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렬 金泳烈(1892 ~ 미상)】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제 경찰서를 습격"
평안북도 벽동군(壁潼郡)에서 출생하였다. 일제 측 기록에 따르면 1892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상세한 출생일과 출신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활동 당시에는 벽동군 대평면(大平面) 음평동(陰平洞)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초반 남만주에서 활약한 대한통의부(大韓統義部) 소속 의용군으로 평북 벽동군 등지에서 무장투쟁 활동의 일환으로 운시면(雲時面)의 운시경찰주재소를 의용군 30여 명과 함께 습격하였다. 대한통의부는 서간도 지역의 대표적 항일단체인 한족회(韓族會)·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이 대한통군부(大韓統軍部)로 연합하여 확대된 것이다. 통의부는 잔여 병력으로 의용군을 재편하여 친일단체파괴, 군자금 모집, 시위운동 전개 등에 앞장섰다. 의용군은 또한 일군경 관서를 습격하여 무기를 조달하기도 하였다. 특히 1923~1926년 사이 일제 주재소와 관공서를 습격하고 일제 경찰과 교전하는 활동이 활발하였다.
1923년 8월 의용군 제2중대 참사 이광호(李光浩), 정원일(鄭元日) 등 30여 명은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제 기관을 파괴하고자 벽동군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의용군 단원 김익봉(金翊奉), 김흥렬(金興烈), 한서봉(韓瑞奉)이 의용군 동지들에게 운시경찰주재소를 습격할 것이니 참여해달라고 독려하였다. 이를 목적으로 김익봉, 김흥렬, 한서봉을 포함한 단원들과 함께 거사를 준비하며 그 해 8월 14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1923년 8월 14일 오후 9시 30분 단원들과 군복을 갖추어 입고 장총을 구비한 채 운시경찰주재소 뒷산에 숨어 기회를 기다렸다. 단원들은 두 대열로 나뉘어 주재소를 습격하고 일제 경찰들과 2시간 이상 교전한 끝에 근무 중인 일본인 순사를 사살하고 총기를 빼앗았다. 이어 주재소와 숙사(宿舍)에 석유를 뿌려 불태웠다. 순사들이 달아난 이후 단원들과 주재소 안에 있는 장총·군도·수통 등 중요 군수품들을 확보한 후, 대평면(大平面) 면사무소로 가서 등사판과 공금 30여원 등 물품들을 획득하였다. 이후 단원 양학준의 인도를 받아 강을 건너 벽동군 대안 중국땅인 근거지 콴덴현(寬甸縣)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그 뒤로도 단원들과 부호(富豪)들을 찾아가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제 경찰서를 습격하는 활동을 지속하다가, 1923년 10월 19일 벽동경찰서 경찰에게 붙잡혔다.
1924년 1월 23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받았고, 이에 불복하여 평양복심법원에 항소하였다. 그러나 1924년 4월 1일 기각되었고, 징역 8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평북 벽동(碧潼) 사람이다. 1923년 압록강 대안(對岸)에서 일선의 일본 경찰을 습격하여 경찰망을 교란할 것을 목적으로 양학준(楊學俊)·김기열(金基烈)·김병서(金炳瑞)·김만홍(金晩洪)·김계주(金桂柱)·김용필(金容弼) 등과 함께 무장독립단(武裝獨立團)을 조직하고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1923년 8월 13일 김익봉(金翊奉) 등과 함께 평북 벽동군 운시면(雲時面) 소재의 운시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 경찰을 사살하기로 논의·결정하였다. 그에 따라 이튿날 오후 9시 30분경 전원 군복을 정제(整齊)하고 장총으로 무장한 독립단원 11명을 인도하여 운시경찰관 주재소 뒷산에 은신시키고 습격의 기회를 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경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독립단원들을 두 부대로 나누어 주재소를 습격하고 주재소 순사들을 사살하였다. 또한 주재소 안에 보관되어 있던 장총과 경찰복장 등 각종 물품을 획득한 뒤, 석유를 뿌려 주재소와 동 숙소를 소각하였다. 이어 계속해서 동군 대평면(大平面) 면사무소로 진격한 그는 단원들과 함께 대평면사무소를 습격하고 그 곳에 보관되어 있던 현금 30여 원을 군자금으로 확보하였다. 그 후에도 평북 각지를 순회하며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본 경찰서를 습격하는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의해 붙잡혔다. 1924년 3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