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漢詩 한 수, 허욕에 대한 질타
澤國江山入戰圖,(택국강산입전도), 강남 일대 강산이 전쟁에 휘말렸으니,
生民何計樂樵蘇.(생민하계락초소). 백성들이 무슨 수로 즐거이 나무하고 풀을 베리오.
憑君莫話封侯事,(빙군막화봉후사), 권하건대 그대여 봉작(封爵)에 대해선 말을 마시오.
一將功成萬骨枯.(일장공성만골고). 장수 하나가 공을 세우면 만 명이 마른 해골로 변한다오.
―‘기해년(기해세·己亥歲)’ 조송(曹松·828∼903)
* 己亥(기해):당희종 건부 6년(879년)의 간지(干支). 간지: 천간과 지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를 십간(十干)이라고 하고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를 12지지라 한다.
* 澤國(택국):일반적으로 강남 각 지역을 의미. 호수와 늪(湖泽)이 사방에 분포되어 있다.
* 樵蘇(초소):초어(樵渔)라고도 한다. 나무를 하고 고기를 잡는다는 의미이다.
✵ 조송(曹松, 828-903, 75세)은 당나라 서주(舒州) 사람. 자는 몽징(夢徵)이다. 젊었을 때 생활이 곤궁했고, 전란을 피해 홍도서산(洪都西山)에 거처했다. 이후 건주자사(建州刺史) 이빈(李頻)에게 가서 의지했다. 이빈이 죽고 난 뒤 강호를 떠돌면서 빈곤과 근심으로 영락했다. 소종(昭宗) 광화(光化) 4년(901) 70여세의 고령으로 왕희우(王希羽), 유상(劉象), 가숭(柯崇), 정희안(鄭希顔)과 함께 진사에 합격하여 당시 ‘오로방(五老榜)’이라 불렸다. 나중에 비서성정자(秘書省正字)와 교서랑(校書郞)을 지내다가 죽었다.
그의 시는 대부분 여행과 관련된 내용이다. 시풍은 가도(賈島, 779-843)와 비슷하나 경지가 깊고 심오하며 글자 하나 구절 하나에 공을 많이 들였다. 사회 제일 낮은 계층에서 살았기에 민초의 질고를 동정했고 전쟁을 증오했다. 현실에 불만을 가졌으나 공명에는 열중해 여러번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고령에야 진사에 합격했다. 역사속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평생 공부만 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공명을 이루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조송은 그나마 행운이라 할 만하다. 벼슬길은 별로지만 문장으로서는 인정을 받았다. 그의 시중 마지막 구절은 천고절구(千古绝句)라 평가를 받는다. 원래 문집 3권이 있었다. 『전당시(全唐詩)』에 시가 2권으로 실려 있다.
지위에 연연하는 지배 계층의 허욕(虛慾)을 질타한 반전의 노래. 안사의 난(安史之亂, 755-763)을 계기로 당(唐) 제국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고 농민 봉기로 인한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시인의 생애로 보아 시제에서 말하는 기해년은 당 말엽인 879년, 중원에서 봉기한 황소(黃巢)의 난이 한창 기세를 떨치던 시기였다. 주로 황허 이북 지역에서 전쟁이 잦았던 데 비해 7년 이상을 끈 황소의 난은 위로는 장안, 아래로는 광둥 지역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방대했다. ‘강남 일대 강산이 전쟁에 휘말렸다’고 말한 건 이 지역이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다는 방증이다.
나무하고 풀을 베는 건 백성들이 최소한의 생활을 위해 선택한 가장 원시적인 활동. 애당초 즐거울 리 없는 고달픈 노동이지만 시인이 굳이 ‘즐거이’라 말한 건 전쟁의 위험에 대비해 볼 때 그렇다는 것이겠다. 하지만 전쟁에 동원되면서는 이마저도 맘 편하게 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 고초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 와중에도 지배 계층에서는 전과(戰果)를 논하고 작위와 상급(賞給)을 따지고 있다. ‘장수 하나가 공을 세우면 만 명이 마른 해골(骸骨)로 변한다’는 준엄한 질타 속에 저들의 탐욕을 향한 시인의 분노가 응축되어 있다.
조송은 남루한 차림으로 당나귀를 타고 다니며 스러져 가는 제국의 명운을 시로 읊은 것으로 유명하다. 줄곧 과거에 실패했으나 독서로 쌓은 내공을 밑천으로 일흔하나 뒤늦은 나이에 마침내 진사 급제했다는 전설적 인물이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 〈이준식의 漢詩 한 수(이준식, 성균관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동아일보 2024년 02월 09일(금)〉, Daum∙Naver 지식백과/ 이영일 ∙ 고앵자 생명과학 사진작가 ∙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
첫댓글 亂舞
亂자는 두 사람이 흩어진 실을 정리하여 타래로 감는 모양에서 유래된 것으로 ‘정리하다’(arrange)가 본뜻인데, ‘뒤섞이다’(jumble) ‘어지럽히다’(disarrange) 등으로도 쓰인다.
舞자는 ‘춤추다’(dance)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양손에 쇠꼬리 모양의 물건을 들고 춤을 추는 무당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이것이 ‘없다’(nothing)는 뜻으로도 활용되는 예가 많아지자, ‘춤추다’는 뜻을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두 발자국 모양을 본뜬 ‘舛’(천)이 첨가됐다.
亂舞(난:무)는 ‘한데 뒤섞여 어지럽게[亂] 춤을 춤[舞]’이 속뜻인데, ‘함부로 나서서 마구 날뜀’을 비유적으로 이르기도 한다. 당송팔대가 유종원(773-819)이 남긴 명언
“예의 큰 뿌리는
난잡한 것을 방지하는 데 있다.”
禮之大本, 예지대본
以防亂也. 이방란야
- 柳宗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