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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암 권철신(鹿庵 權哲身) 묘지명(墓誌銘)
*정조임금의 통치시대는, 유학의 인의를 실천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불꽃들이 있었다. 그 불꽃 들은 정조임금이 좀 더 살았더라면 조선을 살리는 에너지가 될 수도 있었으리라. 정조임금의 뜻하지 않은, 의문의 죽음으로 그 불꽃은 이제 악당들의 선명한 표적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순도가 높아 가장 아름다웠던 불꽃은 더욱 철저하게 잔인하게 짓밟혔다. 당사자뿐 아니라 그 옆에서 바라보던 사람들까지.
이런 일은 사실 그 때만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 일제 강점기를 거쳐 이승만, 박정희 시대를 거쳐 최근에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의외로 그런 일에 관대하고 묵인한다. 오히려 그런 빌미를 준 사람이 잘못이라는 여론재판이 일어나기도 한다. 알고도 일부러 그런 여론을 조장하는 자들도 물론 당연히 있지만, 대부분은 잘 모르기 때문이리라.
녹암 권철신의 묘지명은, 다른 사람의 묘지명도 그렇지만, 특히 더 다산 선생의 안타까움과 분노가 서려 있다. 서교(천주교)를 믿은 것에 대한 잘잘못의 평가를 떠나서, 최소한 그의 죄명이 악당에 의해 무고(誣告)로 만들어졌고, 동생과 아들이 믿은 죄(?)를 부당하게 연좌시켰다는 사실을 소명하였다. 저들이 얼마나 악한 지를 밝혀서, 후세라도 이를 알아주기를 바란 것이다. 더 나아가 이처럼 바보같이 당하지 말기를 바란 것이 아닐까?
녹암 권철신(鹿庵 權哲身) 묘지명(墓誌銘)
성호(星湖) 선생은 독실하게 배우고 힘써 행함으로 정자·주자를 따르고, 공자(孔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성문(聖門, *성인의 도(道)로 들어가는 문)의 깊은 뜻을 열어서 후학(後學)들에게 보여주셨다. 만년에 이르러 한 제자를 얻었으니 바로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공(公)이다. 공은 영민하고 지혜롭고 자애로워 재덕(才德)을 겸비하였으므로 선생이 매우 사랑하여, 문학(文學)에서는 공자가 자하(子夏)에게 했던 것처럼 믿고, 도를 선양함은 자공(子貢)과 같이 생각하셨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과연 재주 있고 준수한 선비들이 모두 공에게 모여들었다.
천주학 서적이 나와서 녹암의 동생 일신(日身)이 처음으로 형벌의 화를 입어 임자년(1792, 정조16) 봄에 죽음에 이르자, 온 집안이 모두 서교(西敎)를 믿는다는 지목(指目)을 받았으나 녹암이 금하지 못하고, 녹암 역시 신유년(1801년, 순조 1년) 봄에 죽었다. 마침내 학맥(學脈)이 단절되어 성호의 문하에 다시 학맥을 이을, 자질이 이처럼 아름다운 이가 없게 되었으니, 이는 세상의 운수이니, 녹암 한 집안의 슬픔만이 아니었다.
공의 휘는 철신, 자는 기명(旣明)이며, 자호(自號)는 녹암이고, 재호(齋號)는 감호(鑑湖)이며,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다. 먼 조상 양촌(陽村) 근(近)이 조선조에 벼슬하여 이상(貳相, *삼정승 다음가는 벼슬로 좌찬성·우찬성을 이름)이 되었는데, 이분이 이상(貳相) 제(踶)를 낳고, 제가 좌의정 남(擥)을 낳고, 남이 홍문관 제학 건(健)을 낳았다. 이후 4대는 모두 음사(蔭仕)로 벼슬하였으나 길천군(吉川君) 반(盼)이 다시 벼슬하여 병조판서가 되었다. 반이 승문원 정자(承文正字) 경(儆)을 낳고, 경이 적(蹟)을 낳았는데, 적이 경학(經學)으로 대군(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종조부 좌랑(佐郞) 척(倜)의 후사(後嗣)로 출계(出系)하여 종가(宗家)를 잇게 되었다. 척의 아버지는 바로 길천군의 형 준(晙)이다. 사부가 이조 참판 휘(諱) 흠(歆)을 낳았으니, 이분이 공의 증조부이다. 조부는 진사(進士) 돈(敦)이고, 아버지 시암(尸菴) 암(巖)은 논의(論議)가 준엄하고 문학을 좋아하였으며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공이 맏이였다.
후세의 학문은 담론(談論)에 빠져 이기(理氣)와 정성(情性)만을 논할 뿐 실천에 소홀하였으나, 공의 학문은 효제 충신(孝弟忠信)을 한결같이 종지(宗旨)로 삼아 부모에게 순종하여 뜻을 봉양하며, 벗과 형제를 한 몸처럼 아끼는 데에 힘쓰니, 그 집 문에 들어간 자들은 다만 한 덩어리의 화기(和氣)가 어우러져 퍼져, 마치 향기가 사람을 엄습하는 것이 난초가 가득한 방에 들어간 것 같았다. 아들과 조카들이 앞에 늘어서면, 마치 친형제처럼 화합하니, 그 집에 10일이나 한 달을 머문 뒤에야 비로소 누가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겨우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노비(奴婢)와 전원(田園), 비축된 곡식을 서로 함께 사용하여 내것 네것의 구별이 조금도 없었다. 집에서 기르는 짐승들까지도 모두 길이 잘 들고 순하여 서로 으르렁거리거나 발길질이나 무는 소리가 없었다. 진귀한 음식이 생기면 비록 그 양이 아주 적더라도, 반드시 분, 촌까지 쪼개서 종들에게까지 고르게 나눠주었다. 그러므로 친척과 이웃이 감화(感化)를 받고, 지역 사람들도 사모하였으며, 먼 곳 사람들도 따르고자 했다. 위로 선비들 중에서도 학문과 실행에 힘쓰는 자들은 모두 공을 표준으로 삼아, 많은 사람들이 자제(子弟)를 문하에 들여보냈다. 그에 따라 명성(名聲)이 자자하여 명도 정호(明道 程顥)가 다시 태어났다고 하였다.
건륭(乾隆) 갑진년(1784, 정조 8)에 문효세자(文孝世子)를 책봉(冊封)하고, 재상들에게 각자 동궁(東宮)의 관원이 될 만한 학행(學行)과 조리(操履)를 가진 사람을 천거하게 하니, 판서 홍수보(洪秀輔)와 참판 채홍리(蔡弘履)가 함께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닦여졌다고 공을 천거하였으나, 마침 세자가 5세에 죽어서 일이 중도에 그쳐졌다. 그러나 경연관(經筵官)으로 뽑혔으니 끝내 그 벼슬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과거 이벽(李檗)이 처음으로 천주교를 선교(宣敎)할 때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자, “감호(鑑湖) 권철신은 사류(士類)가 우러러보는 사람이니, 감호가 들어오면 따라오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하고, 드디어 감호를 방문하여 10여 일을 묵은 뒤에 돌아간 일이 있었다. 그때 공의 동생 일신(日身)이 열심히 이벽을 따랐다. 그러나 공은 오히려 《우제의(虞祭義)》 1편을 지어 제사의 뜻을 밝혔다. 신해(辛亥, 1791)년 겨울 호남옥사(湖南獄事)가 일어나자 목만중(睦萬中)과 홍낙안(洪樂安)이 일신을 고발하였다. 일신이 처음에는 죽음에 이르도록 끝내 굽히지 않아서 제주(濟州)로 유배시키려 했으나, 임금께서 타이르고 깨우치시니 일신이 옥중(獄中)에서 회오문(悔悟文)을 지어 올렸다. 관용을 베풀어 예산(禮山)으로 유배했으나, 일신이 옥에서 풀려나고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이때부터 문도(門徒)가 모두 끊어지고, 공은 문을 닫아걸고 슬픔을 지닌 채 10여 년 동안 발길이 산문(山門) 밖을 나간 적이 없었다. 신유년 봄 공이 체포되어 옥에 갇혀 국문(鞫問)을 받았으나 증거가 나타나지 않자, 어떤 자가 “을묘년에 죽은 윤유일(尹有一)이 본시 그의 제자였으니, 그 비밀스러운 속사정을 마땅히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자, 이로써 사형(死刑)에 처하려 하였으나, 그때 마침 친상(親喪)을 당하여, 공이 기절하여 운명하였다. 마침내 그 시신을 저자거리에 버릴 것을 논의하였으니, 그날이 2월 25일이었다.
아, 인자하고 후덕하기는 기린(麒麟) 같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자녀에게 자애롭기는 호유(虎蜼, *원숭이의 일종) 같고, 지혜롭기는 새벽 별 같고, 얼굴과 체모는 봄 구름과 상서로운 해 같은 분이, 형틀에서 죽어 시체가 저자거리에 버려졌으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경신(庚申, 1800년) 봄, 나의 계부(季父)가 귀천초당(歸川草堂)에 계실 때,
“권철신은 마디마디 잘려도 애석할 것 없다.”라고 하고, 이어서
“오직 집안에서의 행실만은 훌륭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내 둘째 형님이 분한 소리로 말하였다.
“집안에서의 행실이 훌륭한 사람인데 어떻게 마디마디 잘라 죽이는 것이 마땅할 수 있습니까?”
아! 어찌 나의 계부만이 그렇게 생각했겠는가. 공의 효성과 우애, 독실한 행실은, 그를 배척하는 사람들이라도 가릴 수가 없었다.
공은 병진년에 나서 신유년에 돌아가셨으니, 66세였다. 저서(著書)로는 《시칭(詩稱)》 2권과 《대학설(大學說)》 1권만이 전해지고, 나머지는 모두 흩어져 없어졌다. 그러나 내가 들은 바로는, 공이 《대학(大學)》을 논함에는, 격물(格物)은 ‘사물에는 본말이 있다.(物有本末)’의 물(物)을 격(格)하는 것이고, 치지(致知)는 ‘먼저 할 것과 뒤에 할 것을 안다.(知所先後)’의 지(知)를 치(致)하는 것이라 하고, 또 효제자(孝悌慈)를 명덕(明德)으로 삼고, 구본(舊本)에 반드시 착간(錯簡)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중용(中庸)》을 논함에는, ‘들리지 않는 곳(所不聞), 보이지 않는 곳(所不覩)’를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上天之載無聲無臭)’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사단(四端)을 논함에는 ‘단(端)은 수(首)’라는 조기(趙岐)의 설을 따랐으며, 인의예지(仁義禮智)는 ‘행함으로써 붙여지는 명칭(行事之成名)’이라고 하였다.
상례(喪禮)를 논함에는 형제(兄弟)는 동족(同族)을 통칭(通稱)하는 것이고, 입후(立後)는 죽은 사람의 후사(後嗣)가 되는 것이며, 대하척(帶下尺)은 옷깃의 길이이며, 연미(燕尾)는 본래 없는 물건이며, 조상(吊喪)을 받을 때 주인(主人)만이 객(客)에게 절하고, 그 밖의 주인(衆主人)은 객에게 절하지 않는 것이라 하여, 이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국풍(國風)을 논함에는 정풍(鄭風)ㆍ위풍(衛風)은 음분(淫奔)을 풍자한 시라 하고, 《서경(書經)》을 논함에는 매씨(梅氏)의 25편을 위서(僞書)라 하였다. 이상의 말들이 비록 주자(朱子)가 논한 바와 다름이 없지 않으나, 공은 평소 주자를 애모(愛慕)하여 주자의 글을 외고 그 뜻을 기술(記述)하는 것을 무척이나 즐겨하여, 눈썹이 곤두섰다 눕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일찍이, “나만큼 주자를 진심으로 사모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난 경술년 겨울에 내가 희정당(熙政堂)에 입대(入對)하여 각신(閣臣 *규장각의 관원) 김희(金熹) 등과 《대학(大學)》을 강론(講論)한 적이 있었는데, 공이 그 강론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내가 남쪽에 유배가서 지은 책에는, 《시경》에서는 몽송(矇誦)의 뜻을 발명(發明)하였고, 《서경》에서는 유림전(儒林傳)과 예문지(藝文志)를 인용하여 고문(古文)에도 두 종류가 있었음을 증명하였고, 《예기(禮記)》에서는 대의(大義) 수십 조항을 찾아내었고, 악(樂)에서는 취율(吹律)에서 잘못된 것을 알아내었으며, 《역경(易經)》에서는 왕래(往來)와 승강(升降)의 뜻을 찾아내었고, 《춘추(春秋)》에서는 《주례(周禮)》의 유문(遺文)을 찾아내었고, 사서(四書)에서는 인(仁)과 서(恕)가 일관(一貫)되는 바른 뜻을 찾아낸 것들이 있으니, 만약 공이 살아 있을 때 내가 돌아왔다면 공의 기뻐해 줌이 어찌 다함이 있었겠는가.
선형(先兄) 약전(若銓)이 공을 스승으로 섬겨 지난 기해년 겨울 천진암(天眞菴)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講學)할 적에 이벽(李檗)이 눈 오는 밤에 찾아오자 촛불을 밝혀 놓고 경(經)을 담론(談論)하였는데, 그 7년 뒤에 비방이 생겼으니, 성대한 자리는 두 번 열리기 어렵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공이 죽은 지 한 달 뒤에 호남에서 유항검(柳恒儉) 등을 잡아 서울로 압송하니, 포도청에서는 온갖 고문을 다 하여,
“이가환 등이 은(銀)을 내어 선박(船舶)을 부르려 했는데, 공도 홍낙민(洪樂敏) ·이단원(李端源)과 함께 그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그러자 사헌부와 사간원은 상소하여 공에게 형벌을 추가할 것을 청하였다. 아, 정말로 이런 계획이 있었다면 어찌 반드시 봄에 죽은 네 사람이 주관하였겠는가. 유항검 등이 죽은 사람을 끌어들인 것은, 고문을 견딜 수 없어 거짓이라도 진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살아 있는 사람을 끌어들이면 아니라고 할 것이므로, 죽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고통을 면하고자 한 것일 뿐이었다. 공이 이 계획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어머니는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참판(參判) 상빈(尙賓)의 따님이고, 배위(配位)는 의령 남씨(宜寧南氏)로 돈(墩)의 따님이다. 공에게 아들이 없어 집안에서 입후(立後)할 것을 상의하니, 공이,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내게 승중(承重)이 없고, 내가 살아 있으면 후사(後嗣)를 말하지 않는 것인데, 어찌 입후를 하겠는가.”하였다.
공의 아버지 시암(尸菴)이 죽은 뒤 일신(日身)의 아들 상문(相門)을 양자(養子)로 삼았다. 상문 역시 신유년에 죽었는데, 황(愰)과 경(憬) 두 형제를 두었다. 공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이총억(李寵億)에게 시집갔다. 묘(墓)는 양근(楊根) 남시면(南始面) 효자산(孝子山) 선영(先塋)의 남쪽 임좌(壬坐, *남남동향)의 언덕에 있다. 부인 남씨를 부장(祔葬)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학문에서 의견 차이는,
털끝을 다투는 것인데,
경학이 쇠하고 참위가 부흥함에,
이단이라는 낙인을 작동시키네.
세상 선비들은 조(祧)와 현(玄)을 섞어버리고,
또 훈고(訓誥)에 빠졌으나,
공은 그렇지 않다 하고,
주공(周公)과 공자를 본받았도다.
대운(大運)이 이미 기울자,
묵묵히 침잠하였고,
친족(親族)을 보호하려,
형틀에서도 담소했네.
뭇 사람들 원수처럼 말하면서도,
공의 효우(孝友)는 인정하였도다.
하늘이 스스로 살펴,
현량(賢良)을 내셨는데,
참소하는 무리 매우 모질어,
이 어진 분 죽였도다.
공의 덕용 생각하니,
온화한 봄 기상일세.
백세 뒤엔,
다시 공을 알 사람 없겠기로,
이 변변치 못한 글을 묻어,
천명(天命)을 기다리노라.
덧붙인 일화
공이 젊었을 때 하헌 윤휴(夏軒 尹鑴)를 사모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퇴계(退溪) 이후로는 하헌의 학문이 본말(本末)이 있고, 하헌 이후로는 성호(星湖)의 학문이 옛 성인을 계승하여 후세의 학자들을 개도(開導)하였다.”했다 한다. 이는 나의 약전 형님께서 들은 말이다. 그런데 공이 말년에는 이와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들은 바로는 공이 하헌을 오활하게 여겼으나 하헌의 만필(漫筆) 1권은 매우 좋다고 감탄하였으며, 기해예설(己亥禮說)에 대해서는 참최설(斬衰說)을 옳게 여겼다.
공이 젊었을 때 의리에 엄격하여 말하는 사이에서도 혹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으니, 이희사(李羲師)의 시에, “관문에는 의리가 보존되었다.(關門義理存)” 한 것이 바로 이를 일컬은 것이다. 말년에는 논의가 공정하여 젊었을 때보다 많이 누그러졌다. 공은 매양,
“붕당(朋黨)의 사심(私心)이 폐부(肺腑)에 고질이 되었으니 씻어내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고, 이로써 후생들이 경계하게 하였다.
신유년 옥사(獄事)가 일어난 뒤 지사(知事) 권엄(權𧟓)이 상소하기를, [남인(南人) 진신(縉紳)에 대한 소(疏)임.]
“권철신은 바로 간사한 도적(邪賊) 일신(日身)의 형이니, 그에게 만약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일신이 죽은 뒤 눈물을 흘리며 뼈저린 책임을 느끼고 구악(舊惡)을 일변하여 자신부터 먼저 마음을 고쳐먹어야 마땅한데, 도리어 완악하게도 허물을 고칠 줄 모르고, 어리석게도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아들이 요망한 사설(邪說)을 퍼뜨리도록 가르쳤습니다. 그 죄로 전에 포도청에 잡혔었고 뒤에 다시 군옥(郡獄)에 갇혔으니, 이처럼 흉악하게 알면서도 죄짓는 자를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라 하였다.
이 상소문을 살피건대, 공의 억울함을 알 수 있다. 이 상소문에 동생과 자식을 이끌어 말했고 끝까지 공이 직접 범했다는 말이 없으니, 당시 그를 알던 사람들의 공론을 알 수 있다. 그처럼 깊은 학문과 성대한 명예를 지닌 분으로서, 당시 죄를 성토당함이 이 정도뿐이었으니, 공이 법을 범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공은 그 효우(孝友)가 타고난 것이어서 차마 부자(父子)간의 자애와 형제 간의 의리를 해칠 수 없어서 이에 이른 것뿐이었다. 어찌 무고한 선비를 죽인 것이 아닌가.
대사간(大司諫) 목만중(睦萬中)이 상소하기를,
“권철신은 젊어서부터 향학열로 명성이 있었고, 자못 영민하고 해박(該博)하다는 칭찬이 있었더니, 그 아우 일신이 사당(邪黨)에 가입한 뒤로는 오로지 화합만를 위하여 온 집안이 모두 서교(西敎)에 고혹(蠱惑)되었으니, 이는 장차 무슨 짓을 하려는 생각이겠습니까?” 하였다.
이 상소문의 말을 살피건대, 이리저리 더듬어 말을 만들었을 뿐이다. 오로지 화합을 위하여 온 집안이 모두 고혹되었다는 말이 바로 모호한 말이 아닌가? 아비는 자식을 위하여 숨겨주고 형은 아우를 위하여 숨겨주어 하늘이 판결할 날을 기다리는 것이 인륜(人倫)의 지극함인데, 어찌하여 그를 죽였는가?
경기 감사(京畿監司) 이익운(李益運)이 상소하기를,
“그 사교(邪敎)의 우두머리를 찾아낸다면 권일신이 바로 우두머리입니다. 일신이 벌을 받아 죽은 뒤에도, 그들이 당은 허물을 고치기는커녕, 여전히 제멋대로하며 왕래가 끊이지 않으니, 권철신의 온 집안이 악(惡)을 계속했다는 것은 그들의 자백을 듣지 않아도 분명합니다.” 하였다.
이 상소문을 살피건대, 공의 억울함을 알 수 있다. 부자(父子), 형제 사이는 죄를 연루(連累)시키지 않는 것이 옛날의 의리인데, 그 아우의 죄를 추론(追論)하여 그 형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것이 옳은 일인가? 말을 애매하게 하여 ‘온 집안이 악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끝내 ‘자신이 직접 범했다’는 말은 없으니, 공에게 죄가 없다고 믿지 않고서야 이렇게 말했겠는가?
대제학 이만수(李晩秀)가 지은 주문(奏文)에, 옥에 갇혀 화를 입은 사람은 생사(生死)를 막론하고 차례로 거론(擧論)하여 중언부언(重言復言)하였으나, 녹암(鹿菴)의 이름만은 그 속에 끼지 않았으니, 봄과 가을의 옥사(獄事)에 끝내 공이 죄를 범한 증거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시신을 저자거리에 버리는(棄市) 날에 억지로 공에게 죄목(罪目)을 덧씌워 유일(有一)의 죄짓는 정황을 알고 있었다 하고, 호남옥사(湖南獄事)가 일어났을 때 죄인들이 공의 이름을 끌어대자 항검(恒儉)의 정황을 알고 있었다 하여 대계(臺啓)가 있었으나, 그래도 공론(公論)은 여전히 공을 무죄로 여겼으므로 주문(奏文)에 공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것이다.
대제학 이만수(李晩秀)의 반교문(頒敎文)에,
“철신(哲身)의 고을은, 그 친척(親戚), 인척(姻戚)들이 모두 미혹되었다.”고 하였다.
살피건대, 단죄(斷罪)하는 법은 먼저 본인의 죄를 정하고, 그 다음에야 집안과 이웃의 죄가 바로 이 사람 때문이라고 하는 것인데, 녹암만은 매양 집안과 이웃의 죄를 녹암에게 덮어씌웠으니 법례(法例)가 아니다.
경신년(1800년) 정조임금의 국상(國喪) 이후에 양근(楊根)에 사는 악당(惡黨) 김모(金某) 등이 도둑을 보내어 공의 집안 4대의 신주(神主)를 훔쳐다가 수화(水火)에 던져 넣고서 죄를 공에게 덮어씌우려고 모의(謀議)하였는데, 이희사(李羲師)가 [호는 취송(醉松)으로 시명(詩名)이 있었다.] 그 사정을 알고 은밀히 공에게 알리니, 공은 곧 신주를 옮겨 벽장 속에 안치(安置)해 두고 집안사람들에게 지키게 하였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에 과연 도둑 둘이 사당(祠堂)에 들어와 신주를 찾았다. 신주를 못 찾은 도둑이 그냥 돌아가서 악당에게 사정을 말하니, 악당은 공이 전에 이미 신주를 태워 없앤 것으로 생각하고 온 고을에 ‘공이 신주를 태워 없앴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신유년 봄에 군수(郡守) 유한기(兪漢紀)가 사람을 보내어 조사하게 하니, 벽장 속에 4대 신주가 봉안(奉安)되어 있었다. 진사(進士) 조상겸(趙尙兼) 등이 통문(通文)을 내어 악당이 도둑을 보낸 일을 논하고, 공이 신주를 태워 없앴다는 말이 거짓임을 밝혔으나, 군수 유 공(兪公)이 그 사건을 느슨하게 다스렸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 새 군수 정주성(鄭周誠)이 와서 조상겸 등을 잡아 하옥하니, 연루된 사람 50여 명이 죽거나 유배되어 한 사람도 화를 면하지 못했는데, 악당이 신주를 훔치려 한 죄는 불문에 부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