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887호
그 절
전윤호
산속에서 절을 잃었네
분명 그곳에 있지만
길이 지워졌지
지나가는 천둥 번개 때문일까
안내판은 보이지 않고
숲은 닫혀 있었네
산이 있으면 길이 있고
끄트머리에 매달린 암자도 있는 법
날이 저문다 해도 가겠네
초롱꽃 한 무더기 마음을 밝히면
산짐승 으르렁대는 저 어둠 너머
스스로 반기는 풍경 소리 들리지 않겠나
- 전윤호의 뉴스레터 <시 뿌리는 곰> 5월 23일자
***
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입니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날 대체 휴일이지요. 그래서 골랐습니다.
전윤호 시인의 「그 절」입니다.
유난히 절을 잘 다루는 시인이지요. 詩와 寺와 닿아 있으니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동국대 사학과를 나온 이력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전윤호 시인은 비록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불교의 철학이랄까 불심이랄까... 그런 느낌을 주는 시편들을 제법 많이 썼습니다.
- 개심사, 수면사, 전당사, 도피안사, 실연사, 소양사, 달빛사, 도원사, 천은사, 법흥사 발전소, 절터, 폐사지, 절터, 보원사지, 서산마애삼존불, 와불, 금강경 읽는 밤 - 등등 말입니다.
시집을 낼 때마다 절 하나는 꼭 짓고 마는 것이니,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절을 지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전윤호 형이 그러더군요. 종교는 인류의 아주 "오래된 거짓말" 중 하나라고 말입니다. 저도 형의 말에 공감합니다.
제 생각을 좀 더 보태자면, 종교란 잘 쓰면 약이 되고 잘못 쓰면 독이 되는 거짓말 중 으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산속에서 절을 잃었다는 화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그는 왜 깜깜한 밤중에 산에 올라 산속에서 절을 찾고 있을까요?
화자의 독백에서 어쩌면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초롱꽃 한 무더기 마음을 밝히면/ 산짐승 으르렁대는 저 어둠 너머/ 스스로 반기는 풍경 소리 들리지 않겠나"
이 마지막 연을 굳이 필사해서 마음 한 켠에 걸어두는 아침입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2023. 5. 29.
달아실 문장수선소
문장수선공 박제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