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 대중에게 호평을 받고 인기가 있으면 사람들은 자연 관심을 갖게 된다. 신문, 잡지 등의 언론 매체는 판매부수를 늘려야 하니까 그런 사람의 기사를 자꾸 실으려고 한다. 또 여론의 생각과 맞추어야 호평을 받으니까 글의 흐름도 그렇게 된다. 오늘날 민심은 이러한 방식으로 힘을 발휘하고 그 뜻을 드러내는 것 같다. 이것은 물론 자유라는 분위기가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돈 또는 권력 등을 써서 억지로 매체를 타려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공연히 거부감만 주면서 반짝하고 말 뿐이다. 정치가들은 자기가 이러저러한 사람으로 국민에게 비치기를 바라며 그런 이미지를 심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틀림없는 사실은 자기의 언행은 자기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위선을 떨어도 그 속마음은 조만간 드러나고 만다. 그러니 그러한 홍보에 애를 쓸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곧고 깨끗하게 바로잡는 데 힘쓰는 것이 가장 정확한 방법이요, 헛수고를 안 하는 길일 것이다.〉
28. 아버지 추모사업과 다시 등장하는 최태민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아버지의 오명을 벗겨드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남기고 가신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나는 아버지에 대한 평가를 바로잡기 위해 시작한 ‘부모님 추모사업’이 자식 된 도리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믿고 있다. 처음 추모사업을 꾸려갈 무렵, 이 일을 도와줄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대부분이 날 만나는 것조차 꺼렸다. 그러나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나와 뜻을 같이한다는 이유로 강제 해산되었던 사람들이 어렵게 다시 모여 아버지의 추모사업을 진행하는 데 큰 힘이 되어주셨다.〉
29. 1980년 새마음봉사단 해체
전두환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던 허화평씨는 5공화국 초기에 새마음봉사단을 해체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박근혜를 찾아가 “우리는 박 대통령의 명예를 지켜드려야 하는데 새마음봉사단이 대통령의 명예에 누가 되었다. 그러니 이를 해체하는 것을 양해해 달라”고 말했다.
30. 1980년 영남대 이사장 취임과 육영재단
1980년대 중반 육영재단 이사장 시절, 육영재단 인근 거리를 걷는 박근혜 대통령. |
〈새마음봉사단이 강제 해산되면서 자연히 어떤 사회활동도 할 수 없었던 1980년, 나는 영남대 이사장직을 잠시 맡았다. 그러나 학교 내 운동권에서 많은 반대가 있었다. 결국 세상은 내가 그 자리를 맡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고 나는 아무 사심이 없었기에 그 자리를 내 자리라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이 인생을 바쳐 하신 일을 이어나가는 것만큼은 나의 사명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어머니가 남기신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맡아 어머니 생전에 하시던 일을 조용히 마무리 짓는 일을 해나갔다. 어린이회관 안에 근화원과 목련정, 영해루 등 한국 전통양식의 집을 지어 유치원생부터 청소년들이 우리 전통과 생활 예절을 알 수 있는 기관이 되도록 했다.
일부에서는 내가 육영재단 운영을 그만둔 것에 대해 많은 억측을 쏟아내고 있다. 어머니가 생전에 세워놓으신 어린이회관이 자매 사이의 분란을 낳은 것처럼 비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어떤 이유로도 용납되지 않는 일이기에 동생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 후 가끔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접할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동생이 잘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31. 육영재단에서 벌어진 일
최태민은 1980년대 박근혜가 이사장으로 있던 육영재단에서도 권력 남용으로 안팎에서 거센 비판을 받았다. 1986년부터 육영재단의 어린이회관에선 최태민과 그의 5녀 최순실이 박근혜와의 친분을 과시하고 전횡을 일삼아 문제가 되었다.
모든 것을 최태민에게 먼저 보고해야 이사장(박근혜) 결재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무렵 재단 잡지사 기자들의 파업과 직원들의 농성도, 모두 ‘외부 세력’이라고 표현된 최태민·최순실 부녀의 인사개입 등 간섭이 원인이 됐다. 분란은 1990년 11월 15일 박근혜가 동생 박근령에게 이사장직을 넘길 때까지 계속됐다.
《중앙일보》가 1994년 보도한 최태민의 부음 기사에는 “최씨는 최근까지 근혜씨의 생활비를 대주며 재산관리인 행세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는 내용이 있다
《여성중앙》의 육영재단 어린이회관 직원들 취재에는 “박근혜 이사장은 일주일에 두 차례 결재를 하러 왔지만 이에 앞서 제대로 된 직함도 없이 ‘최 회장’으로 불리던 최태민이 먼저 본 뒤 ‘오케이’를 해야 결재가 올라갈 수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
그 딸인 최순실은 자신이 주도하는 연구소를 통해 육영재단이 간행하는 잡지들의 편집에 간여한다는 비판을 샀고 잡지 《어깨동무》와 《꿈나라》는 끝내 휴간됐다. 어린이회관 직원 140명과 기자들 16명이 권고사직당한 반면, 최순실의 초이종합학원 교사들은 어린이회관에 되레 입사했다. 1987년 9월 보다 못한 직원들이 최태민·최순실 부녀의 간섭을 규탄하며 7일간 농성시위를 하기도 했다.
최태민 일가의 육영재단 전횡 논란에 대해 2007년 박근혜 당시 후보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청문회에서 “최씨는 재단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순전히 오해다”라고 주장했다.
2006년과 2007년 청문회에서 최태민과 그 가족들의 비리행위에 대해 박근혜는 “최태민이 모함을 받는 것이고 억울하다고 생각한다. 최 목사(최태민)는 내가 어려운 시절 나를 도운 사람이며 고맙고 훌륭한 분”이라며 그를 끝까지 두둔했다.
최태민과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질문에 불쾌감을 나타내자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냐고 물으니 “아기가 있다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얘기까지 나온다. DNA 검사라도 해줄 테니 애를 데려오라”고 말하기도 했다.
32. 노태우 정부의 최태민 보고서
1989년 10월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실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고한 최태민 관련 보고서. |
〈최근 박근혜는 최태민으로부터 “신(神)의 계시로 몇 년만 참고 기다리면 여왕(女王)이 될 것이므로 친인척 등 외부인을 만나면 부정(不淨)을 타게 되니 접촉을 피하라”는 말을 듣고 친동생인 박지만에 대해서까지 접촉을 제한하고 있어 박지만이 “큰누나는 최태민의 꾐에 빠져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으며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장면을 볼까 봐 사전 약속 없이는 집에서도 만날 수 없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실정으로 항간에 악성 유언비어 확산 우려.…
박근혜에게 최면(催眠)을 걸어 육 여사의 환상(幻像)이 나타나게 해 환심(歡心)을 사고 있다.
최태민은 또 ‘세계정세가 여성 총리가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어 영국의 대처 총리, 파키스탄의 부토 총리가 탄생했는데 1990년대 초에는 우리나라에도 여성 총리가 나오게 되는데 그 인물이 박근혜’라고 예언했다.
박근혜씨는 최태민이 신의 계시로 자신을 위해 헌신해 (최씨를)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모든 일을 그의 조언에만 의존하는 실정이다. 박근혜씨가 근화봉사단 조직이 완료되면 차기 대통령에 출마할 꿈을 꾸고 있다.〉
이 보고서는 최씨가 박정희 대통령이 숨진 1979년 이후에도 박근혜 대통령 곁에 머물며 각종 육영·추모 사업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과 당시 시중 유언비어 등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1989년 10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고됐다고 한다.
보고서는 최씨가 박 대통령이 이사장으로 있던 육영재단과 한국문화재단에 따로 사무실을 두고 박 대통령과 수시로 접촉하며 재단 운영에 개입했다고 했다. 최씨가 측근을 재단 간부와 비서·경호원 등으로 근무하도록 해 박 대통령의 활동을 일일이 수집하는 식으로 재단 운영을 배후조종했다는 것이다.
민정수석실은 당시 최씨가 박 대통령 이동 시에 경호차까지 붙였다며 박 대통령이 탄 차를 뒤에서 따라가며 경호하는 차량 사진까지 첨부했다. 보고서는 또 “최씨는 재단 내부에서 ‘최 회장’으로 불리고 있으며 외부에는 ‘박근혜씨의 후견인’이라 소개하고, (최씨의) 처(妻)로 하여금 박근혜씨의 생필품을 제공하게 하는 식으로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33. 두 동생의 탄원서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인 근령·지만씨는 1990년 8월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낸 호소문에서 “최씨가 육영사업(육영재단), 문화재단(한국문화재단) 등의 회계장부를 조작하는 식으로 재산을 축적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1990년 동생 근령씨와 벌인 육영재단 분쟁 당시 “내가 누구한테 조종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고 했고 최태민의 비리 의혹에 대해선 “반대 세력의 악선전”이라고 반박했다.
34. 전두환과 노태우가 본 박근혜와 최태민
전두환·노태우 정부에 참여한 한 인사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연이어 맡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당시부터 최태민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집권 직후 전직 대통령 유족 보호 차원에서 최씨를 박 대통령에게서 떼어놓으려 했지만 잘 안 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35. 박근혜의 양생법(養生法)
박근혜 대통령은 단전호흡으로 건강을 관리했다고 말한다. |
〈그러던 어느 날 단전호흡을 시작했다. 단전호흡은 무엇보다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육체도 건강해지고 가슴에 맺혔던 멍울도 서서히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단전호흡을 하면서 병에 대한 면역력도 좋아졌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그 충격으로 몸이 많이 약해져서 감기 같은 잔병치레가 잦았다. 그런데 단전호흡을 시작하면서 위와 장도 편해지고 온몸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또한 담력과 끈기가 생기고 서서히 자신감도 회복할 수 있었다.〉
36. 박근혜의 종교관(宗敎觀)
박근혜 대통령이 쓴 책에는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하나 불교, 성경이 주로 등장하고 정작 ‘율리아나’라는 세례명을 받은 천주교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다. 박 대통령이 종교에 탐닉한 것은 1990년대 전후, 즉 육영재단 이사장에서 물러난 뒤로 보인다.
〈그 무렵 나는 법구경, 금강경 등 불교경전과 성경을 두루 찾아 읽었다. 동양철학 관련 책들과 《정관정요》 《명심보감》 등은 머리맡에 두고 수시로 보았다. “남을 책망하는 마음으로써 자신을 책망한다면 허물이 적을 것이요, 자신을 용서하는 마음으로써 남을 용서한다면 사귐을 온전히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명심보감》의 한 구절과 “인생은 참으로 짧지만 거기에는 별, 달, 꽃, 남자, 여자, 강, 그리고 산 등 수많은 즐거움이 있다. 그런데도 그대는 싸움만을 일삼으며 우둔하고 어리석게 살 것인가? 그대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는 오쇼라즈니쉬의 말은 쉬운 듯해도 그 깊은 진리를 알고 실천하기는 매우 어렵다.〉
37. 박근혜의 식사법
박근혜 대통령은 수필집에서 고속버스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것을 즐겼다고 술회했다. |
최순실 사태 후 박근혜 대통령의 식사습관이 밝혀졌다. 요약하자면 ‘늘 혼자 먹는다’는 것이다. 일설에는 전직 청와대 비서실장이 “중요한 일이 있으니 저녁하시자고 했더니 ‘둘이서요?’라고 반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박 대통령이 좋아하는 음식은 된장찌개, 나물류이며 고기 종류는 안 좋아한다고 한다. 묘심화 자비정사 주지는 “(대통령께서) 절밥을 좋아해 오면 꼭 밥을 먹고 갔다”며 삼성동 사저(私邸)에 살 때도 늘 된장, 고추장을 담아 보내줬다고 했다. 김장도 매번은 아니지만 여러 번 보내준 적이 있다고 묘심화 스님은 말했다.
최순실이 반찬을 싸가지고 청와대에 드나들었다는 보도에 대해 한 비박계 의원은 “대통령은 최순실이랑 밥 절대 같이 안 먹는다. 최순실은 몸종이다”라고 말했다. 최근 비선 실세 최순실이 매주 일요일마다 청와대에서 ‘스키야키’를 먹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한 월간지는 전직 청와대 조리장의 말을 인용해 “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 임기 초기에 매주 일요일마다 청와대 관저에 들어와 ‘문고리 3인방’과 저녁까지 회의를 했다. 박 대통령은 거의 동석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이 조리장은 “최순실이 청와대에서 항상 일본식 요리인 ‘스키야키’를 먹었고 관저에서 나갈 때는 김밥을 싸달라고 요구했다”면서 “박 대통령은 세월호 사고 당일도 평소처럼 혼자 관저에서 점심과 저녁을 먹었다”고 말했다. 《월간조선》이 2008년에 보도한 ‘박근혜 인물연구’ 기사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이 좋아하는 간식은 공갈빵, 돼지바라고 한다.
박 대통령은 검소한 식단을 좋아하지만 2016년 8월 11일 이정현 신임 새누리당 당대표를 위해 마련한 만찬에는 바닷가재, 훈제연어, 캐비어 샐러드, 송로버섯, 샥스핀 찜, 한우 갈비 등의 초호화 메뉴를 차려 구설에 올랐다. 박근혜 대통령의 어린 시절을 목격한 이들은 박 대통령이 어머니가 요리할 때 도왔고 북엇국을 잘 끓였다고 증언한다.
38. 박근혜의 미용관(美容觀)
은둔하던 시절, 박근혜 대통령의 머리 손질은 스스로 하거나 최순실 자매 등이 맡았다고 한다. 대통령이 된 뒤에는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당일 청와대에 갔다는 ‘토니앤가이’ 청담점 원장 정송주가 하고 있다. 정씨와 함께 사업을 하고 있는 남편 김대식은 2012년 박근혜 대선캠프에 참여했으며 20대 총선 새누리당 예비 후보로도 등록한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 시절 대변인으로 삼성동을 드나들었던 전여옥은 “처음엔 (최순실이) 머리 해주는 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39. 박근혜의 의상
박근혜 대통령은 서강대 이공학부를 수석 졸업했다. |
대통령의 의상을 책임졌던 최순실·고영태에 따르면 대통령은 요구하는 스타일이 있다고 한다. 일자형이 아닌 허리라인이 들어가는 스타일이면서도 달라붙지는 않는 스타일의 재킷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육영수 여사의 조카이며 비서였던 홍정자 여사는 “박근혜의 한복 맵시는 육영수 발끝에도 못 미친다. 육 여사는 혼자 해 입어도 맵시가 우아했다”고 말했다. 홍정자 여사는 “육영수 여사는 박근혜에게 새 옷을 잘 안 해주고 자기 옷 고쳐 입히고 그랬다”고 말했다. 그래서 새 옷에 집착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이 쓴 책에는 옷과 관련된 단상(斷想)이 많이 나온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오래된 군복바지를 줄여서 내게 입히곤 하셨다. 깡총 짧게 바가지 머리에 국방색 바지를 입은 내 모습은 어린 눈으로 보기에도 참 촌스러웠다. 나는 그 바지를 입는 게 너무 싫었다. 때로는 안 입겠다고 떼를 써보았지만 근검절약이 몸에 밴 어머니에게 옷 투정이 통할 리 없었다.〉
〈의상도 문제였다. 초대받은 행사나 파티를 하나씩 점검하며 그 분위기에 걸맞은 의상을 선별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옷, 구두, 시계, 핸드백 등 필요한 것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학생 신분인 내가 모두 새것으로 구입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의상과 장신구 중 적당한 것을 빌려 착용하기로 결정했다.〉
〈“수석으로 졸업하는데 옷 한 벌 안 해주고 입던 옷을 입으라고 해서 미안하다.” 나는 활짝 웃으면서 괜찮다고 답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표정은 여전히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옷을 깨끗하게 손질해 입는 것이 오히려 내게는 더 뜻깊은 일이었다. 어머니의 한복을 입고 대학 졸업식에 참석했다. 이공학부 수석졸업은 어머니께 드린 나의 마지막 효도선물이었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2014년 한 해 동안 박근혜 대통령이 입은 공식 의상만 122벌이다. 최순실 스캔들 이후 알려진 바로는 이 옷들은 모두 명품이 아닌 최순실 측근 고영태의 작품이었다.
40. 박근혜의 액세서리
최순실은 박근혜의 액세서리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안 상가인 ‘신사시장’에서 주로 샀다고 한다.
41. 박근혜의 결혼관
〈대학을 졸업하던 해 어머니는 내 결혼을 염두에 두고 계신 듯 보였다. 언젠가 봄볕을 즐기며 차를 마시는 동안 어머니가 결혼에 관련된 이야기를 비치셨다.
“네 이상형은 어떤 사람이니?”
“지금까지 한 번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답변을 못 드리겠는데요?”
“곰곰이 생각해 보고 귀띔 좀 해주렴. 좋은 벗을 만나 평생 서로 의지하며 살 수 있다면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거야.”
어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나는 남들과 다를 게 없는 평범한 가정을 일구며 알뜰한 주부로 살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삶은 이미 내게 젊은 날의 꿈으로 막을 내려버린 지 오래다.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가 되고 나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에 연애나 결혼을 꿈꿀 여유가 없었다. 대학생 때는 대통령의 딸이라는 신분 때문에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내 인생에 그럴듯한 연애 한 번 없었다. 사막을 건너는 낙타처럼 묵묵히 젊은 날을 건너왔으나 미련이나 후회는 남지 않았다. 매 순간 가장 최선이라고 여겨지는 일을 선택하며 살아왔고 나름대로 건실한 삶을 꾸렸다는 위안도 있다. 때로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오랜 세월 정답게 늙어가는 노부부를 보고 있으면 그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 더없이 귀하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내가 가져보지 못한 삶에 대한 애틋함인지도 모르겠다.〉
42. 박근혜의 가정관리
〈언젠가 언론 인터뷰 중에 “집에 남자 손을 빌려야 할 때는 어떻게 해결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남자 손을 빌릴 일이 뭔가요?”라고 되물었는데 이는 아마도 뭐가 고장 나면 뚝딱뚝딱 잘 고치시던 어머니를 보고 자란 때문이리라. 지금 나 또한 어머니처럼 웬만한 집안일은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혼자 해결하는 편이다. 전구를 갈아 끼우는 일은 물론 고장이 난 문손잡이도 드라이버를 사용해 덜그럭거리지 않게 나사를 조인다. 공구함만 잘 갖춰져 있으면 어렵지 않게 집안 곳곳을 손볼 수 있다. 어린 날 어깨너머로 배운 어머니의 솜씨를 제대로 써먹으며 살고 있는 셈이다.〉
43. 박근혜의 일기(日記)
〈신당동에 살 때부터 낮에는 마음껏 뛰어놀게 풀어주시면서도 매일 밤 일기를 쓰며 하루를 돌이켜보고 반성하게 하셨다.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쓰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그날의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빠짐없이 쓰고 고쳐야 할 단점은 일기장뿐 아니라 따로 수첩에 적어둔다. 나쁜 버릇이나 습관을 메모하다 보면 의식적으로 고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도움이 될 때가 많았다.〉
44. 박근혜의 여가(餘暇)
〈오늘 TV에서 집게벌레의 생태에 관한 프로를 보았다. 좁쌀 크기의 알을 낳아 곰팡이의 해를 입지 않도록 한 알, 한 알 정성껏 침을 발라 땅속에 차곡차곡 쌓아놓는다.…〉
〈평범하게 산다 해도 행복과 불행은 있기 마련이겠으나 평범한 인생이 부럽기만 하다. TV를 통해서도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보면 마음까지 편안해진다.〉
〈‘중국어회화’ ‘서반아어회화’ 등 저녁때 보는 TV프로의 등장인물들이 부러울 때가 많다. 나도 내 운명의 급격한 변화들이 없었다면 저와 같은 교수의 생활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의 생은 한마디로 투쟁이다. 가장 내가 원하지 않은 생의 방식 그러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TV프로 중 ‘동물의 세계’는 나에게 푸근한 위로를 준다. 살기 위해 고생하는 것은 인간세계와 비슷하나 이토록 복잡한 생각을 해야만 한다든지 이토록 복잡한 사회 구조 속에 살아야 한다든지 하는 얽매임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저녁 ‘신비의 세계’에서 본 코알라의 여러 가지 생태는 참 재미있었고 한때나마 인간세계를, 만사를 잊게 하였다.〉
〈요즘 KBS에서 방영하는 ‘세계의 어린이’라는 프로를 보면서 내가 사실 추구하던 행복, 삶이 바로 저러한 것들이었다고 새삼 깨닫게 된다.〉
〈TV프로 ‘동물의 세계’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다. 뭔가 인간세상을 잊게 해주는 순간이라 더욱 그렇다.〉
45. 박근혜의 죽음론(論)
〈우리의 영혼이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죽음과 동시에 우리 육체를 떠나간다고 하지만, 또 그 영혼은 다른 몸에 의탁하여 이 세상을 다시 오가고 한다지만, 저승에 아무리 좋은 곳이 있다고 해도 우리의 영혼을 참으로 깨끗하고 아름답게 갈고 닦을 수 있는, 또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곳은 오직 이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흔히 이 세상을 바르게 살면 극락세계에 간다고 하지 않는가. 저승에서 인간이 배치될 곳은 바로 이승살이가 정해주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승은 영혼을 닦는 유일한 도장이라고나 할까.〉
46. 박근혜의 인생론(人生論)
〈오랫동안 큰 힘 또는 권력의 비호 아래 지내왔거나 뭐든지 다 들어주는 부모의 보호 아래 금지옥엽으로 자란 사람들은, 그 권내를 벗어나면 참으로 비참한 지경이 되기 쉽다. 무엇보다도 먼저 분노를 다스릴 줄 모른다. 자신의 뜻대로 되었던 세상과는 달리 이제 사사건건 방해와 반대에 부딪히게 되면 그 안에서 조화롭게 문제를 해결할 인내심을 일시에 잃어버리고 극도의 분노에 달하기 쉽다. 그리하여 약간 구부려서 될 일도 꺾어버리고 제동기를 밟아야 할 때 가속기를 밟고…. 이런 경험을 하다 지치면 완전히 자포자기가 되거나 비굴해지기까지 한다. 인생이란 어차피 하나의 싸움이다. 언뜻 겉으로 보기에는 남들과의 싸움인 것 같으나 근본적으로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인 것이다.〉
47. 박근혜의 지옥론(地獄論)
〈자기의 권력을 믿고 큰소리치며 거만하게 번득이던 그의 눈이 아직도 기억난다. 어느 날 또 다른 모습으로 그는 나타났다. 형을 언도받고 오랏줄에 묶여 초췌한 얼굴로 끌려갈 때 그 오만하던 눈빛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가슴에 못을 박았던 사람들. 그때는 가슴 아팠지만 이젠 다 잊었던 사람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신문에서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보자 지난날이,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가는 그들에게 전혀 해를 입히지도 않았고 그럴 의도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지금은 큰 위로가 된다. 그들을 괴롭힌 사람은 따로 있었고 결국 다른 이들에 의해서라기보다 스스로가 지은 잘못들로 인해 고통 속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업(業)’은 결국 자기의 성격이나 행동 양식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니 처음의 생각과 언행에는 선택의 여지나 자유가 있을지 모르나 그 형성이 진행됨에 따라 다시 빠져나가는 일은 이미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흔히 우리는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 끝도 없이 담금질 당하는 곳이 지옥이라고 연상한다. 그런 지옥이 어디 저승길로 들어서야 가는 곳이겠는가. 끝없이 자기 마음을 내리누르는 가책과 수치심, 후회가 바로 지옥인 것이다. 남을 열심히 괴롭히는 자는 자기가 들어가 묻힐 굴을 열심히 파고 있는 중이다.〉
〈착한 사람에게 하늘은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하늘은 벌을 내린다지만 내가 알기로는, 적어도 내가 경험했고 경험하고 있는 이 세상은 그렇게 되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착한 사람이 얼마든지 고통받고 억울하게 살아도 무심한 것이 이 세상이요, 악한 자가 얼마든지 떵떵거리고 살아도 너끈히 용납이 되는 곳이 이 세상이다.〉
48. 박근혜의 지도자론(指導者論)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는 박근혜 대통령. |
〈오늘 《열국지(列國志)》를 다 읽었다. 《열국지》는 어느 의미에서 지도자론이다. 그 수많은 나라의 갖가지 인간상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임금 중심의 이야기가 되다 보니 자연 그렇게 되는 것이다. 지도자는 나라를 지키고 국민이 평안하게 살도록 다스릴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정치의 요체란 무엇인가? 강태공은 “그것은 임금이 먼저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가지는 것”이라 했다.
나라를 바르게 다스림에 있어 그 첫째 조건 내지 그 전제 조건이랄 수 있는 것은 지도자가 자기 마음을 항상 바르게 갖는 것이다. 그 마음이 바로 선 후에야 비로소 나라가 바르게 다스려진다. 그 마음이 바르지 못하게 나갈 때 나라에 망조가 드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항상 깨어 있는 지도자,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끊임없이 정진하는 지도자는 나라와 국민의 복이며 하늘의 축복이며 지도자가 국가와 국민에게 바치는 최대의 봉사인 것이다.
인간의 가장 큰 병통은 오만이라고 하였는데 사람 마음을 병들게 하고 비뚜로 나가게 하는 근원은 거의 항상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쭐한 데서 시작되는 이 마음의 병은 사치와 향락을 부르고 색에 빠지게 하고 눈과 귀를 막아 간신, 충신을 구별 못 하게 하고 충언과 아첨 등을 구분 못 하게 한다. 극심한 분노도 어느 의미에선 오만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항상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자는 하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자이며 그리되면 교만이 스며들 여지가 없다.〉
49. 박근혜의 망국론(亡國論)
〈진시황의 그 혹독한 정치로 진나라는 15년 만에 망했는데 그 멸망의 원인이 된 농민의 봉기는 작은 일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대폭발을 일으키게 된 이유는 그 15년의 세월 동안 쌓인 백성의 원한에 있었다. 가스가 가득 찬 방 안은 눈으로는 언뜻 보이지 않으나 거기에 성냥불같이 작은 불이라도 갖다 대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 바싹 마른 낙엽 위에 던진 담배꽁초가 어이없이 산불을 낼 수도 있는 것이다. “마지막 지푸라기가 낙타 등을 부러뜨린다”는 속담과 같이 그토록 무리해서 등에다 계속 올려놓았던 그 전 과정이 등을 부러뜨린 것이요, 그렇게 메마른 환경을 조성해 온 모든 과정이 산불을 일으키고 만 것이다.〉
50. 박근혜의 ‘수첩론’
〈수첩공주라는 별명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나를 아끼는 사람들은 “인신공격이다” “여성 폄하다”라며 흥분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수첩공주라는 별명이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나의 부모님, 특히 아버지는 늘 수첩을 지니고 다니셨다. 참모들의 이야기든 민원이든 항상 빼곡히 적어두셨고 틈날 때마다 꺼내보며 고민하고 연구하고 생각하셨다. 어머니 역시 전국의 민생 현장을 다니시며 들은 의견이나 민원 편지의 내용을 반드시 수첩에 적은 뒤 실무자들에게 개선을 지시하고 진척 상황을 확인하셨다. 말이나 기억은 잊어버리면 그만이지만 문자로 기록해 놓은 것은 백 년이 흘러도 그대로 보존된다고 믿으셨다. 그런 부모님을 보고 자라서일까? 나 역시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메모하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
51. 최태민과 최순실의 ‘박근혜 고립작전’
‘정윤회 국정개입 문건 유출’ 사건으로 구속 기소됐던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 박관천 전 경정은 “박지만 회장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최순실·정윤회”라며 “‘누나가 최순실·정윤회 이야기만 나오면 최면이 걸린다’고 토로했다”고 말했다. 최태민·최순실의 박근혜 고립작전은 박 대통령이 1982년 신당동을 떠나 성북동으로 이사하면서 본격화된다.
52. 성북동 이사
박근혜 대통령이 1982년부터 3년간 살았던 성북동 자택. |
박근혜 대통령이 1982년부터 3년간 살았던 성북동 자택은 1981년 신기수 경남기업 회장이 무상으로 지어줬다. 신기수 회장은 2007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박근혜 전 대표가 살 집을 지어달라고 내게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품이 많으니까 그걸 다 보관할 수 있게 지어달라고 해서 일부러 지하실을 크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성북동 자택은 300평에 이르며 현재 성북동에서도 비싼 집으로 꼽힌다. 박 대통령은 이후 1984년 성북동 자택을 팔고 장충동으로, 다시 1990년 장충동 자택을 팔고 현재 소유하고 있는 삼성동 자택으로 이사했다.
성북동으로 이사했을 때 동생 박근령씨도 함께 갔다. 이 시기를 회상하며 박근령씨가 언론과 한 인터뷰는 의미심장하다.
— 성북동 생활은 어땠나요.
“성북동으로 이사를 가면서 할 일이 태산 같았다. 신당동 사저는 워낙 좁아서 짐도 못 풀었지만 성북동에서는 짐을 정리할 공간이 생기다 보니 본격적으로 서류를 분류하는 작업을 했다. 총무처와 대학교 도서관학과에서 사람들이 나와서 같이 작업을 했다.”
— 성북동 시절에도 최태민 목사가 박근혜 전 대표의 일에 관여했나.
“새마음봉사단 일과 관련해 거의 매일 의논을 한 걸로 안다. 그런데 육영재단 사건 때문에 후에 들은 구호를 보면, 최태민 목사가 오해받을 일들을 했다는 것이다. 전횡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53. 그들은 박근혜가 최태민·최순실에게 포위됐음을 알고 있었다
① 버시바우 미국대사가 본 박근혜
2007년 대선 당시 버시바우 주한미국대사가 쓴 박근혜 후보 관련 외교 전문은 2011년 위키리크스에 해킹됐다. 버시바우 대사는 한국의 ‘그리고리 라스푸틴’인 최태민이 박근혜의 몸과 마음을 지배해 왔다는 소문이 무성하고 그 결과 최태민의 자녀들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고 썼다.
② 최태민의 의붓아들 조순제의 마지막 인터뷰
조순제는 최태민의 의붓아들로 최태민의 마지막 부인이 데려왔다. 최태민은 공식적으로 아들이 하나도 없다. 다 딸이다. 그러다 보니 구국봉사단부터 시작해서 영남대, 육영재단까지 사실상 도맡아 한 사람이 조순제였다. 조씨는 박 대통령이 이사장을 지낸 영남대 재단 운영에 깊이 관여했고 역시 박 대통령이 이사장을 맡았던 한국문화재단에서 이사를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한 방송사는 최태민의 의붓아들 조순제와 나눈 대화 녹취록을 공개했다. 이 비밀 녹취록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당시 이명박 후보 캠프에서 작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조씨는 녹취록에서 “1970년대 초중반 최태민의 생계가 아주 어려웠다. 생활 자체가 어려웠다. 그런데 1975년 구국선교단을 조직하고 박근혜 대통령을 명예총재에 앉힌 뒤엔 돈 천지였다. 우리나라 재벌들이 돈을 다 냈다. 돈은 최태민이 관리했다”고 말했다. 조씨는 또 “10·26 이후 뭉텅이 돈이 왔는데 관리하는 사람과 심부름하는 사람이 있었다. 최순실이 심부름을 꽤 했다”고 말했다. 조씨는 이 녹취록이 작성된 1년 뒤에 사망했다. 2007년 12월 20일로, 17대 대통령 선거 다음날이었다. 다음은 조씨의 녹취록을 바탕으로 방송사가 보도한 내용의 일부다.
“아이고. 그전에부터도 둘은(박근혜와 최태민) 아주 불가분의 관계라고 봐야지.”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박 대통령은 최태민의 역삼동 집에 사흘에 한 번꼴로 찾아갔다고 한다.
“하여튼 자주 왔어요. 사람들 다 피하게 하고 눈에 안 띄게. 온다고 연락이 오면 다 피하고.”
“둘이 들어갔다 하면 밥은 문간에 갖다놓으면 영감(최태민)이 갖고 들어가고.”
최태민은 박 대통령 동생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자기 가족들도 박 대통령과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차단했다. 구국선교단을 실질적으로 운영한 조순제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내가 혹시 근혜 잡을까 싶어서 (최태민이 경계한 거예요?) 그럼.”
박 대통령이 친동생인 근령, 지만씨와 멀어진 것도 최태민의 이간질 때문이라고 조씨는 말했다.
“거의 맞을 거예요. 그 동생들이 컴플레인하니까 그래서 자기들끼리 거리가 멀어진 거예요.”
③ 육영재단 직원의 증언
《국민일보》 보도에 의하면, 1980년대 육영재단에 근무했던 한 직원은 최태민이 직원들 50~60명 앞에서 여성 속옷이 든 봉지를 들어 올리면서, “박근혜 이사장은 내가 속옷까지 직접 사다 줄 정도로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④ 정두언 새누리당 전 의원
2007년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 때 MB 측에서 박 대통령 검증을 맡았던 정두언은 최근 한 방송에 출연해 “검증을 책임지다 보니까 많이 알게 되잖나”라며 박근혜 대통령과 최태민의 관계에 대해 “그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고 또 아이들이 듣기에는 불편한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그걸 공개한다는 것 자체가… 그런데 그것을 결국 방관했다는 것은 (나도)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2007년 8월 언론 인터뷰에서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를 낱낱이 밝히면 박근혜 좋아하는 사람들은 밥도 못 먹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과 관련해 추가로 밝힐 내용이 있는지에 대해선 “얼마나 더 밝혀질지는 모르지만 이제 더 밝혀질 필요도 없죠. 이 정도면 뭐…”라며 “뭐한 말로 ‘야동’까지 나와야 됩니까? 정말… 정말 충분하죠”라고 말했다.
⑤ 김종필 전 국무총리 증언
2001년 3월 2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 후원회에 참석한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가 박 의원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
2016년 11월 14일 《시사저널》은 박 대통령의 사촌 형부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증언을 보도했다.
— 옛날부터 총재님 이야기를 전혀 안 들었나요.
“전혀 안 듣는 친구야.”
— 이러니저러니 해도 박 대통령에게 바른말 할 수 있는 사람은 김 총재밖에 없지 않습니까.
“없어. 내 말 듣지도 않아. 옛날부터 그랬어요. 자기 아버지, 어머니 말도 안 들었어. 최태민이란 반 미친놈, 그놈하고 친해가지고 자기 방에 들어가면 밖에 나오지도 않았어.”
— 그러니까 최태민과 관련해 별의별 소문이 다 돈 것 같습니다. !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침부터 깜깜할 때까지 뭔 얘기를 하고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지만 들어앉았으니 그렇지. 오죽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정보부장 김재규에게 ‘그 최태민이란 놈 조사 좀 해봐. 뭐하는 놈인지’ 그랬을까. 김재규가 ‘아버지가 조사를 지시한 것’이라고 했더니 ‘근혜’는 ‘맘대로 해보라’며 고함을 지르고 야단을 쳤어요. 아버지한테 찾아가서 울고불고 난리를 부렸지. 그랬던 사람이 지금 대통령이다. 우습지 뭔가.”
⑥ 김해호 증언
김해호씨는 2007년 6월 최태민·최순실 게이트를 맨 먼저 거론했다가 공직선거법 위반 및 명예훼손 혐의로 1년간 실형을 산 인물이다. 9년 만에 그의 폭로는 거의 사실로 입증됐다. 그가 2007년 6월 17일 한 기자회견 내용 중 일부다.
〈박근혜 전 대표는 최태민이라고 하는 사람과 그의 딸 최순실이라는 사람의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자신이 가진 재단조차 소신껏 꾸리지 못하고 농락당하는 사람이 어떻게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겠는가?〉
진실이 밝혀진 후 김해호씨는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제 광화문 앞을 지나는데 한 20여 명 대학생들이 꼭두각시 박근혜를 최순실이 조종하는 그림을 그려놨더라. 속으로 쓴웃음이 나왔다. 나더러 대예언가라고 하는 인터넷 게시글도 봤다. 내가 9년 전 주장한 내용이 사실로 드러나는 것과 관련해 국가적 비극이 된 게 가슴 아프다. 국민들로서는 어이없는 고통이겠지만 나에게는 머리가 쭈뼛 서는 고통이었다. 6개월 트라우마가 6년이 갔다. 지금도 좁은 공간에 가서 밥을 먹으면 한여름이라도 문을 열어놔야 한다.”
⑦ 최씨 일가 운전기사의 폭로
최순실의 승용차를 17년간 몰았던 운전기사는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 1994년에 최태민이 죽었다는데.
“모 기사(박 대통령 옛 운전기사로 1998년 사망)가 그러더라고요. 한번은 대통령이 ‘최 회장(최태민)이 전화가 안 된다’고 하더라. (모 기사가) 아무 소리 안 하고 있으니까 (박 대통령이) ‘두 달째인지 석 달째인지 연락이 안 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얼마 후 다시 모 기사한테 물었다고 하더라. 그러며 ‘석 달째 최 회장 연락이 안 돼요. 집에 가서 알아보라’고 지시했는데, 그래서 (모 기사가) 알아보니 (최태민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 박 대통령이 최태민의 죽음을 한동안 몰랐다는 것인가.
“(최씨 일가가) 안 알려줘서 몰랐던 것이다.”
— 왜 최태민의 죽음을 박 대통령에게 알리지 않았던 걸까.
“최태민의 아들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하더라. 아들들도 신문에서 부고 기사를 보고 찾아왔다.”
— 모친인 임선이도 있었는데 어떻게 최씨가 대장이었는가.
“순실이는 (박 대통령에게 어려운) 이야기를 못 하니까 (임씨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세요’라고 한다. 왜냐하면 할매가 이야기하면 (박 대통령도) 들으니까. 순실이가 보스야(웃음). 순실이가 다 해서 하는 것이다. 할매가 어떻게 하겠느냐. 할매 머리에서 그게 나오느냐? 당연히 순실이가 다 하는 거야.”
— 박 대통령은 최씨 일가의 ‘허수아비’ 비슷한 존재라는 것인가.
“공주라고 보면 된다. 공주는 뭘 모르잖아요? 저 양반(박 대통령)이 참 뭘 모른다. 내가 봤을 때 (박 대통령은) 영혼까지 (최순실이나 최씨 일가에) 뺏긴 사람이야. 거기서 헤어나올 수가 없다. 상징적인 인물이다.”
— 도대체 최씨가 박 대통령의 일상을 어떻게 장악했다는 말인가. 이해가 안 된다.
“(박 대통령 사저의) 경비원부터 전부 이쪽(최씨)에서 보냈다. 옷을 찾아오거나 돈을 (찾아)주는 것도 모두 마찬가지다. 순실이가 시켜서 (박 대통령이 사용하는) 화장품을 사오기도 했다. 저 사람(박 대통령)은 영원한 공주야. 아무것도 (스스로) 못한다.”
— 최씨가 박 대통령에게 이렇게 영향을 미칠 때까지 박지만·박근령 남매는 뭘 했는가. 일각에서는 최씨가 박씨 남매의 접근을 막았다는데 사실인가.
“이 사람들은 철저히 그 남매를 배제했다. 자기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은 (박 대통령에 대한) 전화건 접근 자체를 교묘하게 못 하게 한다. 오죽하면 근령이도 마찬가지로 집(박 대통령의 삼성동 사저)에 들어오지 못했다. 선거할 때도 못 들어왔다. 기사(박 대통령 운전기사)에게 들은 바로는 (최씨가 박 대통령에게) ‘○과장(박지만씨 측과 교류가 있는 인사)이 나쁘다’고 줄기차게 전화를 했다고 하더라. 박 대통령도 (박지만씨 쪽 사람 중에) 유일하게 그 사람과 통화했는데, 결국은 안 하더라. 최씨가 계속 ‘좋은 사람이 아니어서 믿으면 안 된다, 이용한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하더라. 나쁜 이미지를 심어 자기네 이외에는 (박 대통령과) 통화고 뭐고 못 하게 했다.”
— 최씨가 박 대통령 친동생들을 철저하게 박 대통령과 분리시켰다는 얘기인데.
“접촉 자체를 못 하게 했다.”
— 박지만 남매는 이런 상황을 다 알고 있는가.
“알고 있을 것이다. 박지만씨가 왜 몰랐겠느냐. (최씨가 박 대통령과 그 친동생들의) 접촉을 철저히 못 하게 했다.”
— ‘문고리 3인방’이 박 대통령이 아닌 ‘최씨의 종’이란 말이냐.
“그 사람들은 (박) 대통령 사람이 아니다. 순실이의 사람이다. 순실이가 뽑았는데 모두 순실이 사람이다. 그 사람들 모두 순실이하고 정 실장이 뽑은 사람이야. 그 사람들의 종으로 보면 된다. 이 사람들이 (최씨가) 뭐 시키는데 토를 달면 그날로 그만둬야 된다. 순실이 말을 무조건 들어야 해.”
— 이해가 안 된다. 그 사람들은 모두 박 대통령의 보좌관 아닌가. 월급도 받고.
“월급은 거기(박 대통령 측)서 나오더라도 말은 이 사람(최씨) 말을 들어야 돼. 박 대통령은 무슨 이야기를 안 하니까. 자기들이 다 시키고, 연설문도 그렇다. 좋은 건 다 해. 자기들이 보고하지. 야들(박 대통령 측근 인사들)은 거기에 일절 간섭을 못 해. 그저 순실이가 시켜서 하고. ‘순실이 종’이라고 보면 돼.”
— 최씨가 박 대통령의 연설문을 고친 게 밝혀졌는데, 박 대통령의 의원 시절에도 연설문을 고쳤나.
“순실이는 백 번 그러고도 남는다. 정호성, 이재만 등이 이것(연설문)을 쓸 때 보면 밤새도록 하는지 다음날 못 나온다. 나중에 나를 보내 데리고 나오라고 한다. 그러면 (연설문을) 정 실장이 보고 그다음에 순실이가 보고 고칠 것 다 고쳤다.”
— 그때도 최씨가 연설문을 다시 고쳤다는 얘기인가.
“그렇죠. 가(박 대통령 측근 인사들)들 말마따나 ‘(박) 의원님 위에 정 실장이고, 정 실장 위에 순실이’야. 순실이가 대장이고 의원님이 꼴등이야. (최씨가) 하라면 하라는 대로.”
— 박관천 전 경정이 말한 ‘권력 서열 1위 최순실, 2위 정윤회, 3위 박 대통령’이라는 이야기와 같다.
“맞지. 그때부터 계속 그랬어. 순실이가 대장, 그다음은 정 실장, 박 의원은 꼴등.”
—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간다.
“이해가 안 가죠? 정 실장이 고치면 순실이가 ‘그건 안 돼’ 하고 고쳐서 갖다주면 (박 대통령이) 그거 그대로 갖다가 앵무새로(처럼) 이야기하는 거지.”
⑧ 김경래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 증언
김경래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 |
《국민일보》는 김경래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의 증언을 보도한 바 있다.
〈그는 “당시 박근혜는 만나지 말라는 아버지 하명에도 최태민을 몰래 만났다. 박 전 대통령이 주색에 빠진 틈을 타고 기어들어 와 박근혜를 앞세워 각종 이권에 개입한 게 바로 최태민·최순실 부녀”라고 말했다.
김 전 국장이 최태민을 알게 된 것은 1977년 초.
“구국봉사단 여성국장 김모씨와 송모 전 건국대 교수가 수십 장의 문서를 들고 저를 찾아왔어요. 피해 사실을 조목조목 밝히는데, 김씨는 ‘최태민이 영등포 여관에서 자신을 성폭행했다’고 했습니다. 새벽 2시에 도망쳤고, 자신과 같은 여성이 한둘이 아니라며 10여 명의 이름을 거론했지요.”
후배 기자 2명과 함께 확인해 보니 대부분 사실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박 전 대통령 앞으로 친필 편지를 작성했다. 최 목사와 관련한 정보와 비리를 정리해 의전비서관을 통해 박 전 대통령에 전달했다.
“편지에 최태민이 진실한 크리스천이 아니고 성직자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10여 개 주요 교단과 신학교에 졸업 여부를 문의했으나 최태민 이름은 없었다고 말이죠. 영애 박근혜가 비윤리적인 사기꾼 목사에게 놀아나고 있으니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충고했죠.”
그는 박 대통령이 ‘사이비 종교에 빠지지 않았다’고 밝힌 것에 대해 “맹신자, 광신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40년간 최씨 일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겠느냐”고 반문했다. 또 “박 대통령이 혼을 빼앗기지 않고서는 중앙정보부 보고서를 무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했다.
김 전 국장은 “박 대통령은 최태민·최순실 부녀의 정신과 사상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동안 그들의 행사에 참석하고 도움을 준 것”이라며 “최순실은 최근까지도 수시로 점집을 드나들고 점괘를 받아 박 대통령에게 전해줬다”고 했다.〉
⑨ 전여옥이 박근혜에게 등을 돌린 이유
〈“《조선일보》 기자와 인터뷰하는 걸 보고 나서다. 기자가 “영애 시절 최태민이 박 대표를 앞세워 전횡을 저지르고 엄청난 부패를 저질렀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 대표의 목에 힘줄이 파랗게 솟았다. 그러고는 ‘최태민 그 양반은 나를 위해서 너무나 훌륭한 일을 많이 해줬는데 모함과 질시를 받아서 고초를 많이 겪었다. 그리고 다 조사해 봤는데 실체가 없지 않으냐’고 답했다. 박 대표가 인터뷰 자리를 박차고 나갈까 봐 물을 건넸더니 손을 떨고 있더라.”
대변인 시절의 얘기다. “최태민의 꿈에 육영수 여사가 나타나 ‘근혜한테 말을 전해달라. 슬퍼 마라. 너(근혜)를 위해서 길을 비켜준 거다. (근혜는) 아시아의 지도자가 될 거다’라고 했다는 얘기를 자랑삼아 하더라. 당 대표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 대변인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섬뜩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면 ‘뭐 이런 나쁜 사람이 다 있냐’며 내쫓아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54. 전두환이 건네준 6억원의 행방
10·26 후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금고에 들어 있던 10억원 중 6억원을 예우 차원에서 받았다. 이 사실은 박근혜 대통령도 여러 차례 인정한 것이다. 6억원은 2016년 현재에도 거액이지만, 1979년에는 상상을 초월했다. 당대 최고 부동산이던 대치동 은마아파트를 30채가량(1978년 31평형 분양가 2090만원)이나 살 수 있었으며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화폐가치계산’ 계산 결과 2015년 기준 34억원에 달한다.
박근령의 남편 신동욱은 “그 6억원은 당시 아파트 300채를 살 돈인데, 최태민이 박근령에게 2000만원짜리 아파트 한 채를 얻어줬다”고 말했다. 그는 “박지만도 비슷한 가격의 집을 받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신동욱은 그러면서 “궁금한 건 나머지 298채 가격의 돈은 어디 갔냐”고 했다. 두 동생의 집을 최태민 측이 구해 주었다는 것은 이때부터 이미 박근혜·최태민은 통장을 같이 쓴 게 아니냐는 의문으로 확산됐다
55. 1998년 정계 데뷔와 국회의원 당선
박근혜 대통령은 1998년 4월 2일 대구 달성 보선에서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으로 정권이 교체되어 처음 야당이 된 한나라당은 충격에 휩싸였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한나라당에 1998년 4월 2일 예정된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는 당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선거였다. 그런 시점에 문경 예천의 주민들이 나에게 이번 선거에 출마해 달라는 뜻을 전해왔다. 문경 예천은 과거 아버지가 젊은 시절 교편을 잡으셨던 곳으로 나와도 인연이 있었다. 그곳 주민들은 내가 출마 결심만 해준다면 ‘선거운동은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나서서 하겠다’는 고마운 뜻을 전해왔다.… 그런데 사정이 생겨 달성군으로 출마하게 됐다. 여당 후보(고 엄삼탁 전 안기부 기조실장)는 달성군 출신으로 지역을 탄탄히 관리해 온 사람이었다. 자금과 조직력이 풍부할 뿐 아니라 정부 여당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하루는 나를 돕던 의원 한 분이 찾아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선거자금이 얼마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했다. 나의 답변은 간단했다. “없습니다.” 그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니 그래도 최소한의 비용은 있어야지 운동원들 밥은 먹일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제 전 재산이라야 살고 있는 집 한 채와 몇천만 원 정도입니다. 현금을 동원하라면 법정 한도액만큼은 모아보겠습니다.”… 박근혜 캠프가 돈이 없어 고전한다는 신문기사가 나간 뒤 시장에 가면 여러분이 몰려들어 천원, 2천원 지폐가 담긴 비닐봉투를 내밀었다. 약방에 가면 박카스며 피로회복제를 손에 쥐여주었고 밥집에 가면 한사코 음식값을 받지 않았다.… 당선이 확정된 순간 선거전략본부에 함성이 울려 퍼졌다.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어려웠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스물두 살에 어머니를 잃고 스물일곱 살에 아버지마저 잃은 뒤 겪은 고통의 시간과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라 잠시 숙연해지기도 했다.〉
56. 1998년 선거부터 최태민·최순실 일가의 정치자금이 흘러들어왔다
최순실의 전 운전기사 김모씨는 자신이 1998년 국회의원 보궐선거 때부터 최씨 일가 측에서 돈을 받아 박근혜의 자택으로 전달했다는 증언을 했다.
김씨의 증언에 따르면, 1998년 4·2 보궐선거 개시 직전 “‘할매’(최씨의 모친 임씨)가 ‘우리 딸 너이(넷)하고 내(나)까지 해서 5000만원씩 내 2억5000만원인데, 니(네)가 잘 가지고 내려가라’” “돈 가방은 1m가 넘는 길이의 밤색 여행용 가방이었다” “이후 우연히 가방 속의 돈뭉치를 보게 됐다”면서 자동차로 임·최씨와 함께 돈 가방을 싣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살던 대구 달성군 아파트로 내려갔다고 한다. 2000년 실시된 16대 총선에서도 “1998년과 똑같았다”며 최씨 일가가 박 대통령의 선거자금에 관여했다고 말했다.
57. 첫 선거부터 최순실 일파가 함께 있었다
대구 달성 선거 때 박근혜 후보는 현지에 집을 얻어 선거운동을 했는데 이때 수발을 든 것도 최순실이었다.
58. 신촌 커터 피습 사건 때도 최순실 일파가 병실을 지켰다
2006년 박근혜 대통령이 커터에 맞아 부상을 당했을 때에도 최순실의 사람들이 병원을 지켰다. |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관계자에 따르면, 2006년 5월 20일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서울시장 후보 지원 유세에 참가 중 괴한이 휘두른 커터에 왼쪽 뺨을 크게 다쳤는데, 이때 병실에서 숙식을 같이하며 박 대통령의 곁을 지킨 이들도 바로 최순실·최순득 자매였다.
전여옥 전 대변인도 최근 발간된 책에서 이렇게 썼다.
“그런데 박 대표가 커터칼 테러를 당했을 때도 그 두 아가씨가 박 대표 옷을 야무지게 챙겨왔더라. 병원에 찾아온 박지만씨에게 (그 아가씨들이) 친척이냐고 물으니 모른다더라.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최순실의 친척인 것 같다. 젊은 시절 최순실과 닮았다. 최순실은 20년 전 내가 KBS 기자 시절에 만난 적이 있다. 야인 박근혜를 인터뷰할 때 동행한 2명 중 거침없이 행동한 여자가 바로 최순실이다.”
59. 박근혜 ‘오픈 하우스’ 행사 때도 최순실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나라당 대표 시절이던 2004년 11월 22일 저녁 출입기자들을 서울 삼성동 자택으로 초청해 만찬을 함께했다. 기자단 20여 명은 이날 오후 6시30분쯤 박 대표의 자택에 도착했고 한나라당에서는 주호영·유기준 의원과 임태희 대변인이 참석했다. 다음은 당시 보도된 내용이다.
〈박 대표는 식사 전 거실과 각 방을 안내하며 액자와 소품들에 얽힌 사연을 소개했다. 거실에는 최근 한나라당 연수회 때 곡성군 이장으로부터 선물 받은 수석이 높이 있었다. 박 대표는 “사람이 공손히 인사하는 모양 같지 않으냐. 국민에게 공손하고 겸손한 정치를 해달라”는 뜻으로 선물을 받았다고 말했다. 거실장 위에는 동생 지만씨와 결혼할 예정인 ‘예비 올케’ 서향희씨와 ‘예비 사돈들’과 찍은 두 장의 사진이 놓여 있어 눈길을 끌었다. 또 박 대표가 1990년쯤 손수 뜬 난초 자수도 걸려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1971년작 유화그림이 있었고 주방에는 고 육영수 여사의 ‘한반도 자수’가 걸려 있었다. 박 대표는 서재로 들어서자 즉석에서 피아노로 ‘꽃노래’라는 곡을 잠시 연주해 주기도 했다. 한미관계 전문가인 미국 돈 오버도퍼 교수의 ‘두 개의 코리아’가 책상에 놓여 있어 눈에 띄기도 했다.
박 대표는 기자단에서 꽃다발과 와인 보졸레 누보를 선물하자 “강남에서 산 꽃이라면 노 대통령이 싫어하지 않겠느냐”며 노 대통령에게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저녁 식사가 나오자 ‘계영배’로 백세주를 권했다. 박 대표는 “‘계영배’는 옛 선비들의 과욕을 삼가기 위한 뜻이 담겨 있다”면서 “스스로도 경계로 삼기 위해 손님이 올 때면 자주 권한다”고 말했다.
백세주를 마시며 기자단에 건배사를 제의했다. 일부 기자들 중에는 ‘2007년 집권을 기원한다’ ‘한나라당 색깔이 더 다양해야 한다. 그것을 겁내 하는 것 같다’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백세주가 몇 잔 돈 뒤에는 폭탄주가 한 잔씩 돌아갔다. 그러나 전통주 애호가로 알려진 박 대표는 백세주는 마셨지만 폭탄주는 마시지 않았다.〉
전여옥 전 의원은 당시를 기억하면서 최근 발간된 자신의 책에 이렇게 썼다.
〈“박 대표가 오픈 하우스(집 개방)를 해 기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한 적이 있다. 나도 그때 처음 가봤다. 그릇이 좋아 물어보니 박 대표가 ‘저를 도와주는 분께서 빌려주셨어요’ 했다. 그릇 나르는 20대 후반과 30대 초반 아가씨 2명이 보였다. 박 대표의 비서가 친척이라고 말해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한나라당 출입기자가 150명 정도 되는 데다 정치반장끼리, 2진끼리, 3진끼리 자리를 나누다 보니 초대 자리가 10번쯤 마련됐는데, 그때마다 그 아가씨들을 봤다. 그들은 젊은 시절 최순실과 닮았다.〉
60. 탄핵 동기 노무현과 박근혜
2005년 9월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만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 |
〈2005년 6월 24일 노무현 대통령이 여권 핵심 11인 회의에 참석한 다음부터 ‘연정(聯政)’이라는 말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처음에는 소연정 얘기와 대연정 얘기가 섞여 나오더니 나중에는 노 대통령이 정말 원하는 건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나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하지만 연정을 하자는 대통령의 구애는 끊임없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대통령의 말은 시시각각 변했다.… 대연정에 대해 나는 진심으로 대통령에게 몇 가지 충고를 했다.
“권력이란 국민이 부여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권력을 나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권력을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만큼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겁니다. 여소야대일 때 힘들다고 하시는데 총선 이후에는 여대야소였지 않습니까. 대통령께서 경제에 전념하셔서 선거로 국민의 표심을 얻어야 합니다.”〉
61. 박근혜와 촛불집회
박근혜 대통령은 2005년 연말 서울 명동에서 자신의 정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촛불집회를 가졌다. 노무현 정부의 사학법 날치기 원천 무효를 선언하는 장외투쟁이었다. 11년 후 박 대통령은 그 촛불집회의 역습을 받고 있다.
〈우리가 처음 가두투쟁에 나선 곳은 명동이었다. 그곳에서 집회를 하고 날치기 사학법의 부당성을 알리는 홍보물을 시민들에게 배포했다. 하필 그해 가장 낮은 기온을 기록한 날이었다. 잠시만 서 있어도 발이 꽁꽁 얼고 내복을 껴입고 스웨터를 껴입어도 살 속으로 한기가 파고들었다.〉
62. 박근혜 어록(語錄)
“휴전선은요?”(고 박정희 대통령 사망 소식을 들은 뒤)
“대전은요?”(신촌 현대백화점 앞 테러로 수술을 받고 의식을 회복한 뒤)
“참 나쁜 대통령.”(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습니다.”(친박계 공천 학살 뒤)
“오만의 극치.”(이재오 의원을 향해)
“살아서 돌아오십시오.”(18대 총선 직전 탈당한 친박계들에게)
63. 선거의 여왕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2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 광장에서 열린 제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국민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
박근혜 대통령이 당대표로 선거 캠페인을 지휘할 때 한나라당은 연승을 거듭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총 3번의 선거를 당대표 또는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진두지휘하며 승리로 이끌었다.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이 121석을 가져 열린우리당의 과반 의석 확보를 막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원래 탄핵 정국에서 열린우리당 180석 VS. 한나라당 60석까지 밀릴 것으로 예상되던 것을 크게 반등해서 이 정도로 막아낸 것은 박근혜의 공이라고 평가된다.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워낙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정권에 대한 반대여론이 커서 이기기 쉬운 선거였지만 접전지였던 대전에서는 열린우리당이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박 대표가 서울 유세 도중 괴한이 휘두른 커터에 얼굴을 피습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수술 직후 깨어난 박근혜가 당직자에게 첫마디로 “대전은요?”라고 물은 것이 화제가 됐고, 결국 대전시장 판세가 역전됐다. 이때 한나라당은 호남과 제주를 제외한 광역자치단체 12곳을 모조리 이기는 역대 최고의 승리를 거둔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명박 대통령과 가까운 친이계가 한나라당 당권을 장악하면서, 친박계 현역 의원이 대거 공천에서 탈락했다. 이에 불복한 친박계 인사들이 대거 탈당하여 친박 무소속으로 출마하거나 친박연대라는 당을 급조해 출마했고 박근혜 대통령은 “저도 속았고 국민도 속았습니다”라고 했다. 친박연대는 지역구 6석, 비례대표 8석(정당 득표율 13.8%)으로 14석이나 의석을 확보했고 친박으로 분류되는 약 16명의 무소속 지역구 의원도 당선되었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근혜는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됐다. 당시 한나라당은 총선과 대선 필패라는 위기감에 싸여 있었으나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젊은 인사를 영입하였으며, 경제민주화와 같은 개혁적 공약을 내걸며 152석의 단독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전까지 박 대통령은 자신이 지휘한 선거에서 진 적이 없었다.
64. 박근혜의 세 차례 담화와 탄핵 후 발언(요약)
2016년 10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하면서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
1차 담화(2016년 10월 25일)
최순실씨는 과거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으로 지난 대선 때 주로 연설이나 홍보 등의 분야에서 저의 선거운동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이나 소감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일부 연설문이나 홍보물도 같은 맥락에서 표현 등에서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취임 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은 일부 자료들에 대해 의견을 들은 적도 있으나 청와대의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두었습니다. 저로서는 좀 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인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치고,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2차 담화(2016년 11월 4일)
최순실씨 관련 사건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실망과 염려를 끼쳐드린 점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무엇보다 저를 믿고 국정을 맡겨주신 국민 여러분께 돌이키기 힘든 마음의 상처를 드려서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저와 함께 헌신적으로 뛰어주셨던 정부의 공직자들과 현장의 많은 분, 그리고 선의의 도움을 주셨던 기업인 여러분께도 큰 실망을 드려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국가 경제와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바람에서 추진된 일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특정 개인이 이권을 챙기고 여러 위법 행위까지 저질렀다고 하니 너무나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입니다. 이 모든 사태는 모두 저의 잘못이고 저의 불찰로 일어난 일입니다. 저의 큰 책임을 가슴 깊이 통감하고 있습니다.
어제 최순실씨가 중대한 범죄 혐의로 구속됐고, 안종범 전 정책 조정 수석이 체포돼 조사를 받는 등 검찰 특별 수사본부에서 철저하고 신속하게 수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검찰은 어떠한 것에도 구애받지 말고 명명백백하게 진실을 밝히고 이를 토대로 엄정한 사법처리가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번 일의 진상과 책임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이미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에도 검찰의 수사에 적극 협조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필요하다면 저 역시 검찰의 조사에 성실하게 임할 각오이며 특별 검사에 의한 수사까지도 수용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저는 청와대에 들어온 이후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염려하여 가족 간의 교류마저 끊고 외롭게 지내왔습니다. 홀로 살면서 챙겨야 할 여러 개인사를 도와줄 사람조차 마땅치 않아서 오랜 인연을 갖고 있었던 최순실씨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었고, 왕래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곁을 지켜줬기 때문에, 저 스스로 경계의 담장을 낮췄던 것이 사실입니다. 돌이켜보니 개인적 인연을 믿고 제대로 살피지 못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에게 엄격하지 못한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 스스로를 용서하기 어렵고, 서글픈 마음까지 들어 밤잠을 이루기도 힘이 듭니다. 무엇으로도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드리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 국민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해드리겠다는 각오로 노력해 왔는데 이렇게 정반대의 결과를 낳게 돼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입니다.
심지어 제가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거나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데,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리나라의 미래 성장 동력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기울여온 국정 과제들까지도 모두 비리로 낙인찍히고 있는 현실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일부의 잘못이 있었다고 해도 대한민국의 성장 동력만큼은 꺼뜨리지 말아주실 것을 호소드립니다.
다시 한 번 저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국민 여러분께 용서를 구합니다. 이미 마음으로는 모든 인연을 끊었지만, 앞으로 사사로운 인연을 완전히 끊고 살겠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이번 수사를 통해 잘못이 드러나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며, 저 역시도 모든 책임을 질 각오가 돼 있습니다.
3차 담화(2016년 11월 29일)
저의 불찰로 국민 여러분께 큰 심려를 끼쳐드린 점 다시 한 번 깊이 사죄드립니다.
이번 일로 마음 아파하시는 국민 여러분의 모습을 뵈면서 저 자신 백 번이라도 사과를 드리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다 해도 그 큰 실망과 분노를 다 풀어드릴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면 제 가슴이 더욱 무너져 내립니다.
국민 여러분, 돌이켜보면 지난 18년 동안 국민 여러분과 함께했던 여정은 더없이 고맙고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1998년 처음 정치를 시작했을 때부터 대통령에 취임하여 오늘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마음으로 모든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단 한 순간도 저의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고 작은 사심도 품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지금 벌어진 여러 문제 역시 저로서는 국가를 위한 공적인 사업이라고 믿고 추진했던 일들이었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개인적 이익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은 결국 저의 큰 잘못입니다.
이번 사건에 대한 경위는 가까운 시일 안에 소상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그동안 저는 국내외 여건이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길인지 숱한 밤을 지새우며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습니다. 이제 저는 이 자리에서 저의 결심을 밝히고자 합니다.
저는 제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습니다. 여야 정치권이 논의하여 국정의 혼란과 공백을 최소화하고 안정되게 정권을 이양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 주시면 그 일정과 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저는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하루속히 대한민국이 혼란에서 벗어나 본래의 궤도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국회 본회의 탄핵안 의결 후 국무회의 발언(2016년 12월 9일)
오늘(9일) 오후에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안보와 경제가 모두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서 저의 부덕과 불찰로 이렇게 큰 국가적 혼란을 겪게 되어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밤낮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일에 여념이 없는 국무총리와 각 부처 장관을 비롯한 모든 공직자 여러분께 더 많은 어려움을 드리게 되어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저는 국회와 국민의 목소리를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지금의 혼란이 잘 마무리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앞으로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절차에 따라서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과 특검의 수사에 차분하고 담담한 마음가짐으로 대응해 나갈 것입니다.
65. 결국 무너지고 만 종북 세력에 대한 ‘최후의 방파제’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 5년을 채우지 못하고 퇴진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4년 정도의 기간 동안 박 대통령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기도 했다.
첫째, 한미연합사령부의 전시작전권 전환을 무기 연기했다. 둘째, 전교조를 법외노조화했다. 셋째, 헌법재판소를 통한 통합진보당의 해산을 이끌어냈다. 넷째, 20년 동안 과거 정권이 못 했던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추징금을 강제 징수했다. 다섯째, 한미 핵연료 재처리 협상을 성공리에 끝냈다. 여섯째, 방위산업 비리 척결을 추진했다. 일곱째, 북한에 대한 무분별한 퍼주기 정책을 중단시켰다. 여덟째, 북한 핵미사일에 대한 최소한의 자위 조치인 사드를 도입하기로 했다. 아홉째, 좌경화 일색인 역사교과서를 국정화시켰다. 열째, 공무원 연금개혁을 시도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 초부터 세월호 사고에 발목을 잡혔고 사사건건 반대하는 야당 때문에 마음껏 국정을 펼쳐보지도 못했다. 여기에 친노(親盧) 못지않게 외곬인 친박(親朴) 세력의 오만함과 대통령 스스로 최순실 일가에게 눈과 귀가 막혀 불통(不通)으로 국민들 눈에 비치면서 ‘선거의 여왕’ 때 보여줬던 그 정확했던 민심 읽기가 오독(誤讀)이 되고 말았다.
주변에 충신이라도 있었다면 비극을 막을 수 있었겠지만 ‘문고리 3인방’은 후한(後漢)시대 십상시들처럼 주군의 총명을 가릴 뿐이었으며, 검사 출신 비서실장과 민정수석은 십상시들의 전횡을 막기는커녕 외면하거나 동조하고 말아 끝내 종북·좌경 세력에 대한 최후의 보루가 어이없이 붕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