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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종은 말년에 세상과 사람을 떠나 산에서 산으로, 보다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옛날 이집트의 안토니처럼 깊은 산에 숨어 철저한 고독과 침묵 속에 살았다. 고독과 침묵은 모든 수도자들이 영성을 길러가는 두 가지 방편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다.
화학산 도구박골은 주위 십리 안에 인가가 없는 수도의 적지였다. 이세종은 이 도구박골에서 돌로 울타리를 쌓아놓고 그 안에 있는 큰 바위에 올라 앉아 매일 하늘만 쳐다보면서 명상하였다. 얼마 후 더 깊은 산 자기의 마지막 장소를 찾아 거기서 떠나 화학산 각시 바위 넘어 한새골에서 최종 말년을 보냈는데 그곳은 인가가 전혀 없는 산중이었다.
그를 따르는 제자 박복만을 시켜 통나무집을 나흘간 지었는데 겨우 두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는 집이었고, 문도 성경대로 좁은 문이였다.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었다. 이세종은 평소에 가르치기를 “예수 믿는 길은 좁은 문이다. 좁은 문도 그냥 들어가는 좁은 문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고 좁은 문을 들어가야 한다” 고 했는데 실제로 그런 집을 지었다. 이 한새골 움막 좁은 문도 이세종은 너무 크다고 했다. 제자가 “다시 뜯어 다시 좁게 할까요?” 하고 물으니 “얼마나 오래 살 것이라고 내버려 두시오.” 하였다. 결국 그 집에서 삼 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세종의 길은 좁은 길이었다. 우리 생각에는 큰 문 열어놓고 대대적으로 전도하며 “아무나 와도 좋소!”하고 싶으나 진리는 언제나 좁은 길이다. 이 세상에서 진리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환영받는다. 세속적 기독교는 넒은 문이다. 참 신자가 찾아가야 하는 길은 좁은 문, 좁은 길이다. 좁은 문도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십자가를 지고 들어가는 좁은 문이다. 나사렛 예수의 길은 바로 이 길, 좁은 길이다.
이세종이 세상을 떠날 때는 평생 그를 따르던 제자 몇 사람만이 곁에서 시중하였다. 제자들에게 나뭇가지를 베어오게 하여 그것을 손수 새끼로 엮어 사다리 상여를 만들어 자기 좁은 방에 놓았다. 그 위에 이불을 펴고 평소에 베고 자던 목침을 놓고는 제자들에게 “나를 들어 그 위에 올려놓으시오. 그리고 내가 숨이 지더라도 꼭 이대로 묻어 주어야 합니다. 달리하면 당신들 벌 받습니다.”고 하였다. 바싹 마른 이세종의 몸은 이미 미이라 같은 해골이었다. 제자들에게 자기 누운 상여를 들어 어깨에 메라고 명했다. 제자 다섯 명이 시키는 대로 하니 아모스 4장 12절을 찾아 읽으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하고 소리쳐 읽으니 이세종은 상여 위에 누운 채 “높이! 더 높이!”하고 재촉하더니 “올라간다! 올라간다! 올라간다!”고 세 마디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숨진 뒤 시신에 입힐 수의를 새로 마련할 필요도 없고 늘 입고 있는 거지 옷 그대로 땅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아내가 소리내어 통곡하니 누워 있던 이세종은 벌떡 일어나 왜 우느냐면서 “울음을 그치시오. 내가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울어서야 되겠소!”하고 말했다. 아내가 울음을 멈추자 이세종은 도로 누워 얼마 후 고요히 잠자듯 숨을 거두었다. 그는 끝까지 따르던 몇몇 제자들과 아내의 돌봄 속에서 우여곡절의 지상 생애를 마감했다. 그때가 바로 1942년 2월 그의 나이 63세였다. 이세종이 남긴 유산이라고는 가마니 한 장도 없었다. 일생 사진 한 장도 안 찍었다.
이세종 선생 무덤
전남 장흥땅 유치면에 있는 이공의 무덤 앞에서 동광원 식구들이
예배드리고 난 뒤 함께 앉아 있다
제자들은 추운 겨울 언 땅을 파고 그의 지시대로 움막 옆에 무덤을 만들어 헌 옷 그대로 입혀 평토장하여 스승을 땅에 묻었다. 지금 그의 무덤은 전남 장흥군 유치면 대천리 양지녘에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의 껍데기인 육신만 땅에 묻혔을 뿐, 그의 혼과 얼은 제자들의 가슴에 묻혀 한국 기독교의 토착적 영성의 뿌리가 되었다. 후에 맨발의 성자라 불리웠던 이현필은 조직과 운영으로, 정인세는 이 운동을 서울로 끌어 올리는 중추 역할을 하였다. 그 영향으로 김병로와 같은 이는 대법원장으로 있을 때 판결을 내리기 전에 먼저 기도하고 성경 위에 두 손을 얹고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이세종의 영향을 받은 이로서는 전 검찰총장 원택연 장로가 있고, 정치가로는 장면과 김상돈이 있다. 학계에는 전남대 농대 교수인 김준과 전남대 명예 교수인 신귀남이 있다. 철학자로는 유영모가 있고, 사회 운동가로는 현동완 YMCA 총무가 있었다.
화순 천태산을 뒤로하고
왼쪽부터 이현필 선생의 수제자 오북환 장로, 이세종 선생의 제자 이원희 장로,
'호세아를 닮은 성자'의 저자 엄두섭 목사
천태산을 내려오는 길에 김춘일 화순 분원 원장이 이세종 선생에 대한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아직도 긴 여운을 가지고 내 마음 속에 살아있다. “이공(이세종)님이 예수를 믿고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는 그대로 조금 남은 돈을 늘 큰 주머니에 넣고 다녔대요. 다니다가 거지가 구걸하면 손을 쑥 집어넣어서 잡히는 대로 다 주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에 들어서자 저만치 한 거지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지 뭐예요. 그 순간 그는 주머니 속의 돈을 꺼내어 다가와 구걸하는 거지에게 몽땅 털어 주었어요.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거지는 고맙다는 인사는 커녕 당연하다는 듯 아무 반응도 없이 지나쳐 가더래요. ‘저 저 저런, 문둥이 같은 자식 보래이. 그 돈이 얼마나 큰돈인데 인사도 없이 그냥 지나가나? 저런 못돼 먹은 놈···’ 그러나 이런 생각도 잠깐 뿐 이공님은 그 자리에서 가슴을 치고 말았답니다. ‘오, 주님!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구제한답시고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려 하다니! 오, 내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아직도 이 죽을 놈이 살아 있습니다.’ 그날 이후로 이공님은 저기 천태산에 들어가 수도를 하셨다는 거예요.”
이세종 선생이 살아있을 때 제자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 마태복음 7장 21절 말씀을 해석하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님의 일을 할때 ‘나’라는 의식조차 없어야 합니다. ‘나’라는 의식 이것이 곧 불법입니다.” 이세종 선생의 이 한마디 말씀이 지금 나의 영혼을 깨우고 있다. ‘나’라는 의식을 지우고 오직 주님만이 살고 나타나야 한다.
이세종의 전기를 써서 그를 세상에 처음 알렸던 엄두섭 목사는 「호세아를 닮은 성자」라는 책에서 이세종에 대한 일화를 이렇게 들려주고 있다. 어느 날 이세종은 나주 남평 오동나무 거리에서 어린 거지 하나를 만났다. 돈 얼마를 구제하고 조금 가다가 생각하니 그 거지의 허름한 옷과 헐벗은 모습이 떠올라 양심이 괴로웠다. 그래서 다시 그 거지를 찾았으나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하루 종일 거지를 찾아다니다가 해질 무렵에서야 원적골이라는데서 다시 만났다. 이세종은 거지를 붙잡고는 “당신께 좋은 일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입은 옷과 내 옷을 바꿔 입으면 어떻소?”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바꾸어 입었는데 그 모습은 참 가관이었다.
이세종 선생의 제자들
전남 곡성군 원달 수도처에서 찍은 사진으로
왼쪽 첫째가 이재갑 장로이고 둘째가 이상복 장로이다
거지가 입던 다 떨어진 옷을 자기가 입고 자기의 새옷을 거지를 주니 이세종의 큰 몸집에 거지의 옷은 너무 작아 남 보기에 그야말로 우스꽝스러운 꼴이었다. 이세종의 조카들이 그 꼴을 보고서는 너무 창피해서 “그런 거지 꼴을 하고 마을에 가면 우리들까지 수치스럽다.”면서 야단쳤다. 그래서 이세종은 해가 질 때까지 돌아가지 못하다가 자기 모습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어두워진 다음에야 마을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세종의 상식을 뛰어넘는 언행은 처음엔 사람들에게 바보처럼 보였으나 세월이 흐르자 차차 거룩하게 느껴지게 되어 사람들이 이세종을 성자로 받들게 되었다. 유영모 선생도 이현필과 함께 이세종이 살던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를 둘러보고는 이세종을 성자라고 부르기에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유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성인이 무엇이냐? 물질에 빠지고 미끄러지는 나를 물질을 차 버리고 깨끗해 보라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위에서 내려온 얼을 생명으로 잡아 윗자리와 같이 거룩해 보자는 것이 성인이 아니겠습니까? 내 위에 누가 있으랴 하는 자는 지각이 없기로, 마치 철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기 머리가 가장 위인줄 알고 일을 저지르니 못된 짓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박영호, 다석 유영모下, P.150)
이세종은 좀처럼 어디로 다니지 않았다. 깊은 산 속 바위 그늘에 핀 향기로운 꽃 한 포기가 제자리를 떠나지 않듯이 그가 일평생 산 세계는 화순 도암의 등광리와 천태산, 거기서 좀 더 산 속으로 들어가서 그가 말년에 숨어 살다가 세상을 떠난 화학산이 그의 무대의 전부였다. 그는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숨어 있기를 원했다. 그는 예수를 영접한 후 사람들이 자기를 ‘이공(李空)’이라 불러주기를 바랐다. 철저한 자기 부인 자기 비움의 정신이었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공’. 그는 그 이름을 그렇게 사모하고 불림 받기를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오늘까지 그를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세종 선생이라 하지 않고 이공 어른, 이공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