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규 시인의 시집 『설산 아래에 서서』를 읽다가 떠오른 말이 있다.
“낭만적인 환상과 욕망에 의해 재구성된 자연, 현실의 외부인이나 여행자의 시선으로 포착하는 ‘풍경’으로서의 자연, 서정적인 감흥과 동화(同化)의 대상으로서의 자연, 현실과 고통을 상쇄해주고 치유해주는 완충제로서의 자연은 이제 그 역할이 만료되었다”는 김수이(金壽伊) 평론가의 말 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시집을 하나의 테마로 묶는 것을 경계하는 편이고 또 그렇게 묶인 시집을 기피하는, 선입견 같은 것이 있다. 최영규 시인의 산행 소식과 그 후속 시편을 간간히 대하면서(그 기간이 길었기에) 일종의 부러움에 가까운 시샘이 내게는 있었다. 주방에 박혀 ‘세계 테마 기행’ TV 프로나 보는 내게는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들텐데……’
이번 최 시인의 시집을 대하면서 그 부러움이 바뀌었다. 김수이 평론가의 말처럼 최 시인은 ‘자연의 만료된 그 역할의 시점을 벗어나’ 있는 것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산악체험은 일반적인 등반 수준을 넘어선 죽음의 체험에 닿아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시집에는 극악한 육체적 한계에 이른 체험과 죽음에 잇닿아 있는 체험이 주는 전율이 깔려 있었다. 어쩌면 그 극악한 전율적 체험이 카타르시스를 동반할 터이고, 그래서 그 산행이 주는 중독을 긴 시간 이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의 체험에 이르는 중독이라. 진정성은 저절로 담보되는 셈이다. 이런 점은 짜장 부럽다.
시를 한 편 보는 것으로 소회를 마친다. 시는 간단하다. 그런데, 간단하지 않다.
하늘마저 얼어붙은 정상에 풍경 따윈 없었다. 적막을 뒤집어쓴 허공만이 나를 반길 뿐이었다. 얼음의 숨결이 내 숨결을 막았다. 찰나의 환호성마저 바람이 잘라먹었다. 하지만 신神은 끝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정상엔 아무도 살지 않았다
(「정상엔 아무도 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