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은 인간들의 동화속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의 축소판 요정이 아니다.
땅의 물질과 미세 장 사이에서 특정 원소를 움직이는 의식이다.
신을 대리하지도 사람을 섬기지도 않는다.
자기가 맡은 흐름을 지킨다.
그들의 역할은 원소로 나눈다.
땅의 정령은 돌, 뿌리, 토양, 집의 기초를 다진다.
느리고, 경계를 좋아하며, 약속과 자리를 중시한다.
물의 정령은 강, 비, 샘, 체액과 감정을 순환시킨다.
흐름이 막히면 탁해지고 흘러야 맑아진다.
공기의 정령은 숨, 바람, 소리, 생각의 이동을 맡는다.
가볍고 빠르며, 정체된 공간이나 방을 싫어한다.
불의 정령은 열, 변태, 씨앗의 힘, 의지와 소화의 불을 지킨다.
억누르면 꺼지고, 멋대로 키우면 태운다.
이 네 줄기 위에 장소의 정령이 있다.
나무, 산, 우물, 오래된 집, 교차로.
그곳은 각 원소가 뭉쳐져 한 얼굴의 존재로 모인 자리다.
그곳에 가면 강렬한 무언가의 존재가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모두가 같은 흐름을 맡지는 않는다.
작은 흐름을 맡은 이와 한 숲 전체를 맡은 이가 다르다.
그들과 소통하는 법은 숭배도 통제도 아니다.
그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보라.
말을 걸 수는 있으나 소원을 빌거나 인간의 욕망을 처리하는 존재로 부르면 그들과의 연결이 닫힌다.
땅을 더럽히고 물을 흐름을 막고 불을 함부로 다루면서 정령의 도움을 청하는 것은 욕심이고 계약 위반이다.
보이는지 보다 존중이 먼저다.
자리에 인사하고, 가져간 만큼 남기고, 필요 없는 소음을 줄이고 진심으로 존중한다면 그들은 응답한다.
우리 시야에 안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이 물질적 3차원 감각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눈은 반사되는 빛을 읽고, 정령은 그 빛보다 한 겹 미세한 밀도에 있다.
장이 두꺼우면 거름망이 두꺼워져 안 보인다.
예민한 아이, 숲에 오래 머문 사람, 밀도의 장이 얇아진 밤에 언뜻 느껴지는 것은 진동이 상승하거나 눈이 좋아서가 아니라 밀도의 장이 잠시 얇아져서다.
그들도 성장하는 존재이다.
다만 인간처럼 에고적 경험으로 성장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맡은 원소가 맑아지고 다루는 범위가 넓어지며 더 큰 장의 일원이 되는 쪽으로 성장한다.
오염된 물가의 정령은 탁해지고, 잘 흐르는 숲의 정령은 또렷해진다.
다른 존재와 계약을 남용하면 그들도 왜곡된다.
자유 의지가 인간만큼 있지는 않으나, 완전히 고정된 존재도 아니다.
인간이 5차원 밀도에 있었을 때 즉 형태가 가벼운 밀도에서는 정령이 환상이 아니라 일상의 이웃이었다.
나무와 강과 불이 말로 통하고, 아이도 그 존재를 분리된 상상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로 알았다.
3차원으로 밀도가 무겁게 내려앉으며 물질을 생존의 도구로 좁힌 것이다.
보이지 않게 된 것은 정령이 떠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점으로 인한 감각이 그 문을 닫은 것이다.
잠시 그들이 보인다고 해서 5차원 진동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3차원 밀도의 장이 얇아지면 보이거나 느껴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의 관계다.
잠시 보여지더라도 그들을 숭배하고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기보다는 그들의 자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그들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https://x.com/BridgeKeeper_J/status/2097475301051879758
첫댓글 고맙습니다
땅을 더럽히고 물을 흐름을 막고 불을 함부로 다루면서 정령의 도움을 청하는 것은 욕심이고 계약 위반이다.
보이는지 보다 존중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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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몰라라~~하는 현대인에게 생각하게 끔 하는 문구입니다.
고맙습니다
지구에 존재하는 생물 ㆍ무생물
숭배하라!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