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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영화배우 앤서니 퀸 사망
← 영화배우 앤서니 퀸
영화 ‘희랍인 조르바’와 ‘길’의 명배우 앤서니 퀸이 2001년 6월 3일 미국 보스턴의 한 병원에서 호흡 곤란으로 별세했다. 86세였다. 그는 60년이 넘는 기간을 스크린에서 활약하며 ‘노틀담의 곱추’ ‘아라비아의 로렌스’ ‘25시’를 포함해 150여편이나 되는 출연작을 남겼다.
퀸은 1915년 멕시코에서 태어났다. 미국으로 이주해 ‘가출옥’(1936)으로 데뷔한 그는 오랜 무명생활 끝에 ‘혁명아 자파타’(1951)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따내면서 주목받았다. 이어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1954)에서 생존 에너지로만 똘똘 뭉친 듯한 차력사 역을 맡아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늘 거친 남성적 캐릭터들을 연기했지만, 실제 삶에선 화려한 여성편력을 과시했다. 1937년 세실 드밀 감독의 딸 캐서린과 첫 결혼을 했지만 리타 헤이워스를 비롯한 숱한 여배우들과 밀애를 나눴다. 1957년 두 번째 결혼식을 올렸지만 1993년 퀸이 비서와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는 바람에 1997년 파경을 맞았다. 퀸의 자녀들은 81세의 나이에 낳아 화제가 된 마지막 아이를 포함해 13명에 달했다. 퀸은 말년에 오랜 꿈이었던 화가와 조각가로서의 삶에 더 집중했다./조선
[2000년] 지중해서 기원전 7~6C사이에 조성된 고대 이집트 도시 '메노우티프'와 '헤라클레이온' 발견
← 고대 도시 ‘헤라클레이온’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시에서 6km 떨어진 해저에서 발견됐다. 당시의 저택과 사원, 항만, 조각상 등이 원형대로 보존돼 있었다.
그리스 고전 문헌을 통해서만 알려졌던 고대 도시 메노우티프와 헤라클레이온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시에서 약 6km 떨어진 해저에서 발견했다고 프랑스-이집트 합동 발굴단이 2000년 6월 3일 발표했다. 이번 발견은 역사적 가치와 보존 상태 등에서 이집트 투탕카멘왕릉에 비견되는 고고학적 대발견으로 평가받고 있다.
발굴 책임자 프랑크 고디오는 이날 검은 화강암으로 된, 높이 15m의 이시스 여신상을 공개했다. 그는 2년에 걸친 탐사 끝에 아부퀴르만 해저에서 1500여년 전 발생한 지진 또는 홍수로 수몰된 고대 도시 유적을 발견했으며, 당시의 화려한 생활상을 보여주는 저택, 사원, 항만, 조각상 등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돼 있다고 밝혔다.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 사이인 파라오 시대 말기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고대 도시는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되기 전까지, 고대 그리스와 지중해 여러 도시와의 무역을 통한 번영과 이시스 여신-헤라클레스 등을 모신 화려한 사원으로 유명했던 곳이었다. 기원전 450년 이집트를 방문했던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당시 화려했던 헤라클레이온의 생활상과 헤라클레스에게 봉헌된 사원 등에 대해 기술했으며, 그리스 비극과 각종 여행담에도 이들 도시의 이름이 나오고 있지만 약 1500년 간 그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었다. 유물 중에는 기원전 7세기인 제26대 파라오 시대의 스핑크스 상, 이집트·그리스 시대 조각의 머리 부분도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조선
[1998년] 독일 고속열차 탈선으로 100명 사망
← 크레인이 고속열차 사고 잔해를 들어올리고 있다.
독일 뮌헨을 출발, 시속 2백km로 함부르크를 향해 달리던 ICE(도시간 고속철) 열차가 1998년 6월 3일 오전 11시 하노버 북쪽 50km 지점에서 철로에 뛰어든 승용차와 충돌하면서 탈선, 최소한 1백명이 사망하고 2백여명이 부상했다.
사고는 함부르크 남쪽 1백km지점인 에쉐데 역 부근을 지나던 고속열차가 고가도로에서 추락한 것으로 보이는 승용차와 충돌하면서 앞부분 4개 차량이 철로를 벗어나 도로 교각을 들이받아 일어났으며, 열차 객실 13량이 부서졌다.
이 충돌로 철로와 교차하는 도로 교각과 상판이 무너져 객실 2량을 덮쳤다. 사고열차는 최고시속이 2백80km로, 정원 7백59명에 승객과 승무원을 포함, 3백여명이 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 원인은 선로이상과 바퀴파손 등으로 밝혀졌다./조선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안 발표
← 국민회의파의 네루(왼쪽)와 신임 인도 총독 마운트배튼(가운데) 그리고 무슬림 동맹의 진나가 인도독립에 관해 협의를 하고 있다.
1947년 6월 3일, 영국의 루이스 마운트배튼 인도 총독이 영국령 인도를 힌두교 지역과 무슬림 지역으로 나눠 각각 제헌의회를 세운다는 분리독립안을 발표했다.
힌두교의 국민회의파를 중심으로 순조롭게 진행되던 독립일정이 차질을 빚은 것은 무슬림연맹이 분리독립을 요구하면서였다. 영국은 내전과 분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국민회의파도 종교갈등과 이로 인한 살육행위를 마냥 모른 체할 수 만은 없었다. 간디는 “인도를 생체해부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8월 15일, 마침내 인도와 파키스탄 2개 국가가 분리독립됐지만 이 과정에서 또 대규모 학살이 자행됐다. 힌두교도와 시크교도가 파키스탄으로부터, 이슬람교도가 인도로부터 쫓겨나면서 1400만명의 난민이 발생하고 100만명이 살해된 것이다. 분리 후에도 양국은 경계지역인 카슈미르를 둘러싸고 지금까지 3차례나 전쟁을 치렀지만 긴장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1924년]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사망
← 프란츠 카프카
20세기 문학사의 한 축을 이룬 체코 출신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가 1924년 6월 3일 빈 교외의 킬링 요양원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41세였다. 프라하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프라하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나 이즈음 시작된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본격적인 습작에 들어갔다. 1906년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08년부터는 노동자재해보험국에서 14년 동안 근무했다.
독일어와 체코어가 함께 사용되던 프라하에서 그는 독일어로 작품을 썼다. 그의 문장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간결하지만 독일어 산문 문학 중 가장 명료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인간의 부조리와 인간존재의 불안 등을 날카롭게 통찰해 현대 인간의 실존적 체험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표현한 그의 작품들은 사르트르와 카뮈에 의해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았다. 소련 공산당은 ‘절망과 불안을 조장하는 부르조아 퇴폐 반동 작가’라는 이유를 들어 그의 작품을 오랫동안 금기시했으나 1964년 해금됐다. 그의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성(城)’과 미완성 장편소설 ‘심판(審判)’ 등이 있다./조선
[1964년] 6·3사태 발발
← 5·16군사정변의 주체세력들
1964년 6월 3일 정부가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을 본격화시키자 학생을 중심으로 격렬한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학생들은 서울대학교 집회에서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일본 총리와 이완용의 허수아비 화형식을 가진 뒤 가두시위에 돌입했고, 서울·부산·대구 등까지 저항운동이 확산되었다. 한일회담과 5·16군사정변을 맹렬히 성토하는 가운데 시위대가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청와대까지 이르자 박정희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6월 3일 계엄군의 진주로 시위가 무력진압된 후 7월 29일 계엄령이 해제되기까지 학생 168명, 민간인 173명, 언론인 7명이 구속되었다./브리태니커
← 비상계엄을 부른 6.3 시위장면.
5·16군사혁명 후 2년7개월 만에 권좌에 오른 박정희 대통령이 첫 대규모 난관에 봉착했다. 한·일 간 국교수립을 서둘렀던 것이 화근이었다. 구악 근절을 내세우면서 신악을 양산한 것도 반발을 부채질했다. 야당을 중심으로 ‘범국민투쟁위원회’가 결성되고 전국의 대학생들이 매국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면서 정국은 혼미 속으로 빠져들었다.
1964년 3월 24일, 서울대 문리대생 500여명이 거리로 진출한 것을 신호탄으로 각 대학 학생들도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때부터 6월 3일까지 대학가와 거리는 최루탄 연기와 곤봉, 널브러진 돌덩이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정부는 유화적인 태도로 사태확산을 막아보려 했지만 학생들이 단식농성 등 강도를 점차 높여나가자 강경책으로 선회했다.
6월 3일 시위가 절정을 이룬 이날, 국회의사당에서 청와대에 이르는 길은 수만명의 학생들과 경찰들로 뒤덮였다. 사태가 4·19를 방불케 하자 정부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후 9시40분, 마침내 오후 8시를 기점으로 한 계엄령이 서울시 전역에 선포됐다. 계엄은 55일 뒤에 해제됐지만 1120명이 검거되고 348명이 구속됐다. 이때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던 세대를 학생운동사에선 ‘6·3세대’라고 부른다./조선
[1950년] 안나푸르나 최초 등정
1950년 6월 3일 프랑스 등반대가 안나푸르나 제1봉의 최초 등정에 성공했다. 안나푸르나는 네팔 중북부의 히말라야 산맥의 일부로 칼리간다크 강 유역과 마르시안디 강 유역 사이에 능선을 이루고 있다. 4개의 주요 봉우리들 가운데 서쪽 끝에는 안나푸르나 제1봉(8,091m)이, 동쪽 끝에는 제2봉(7,937m)이 자리잡고 있는데, 제1봉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가운데 하나이다. 1950년 6월 3일 프랑스 등반대의 모리스 에르조와 루이 라슈날이 정상에 도달함으로써 안나푸르나 제1봉 등정에 처음 성공했다. 한국에서는 영남대학교 산악회가 처음으로 안나푸르나 제2봉 등정에 성공했으며, 1984년 겨울에는 한국의 김영자가 여성산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안나푸르나 제1봉 등정에 성공했다./브리태니커
[1853년] 피트리 Sir (William Matthew) Flinders Petrie 출생
← 피트리
1853년 6월 3일 태어남 / 1942년 7월 28일 죽음
지구포럼 역시 전세계로부터 약 7900개의 민간환경단체가 참가했다. 보통 ‘리우환경회의’로 불리게 된 이 회의는 경제개발로 인해 날로 악화되고 있는 지구의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리우환경회의는 지구온난화, 대양오염, 기술이전, 산림보호, 인구조절, 동식물 보호, 환경을 고려한 자연개발 등 7개 의제를 놓고 12일간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 결과 ‘환경과 개발에 대한 리우선언’이 발표됐고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해 실천해야 할 원칙을 담은 ‘아젠다 21’이 채택됐다. 또 기후변화방지협약, 생물다양성협약, 산림에 관한 원칙 등 국제협약이 체결됐으며 리우환경회의의 성과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기구인 지속개발위원회가 설치됐다.
리우회의의 최대 성과는 개발과 환경보호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기 위해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이었다. 또 민간환경단체들이 회의 기획 단계부터 참여했고 많은 나라가 이들을 정부대표단에 포함시킨 점도 고무적이었다. 그러나 리우환경회의는 환경보존 재원의 충당문제, 환경기준치 설정문제를 놓고 선진국과 개도국간의 의견차를 보였고, 환경기술이 앞으로 새로운 무역장벽으로 등장할 것임을 예고했다./조선
[1989년] 이란 지도자 호메이니(Khomeini, Ayatollah, 1900~1989) 사망
← 아야툴라 루훌라 호메이니
지난 1979년 회교혁명이후 신정체제를 굳혀온 이란의 최고지도자 아야툴라 루훌라 호메이니옹이 1989년 6월 3일 테헤란병원에서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902년 수도 테헤란 남쪽 오아시스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6세 때 이미 코란을 암송할 정도였고 19세때 시아파 중심지인 콤시에서 성직자가 되었다. 1963년 팔레비 국왕에게 공개적으로 죽음을 경고하는 투쟁을 벌이다 추방되었으나, 1978년 7월 계엄령속에 시민 수천명이 군대에 의해 학살당한 ‘검은 금요일’ 이후 혁명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팔레비 독재왕정을 무너뜨리고 최고권자에 오른 호메이니는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속에 도덕적 회교 원리주의국가를 실현시키고자 노력해왔으나 이란 - 이라크전 때문에 대부분의 집권기간을 전쟁속에 보내야만 했다. 이러한 그의 삶을 뒤로하고 오늘날 세계는 그를 회교정신을 부흥시킨 탁월한 종교-정치적 지도자로서, 또 한편으로는 세계의 기존질서를 위협한 인물로서 엇갈린 평가를 하고 있다. /조선
[1973년] 소련 초음속항공기(TU144) 파리에 추락
← 1973년 6월 3일 파리의 국제 에어쇼에서 시범비행 중 불을 뿜으며 추락하고 있는 소련의 초음속항공기(TU144).
소련의 최신형 TU144 초음속 항공기가 1973년 6월 3일 파리교외 르브르제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항공쇼에서 시험비행중 귀빈석 스탠드를 저공비행으로 통과한 직후 공중폭발, 인근 주거지역에 추락하여 소련승무원 6명 전원을 포함한 8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사고지점인 구생빌르 마을에는 가옥 15채가 파괴됐고 1백여채가 기체파편의 낙하로 부분파손을 입었다.
에어 쇼의 마지막날인 이날 소련항공계의 자랑인 TU144기를 구경나온 30만명의 관중들은 귀빈석 위를 저공비행한 후 구름속으로 수직상승 하자마자 곧 폭음,화염과 함께 산산조각난 기체의 파편들이 떨어지는 극적인 추락현장을 목격했다. 이날 공중폭발한 초음속항공기 TU144는 영불합작 의 콩코드기의 유일한 경쟁자이였고 외형도 콩코드와 흡사했다. TU144기는 1968년에 처녀비행을 했고, 1970년 5월 21일 일반에 첫선을 보였다./조선
[1969년] 호남 정유공장 준공
1966년 락희화학공업사(주)와 미국의 칼텍스석유회사(주)간의 합작투자계약에 따라 1967년 5월 호남정유(주)로 설립되었다. 1969년 6월 일일 원유 처리능력 6만 배럴 규모의 여수공장을 준공한 이래 계속된 생산시설 확장으로 2002년 현재 일일 원유 처리능력 65만 배럴 규모의 정제시설과 세계 최대의 중질유 분해시설을 갖추게 되었으며, 또한 파라자일렌 105만t을 포함한 연산 200만t 규모의 방향족 생산시설 및 연산 18만t 규모의 폴리프로필렌 생산시설을 완공하여 석유제품을 비롯한 석유화학 공업원료 등을 생산·공급하고 있다.
1996년 상호를 LG칼텍스정유(주)로 변경하고 1997년 LG정유유통(주)을 흡수합병, 1998년에는 LG정유판매(주)를, 1999년 호유해운(주)을 합병하였다.
[1965년] 미국 제미니4호 발사. 애드화이트 소령 미국 최초로 21분간 우주유영
← 미국인 최초로 우주에서 유영하고 있는 화이트 소령
미국의 2인용 유인위성 ‘제미니4호(Gemini 4)’가 1965년 6월 3일 발사돼 우주비행사 에드워드 화이트 소령이 미국 최초로 21분간의 우주유영에 성공했다. 소련의 레오노프 소령보다 3개월 늦은 것이었다.
화이트는 우주선과 함께 시속 2만9천Km로 지구를 선회했다. 당시 우주의 아름다운 광경에 매료된 화이트는 우주선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에 "내 일생에서 가장 슬픈 순간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후 화이트는 1967년 1월 26일 아폴로1호 발사시험에 참가했다 화재사고로 사망했다.
[1963년] 로마 교황 요한23세 서거
카톨릭의 교황 요한 23세가 오랫동안 위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다가 81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1881년 12월 25일 태어나 1953년 베네치아 대주교를 거쳐 1958년 10월 9일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261대 로마법왕으로 5년 재임하는 동안 세계평화를 위해서 그가 남긴 업적은 크다. 그는 국가와 정치와 종교의 차이를 초월해 모든 인간의 평화를 위해서 힘썼다.
그는 교황으로서의 위엄을 지키기보다는 오히려 평민적인 냄새를 풍기는 사람으로서 교황으로 당선된지 몇 달만에 전 교황 비오12세가 19년 동안에 한 것보다 많은 공개석상에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1962년 10월 11일에 카톨릭교공의회를 열었다. 이것은 2천년의 카톨릭교 사상 21번째의 공의회이며 근 백년 동안에 처음으로 열리는 회합이었다.
비(非) 카톨릭신자들에게도 유명했던 교황은 평화와 종교단결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물로 세계 지도자들과 종교인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며, 교회의 현대화를 위해 상당한 영항력을 행사했다. 요한23세의 뒤를 이어 밀라노의 대주교인 바티스타 몬티니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는 바오로6세가 됐으며 6월 30일 바티칸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했다./조선
[1961년] 미국, 소련 비엔나에서 회담
← 정상회담차 만난 소련 흐루시초프 수상(왼쪽)과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가 1961년 6월 3일 비엔나에서 역사적인 냉전회담을 시작했다. 케네디 대통령과 흐루시초프 수상은 비엔나에 이틀간의 정상회담에서 여러 국제적인 현안에 합의하지 못했으나 양국은 적어도 대화를 재개했다. 대화재개 자체가 지난 1960년 5월 흐루시초프가 U2기 사건으로 결렬시킨 파리 정상회담에 비하면 성공적었다.
케네디와 흐루시초프는 베를린의 미래와 위상에 관해 첨예한 의견 대립을 보였다. 소련은 동베를린의 통제를 동독 당국에 넘겨주겠다고 위협해 왔고, 미국은 서베를린에 대한 소련 간섭의 결과에 대해 경고했다. 양 지도자는 라오스의 주권에 관해 제한된 합의에 도달했다. 라오스 정권은 모스크바의 지원을 받는 공산 게릴라에 의해 위협받아 왔다./조선
[1959년] 싱가포르, 영연방자치국 독립선언
← 싱가포르
1959년 6월 3일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은 싱가포르가 새 헌법의 공포와 함께 영국의 자치령이 됨으로써 140년간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났다.
140년 전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조호르 영주에게 불과 얼마되지 않는 비용 만을 지불하고 싱가포르를 사들였다. 당시에는 무인도로 가치가 없던 때였다. 이후 싱가포르는 영국의 식민지로 자유·중계 무역항이 되었으며, 말레이반도를 비롯하여 인근 여러 나라와 유럽 무역의 중심이 되었다.
1921년에는 영국군의 군사기지가 설치되어 군사·경제적으로 영국 식민지배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잠시 일본군에 점령당하기도 했으나, 종전 후 다시 영국 식민지가 됐다. 그후 反식민지운동이 활발해지기 시작, 결국 이날 영연방 자치국으로 독립했다./조선
[1948년] 미국, 캘리포니아 팔로마산천문대 개소식, 200인치 망원경 설치
미국 캘리포니아주 팔로마산의 해발고도 1,706m에 있는 팔로마산천문대(Palomar Observatory)는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 있는 사립대학인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이 소유·운영하며, 대학의 교수진과 학생들의 과학 연구 프로그램그램의 지원에 사용된다. 1920년대 중반에 이웃인 100인치 망원경을 갖춘 윌슨산 천문대에서 보다 진보된 천문학 연구를 위해서는 더 좋은 기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자, 1928년 록펠러 재단의 하나인 국제교육이사회에서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 200인치 헤일망원경을 기증하기로 했고, 천문학 관측에 필요한 최적의 대기조건을 갖추기 위해 여러 장소에서 테스트가 이루어진 결과 1934년에 팔로마산이 선정되었다.
주요기구로는 지름 5m의 헤일망원경, 1.2m의 오스친 망원경, 46cm의 슈미트카메라, 그리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과 워싱턴의 카네기연구소에 의해 공동으로 운영되는 지름 1.5m의 반사망원경이 있다. 또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은 상호동의에 의해 헤일망원경을 코넬대학교의 천문학자와 제트추진력연구소 실험실 학자들과 함께 사용한다.
공사기간 20년이 걸려 1948년에 완성된 지름 5m의 헤일망원경(Hale Telescope)은 항성(恒星)의 스펙트럼과 외부 은하의 연구 등에 이용되며, 오스친 망원경과 슈미트카메라는 초신성(超新星) 관측 및 은하계 내의 성운 연구에 이용된다. 특히 슈미트카메라를 이용하여 1950년대에 제작한 사진성도(寫眞星圖) 《국립지리학회:팔로마천문대천성도 National Geographic Society:Palomar Observatory Sky Survey》는 잘 알려져 있다. 소재지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북동쪽 65㎞ 지점인 팔로마산에 있다.
[1946년] 이승만,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시사하는 ‘정읍 발언’ 연설
← 남한단독정부 불가피론을 주창한 이승만 박사
1946년 6월 3일 이승만 박사가 전북 정읍에서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 해방정국에서 국제정세에 가장 밝았던 현실주의 정치가 이승만은 이미 북한의 소비에트 권력체제가 현실적으로 깊숙이 진전되어 있다고 판단. 아무 뚜렷한 전망도 없는 미소공동위나 좌우합작위에 더이상 남한의 정권수립을 무작정 맡겨둘 수 없다고 보고 이같은 연설을 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정읍발언’의 배경이다.
이승만의 연설은 미국정부와 국내 중도적 온건파 등을 당황하게 했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민족단합을 통한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을 원했고, 미국은 소련과 합의한 `모스크바 의정서`에 따라 미소협조에 기초해 한반도에서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성사시켜 남북을 통틀어 조선임시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진행해 왔기 때문이었다. 미소공동위나 좌우합작운동도 이 목적을 위해서였다.
이승만은 미국의 이러한 정책을 맹렬히 공격했다. 소련의 침략적 팽창주의의 본질을 모르는 유화주의자들이 한반도정책을 오도하고 있으며 미국의 구상대로 일을 추진하다가는 결국 남한마저 소련에 의해 공산화될 것이라고 정읍발언에서 경고한 것이다.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 불가피론은 도쿄에 자리잡고 있는 태평양지역연합군최고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주목을 받았으며, 그의 도움으로 1946년 12월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조야를 상대로 설득전을 폈다. 그의 설득전은 시의적절했다. 미국은 마침내 1947년 봄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소련에 대한 종전의 유화정책을 버리고 소련의 팽창주의정책과 세계적화전략에 과감히 맞설 것임을 다짐했다. /조선
[1946년] 이범석 장군 및 광복군 5백여명 귀국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 1900~1972)은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 장군을 도와 중대장으로 참가하여 활약했다. 이후 소련으로 진출해 1922~25년 소련 합동민족군 연해주 지역 지휘관으로 소련의 혁명전쟁에 참가했으나 소련의 대일정책에 불만을 품고 다시 북만주로 돌아와 고려혁명군 결사대를 조직했다. 1933년 뤄양[洛陽] 군관학교 한국인 장교대장을, 1936년 중국 제3로군 사령관 등을 지냈다. 1941년 한국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을 겸임했으며, 중국 주재 미사령부와 합동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27일 광복군을 거느리고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비행기로 여의도까지 왔으나 미군의 거부로 중국으로 다시 돌아갔다가 1946년 6월 광복군 간부들과 함께 귀국했다. 미군정이 임시정부와 마찬가지로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자 12월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하고 단장이 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1950년 주중대사, 1952년 자유당 부당수 및 내무부장관 등을 지냈다. 1952, 1956년 2번 부통령에 입후보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1960년 초대 참의원에 당선되었고, 1963년 '국민의 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을 지냈으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저서로 〈우등불〉·〈방랑의 정열〉·〈민족과 청년〉 등이 있다.
[1902년] 산돌 손양원 목사 출생
← 손양원 목사
1902 경남 함안 ~ 1950 전남 여수.
호는 산돌. 1908년 그리스도교도가 되었고, 1917년 선교사 F. J. L. 매크레이에게 세례를 받았다. 1923년 도쿄[東京] 스가모중학교[巢鴨中學校], 1925년 경상남도 성경학원을 졸업했다. 부산의 나병원 전도사로 부임한 후 울산 방어진교회·남창교회(南倉敎會), 양산의 원동교회(院洞敎會) 등을 개척·설립하여 1934년까지 시무했다. 1938년 평양장로신학교를 졸업했고, 이듬해 7월부터 여수 애양원(愛養院)에서 시무했다. 1946년 경남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1950년 9월 13일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여수·순천 10.19사건 당시 아들을 처형하여 죽인 범인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아 전도사로 키워낸 그의 일대기를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제목으로 안용준 목사가 저술했고, 영국에서는 〈씨앗은 죽어서〉로 번역·출판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홍형린 장로의 기획으로 1966년 영화로 만들어졌다. 저서로는 〈산돌 손양원 목사 설교집〉이 있다.
[1963년] 시인 오상순(吳相淳, 공초) 사망
1894. 8. 9 서울 ~ 1963. 6. 3 서울.
1920년대 〈폐허〉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인생의 허무를 주로 노래했다. 본관은 해주. 호는 공초(空超)·선운(禪雲). 성해(星海)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목재상을 운영하던 아버지 태연(泰兗)의 4남 1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나 효제국민학교를 거쳐 1906년 경신학교를 졸업했다.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1918년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귀국했다. 귀국한 뒤로 한동안 전도사로 교회일을 맡아보았는데, 이때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성서와 철학책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1920년 〈폐허〉 동인으로 김억·남궁벽·황석우 등과 친하게 지냈다. 1921년 종교를 그리스도교에서 불교로 바꾸고 조선중앙불교학교·보성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학교를 그만둔 뒤로는 8·15해방 때까지 방랑생활을 했다. 그의 방랑벽과 담배를 하루에 20갑 넘게 피우던 습관은 한국문단에 널리 알려져 있다. 1945년 서울로 돌아와 역경원 등을 전전하다 조계사에서 지냈으며, 1963년에 죽은 뒤 유해는 수유리에 안장되었고, 시 〈방랑의 마음〉 첫머리를 새긴 시비가 세워졌다.
1920년 〈페허〉 창간호에 평론 〈시대고와 그 희생〉을 발표해 '폐허'는 그것을 극복해서 낙원을 찾는 긍정적 의미가 있다며 '폐허'의 옹호와 허무의 극복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후에 발표한 시 〈허무혼의 선언〉·〈아시아의 밤〉·〈타는 밤〉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자신의 이론에 맞도록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폐허〉 제2호에 〈힘의 숭배〉·〈힘의 동경〉·〈힘의 비애〉 등의 시 17편과 평론 〈종교와 예술〉을 발표한 데 이어, 1935년 대표시 〈방랑의 마음〉(조선문단, 1935. 2)을 발표했다. 그의 시에는 '허무·폐허·태고·원천' 등의 생경한 단어들이 많이 등장하며, 허무적·퇴폐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해방 후 시 〈항아리〉·〈해바라기〉를 발표해 민족적 염원과 정서를 노래하기도 했다. 유고시집으로 〈공초 오상순 시선〉(1963)·〈방랑의 마음〉(1977) 등이 있고, 1955년 대한민국 예술원상과 1961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았다. /브리태니커
그밖에
2005년 2006 독일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한국 대 우즈베키스탄 경기
2005년 이미나 선수, LPGA투어 HSBC 여자월드 매치플레이챔피언십에서 준우승
1995년 세계최초 컴퓨터 ‘에니악’을 개발한 프레스터 에커트 사망
1991년 정원식 총리 폭행사건
1978년 방글라데시 대통령 라만 당선
1975년 도피성이민 우려있는 명사 84명 출국규제
1972년 서독 폴란드 수교
1971년 김종필 제11대 국무총리 취임
1962년 프랑스 여객기 파리공항 추락 1백30여명 사망
1957년 미국 중동조약기구(METO)에 가입
1957년 흐루시초프, 신스탈린파 말렌코프, 몰로토프 등 숙청
1955년 프랑스 보호령 튀니지에 자치권 부여 협정 조인
1955년 미국-이스라엘 원자력쌍무협정에 조인
1949년 국회, 전국무위원 인책사임안 가결
1948년 파라과이 쿠데타 발생
1947년 군정청, 산하 기구를 남조선 과도정부로 개칭
1943년 알제리에서 드골지휘하에 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 결성
1936년 총독부 발행 조선민력에 음력이 폐지됨. 양력 발행을 결정
1936년 이디오피아 황제 영국에 망명
1929년 스위스의 세균학자 아르버 출생 - 1978년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
1929년 칠레.페루 국경분쟁 해결, 미국중재
1917년 알바니아 독립 선언
1916년 미국, 국가방위법 제정
1915년 파리서 제1회 연합국전쟁경제회의개최, 경제적공동체제수립 결정
1911년 사찰령 공포
1899년 오스트리아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 사망
1895년 청, 일본에 대만과 팽호도 할양
1894년 동학난 진압위해 청에 파병 요청. 이홍장 파병
1875년 가극 작곡가 조르주 비제 사망
http://file.dic.daum.net/dic100/wiki/media/wikipedia/commons/thumb/9/96/Georges_bizet.jpg/200px-Georges_bizet.jpg 1786년 추사 김정희 출생
1657년 영국의 생리학자 하비 사망
1116년 송나라의 대성악 고려에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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