眞雄, 식성군 이운룡 장군
재령 이씨 이운룡은 3대에 걸친 정통 무관 집안에서 1562년 청도 광명대(지금의 온막리)에서 태어나 1584년 약관22세에 무과에 급제,1587년 함경도 두만강유역 6진에 선전관으로 발령받아, 그 지역 만호(지금의 대대장급)인 이순신을 상관으로 모시게 된다.
1588년 여진족 기마병 1,000여명이 기습해와 곡식을 약탈하고 수많은 백성들을 살육, 포로로 잡아가자, 불과 수십명의 아군이 두만강하류 작은 섬인 녹둔도에서 기습하여 수많은 적을 살육하고 끌려가던 백성의 대부분을 구출해내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조정은 패배의 책임을 물어 이순신과 이운룡을 참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선조는 "완벽한 승리는 아니지만, 결코 패배가 아니다!"며 이들을 장형에 처하고 백의종군 할 것을 명하였다.
사병으로 백의종군하던 이운룡은 1589년 옥포만호(지금의 거제도 해군 함대장)로 발령받는다.
당시 각 수영의 지휘관은경상좌수영 박홍, 경상우수영 원균, 전라좌수영 이순신, 전라우수영 이억기였으며, 경상우수영이 가장 큰 규모였으며,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이 가장 작은 규모로 경상우수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운룡은 원균의 예하부대장이었음.
1592년 5월23일 임진왠란이 발발하자, 경상좌수사 박홍은 부대지휘권을 제대로 행사해 보지도 못하고, 혼비백산하여 뿔뿔히 육지로 후퇴하고 말았고, 경상우수사 원균 역시 지휘부 창고의 식량과 무기를 불태우고는 판옥선을 타고 남해지역으로 피신하였다. 이로 인해, 원균산하 70여척의 판옥선과 협선은 무용지물 혹은 멸실되었다.
남해로 피신 온 원균은 해당 지역 부대장(만호)들에게 피신할 것을 종용하였지만, 당시 30세의 패기 넘치는 옥포만호 이운룡은 원균에 항명하며 결사 항쟁하는 동시에, 전라좌수영과 연합작전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전라좌수영과 가장 인접한 남해 만호를 급파하여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영 함대가 판옥선25척, 협선15척을 이끌고 옥포 지역으로 오게 된다.
이렇게, 이운룡은 두만강 6진에서 2년간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이순신과 4년만에 한반도 최남단 옥포(거제도)에서 재회하였다. 천하의 이순신도 옥포지역은 생소해서 옥포만호 3년차로 해당 지역의 지형과 조류, 기상을 훤히 꿰고 있으며, 자신을 잘 따르는 이운룡을 중용하여 임진왜란 사상 첫 승전을 올린다.
옥포해전을 필두로, 이어지는 사천, 진해, 한산, 부산포 등의 전투에서 늘 선봉에 서서 적을 유인하고 학익진 등의 전술을 건의, 대승을 거둔다.
이순신 초대 3도수군통제사가 되다.
1593년 10월, 이순신은 마침내 경상도수영, 전라도수영,충청도수영 등 조선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3도수군 초대 통제사에 오른다.
주)삼도수군통제사는 지금의 해군참모총장에 해당되며, 초대,제3대를 이순신이, 제2대를 원균이, 제7대를 이운룡이 하였다.
이 때 이운룡은 지금의 진해지역인 웅천현감으로 승진하였다가 1596년에는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좌수사로 승진한다.
임진왜란 후 선조에 의해 선무공신으로 책봉되면서 식성군이라는 칭호와 함께 청도 온막리 자미산 일대의 땅을 하사받고, 궁중화공이 영정을 그렸다. 이 영정은 그의 사후 온막리에 상충사라는 사당을 지어 보관타가 청도 이서에 금호서원이 생기면서 그리로 옮겼다가 고종의 서원철폐 시 도난당했다고 한다. 이 후 남아 있던 사진을 바탕으로 모사하여 새로운 영정을 만들어 청도 원정리 소재 충현사에 보관하고 있다.
이 후, 이운룡은 함경도병마절도사(지금의 육군 군단장급), 포도대장(지금의 경찰청장), 비변사당상관(지금의 군관합동 국방위원회) ,삼도수군통제사(지금의 해군참모총장)을 거쳤다. 1610년 탄핵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전상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해 병사하였다.
주)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3년 전, 조정의 관료사회는 퇴계 이황을 추종하는 서인과 율곡 이이를 추종하는 동인으로 나뉘어 치열한 당파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관직은 한정되어있는데 비해 선비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필연적으로 밥그릇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꼴이 보기 싫어 정여립은 고향으로 낙향하여 당시 유행했던 대동계를 조직하였는데, 마침 전라도 지역에 왜구가 출몰해 정여립의 대동계가 이를 퇴치한 것이 "역모를 위해 사병을 키운 것"으로 윤색되어, 선조는 송강 정철을 특검단장에 임명하여 동인에 대한 엄청난 숙청을 단행했는데 당시 동인 소속 관리/선비 1,000여 명이 죽임을 당하였다.(기축사화).
그 여파로 이순신과 이운룡도 수차에 걸쳐 탄핵을 당해 관직박탈 및 유배를 당했다.
지금의 대한민국도 안보위기상황에서 여야의 극심한 대립으로 원균과 같은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하고 이순신, 이운룡같은 애국 충신들이 탄핵을 당할 처지에 있으니 우리 모두 역사의 교훈을 깊히 새겨야 할 때이다.
그의 사후 광해군은 그를 병조판서(지금의 국방부장관)에 추서하였다.
이운룡은,
이순신을 가장 존경하며 따랐던,
이순신을 가장 닮았던,
이순신이 가장 사랑하고 아꼈던 장군이었다.
(이동광목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