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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행궁역사탐방
일시 : '24년 08월 10일(토)17:00.
장소 : 수원 화성행궁
코스 : 화성행궁- 서장대-화서문 - 장안문 -
참석 : 회장 안형순외 38명
식사 : 용성통닭집 치맥파티 삼계탕
前 회장 차희준님 공로패수여 와 행운의 열쇠증정
찬조 / 협찬 : 정관희 9만 오재기 10만 김경준 10만 문병국 20만 윤재석 매실캔150병 박찬구 음료수150병 박정렬깃발곷이배낭 감사드립니다.
촬영 : 문병국 강은구 구영식 정동준 안형순 임정길 수고하셨습니다.
붙임 1. 경영학박사 김경준님 기행문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24년 08월 10일
재경 조대부고 조이산악회 사무총장 성용호 회장 안형순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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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임 1. 경영학박사 김경준님 기행문
조이산악회 283차 화성행궁(華城行宮)과 수원화성(水原華城) 역사문화탑방 기행문
이번 조이산악회 8월 산행은 화성행궁(華城行宮)과 수원화성(水原華城)으로 남한산성 산행에 이어 올해들어 두번째 역사문화 탐방이다.
이번 화성행궁(華城行宮) 산행은 이전 같으면 버스를 대절해서 단체로 이동하지만 이번에는각자 스스로수원 화성행궁 앞으로 모이라고 한다
수원화성 성곽을 걸으니 역사문화탐방이고 수원화성에 있는 128m 높이의 팔달산에 오르니 등산에 해당되어 역사문화탑방에 산행을 더한 기행문이라 할 것이다
화성 역사탐방에 앞서 왜 정조는 화성을 쌓았는가?를 알아보기 전에 당시의 조선 국내정치와 국제질서 상황을 살펴본다.
○ 정조 성장기의 국제질서
이산으로 알려진 정조가 성장할 때 국제상황은 17세기 해당하여 영국에서는 산업혁명 초기에 들어섯으며 1756년, 7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7년전쟁은 유럽, 북아메리카, 인도, 서인도 제도의 여러 나라와 식민지가 참여한 최초의 세계 규모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결과 1763년 파리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와 인도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후 영국은 제국주의 정책과 식민지 건설을 지속하게 된다. 미국에서는 1775년 미국 독립 전쟁이 발생하였으며 그 결과 미국의 독립으로 영국은 아메리카에서 식민지를 잃게 되었다. 영국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에 대한 식민정책은 계속 이어졌다.프랑스에서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생하였으며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이 산업혁명 초기에 들어 서고 증기기관(蒸氣機關)
의 발명으로 산업이 크게 발전하고 있었다. 동서양의 산업과 기술, 생활 모습에서 동서양의 기술과 문화에 현격한 차이가 있는 가운데 조선은 왕이 통치하는 왕권국가였다.
고요한 은둔의 나라 조선(朝鮮)은 영조 임금이 통치하는 왕권국가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붕당정치가 한창이였다.영조의 뒤를 이어 이산은 조선22대 왕으로 정조대왕의 즉위이다. 조선왕조 22대 왕은 영조의 세손이고 사도세자(思悼世子)
의 아들도 일반인들에게 '이산'으로 알려졌다. 조선왕조 모든 임금 중에 문무를 겸한
유일한 왕이다.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왕이다.
사도 세자(思悼世子)가 15세가 되자 영조는 일부러 사도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행한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잘하는 걸 칭찬하기 보다는 잘못한 걸 크게 혼냈다.신하들 요구를 들어주면 들어준다고 꾸짖고, 들어주지 않으면 신하들의 말을 왜 안 듣냐고 꾸짖으니 세자는 점점 아버지를 대하는 것이 어렵고 두려워지고 주눅이 들어 마음에 병을 얻게 된다.
마음의 병이 깊어간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 알현하는데 1년 이상 지나면서 영조의 불신은 극에 달한다사도세자의 병적 증상이 깊어지면서 세자의 미치광이 행동은 점점 심각해져 갔다.사도세자는 궁을 탈출하여 놀다 들어오고, 칼을 휘둘러 내시나 궁녀를 죽이기를 100여명에 달했다고 하니 당시 조정의 권력을 장악한 노론들은 세자 기행(奇行)을 핑계로 폐세자 상소가 물밑듯 쇄도한다.
○ 영조는 사도세자의 기이(奇異)한 행실에 대해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분노와 실망은 극에 달한다.어느날 사도세자는 칼을 들고 "왕을 죽이러 간다" 목소리 높히며 궁궐을 활보하니 스스로 역모(逆謀)를 저질었고 이 소문이 영조에게도 알려졌다.영조는 사도세자를 폐세자로 결정하고 어머니 영빈이씨도 "처단하옵소서" 라고 아들을 죽이라고 한다
노론에서 폐세자 상소가 올라오고 영조는 직접 자신이 사도세자를 죽이면 아들을 죽이는 왕으로 역사기록에 남기때문에 사도세자에 칼을 던져주며 자결(自決)을 명한다.사도세자는 영조에 자신의 죄와 행실에 용서해 달라고 하면서 세자로서 글도 열심히 읽고 왕세자의 법도에 열심히 하겠다고 하였으나 영조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어서 쌀뒤주에 들어가라" 명하고 사도세자는 쌀 뒤주에 갖히게 된다.
아버지가 쌀뒤주에 갖혀 죽게 된다는 소식을 들은 사도세자의 아들 11세의 이산(정조)은 죽음의 현장에 달려나와 '할아버지 영조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애걸하지만 영조는 거절한다
조선 제21대 국왕 영조가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폐서인하고 뒤주에 가두는 굶어죽이는 아형(餓刑)을 집행하여 뒤주에 갇친지 8일 만에 죽게 한다조선왕조 통틀어 궁중의 참혹한 비극이다. 이산은 11세에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히고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아야 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지 8일만에 사망하고 지금의 휘경동 배봉산 기슭에 묻힌다.
영조는 사도세자 사후 정조에 앞서 요절한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영조와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사이에 태어난 사도세자의 이복형으로 후일의 진종으로 추존된다)의 뒤를 잇게 한다.사도세자가 죽은 뒤 이산을 효장세자에 양자로 입적 후 왕통을 잇게 한 것이다. 이후 세손이지만 세자의 지위를 가지고 생활하던 정조는 영조 말년 경인년 1775년 국왕을 대신해 대리청정하다가 다음 해 영조가 승하하면서 25세로 왕위에 올랐다.
○ 영조는 사도세자 사후 정조를 앞서 요절한 맏아들 효장세자(후일의 진종) 사도세자를 후사로 삼아 왕통을 잇게 하였다.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기에 영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을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해 왕통을 계승한 것이다.이후 세손이지만 세자의 지위를 가지고 생활하던 정조는 영조 말년 경인 1775년 국왕을 대신해 대리청정(代理聽政) 하다가 다음 해 영조가 승하하면서 25세로 왕위에 오르니 정조대왕이다.
○ 정조는 왕권강화에 착수하다
이산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위의 정통성보다 피의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선언하면서 노론과 대척관계임을 스스로 선언한 것이다 당시 노론의 권세가 막강하여 대리청정(代理聽政)이 결정될 당시에는 홍인한은 “동궁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인사와 병권 장악해 동궁을 허수아비 놀이개로 보았다.
어쨋든 왕위에 오른 이산 정조는 왕권강화에 나선다.정조는 신변호보화 함께 군권장악을 위해 새로운 군영인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였다. 장용영은 1785년(정조 9년) 창설되어 국왕의 호위를 전담하는 군영으로써 영향력을 끼치게 한다.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사도세자의 묘소인 수은묘( 폐세자이기에 일반백성과 같이 원이 아닌 묘로 칭했다)를 '영우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 곧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읍 명당으로 이장하면서 묘의 규모를 왕릉에 준하여 만들었다.
1789년 8월(음) 사도세자의 새로운 무덤을 '현륭원(顯隆園) "이라고 이름 지었다.세월이 흘 러 26대 왕인 고종이 사도 세자를 높이 받들어 존경한다는 뜻으로 장조로 추존하니 비로소
현륭원에서 '융릉(隆陵)'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 화성행궁(華城行宮)을 중심을 수원화성(水原華城)이 탄생돼다
정조는 아버지 묘소를 수원읍으로 이장한 후 현륭원(顯隆園) 주위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화성 팔달산 아래 영구 이주하게 한 후 이 지역에 새로운 도읍지를 만들었으니 이름하여 화성행궁(華城行宮)이다. 화성행궁 앞에 보면 신풍루(新豊樓)를 맞이하게 되는데 한고조 유방의 고향 풍패(豊沛)로부터 비롯된 이름으로 정조가 화성을 고향처럼 여긴다는 의미이다
신풍이라 중국 한나라 고조 유방의 옛고향 패현을 말한다 즉 패현은 한나라의 왕조 도읍지을 의미한 것으로 역사속에서 개성이 고려의 도읍지이고 한양이 조선의 도읍지이니 화성의 신풍루는 정조의 새로운 도읍지 왕도라는 뜻이다. 정조는 수도 한양을 화성행궁으로 옮겨 개혁정치를 펼치고자 했다
정조는 조선의 기존질서에서는 개혁정치를 이룰 수 없다고 봐 젊은 실학자 유형원, 박제가,이덕무, 정약용을 대거 등용하여 창덕궁내에 왕립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하고 개혁의 깃발를 올렸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그리워 수원읍에 있는 "현륭원(顯隆園)"을 자주 행차하니 가는 도중에 행궁을 설치하는데 이 시기에 화성행궁을 짓게할 뿐만아니라 다수 행궁을 설치한다.
행궁은 왕이 지방에 거둥할 때 전란, 휴양, 능원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하게 하니 "화성행궁(華城行宮 "과 "수원화성"이다.
화성행궁이 먼저 들어서고 나중에 화성행궁(華城行宮)을 중심을 수원화성(水原華城)이 축조되었다. 또 1790년에서 1795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조선행궁 중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華城行宮)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가 집무하는 내아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이 해에 프랑스에서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다)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거행하였다.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치루었다. 이때 조선왕조 천재로 알려진 정약용의 출현이다.
정약용(丁若鏞, 1762년 ~ 1836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의학자이자 철학자이다. 2012년,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아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다
정조는 이미 현륭원 참배시 조운선 漕運船 (명사 물건을 실어 나르는 데 쓰는 배)을 이용해 한양 용산에서 노량진을 잇는 '배다리' 설계로 그 실력을 인정받은 정약용을 불러 함께 팔달산에 올라 수원화성 설계와 축조를 명한다. 수원화성의 총괄책임관리에는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을 임명하였다 정조와 정약용의 만남이 오늘날의 수원 화성을 있게 하였다.
삼국시대 이후 조선에는 수많은 석성이 존재했고 축성전문가들이 있었지만 새로운 질서와 개혁을 주창한 정조는 기존의 것을 무시하고 전혀 축성에 관한 전문지식이 일천한 정약용에 맡긴 것은 당시 새로운 학풍으로 실생활의 유익을 목표로 한 새로운 학풍인 실학 (實學)로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융성하였으며, 실사구시(實事求是), 이용후생(利用厚生)기술의 존중과 국민 경제생활의 향상에 대하여 연구 실학(實學)에 대한 믿음이 컷기 때문이다.
종전의 축성이론은 성은 석성으로 외모와는 상관없이 튼튼하기만 하면 된다는 이론에 반하여 정조는 "성(城) 은 실 생활에 유익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고 주장하여 같은 주장을 한 정약용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 (城)"으로 알려진 수원화성은 성 축성에 있어 노예나 일반백성을 강제로 징용 동원해서가 아니고 축성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일일히 노임을 지급하고 축성에 필요한 전돌과 목재를 돈을 지급하고 구매하여 축성하는 세계 축성역사에서 유래가 없는 대토목 건축 축성공사이다
화성의 총길이는 5.7km에 달하고 4대문과 성벽에 누(樓) 없이 만들어 놓은 문으로 적의 눈에 띄지 아니하는 곳에 만들어서 평소에는 돌로 막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에 비상구로 사용하는 5개의 암문(暗門)을 설치했다. 수원화성의 특징은 수원화성에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수원천이 있고 인공 못인 용연(龍淵)이 있다.
성곽의 높이는 5~6m로 하고 성곽을 단순한 방어목적인 포대 방어진지만이 아니고 전망과 감시기능에 정자와 예술적 구조물을 설치해 자연환경과 아름다운 조화와 조경으로 건축미를 첨가하였다. 화성 성곽위에 방어진지는 물론 봉화, 중국성에서 볼 수 있는 돈대(墩臺), 포대, 정자 등 구조물을 설치해 아름다운 성으로 명성을 떨치게 한다.
성내에는 상업시설을 조성하고 일발 백성이 농사도 짓고 상공업도시 기능 더해 실용적인 도시 기능을 하도록 하였다. 팔달문 장안문 등 4대문의 크기와 규모가 한양 숭례문보다 크고 성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반달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아 적의 칩입을 막고 적이 옹성안으로 들어온다 하더라도 독안의 쥐신세가 된다.
수원화성에 출현한 거중기(擧重器)가 애초 예정했던 축성기간10년을 2년 9개월만 완성하였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기록을 보면 거중기는 지랫대 원리를 적용해 만는 것으로 다른 나라 것을 모방하거나 들여온것이 아니라 정약용이 창안한 신발명 기기로 주로 채석장에서 돌을 우마차에 옮기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쌓았는데 크게 타원을 그리면서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를 띠고 있다.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들이 있다. 현재에는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洛南轩)만이 옛 화성행궁 건물로 남아있다. 특히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창룡문·장안문·화서문·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점이 화성의 특징이라 하겠다.
○ 화성과 화성행궁의 시련 6.25 전쟁
1950년 6월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화성을 점령한다. 6.25 전쟁 때는 서북공심돈, 화서문, 창룡문, 장안문, 동북공심돈, 서장대, 북서포루 등 어마어마한 문화재들이 파괴되거나 심하게 훼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성벽도 포탄과 총알세례를 받아 벌집투성이가 되어버렸다.
화성의 창룡문과 장안문의 옹성을 무기고로 사용하자 미군은 공중폭격을 감행해 이때 팔달문 창룡문이 반파되거나 완파되어 화성 성곽기능을 잃게 된다.전쟁이 끝나고 1975년에서 1979에 이르기 까지 크게 훼손된 장안문과 창룡문루 등 화성복원 작업에 나선다
○ 일제의 무자비한 화성행궁 훼손(毁損)
일제는 한국을 침탈한 후 '읍성이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된다'고 하여 한국만족정기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전국의 읍성에 폐쇄시행령을 내린다. 이 때 전국의 읍성이 크게 훼손되거나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화성행궁은 수많은 전각과 부속건물이 철거 훼손되었고 낙남헌(洛南轩)만이 남기고 거의 헐러나갔다.
일제의 침략과 민족문화말살로 화성행궁과 서울 경복궁,창덕궁, 창경궁의 수많은 전각이 없어진다. 나라가 망한 마당에 화성행궁 역사문화재도 함께 사라졌다. 해방 후 화성행궁의 봉수당(奉壽堂) 자리에 자혜의원이 들어서고 (그 뒤 자혜의원이 수원도립병원으로 변모) 수원경찰서, 여성회관, 수원 우체국, 신풍초등학교는 물론 무질서한 일반주택이 들어서 화성행궁은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 수원문화원이 나선 화성행궁복원 운동
해방이 된 후 한참 세월이 흘러도 화성행궁은 거의 훼손 말살되 그 존재 자체도 알 수 없었다. 당시 수원문화원 심재덕원장과 수원지방 유지들이 모여 수원화성 복원운동에 나선다.
수원문화원 심재덕 원장과 추진위원들이 관선 암사빈도지사를 만나 수원행성 복원을 요구하였으나 수원도립병원 건립에 설계도에 2억이나 들여 수원도립병원 설계비가 지출되고 중앙정부로 부터 57억 예산까지 내려졌다는 이유로 난색(難色)을 표시한다.
이때 이한구 수원문화원 문화편집위원이 나서 "수원도립병원은 수원의 다른 지역에 건립할 수 있지만 화성행궁은 화성행궁터에만 지을 수 있다. 화성행궁 복원은 민족정기와 문화창달의 길인데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라와 민족의 역적이 된다" 고 강력한 어필에 임사빈도지사가 이를 받아 들게 된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에서 심재덕수원문화원장이 수원시장에 무소속으로 당선과 함께 화성행궁 복원사업이 급피치를 이뤄 복원하게 된다. 그 당시 화성행궁 복원운동이 없었다면 화성행궁은 역사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뻔 했다.
○ 화성행궁 유네스코
(UNESCO)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登載) 1997년 12월 유네스코는 화성행궁과 수원화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세계 모든 사람들이 보존하고 함께 보고 누려야 한다" 는 취지에 따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로 한다. 이때 유네스코심사위원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 "지금의 화성행궁과 수원화성이 원형이냐?"를 두고 심각한 논쟁을 벌이게 된다.
유네스코 심사위원들이 미리 알려진 사료에 의해 일본식민지시절 화성행궁이 거의 소실되었던 사실과 6.25전쟁때 창룡문과 장안문 문루가 반파된 사실을 사료를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심사에 들어가자 한국 유네스코위원들은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10권"을 증거자료로 내놓는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는 조선 정조 재위 18년(1794) 1월부터 20년(1796) 8월까지 총 2년 8개월간 수원화성을 축성하며 그 건설 과정 및 기타 제반사항들을 모두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여 남긴 조선왕실의궤. 권수(卷首) 1권, 본편(本編) 6권, 부편(附編) 3권으로 이루어졌고, 총 10권이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는 조선 정조 재위 18년(1794) 1월부터 20년(1796) 8월까지 총 2년 8개월간 수원화성을 축성하며 그 건설 과정 및 기타 제반사항들을 모두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여 남긴 조선왕실의궤이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10권 책을 내밀며 화성과 화성 행궁의 실존과 복원과정을 증명하고 설명하니 유네스코심사위원들이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수원화성행궁과 수원화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심의 결정한다. "기록은 사실(史實)과 사실(事實)을 밝힌다"는 역사적 명제를 밝혔다. 참으로 감동적인 순간이다 이상은 화성행궁과 수원화성의 유래를 살펴보았다.
○ 이윽고 2024년 8월10일 조이산악회283차 화성행궁과 수원화성 역사문화탐방이 시작됐다. 오후 5시에 화성행궁 신풍루(華城行宮新豊樓)앞이 오늘 역사문화탐방의 집결지인데 조이산악회 안형순회장님과 성용호사무총장님과 전 문병국사무총장님이 미리나와 선후배 동문들을 맞이하고 계셨다.
참가인원이 무려 38명을 넘어서 놀랐다 11회 안태호 선배님께서 건강한 몸으로 함께 해주셨고 17회 곽종환 이문옥, 이종옥, 종관희, 이종섭, 정인석선배님들과 19회 박찬선, 김원석, 문재순, 이문옥 이종범선배님 20회 윤태정 양정열선배님 21회 임정길 선배님 등 선배님들께서 대거 참석해 주시니 조이산악회의 영광이다. 선배없는 후배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귀하고 존경스럽다.
화성행궁 앞 느티나무 쉼터에 88올림픽 조직위원이셨던 23회 정찬구동문이 보내온 음료수 150병이 놓여져 있다. 이번 화성행궁 역사탑방에 안형순회장과 조대부고40회 성용호사무총장과 송종길 동문이 화성과 화성행궁에 관한 전문 관광문화해설사를 수배하여 화성행궁에서 부터 서장대와 성곽길에 조성된 보루와 포대, 화서문, 장안문, 창룡문의 현지 답사 해설과 안내를 인도하여 큰 도움을 주었다. 이윽고 신풍루앞에서 기념촬영을 마치고 화성행궁 견학에 나섰다.
화성행궁 전각과 부속건물은 일제가 거의 훼손하고 낙남헌(洛南轩)만이 남았다는 설명을 끝으로 화성행궁 답사를 마치고
팔달산 서장대(西將臺)로 오르기 시작했다.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이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있으며 ‘화성장대(華城將臺)’란 편액은 정조가 친히 쓴 것이다.때는 한여름 삼복더위가 심해 걷기 조차도 힘들고 땀이 비오듯 흘렀다. 선후배동문들이 팔달산을 오르는데 양기가 탱천해서 인지 범 뛰듯 잘도 걷는다.
서장대가 군사지휘소의 기능을 다하고 실제 정조는 이곳에서 친위부대인 장용영 6000 군사를 이끌고 야간기동훈련를 지휘한다. 이 야간 기동훈련은 나라의 방어훈련으로 왕권강화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줌과 동시에 노론계 신하들에 대한 무력시위의 성격이 있어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한다.
서장대에서 내려가는 성곽길에 노대와 포루에 설명이 이어지고 화성의 서쪽문인 화서문의 설명이 있었다. 성곽길의 성곽에 해설에 있어 멀리 공격해 오는 적을 겨냥한 원총안과 가까운 곳에 적을 근총안이 있는데 성곽의 총구기의 뱡향에 따라 수평이면 원거리용이고 대각선이면 근거리 공격용이라고 한다. 성의 높이가 밖에서 보면 5~6m보다 높고 성안에서 보면 3~5m 정도이다. 화성 축조에 있어 주요소재로 전돌(구은 벽돌)의 사용인데 전돌이 화강암보다 포격에 강하다고 한다.
조이산악회회원들은 화서문에 이어 성곽길을 따라 장안문, 창룡문을 따라 걸으면서 아름다운 화성 탐방을 즐겼다. 이제 오늘 치맥파티가 열리는 "용성통닭집"에 도착했다.치킨을 먹으면서 선후배 동문님들이 생맥주를 주거니 받거니 그 정겨운 모습을 어디다 비교하랴!
맥주 한 순배가 돌린 후 성용호사무총장님 주도로 안형순회장님의 인사말씀과 건배제의가 있었고 오늘 참석한 졸업횟수별 동문들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11회 안태호선배님은 82세의 나이에도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셔서 만장의 박수를 받았다. 오랫만에 조이산악회 나오신 17회정관희선배님의 인사말씀이 계섰다.
졸업 회수별 동문들에 대한 소개가 있었는데 조대부고22회 동기들이 7명이나 참석해 최다 인원을 자랑했다. 22회 신종호회장님의 조이산악회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남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오늘 산행의 클라이 막스는 2023년도에 조이산악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오신 차희준회장님에 대한 때 늦은 공로패와 금 한돈 전달하는 수여가 있었다. 그 공로패의 내용이 이러하다.
공로패 귀하는 산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자연과 동화된 산악인의 참모습을 보여주셨고 조이산악회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신 노고에 회원 모두의 감사와 사랑을 이 패에 가득 담아 드립니다. 2924년 4월 14일 재경조대부고 동문 조이산악회일동
차희준 회장이 재임시 조이산악회에 남긴 훌륭한 족적(足跡)은 위의 공로패 내용 말고도 조이산악회를 단순한 산악회 모임이 아닌 동문 서로간 사랑과 정으로 형님, 동생하면서 화합과 단결로 뭉치게 하고 조이산악회의 중흥을 있게 했다.
2023년 7월 수락산 산행시 발목에 심한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석고붕대(기브스)를 한 채로 산행에 참석해 그 책임과 열정에 감동하고 박수를 보낸 바 있다.무릇 조직의 지도자는 솔선수범하고 모범을 보여야 하고 봉사와 봉사정신이 투철해야 한다. 2023년 차희준 회장님께 뜨거운 위로와 박수를 보낸다.
오늘 귀한 동문 손님은 오마이뉴스의 구영식기자 부부가 함께 참석해주셔서 자리를 빛내주셨다. 윤석열 대통령이 공정과 상식을 일탈하여 민생파탄과 민주주의 후퇴, 국회와 국민을 무시하고 그의 처 김건희의 갖은 불법과 비리를 감싸주고 보호하는 국정농단에 대해 우리 조대부고 동문이신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가 여과없이 유튜브방송을 통해 만천하에 공개하고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정의를 외치며 양심있는 기자로서 우뚝 서고 있다.그래서 구영식동문의 부인에게 "정의롭고 양심있는 기자를 따라 사시느랴고 고생이 많으시네요. 라고 위로의 인사를 전했다.
이번 조이산악회의 화성행궁과 수원화성 역사문화탐방에 40회 송종길동문이 관광문화해설사를 수배하고 식당을 예약하는 등 지대한 공헌을 했다. 조이산악회 산행마다 산행현장을 촬영해주셨고 동영상을 만들어 배포해주셨던 15회 정종수선배님의 가족입원으로 간호를 위해 이번 산행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조이산악회 회장을 지낸 다재다능하고 팔방미인으로 이름 난 강경화님의 지휘아래 조이산악회 구호와 교가 제창을 끝으로 283차. 산행을 마치게 되었다." 막는 것 산이거든 무는 곳 못가랴 파도건 눈 보라건 박차헤치자 조대부고~~ 끓은 땀 부어서 일일이 다진 터 희망은 솟는다 조대부고~~
우리 멋진 조이산악회 동문들께서 다음 9월 산행에 기꺼이 참석해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편집후기
경영학박사 김경준님의 기행문에 의하면 화성행궁과 수원화성은 조선시대 정조 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역사적인 장소이며, 수원화성은 군사적 목적과 방어를 위해 설계된 성곽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어 있습니다. 화성행궁은 왕이 수원에서 머무를 때 사용했던 궁궐로, 그 당시의 아름다움과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이번 탐방을 통하여 이러한 역사적 유산을 소중히 여기며 그 가치를 이해하고 보존하는 것이며 과거의 지혜를 통해 현재를 되돌아보고, 미래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할것입니다 참석자 모두가 기행문에 공감하고 사진촬영과 찬조와 협찬하여 주신 동문 여러분께 격려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의 열정과 참여로 역사와 문화를 함께 나누며, 서로의 소중한 추억을 쌓는 기회를 가진 것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서로를 격려하고 함께 성장해 나가는 동문으로서의 모습을 기대합니다. 특히 前회장 차희준님의 공로패에 의하면 우리모두에게 귀감이 되어 감사와 사랑을 가득담아 드립니다“ 하였습니다. 조이산악회 발전에 커다란 힘이될것입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 편집자 제15회 정종수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