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 33주년의 아침이 밝아옵니다. 지난 33년간 한국 사회는 국민이 5.18 유언비어와 거짓 주장을 맹신하도록 강요당하는
사회였습니다. 합헌적 민주 선거가 아니라, 무장봉기라는 비민주적 수단에 의해 정권을 교체하려 했던 김대중 및 적화통일 세력의 야욕과 음모가
빚었던 5.18 사건 기록물이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을 때 우리는 이제 이러한 역사왜곡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문제라고 여겨
분연히 붓을 들었으며, 그런 진실 탐구의 결실로서 마침내 '역사로서의 5.18'이라는 제목으로 책이 완성되고 출간되었습니다. 애국 국민에게
광주사태 33주년은 이제 한국 근현대사에서 역사왜곡에 종지부를 찍게 하여야 할 사명과 목표가 있다는 점에서 역사의 새 아침을 여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로서 우리가 유언비어와 거짓말의 지배를 방관하던 때는 지나갔습니다. 본서를 소개하는 사진과 글은 “33년 만에 공개된 5.18
광주사태의 진상"이란 제목의 글( http://cafe.daum.net/issue21/3IBb/772
)에 있습니다.
광주사태 혹은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불리는 5.18 사건에는 북한의 개입 및 북한군 광주 침투 사실 못지 않게 중요한 두가지 명제가
있습니다.
명제1: 5월 시위구호는 직선제 요구가 아니라. 직선제 개헌 반대였다.
명제2: 학생이 아니라, 북한 세력이 전두환을 제거하려 하였다.
명제1: 5월 시위구호는 직선제 요구가 아니라. 직선제 개헌 반대였다.
5월 중순의 시위구호는 “최규하 퇴진” “신현확 퇴진” “개헌 반대”였는데, “개헌 반대”는 직선제 개헌 반대였다. 최규하 대통령 정부는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하고, 그 새 헌법에 의거하여 1년 내로 5공화국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그 한가지 목적을 위하여 탄생한 과도정부였던 반면 1980년 봄의 시위는 과도정부가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하는 것을 훼방하기 위한 시위였었기에 그 시위구호가 “개헌 반대”였다.
1960년대의 통혁당 사건 이래 적화통일세력은 줄곧 무장봉기에 위한 공산주의 혁명 노선을 유지하였다. 1975년 월남에서 도시 게릴라 방법에 의한 무장봉기로 공산주의 혁명이 완성되는 것을 본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는 남한에서 그 방법을 접목시키려는 시도를 구체화하였다. 이것이 1979년 11월의 <명동YWCA위장결혼식 사건> 때부터는 민중봉기에 의한 정권교체론으로 발전하고, 이듬해 1980년 3월 김대중이 신민당 대선 후보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선거가 아닌 민중봉기로 정권을 교체시키겠다는 김대중의 집권 전략으로 가닥을 잡았다.
당시 선거가 아닌 민중봉기로 정권을 교체시키겠다는 김대중의 집권 전략을 지지하던 세력의 논리는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는 유신잔당이므로 과도정부는 헌법 개헌을 주도할 자격이 없고, 민중봉기로 과도정부를 전복시킨 후 김대중이 임명하는 쉐도우 내각이 새 헌법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집권 전략이 성사되게 하기 위해서는 과도정부의 선거법 개정을 방해하여야 했으며 그래서 당시 시위 구호가 “최규하 퇴진” “신현확 퇴진” “개헌 반대”였다.
이것은 당시 학생으로서 시위현장에 있었던 시대의 증인이 아는 사실이요 <5 · 18 이전 성명서>로서의 기록물들에 명시되어있는 사실이다. 직선제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친 시민군은 단 한 명도 없었으며, 선거가 아닌 무장봉기의 수단에 의하여 정권을 교체시키려던 의지가 시민군 성명서들에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다. 『역사로서의 5‧18』 독자들은 5‧18 사건의 정치적 동인은 합헌적 선거가 아닌 민중봉기에 의한 정권교체론이었다는 사실을 본서 제1권 2장 “5‧18은 사전에 준비된 무장폭동인가 사후의 저항운동인가?” 제3권 7장 “5‧18 재조명이 필요한 이유”, 8장 “5‧18이 헌법수호라는 판결과 상반되는 사실들”, 9장 “5‧18이 국민의 결집이었다는 판결과 상반되는 사실들”, 11장 “광주해방구에 대한 법리 해석의 문제”, 제4권 12장 “5‧18의 민족민주에 대한 법리해석의 문제” 그리고 13장 “광주운동권사에 비춰본 5‧18 등에서 분명하게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명제2: 학생이 아니라, 북한 세력이 전두환을 제거하려 하였다.
시민군이 악을 쓰며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는 구호를 외쳤으나, 그들은 그가 누군지 전혀 몰랐다. 난생 처음으로 그 이름 석자를 들어보았을 뿐 어디에 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인물은 애증의 대상이 아니다. 시민군이 아무런 생각 없이 외친 구호에는 별 의미가 없었으되 “아무개를 찢어죽이자”는 본래 북한의 군중대회 구호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
강명도는 1996년에 그의 저서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에서 북한 당국이 전두환을 공적 1호로 삼고 제거하려 하였었다는 사실을 기록한다. 국가관이 분명하며 확실하게 대한민국 편에 서있던 인물이 북한의 공적이었다.
1978년 1월 14일 김정일의 지시로 여배우 최은희가 납북되었을 때 전두환 소장이 1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였으며 저자는 그 부대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둔 맞은 편 부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전두환 사단장이 부임하자마자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오산리에서 금촌으로 이어지는 도로에서는 매일 새벽 6시에 진풍경이 펼쳐졌다. 사단장이 선두에서 달리니 부사단장 이하 장교들 중 그 누구도 아침 구보 훈련에서 열외될 수가 없었다. 사단장이 선두에서 뛰는 그 긴 구보 행렬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기상이 서려 있었고, 전 부대장병들의 우렁찬 함성에서 조국을 지키려는 뜨거운 충정이 느껴졌다.
한편 북한에서는 “내가 여자지만 가장이고 가르치는 학생이 수백 명인데 어떻게 사람을 무작정 끌고 올 수 있느냐”는 따지는 최은희의 말에 김정일의 부관은3년 있으면 남조선 해방하고 갈텐데 3년만 기다리라고, 틀림없이 해방된다고 하는 말로 그녀를 달랬다. 그리고 그 말 들은 지 3년째 되는 1980년에 그녀는 북한에서 광주사태 생중계 방송을 보게 되었는데, "지금 폭도들이 무기고를 부수어 가지고 무기를 들고 서울쪽으로 향하고 있다 “는 뉴스도 들었다.
북한 고위층이 말하는 통일의 기회란 남한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면 남침 땅굴 등으로 게릴라 부대를 침투시켜 내전 상황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탈북자들도 북한의 적화통일전술은 국군과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한 게릴라 부대를 땅굴로 침투시키는 것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는바, 이런 전망에서 살펴볼 때 북한이 1980년대 초에 그토록 전두환을 제거하려 하였던 이유가 분명해진다.
북한 당국이 1980년에 통일이 완성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며 최은희를 회유하고 있었을 때 그들은 전두환이 남침땅굴을 찾아낼 줄 예상하지 못했었다. 전방지역에는 여전히 지뢰가 많았으며 남침땅굴 측량기사로 일하다가 귀순한 김부성씨도 자기가 판 땅굴을 찾다가 지뢰를 밟아 한쪽 다리를 잃었다. 만약 국방과학연구소 기술진마저 갱도가 있을 가능성을 부인하였을 때 전두환이 포기하였었더라면 안보에 가장 위협적인 제3땅굴을 영영 찾아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훈련장에서 사병들 선두에서 달리던 전 장군은 지뢰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최전방에서도 마침내 1978년 10월 17일 땅굴을 찾아내는 명장의 면모를 보였다. 그는 육군본부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이듬해 여름 보안사령관이라는 새 직책에 임명되었다.
1980년 5월 19일 서울의 대학가에는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자다”라고 쓴 대자보가 나붙었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자라서 수도권에서 편하게 근무하였으므로 퇴진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왜곡된 정보로 학생들을 속일 수는 있었어도 서울에서는 시위대를 형성할 만한 호응을 얻지 못했다. 광주사태 33주년의 시점에서 그때를 뒤돌아보아도 남침 땅굴을 찾아낸 인물은 안보의 기둥이었으며, 학생들 편에서는 국가 안보의 기둥을 제거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북한 편에서는 전두환이 적화통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기에 제거하려 하였다.
합헌적 선거가 아니라 민중봉기의 수단에 의한 집권전략을 추진하고 있었던 김대중 진영 편에서도 전두환이 가장 큰 걸림돌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때는 시위 주동자들이 전두환도 최규하 대통령 및 신현확 총리와 마찬가지로 유신잔당이기에 숙청 대상이라고 선동하더니 15년 후5‧18 재판 때는 말바꾸기를 하여 시민군은’ 유신잔당’ 편이었는데 전두환이 유신잔당에 반기를 들기에 봉기를 일으킨 것이었다는 허위주장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본서 독자들은 이런 사실들을 본서 제1권 1장 1 “전두환이 누군지 모르는 자들의 소동”, 2장 3 “5‧18 이전에 민중봉기 선동한5‧18 성명서”, 제2권 5장 “외부에서 침투한 시민군”, 제3권 7장 5 “말바꾸기 꼼수로 빚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법리” 그리고 제4권 12장 3 “5‧18 성명서 상투어에 반영된 이념” 등에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첫댓글 광주건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타인에게 제시하였다가 미친놈 내지는 수구꼴통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광주사태의 관계자들이 대다수 생존해 있음에도 광주폭동을
민주화운동 또는 민중항쟁으로 왜곡하고 있는 현실이 한심합니다. 비봉 출판사 책을 사서 읽어 보겠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또 한심스러운 현실에 답답해 질 듯 합니다.
이번에는 뭔가 다른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광주사태 33주년 행사가 계속되는 7월까지 5.18 역사왜곡의 문제를 바로 잡으려는 목표를 세우는 것이 필요한 때일 것입니다
5ㆍ18의 두 가지 명제를 읽어보니, "눈"이 확 뜨입니다...대한민국 역사에 좋은 기록문헌으로 남을 것입니다...^*^...
너무 큰일을 하셨읍니다, 이책을 보면은 다시한번 진실을 판단할수 있을겁니다. 지금도 보이지 않은 사상전이 진행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학도님, 80년 최규하 정부가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려 하였다는 사실이 놀랍군요. 최규하정부는 스스로를 과도정부로 개헌을 통한 정권이양을 준비중 이었다는 글을 읽은 적은 있지만
최규하 정부가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최규하 과도정부가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를 가장한 대규모 폭동이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배후조종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됩니다. 역시 배후는 김대중(윤대중인지 제갈대중인지는 모르지만)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대중이 자신의 본거지인 전라도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려던 것이 5. 18로 나타난 것입니다.
5. 18의 주범 김대중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특정 지역과 특정세력에게 있어 김대중은 성역과도 같은 듯 합니다. 절대불가침의 성역, 중학교 3학년 정도의 상식과 인성을 갖춘 사람이면 5. 18에 대한 허위와 거짓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인데 수 천년의 세월이 흐른 것도 아닌데 왜 진실을 밝힐 수 없는 것인지?
위국헌신님, 새로님 감사합니다. 프리찌스오너님, 직선제 선거에 의한 제5공화국안은 최규하 대통령안이었습니다. 유신헌법에 의해 대통령이 선거되는 공화국을 4공화국이라 부르는데, 최 대통령 스스로 4공화국을 부스기 위해 스스로 자기 정부를 과도정부라고 불렀습니다. 직선제에 의한 5공화국 대통령 선거를 1980년 1월 취임하자마자 추진하였기 때문에 2월부터 바로 양김씨도 대선 출마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직선제 개헌을 못하게 온갖 방해를 하다가 김대중이 광주사태를 일으키니깐, (더구나 5월 27일 새벽에 군자위권 발동 명령을 재가하시어 17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개헌을 포기할 수밖에
없고 당시 판단에 전두환 장군만이 그 혼란으로부터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여겨 전 장군에게 5공화국 대통령 선거를 맡기셨던 것입니다. 1981년 1월 전두환 민정당 후보는 미국식 간선제로 5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그때는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드디어 역작이 나왔군요. 오랫동안 고생많이 하셨습니다. 518측과 이성적인 대화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대가 큽니다.. 역사학도님... 좌빨들의 역사 왜곡을 꼭 바로 잡아주셨음 합니다..
성경 말씀에.. "그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라"하셨는데.. 518의 열매들은.. 어찌 그리.. 악성 좌둥아리들이 들끊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꼭 사봐야겠습니다..
빵구님, 소리내음님, 주장군님 감사합니다. 누가 교보문고 온라인집계 역사문화분야 베스트셀러 10위 등극을 알리는 글이 일베에 떴다고 알려주더군요. http://www.ilbe.com/1249181224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많아지면 518측과의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해 질 것이고, 그간 왜곡되어 왔던 역사가 바로 잡히는 계기도 마련될 것입니다.
축하합니다. 교보에서 팔고 있네요.
5.18광주사태를 둔갑을시켜 뒤집어 민주화 운동으로 지정했다면 탈북자 월북자[범 법자]의 의견을 개입 시킬일은 아니라는것입니다.그 들은 그 후에 사람들이니까요.
북한군이 600명이왔다.고하나 국군이 잠자고있었던것도아니고 이것은국군을 모독하는 행위며.
5.18때 소수나 대 다수의 북한군이왔다.하여도 남한에 간첩이있어 가능했던것이며.5.18은 호남인의 본성이 빚어낸 비극의 불행이었음.
딱 잘라 김 대중외 주동자들에속아 스스로 발등찍고 제 무덤 판격 아니겠습니까?33년의 세월속에 5.18은 책 팔아 먹기위한 수단으로 경제력 챙기기 바빴던 일부인 들로인해
부풀고 왜곡되어 정리하기가 어려운것이며 대한민국 어느 누구도 마무리짓기는 어려울것입니다. 민주화 운동으로 뒤집었다는것을 알고 신고한 자는 저였으니까요.
보수분들이 북한군을 강조 하고있으나 범 법자들의 의견을 개입시킨다는것은 지금 당장이라도 북으로 추방시키면 사형감이나 다름없는자들과 동등한 의미이니
신뢰가없으며 수구꼴통이란/ 단어가 붙어 다닌다는것이죠.5.18이 민주화 운동이 될수없다면 지정 하기전 따져야했다는것임.
5.18은 광주시민인 제
직선제 개헌 반대가 어디에 나왔나요? 출처를 대시죠. 참나 그 당시 시위했던 사람들이 아직도 살아있는데 이따위 말이나 지껄이고 있으니....
김대중만 있었나 김영삼도 대권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유독 김대중과 엮을려는 이유는 뭐요?
K공작이란 말 들어들 보셨나? 박정희 시해 후 보안사에서 준비한 것 말이야. 당신들은 5.18을 중심으로 모든것을 보려고 하는데 그게 문제야 5.18은 말이지 부마 항쟁을 시작으로 박정희시해사건 이후 신군부가 정권을 잡는 과정 그러니까 12.12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황에서 정국을 확실하게 잡기위한 수단의 한 과정이야 5.18이후 전두환이 설치한게 국보위란것쯤은 알고 있겠지? 국보위가 뭐야? 박정희가 쿠데타 일으키고 만든 무슨위원회랑 같은 수법이랑 같지?
5.18은 말야 전두환의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기위한 좋은 구실이 된거지 거기에 김대중을 엮었으니 일석이조지. 그런데말야 오공청문회가 언제이넜지? 노태우 정권때였지...그때 북한개입설이 나온적 있나? 아니 정당성의 도구로 훌륭한 구실이었던 5.18을 제대로 이용하려면 북한군개입은 그때 말했어야지 ㅋㅋㅋㅋ 그리고 전대가리도 뭐라고 했지? 양아치들이 일으켰다고 했어 북한군이란 말은 쓰지도 않았다고. 왜? 북한군 개입 어쩌구 저쩌구 하는 순간 지들은 목아지거든 대통령 서거로 제주를 제외한 전국이 계엄하였지
5.17전국계엄은 제주도까지 포함시킨것에 불과해 즉, 철통경계하에서 북한군 남하가 가능 하냐고?
만야에 북한군이 문제를 일으키면 처음부터 총을 들었겠지 안그래? 이승복 어린이 사건때나 김신조 침투만 봐도 그래 직접 처음부터 공격하면 되지 뭐하러 나중에 무기고를 터나?
그냥 광주를 인정하기 싫으면 전대가리처럼 깡패 양아치들이 일으켰다고 해라. 그러나 공수부대가 처음부터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니들도 인정해야 할거다. 그들의 행동은 살안마 그 자체였으니까. 니들도 부모 형제 이웃 사촌이 있겠지 ㅋㅋㅋ 최초 사망자는 농아였다 말을 못했기 때문에 맞아죽었다. 니들이 인간이라면 사람이 내가 낸 세금으로 훈련된 군인이 사람을 죽였어 사람들 보라고 남녀가릴것 없이 속옷만 입혀서 수치심을 줬어 그 상황에서 니들이 무서워 도망가거나 찍소리 못하면 사람도 아니다 개만도 못한 인간들아
난 광주민주화운동이란 말보다 광주 항쟁이란 말을 더 좋아한다. 비겁하진 않았으니까. 민주화운동이란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보상정도로만 생각할 뿐..그 사람들 만큼이나 목숨걸고 할 생각 있으면 공영방송에 나와서 해봐라 변희재처럼 말야
최강의 특수부대를 상대로 싸운 사람들이 난 자랑스럽다. 뭐 시위자들 중에도 군대를 나온 사람들이 많을테니. LA 흑인폭동때 엎드려쏴 자세를 취한 한국 교민의 모습이 시민군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요즘들어 의문이 드는게 한 가지 있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씨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 말이야. 광주문제를 키우기위해서라면 신군부 측에서 유포했을지도. 특전사의 임무중 하나가 심리전이란것 정도는 다들 알고 있겠지? 보안사를 통해서도 가능하겠지 않았겠나? 아니면 중앙정보부의 동원해서라도(중앙정보부서리를 전대가리가 한 것 정도는 다들 아시겠지요?)
그 유언비어 처름에 김현장이 퍼뜨리기 시작하였는데 김현장이 신군부였나요?
이 시점에서 역사학도라는 사람이 궁금하네요? 계엄군과 관련된 사람인가? 내가 아는 계엄군은 자신의 죄를 정당화시키려고 발악하는 인간과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사죄하는 인간 두 부류인데 전자와 관련된 사람인가?
해병대가 광주에 진주 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텐데.....
김현장이란 사람이 유포했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나요?
사이트 주소좀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5.18이 양아치들이 일으켰다는것도 새빨간 거짓말.
그 당시 광주의 서민층은 지금의 거지보다 더 허름한모습었음.
그 들은김 영철.윤 상원.그 분들이 시민 아파트 옥상에서 학용품을 나누어주며
게임등 유희를 가르켜주던 어린이들이었음이 분명함.
지금이라도 조사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