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동이>를 보면 장희빈이 잘못된 탕약을 명성대비에게 올려 위독하게 만들고, 그 책임을 인현왕후에게 전가시켜 중전 폐위라는 사건을 만들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폐위되었다는 이야기 자체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만, 그 폐위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관한 드라마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우선, 명성대비의 죽음이 인현왕후의 폐위와 완전히 무관했다는 점부터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명성대비는 숙종9년 12월 5일(음력) 즉 서기 1684년 1월 21일(양력)에 사망했고, 인현왕후는 음력으로 숙종15년(1689) 5월 2일에 폐위됐다. 음력을 기준으로 할 때에 두 사건 사이에 5년 반 정도의 시간적 간격이 있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대비의 죽음과 왕후의 폐위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었다.
게다가 명성대비 사후에야 비로소 장희빈이 후궁이 되었기 때문에, 장희빈이 대비의 사인(死因)을 악용해서 인현왕후의 폐위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인현왕후 폐위가 장희빈의 계략 때문이라는 드라마 <동이>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럼,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한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누구의 잘못 때문에 왕후가 폐위된 것일까?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왕후의 폐위를 초래한 숙종15년(1689) 기사환국 시기의 정세변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숙종6년(1680) 경신대출척 이후 정권을 잡은 쪽은 서인 당파였다. 그런데 서인의 집권은 숙종15년(1689)에 다가가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인의 집권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정치 환경이 조성된 탓이었다. 그 환경이란 것은 장희빈의 아들인 이윤(훗날의 경종)의 출생이었다.
자손이 번성했던 전기 조선과 달리, 후기 조선에서는 왕실에 손(孫)이 매우 귀했다. 손이 귀하다는 것은 왕실의 연속성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숙종 입장에서는 첫아들인 이윤의 후계자 지위를 조속히 확정할 필요가 있었다. 출생 이듬해인 숙종15년(1689)에 이윤이 예비 후계자인 원자에 책봉된 데 이어, 다시 그로부터 1년 뒤인 숙종16년(1690)에 정식 후계자인 세자에 책봉된 사실은 후계구도 안정에 대한 숙종의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인의 지지를 받는 이윤을 중심으로 한 후계구도의 정착은 집권여당인 서인의 기반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윤 중심의 후계구도 확립을 둘러싼 이해관계의 대립은 결국 숙종15년(1689)의 기사환국으로 분출되었다. 이 때문에 불거진 정쟁으로 송시열이 사약을 받는 등 서인 지도부가 대대적인 타격을 입는 동시에, 남인이 9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하는 정치변동이 발생했다.
숙종이 여당을 교체한 핵심적인 동기는, 자신이 구상한 후계구도를 반대하는 당파와는 손을 잡고 국정을 운영할 수 없다는 판단에 있었다. 동시에, 그것은 특정 당파가 너무 커지기 전에 싹을 자르는 숙종 특유의 통치스타일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숙종시대의 정치변동에서 나타난 특징은 당쟁과 후궁들이 긴밀히 연동됐다는 점이다. 당쟁의 승패가 후궁들의 승패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패턴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서인정권이 무너지면서 인현왕후도 함께 무너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인현왕후의 폐위는 기본적으로 서인정권의 몰락과 연동된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아무리 당쟁과 후궁들이 연동됐다고 하더라도, 단순히 서인정권이 붕괴됐다는 이유만으로 숙종이 인현왕후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서인을 내몬 여세를 몰아 인현왕후까지 내몰려면, 인현왕후에게서 뭔가 문제점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숙종이 인현왕후에게서 발견한 문제점은 <숙종실록>의 여러 군데에서 나타난다. 여러 기록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숙종15년(1689) 5월 2일자 <숙종실록>에 실린 숙종의 비망기(備忘記)다. 비망기란 것은 승지에게 전달된 임금의 명령문이다. 숙종이 작성한 비망기에는 인현왕후 폐위의 사유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왕후는) 투기하는 것 외에도, 별도로 간특한 계략을 만들어내 역대 왕과 왕후의 명령을 꾸며 공공연히 큰소리로 '그(장희빈)의 팔자에는 본래 아들이 없기 때문에 주상께서 애쓰셔봤자 아무 소용도 없고, 중궁전에는 자손이 많을 것이니 선조 때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내게 말했다. 이런 말은 삼척동자라도 믿지 않을 게 분명하다. 하물며, 이제 조상들이 도우셔서 세자가 태어남으로써 (왕후의) 흉한 계략이 더욱 더 드러났으니, 누구를 속이겠는가?"
비망기에 따르면,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한 데에는 장희빈에 대한 투기 외에 또 다른 원인이 있었다. 그것은 국본(國本) 즉 세자의 생산을 두고 인현왕후가 허무맹랑한 저주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비망기에 의하면, 인현왕후는 평소에 "장희빈의 팔자에는 본래 아들이 없기 때문에 주상께서 애쓰셔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것"(其八字本無子, 主上勞而無功)이라며 막말을 일삼았다. 근거 없는 사주풀이를 동원해서 숙종과 장희빈의 관계를 갈라놓으려 했던 것이다.
인현왕후는 숙종과 장희빈을 갈라놓기 위해 그 같은 비난을 일삼았겠지만, 그런 비난이 숙종의 귀에는 또 다른 의미로 들렸던 것 같다. 숙종 입장에서는 장희빈에 대한 비판보다는 '주상께서 애쓰셔봤자 아들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부분이 한층 더 불쾌하고 노여웠던 모양이다. 하루라도 빨리 후사(後嗣)를 양성해 후계구도를 안정시키려는 숙종의 열의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막말을 꾹 참아온 숙종은 세자가 태어나고 그 지위가 안정된 뒤에야 비로소 속에 담아 두었던 분노를 거침없이 표출했다. "이제 조상들이 도우셔서 세자가 태어남으로써 흉한 계략이 더욱 더 드러났으니 누구를 속이겠는가?"라고 숙종은 퍼부었다. '중전의 사주풀이가 맞는다면 세자 이윤이 왜 태어났겠느냐?'며 인현왕후를 공격한 것이다.
위와 같은 기록을 보면, 인현왕후 폐위는 왕후의 배후세력인 서인 정권이 붕괴함에 따른 결과인 동시에, 숙종의 후사 생산을 놓고 평소 막말을 일삼던 인현왕후에 대한 숙종의 분노가 폭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한 개인적 동기 중 하나는, 왕후가 평소에 근거 없는 정보를 동원해서 숙종의 후사 생산과 관련해 모독적인 발언을 일삼은 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근거 없는 사주풀이로 무책임하게 국본을 뒤흔들고 또 왕실의 번성보다는 개인의 영화를 우선시하는 여인에게 더 이상 중궁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판단 하에, 숙종은 인현왕후 폐위라는 결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인현왕후 폐위는 장희빈 탓이라기보다는 인현왕후 자신의 탓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