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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것이세월뿐이랴]8 last
[8] 제목 : 흐르는 것이 세월뿐이랴 제 8 부 (최종)
미니시리즈 "흐르는 것이 세월뿐이랴" 제 8 부
$#1. 아버지의 집, 마루
어머니, 황망한 얼굴로 앉아 있다.
묵골댁, 정희, 정민, 그런 어머니를 답답한 듯 보다,
묵골댁 봐라. 동상댁 무신 일이가? 가시나가 뭐라 캤길래 고마 넋을
놓노 어이?
정희 엄마, 아버지한테 (하는데)
어머니 (화들짝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말을 잡아채며) 어쩌니. 이 일
을. 니 아버지가, 니 아버지가 다 알았단다.
정희, 정민 (놀란다)
묵골댁 동상이 뭣을 알았다고?
어머니 (혼잣말처럼) 니 아버지 불쌍해서 어쩌니?
(한숨) 맘 편하니, 모르고 그냥 가지. 자는 듯 그냥 가면 좀 좋
을까... 지지리 복도 없는 사람...
정희, 정민 ...
$#2. 바닷가
아버지와 이발사, 낚시를 하고 있다.
정수,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미끼로 쓰는 새우를 만지작 거린다.
이발사, 고기를 한 마리 낚는다.
아버지 큰 걸 잡으셨습니다.
이발사 (웃으며) 예. (낚시 바늘 빼며) 이만하면, 부장님하고 정수, 저
녁찬은 되겠는 걸요.
$#3. 횟집
아버지와 이발사 방에 앉아 있다.
창으로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상위에는 휴대용 가스레인지에서 매운탕이 끓고 있다.
아버지와 이발사, 서로 술잔을 나눈다.
이발사 세상사람들은 저더러 거짓말이라 하겠지만... 저는 부장님이 부
럽군요.
아버지 (쓸쓸한)
이발사 정수, 정민이 정희... 아직도 부장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아버지 그러고 보니, 장 선생님 가족들을 한번도 뵌 일이 없습니다.
이발사 ...(한 잔 마시고) 저도 가족이 있지요.
아내도 있고, 아들도 있고...
아버지 (그런데 왜 하는 눈빛으로 본다)
이발사 염치가 없어서요. 젊어 한때, 마음내키는 대로 사느라 가족들
을 버려 두었지요.
아버지 장 선생님께서요?
이발사 안 믿어지십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저한테 그런 세월이 있었다는 것이 안 믿어진답니다.
아버지 ...
이발사 (회한에 잠겨) 이제는 너무 늦어서요.
가족이란 게 말입니다. 부모, 자식으로 인연 닿았다고 다 가족
은 아닌가 봅니다. 제 몫의 책임을 다 해야 그게 가족이란 것
을 젊어서는 몰랐지요.
아버지 ... (이발사를 한번보고, 말없이 그의 잔을 채워준다)
$#4. 바닷가 (황혼)
아버지와 정수, 걷고 있다.
아버지 정수야. 훗날에 말이다. 정수가 아버지 나이가 되면, 여기 다시
찾아올까?
정수 (아버지를 본다)
아버지 (아득한 눈빛으로) 아버지가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를 정수
한테 하는 것처럼, 우리 정수두 나중에 말이다. 아이들 손잡고
와서, 아버지 생각해줄래?
정수 (고개를 끄덕인다)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온다.
아버지와 정수, 소리 나는 쪽을 본다.
바위 위에 좌판 장수가, 호루라기와 팔랑개비를 팔고 있다.
$#5. 바닷가 바위 위 (황혼)
아버지, 호루라기를 하나 사서 정수의 목에 걸어준다.
아버지 우리 정수, 꼭 하나 뭔가 사주고 싶은데... 이거 밖에 없구나.
정수 (만져 보며) 좋아 이것두.
아버지 그래?
정수 운동회 때 불래. 나쁜 사람 쫓아올 때도 불구, 캄캄할 때, 무서
울 때두 불구.
아버지 (귀여운 듯 딸을 본다)
정수 ...(목소리가 가라앉는) 아빠가 보고 싶을 때. 아빠가 많이 보고
싶을 때 그때도 불게.
아버지 ... (딸을 가만히 보다가 꼭 끌어안는다)
$#6. 아버지의 집, 마당 (낮)
정수, 고기 광주리를 들고 들어온다.
어머니와 정민, 그 모습을 본다.
어머니 니 아버진?
정수 (광주리 내민다)...
어머니 (받고) 너 혼자 온 거야?
정수 (고개 흔들고) 선생님 댁에 갔어. 정민 언니 선생님한테.
어머니 뭐?
정민 ! (놀라는)
$#7. 준일의 집, 거실
아버지와 준일, 앉아있다.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없이...
(시간 경과)
두 사람, 사이에 찻잔에 식어있다.
손도 대지 않은 채.
아버지와 준일, 여전히 말없이 앉아있다.
아버지 (일어선다)
준일 (따라 일어선더) 식사라도 하시고 가시지요. 여기까지 오셨는
데...
아버지 불쑥 찾아와서, 폐를 끼쳤습니다.
아버지,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준일.
준일 ...이제, 박조교 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 (그제서야 미소) 고맙습니다... 늙으면 괜한 염려가 많아져서요.
선생님을 믿겠습니다.
$#8. 마당 (밤)
정민, 생각에 잠겨 의자에 앉아있다.
아버지, 마루 문을 열고 나오다 정민을 본다.
아버지, 정민의 옆에 앉는다.
정민 (아버지를 보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버진 행복하셨어요?
아버지 (보면)
정민 (차분하게) 사랑하는 분이랑 헤어진 거 후회하지 않으셨어요?
아버지 ...
정민 전 세상 사람들이 다 절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아버진, 아버지만은 제 편이 되어주실 줄 알았어요.
아버지 정민아, 아버진 항상 네 편이다.
다만... 살다보면 혼자 넘기 힘든 세월이 있지.
그때 말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 누구도 위안이 안 될 때,
우리 정민이를 오래오래 곁에서 지켜 봐줄 수 있는 사람이 있
었으면 싶다.
정민 아버지.
아버지 마음은 물길과 같아서, 다 기울이는 데로 흘러가는 법이다.
정민아, 아버지는 너희 어머니를 만나 한평생... 후회가 없구나.
정민 ...
아버지와 정민, 말없이 상념에 잠긴다.
$#9. 아버지의 집, 안방 (밤)
정수, 잠이 든 듯 누워있다.
아버지와 어머니, TV를 켜 놓은 채 건성으로 브라운관에 시선 두고 있다.
아버지 (잔기침을 몇 번 한다)
어머니 거 봐요. 바닷바람이 얼마나 찬데.
아, 꽃피는 춘삼월에 차 하나 세 내서, 식구들이랑 소풍 삼아
다같이 가면 얼마나 좋아요.
아버지 꽃 피는 춘삼월이라... (내가 그때까지 살 수 있을까 하는 아득
한 눈빛)
어머니 당신, 모르는 게 더 낫겠다 싶었어요.
알아질 때 알아지더라도, 그 땐.. 그 땐 그랬어요. 말 할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 됐소. 당신 마음 내 다 알지. (미소) 나라두 당신처럼 했을 거
요.
어머니 ... (정수보고, 괜히) 저 놈의 기집앤, 지방에서 자지. 다 큰 게.
아버지 그냥 둬요. 먼 길 갔다오느라 고단해서 그런 걸.
어머니, 일어나 장에서 이불을 꺼낸다.
아버지, 자신의 베개를 받아 정수의 머리 밑에 받쳐주면서
아버지 좀 높은데... 고개 안 아플라나...
$#10. 시간 경과 (아침)
이불, 한쪽에 밀쳐져 있고,
정수, 아버지의 베개를 베고 누워있다.
아버지, 신문을 보고 있다.
정수, 뽀시락 대며 소리를 낸다.
아버지 (보고) 일어났구나.
정수 아니, 안 일어났어. (베개에 고개를 묻고 킁킁거린다) 아빠. 여
기서 아빠 냄새 나.
아버지 (보면) 응?
정수 진짜야. 베개에서 아빠 냄새 난다.
아버지 사람이 나이가 들면 말이다 다 냄새가 조금씩 나는 법이지.
정수 응. (베개에 얼굴을 묻고, 나른한 목소리로) 기분 좋다.
아버지 ...(흐뭇해서, 보는)
$#11. 정희의 집, 거실
벽에 정희와 성수의 결혼 사진 대신, 달력이 걸려있다.
정희, 한 손으로 원정이 옷 입히면서 한 손으로 수화기 들고 어머니와 통화하고
있다.
정희 네. (사이) 어머! (깜짝 놀라, 일어나 달력 쪽으로 간다) 네. 그
러네요. (손으로 날짜 집어보며) 벌써 다음주네요. 깜빡 잊고
있었어요. (사이) 네. 엄마. 제가 알아서 할게요. (사이)
E 띵똥- 띵똥- 벨 소리 난다.
정희, 현관 쪽을 의아하게 본다.
$#12. 정희의 집, 안방
정희, 화장대 스톨의자에 화가 나서 앉아있고,
성수, 서 있다.
성수 당장 필요한 옷이랑, 책이나 좀 챙기면 돼.
정희 ...
성수 아버지, 어머니, 기다리셔.
정희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그냥 가요.
성수 정희야.
정희 다 당신 맘대루 해줬어요. 그치만, 원정인 안돼요.
성수 널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야.
너, 이제 서른 둘이다. 언제까지구, 이렇게 혼자 살 거야?
정희 그래요, 혼자 살 거야?
성수 고집 부리지 마. 사랑이라는 게 그렇게 마음대로 대니?
니가 빗장 걸고 들어앉아 있다구 해서, 비켜 가는 게 아냐. 너
무 빠른 이야기인 줄은 모르겠다. 하지만 정희야. 난 네가 좋
은 사람 만나서, 행복해 졌음 좋겠어.
정희 (돌아보고, 소리 내서 웃는다)
성수 그래, 주제넘은 소리 넘은 줄 알아.
그래도, 부모님 외에는 우리, 가장 가까운 사이였잖아.
서로 걱정해 주면서, 축복해주면서 그렇게 살면 안 되겠니?
정희 아후,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날라 그러네요
성수 정희야.
정희 당신 이렇게 해서라도 마음의 빚을 덜고 싶은 모양이군요. 부
담 느끼지 마요. 원정인 내가 키워요.
성수 ...
$#13. 정희의 집, 거실
원정, 시무룩해서 레고로 블록 쌓기하고 있다.
성수와 정희, 나온다.
성수 (원정이를 본다) 원정아. 아빠랑 저기, 청주에 안 갈래? 할아버
지 할머니한테?
원정 ...
정희 여보! (하다가) 성수씨.
성수 가서, 밤두 구워먹구, 썰매두 타구...
원정 (벌떡 일어난다) 싫어!
성수 왜? 왜 싫어?
원정 (화가 나서 씩씩거린다) 나, 엄마두 싫구, 아빠두 싫구, 청주두
안 가.
성수 ... (놀라는)
정희 원정아. (원정이를 만지려 하면)
원정 (몸을 탁 빼면서) 나두 다 알아! 나두 다 알아. 엄마랑 아빠랑
이혼하는 거 나두 다 알아. (눈물이 뚝뚝 흐른다) 나, 엄마하구
두, 아빠하구두 안 살 거야!
원정,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뛰어가, 문을 닫는다.
정희, 성수, 말 없이 그 모습을 본다.
$#14. 아버지의 집, 마루
어머니, 과일주를 담고 있다.
정희, 소쿠리에 가득 담긴 귤을 마른행주로 닦아 채반에 놓으면,
어머니, 칼로 반으로 잘라서 커다란 유리병에 넣는다.
정민, 옆에서 귤 까 먹고.
어머니 이번 니 아버지 육순은 크게 할란다. 회사 사람들두 다 부르
구, 몇 안 되지만, 친척들두 부르구,
정희 네.
어머니 원정애비 친구들두 불러야겠다. 사내들 시끌시끌해야 잔치 기
분이 들지.
정희 ...
어머니 알았지?
정희 (농담처럼) 집 비좁아서, 어떻게 다 불러요.
어머니 걱정 마라. 앉을 데 없으면, 마당에 불 피구, 비닐 치면 된다.
내 이번엔 어디 맘먹고 한 번 해볼 거야. (눈시울이 시큰) 니
아부지... 그렇게라두 먹여 보내고 싶어서... 그래 그런다. (눈가
를 쓱 닦는다)
$#15. 포목점
어머니와 정희, 묵골댁 천을 고르고 있다.
주인, 피륙을 쭉 편다.
어머니 그게 좋겠네. 그래요. 그 분홍색 어디 그걸로 조봐요.
정희 너무 곱지 않아요? 아버지 연세도 있으신데.
묵골댁 무신 소리, 원래가 나이 들수록 곱은 색을 입어야 태깔이 나는
법이다. (만져 보며) 아구, 곱다. 우리 동상 이거 쫙 해 입히믄
고마 새신랑 갔겠구마.
어머니 (웃고) 이걸로 끊어 가야겠다.
정희 바느질은요? 다른데 맡기실려구요?
어머니 아니. 바느질은 내가 할 거야.
정희 (어머니를 보는)
$#16. 영주의 차 안
성수와 영주, 앉아있다.
영주 (시동 걸며) 이제, 어디로 갈 건데?
성수 ...
영주 법원으로 가야 되는 거 아냐?
성수 ...
영주 (짜증나는) 오빠, 나 정말. 알다가두 모르겠어. 도대체 이번에
는 또 뭘 망설이는 거야? 맘대로 해. 나두 이제 더는 관여하고
싶지 않아.
성수 서초동으로 가자.
그래, 서초동 법원으로 가.
영주 (무슨 말인가 하려다, 멈추고 차 돌린다)
E 때르릉- 때르릉 (성수의 핸드폰 울리는)
성수, 주머니에서 핸드폰 꺼낸다.
$#17. 찻집
아버지의 집, 근처 찻집이다.
아버지와 성수, 앉아있다.
아버지 여기까지, 오라해서 미안하네.
성수 죄송합니다. 아버님. 찾아뵙지도 못하고.
아버지 아닐세. 그래 잘 지내나?
성수 예...
아버지 ...원정이는 어찌 할 셈인가? 큰애하고 상의는 해봤나?
성수 ...당분간은 청주에 데려다 놓을 생각입니다.
아버지 (고개 끄덕이고) 그래. 그 방법이 있었군.
성수 ...
아버지 (혼잣말처럼) 부부사이하고, 부모 자식은 또 다른 법이지. 헤어
지는 게 그저 두 사람 문제라고만 생각들을 하지.
성수 ...
아버지 부부사이에 앙금은 다 가을날 서리 같은 거라네.
시간 지나고, 볕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지.
하지만 말일세, 자식은 다르다네. 자식 마음에 박힌 상처는 좀
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거야.
성수 ...
아버지 지금까지는 두 사람 입장만 생각했다면, 이제부터는 원정이,
자네가 원정이라 여기고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어 보게. 나
중에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말게나.
성수 ...
$#18. 아버지의 집, 마당
원정이와 정수, 의자에 앉아서 발을 흔들고 있다.
아버지, 들어온다.
원정 (쪼르르 달려가) 할아버지 감 따 줘.
아버지 응?
원정 (손으로 가리키며) 저거 따 줘.
아버지 어떡하나, 저건 까치밥인 걸. 얼었다, 녹았다 해서 못 먹어요.
원정 그래두 따 줘. 하나만.
$#19. 아버지의 집, 마당 일각
원정과 정수, 분홍보자기를 펴들고 신나서 아버지 옆을 따라 다닌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아버지, 감 꺾는 장대로 감을 따기 시작한다.
원정과 정수, 신나서 웃고
아버지, 일순간 기침을 하면서 휘청 인다.
아버지, 가까스로 장대를 내려놓고, 기침을 한다.
불안하게 보는 정수와 원정.
아버지, 마당에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20. 대문 앞
엠블란스 멈춰 있다.
황급히 내리는 태준과 병원직원들.
$#21. 아버지의 집, 마루
아버지, 들것에 누워있다.
묵골댁, 정희, 정민, 어머니, 정수, 그런 아버지를 보고.
묵골댁 동상, 시상에 이기 무신 일이고. 다 나았다 카드이 이기 무신
일이고...
정희 아버지...
아버지 (의식이 가물가물 한다)
정수 (눈물만 떨군다)
태준, 황급히 들어오며, 병원직원1, 2에게
태준 얼른 모시세요.
직원1, 2 네.
직원1, 2 들것을 든다.
$#22. 대문 앞
엠블란스 뒷문 열리며, 아버지 이동침상에 옮겨져 실린다.
태준과 어머니, 뒤에 탄다.
아버지, 힘겹게 눈을 뜬다.
어머니 여보.
태준 (그 소리에 보고) 선생님.
아버지 (힘들게) 나, 그냥... 집에 있을라네.
태준 선생님.
아버지 (고개를 힘없이 젓는다) 여기가 좋아. 정희 엄마.
어머니 네.
아버지 나, 여기서 그냥 가게 해주게.
어머니, 태준을 본다.
$#23. 아버지의 집, 안방
아버지, 자리에 누워있다.
옷걸이대에 링거가 매달려, 아버지 링거를 맞는다.
링거를 조절하고, 옆에 앉은 어머니와 정희, 정민, 묵골댁을 본다.
$#24. 정수의 방
어머니와 정희, 정민, 태준, 앉아 있다.
어머니 저렇게 가는 건가요? 이게 마지막이에요?
애들 아버지, 이게 정말 마지막이에요?
태준 ...의식은 돌아오실 겁니다.
어머니 어(반갑게) 그래요? 고마워. 아구 고마워라...
태준 ...사모님. 준비를....
선생님 보내드릴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어머니 ! (놀라서 보는)
태준 죄송합니다.
마루에서, '어이! 동상, 안 되네'하며 우는 묵골댁의 소리 들린다.
$#25. 마루
묵골댁, 정수의 방 앞에서 운다.
정수, 눈물이 그렁해서 서 있다.
안방 쪽을 본다.
$#26. 안방
아버지, 링거를 꼽은 채 누워있다.
문이 조금 열리고, 정수의 고개가 들어온다.
정수, 아버지를 본다.
아버지, 잠시 정신이 나는 듯 신음을 흘리다, 정수 쪽을 본다.
아버지, 희미하게 웃으면서 링거 꼽지 않은 다른 손으로 정수에게 힘없이 손짓
한다.
정수,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는다.
정수, 아버지를 바라보다 아버지의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간다.
정수, 엎드린 자세로 눈물을 흘리며, 어깨를 들썩인다.
아버지 아버지가 죄가 많구나... 우리 막내한테, 죄가 많아...
$#27. 음악당 (동숭아트홀), 복도
준일과 이 교수, 커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준일 죄송합니다.
이 교수 ...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정민이와 준일씨, 함께 한 세월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준일씨 충분히 흔들리고... 그 마음 이해 할 수 있어
요.
준일 ...
이 교수 정민이와 준일씨, 결혼할 건가요?
준일 아닙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이 교수 네...
준일 아이들 마지막 연습인데 들어가 보죠 이제. (돌아서는)
이 교수 저한테도 기회가 있나요? 다시 기회가 있을까요?
준일 ...
$#28. 음악당 안
플랜카드- '제 00회 졸업연주회' 붙어있다.
학생들, 연습하는 모습 보인다.
정민, 클라리넷 연주하다 나란히 들어오는 준일과 이 교수를 본다.
$#29. 아버지의 집, 마당 (다른날 새벽)
어머니, 수돗가에서 넋을 놓고 앉아 있다.
건성으로 함배기에 쌀을 씻는 아버지, 마루에서 나온다.
아버지, 마당으로 내려서는.
어머니, 문득 소리에 돌아본다.
아버지와 어머니, 눈이 마주친다.
어머니 그만해요?
아버지 (고개를 끄덕인다)
어머니, 아버지를 애잔한 눈길로 본다.
$#30. 아버지의 집, 안방
방 한 가운데 펼쳐져 있는 한복 천.
아버지, 방 가운데 팔을 벌리고 서 있고
어머니, 줄자로 아버지의 치수를 재고 있다.
아버지, 한 손에는 메모지, 한 손에는 연필을 들고 서 있다.
애드립으로 어머니가 치수 말하면,
아버지, 받아 적는다.
어머니 다 됐어요.
아버지 (앉고) 뭘 손 많이 가게 옷을 짓는다 그래.
어머니 (앉고) 후다닥하면 되지. 손 갈 게 뭐 있어요.
아버지 ... (천을 보다) 곱군. 당신 해 입어도 되겠어. (생각난 듯) 그
래, 자네 치마 저고리로 말게나.
어머니 이이는. 남의 성의를 무시해두 분수가 있지.
아버지 (웃으며) 나야, 몇 번이나 입겠는가? 당신이 해 입는 게 좋겠
어.
어머니 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당신 육순날 입고, 가족 사진도 찍고,
당신 사진도 찍고....
아버지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며) 저거로 됐네.
어머니 (본다)
아버지 정희 엄마. 내 영정 사진은 저거로 됐어. 저만하면 잘 나온 걸.
어머니 ! (가슴이 덜컹하는 심정으로 남편을 본다)
$#31. 마루 (다른 날, 낮)
어머니, 김자반을 하고 있고,
아버지, 방에서 나와 어머니 옆에 앉는다.
어머니 뭐하루 나와요.
아버지 좋구만. 좀 있으면 잔디두 파릇파릇 나고, 저 뒷산에 개나리두
피구 할 것 같애.
어머니 그래두 바람 끝은 차요. 문 닫을까요?
아버지 아니.
아버지, 어머니가 김자반 하는 모습을 보다, 깨통을 끌어다가 찹쌀풀 바른 김자
반 위에 골고루 깨를 뿌린다.
아버지 봄 될라믄 아즉 멀었는데, 뭐하루 이런 걸 하나?
어머니 당신 입맛 없어 하잖아요.
볕이 좋길래, 쪼끔 해 보는 거예요.
당신 생일도 다 됐구요.
마를 지 안 마를 지도 모르겠네요...
아버지 집이 조용하네.
어머니 당신이랑 둘이 오붓하게 있으라구 다 쫓았어요.
아버지 잘했군. (웃는다)
아버지 너무 적막해서 시간이 다 멈춘 것 같아. 이대로 당신이랑 둘이
있으면 좋겠군.
어머니 (눈물이 나올 것 같으니까, 괜히 등을 움썩거린다) 아우 등 가
려.
아버지 (보면)
어머니 아우. 왜 이렇게 등이 가려운가 몰라. 저기, 방에 가서 등 긁개
좀 갖다 줄래요.
아버지 ... (애잔한 눈으로 어머니를 본다) 당신도 늙는가 보이.
어머니 그럼 난 늘 청춘인 줄 알았어요?
아버지, 어머니의 등 뒤로 간다.
아버지, 어머니의 스웨터 속으로 손을 넣는다.
어머니 에구 깜짝이야! (놀라서)
아버지 (어머니의 등을 긁어 준다)
어머니 (쑥쓰럽다) 왜 이래요. 안 하던 짓을 하구 (몸을 빼려 하면)
아버지 (어머니를 제지하고, 등을 천천히 긁어 준다) 오래 오래 있다
오게.
어머니 ...
아버지 나 보내고, 오래오래 있다, 우리 누님도 잘 보내 드리고, 정희
정민이, 잘 지켜보고.
어머니 ... (눈시울이 젖어든다)
아버지 우리 막내. 말이야. 우리 정수, 어떻게 컸는지, 누구한테 시집
가는지. 손자 낳으면 누구 닮았는지... 그거 다 지켜보고 나중
에 나한테 들려주게.
어머니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아버지 애들이 자네한테 잘 할 거야.
어머니 (일부러 퉁명스레) 무슨 부탁이 그렇게 많아요. 아유 그만 긁
어요. 등 벗어지겠네.
아버지, 손을 뺀다.
어머니, 억지로 입술을 꾹 다물고 울음소리를 삼킨다. (시간 경과)
어머니 들어가서 좀 누워요.
아버지 됐네. 여기가 좋아. 자네 옆이 좋군.
어머니 ...
어머니, 도마에 김자반 발라두면,
아버지, 그것을 가져다 채반에 놓고, 깨 뿌린다.
어머니, 문득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손끝이 가지런한지 몰라. 당신이 뿌린
거는 표가 나네. 내가 한 건 덜렁덜렁 대충대충. (배시시 웃는
다)
어머니, 앞에 내려온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러운 듯 손으로 이마를 쓱 문지른다.
어머니의 얼굴에 묻는 풀.
아버지, 옆에 놓인 깨끗한 행주로 어머니의 이마를 닦아준다.
그리고, 손으로 어머니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준다.
어머니. 마치 새색시처럼 수줍다.
$#32. 장독대
아버지, 빼곡히 놓인 김자방 채반을 장독 위에 올려 놓는다.
$#33. 마루 끝
어머니, 채반을 들고 나오다
문득, 장독대에 아버지를 본다.
어머니의 눈빛에 따뜻함이 어린다.
$#34. 마당
어머니, 마당에 서서 채반을 장독대로 올린다.
아버지, 받아서 장독 위에 놓는다.
어머니와 아버지, 마당으로 내려온다.
어머니 여보.
아버지 (보면)
어머니 살면서 제일 행복한 날이네요. (미소) 오늘처럼 행복했던 날이
없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 어머니의 손을 잡는다.
아버지 고맙소. 정희 엄마.
아버지와 어머니, 오래도록 그 자세로 서로를 바라본다.
$#35. 음악당 안 (저녁)
무대 위에서는 졸업연주회가 진행중이다.
음악당 문, 열리고 아버지와 식구들 조심조심 들어온다.
연주되던 곡 마무리 되고, 박수소리
정장한 최 조교, 무대 앞으로 나온다.
최 조교 다음은 대학원 기악과의 박정민양의 클라리넷 독주입니다. 곡
목은 000 (적당한 것으로 고를 것),
관중들 박수친다.
무대 위로, 성장한 정민이 클라리넷을 들고 나온다.
정민, 악기 한두 번 튜닝하고 연주를 시작한다.
아버지와 식구들, 비어있는 앞자리로 조심스럽게 간다.
정민, 문득 객석 (무대에서 2, 3자리 뒤에)의 아버지를 본다.
식구들 착석하고.
아버지, 정민을 바라본다.
정민, 연주하면서 아버지를 바라보면, 3부의 장면이 인서트 된다.
방안에 아버지와 마주앉은 정민.
정민E ...죄송해요. 아버지한테 전, 너무 나쁜 딸인가 봐요.
아버지E 아니다. 난 이제까지 우리집 딸들처럼 착한 애들을 본적이 없
다.
8부의 마당이 인서트 된다.
아버지E 정민아. 아버진 항상 네 편이다.
정민, 울컥 눈물이 솟구친다.
연주를 멈추는...
관중들 웅성거린다.
어머니와 정희,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정민을 본다.
정민 ...(눈물을 흘리며) 죄송합니다. 여러분. 양해해주신다면 이제부
터 저는 소개해드린 곡과는 다른 곡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세상에서 가장 못된 딸이 편찮으신 아버지께
해드릴 것이 이거밖에 없습니다.
정민, '어부의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아버지, 눈을 지그시 감는다.
정민, 눈물을 흘리며 클라리넷을 연주하고, 장내 숙연해진다.
$#36. 아버지의 집, 안방 (밤)
깊은 밤, 아버지 고단한 듯 잠들어 있다.
어머니, 돋보기를 쓰고 한복 바느질을 한다.
아버지, 간간이 앓는 소리를 낸다.
어머니, 그런 아버지를 측은하게 바라보다 바느질을 더 빨리 한다.
$#37. 아버지의 집, 부엌 (아침)
어머니와 묵골댁, 수정과 거르느라 바쁘다.
묵골댁, 곶감 손질하고.
어머니 전은 밤에 부쳐도 되겠죠?
묵골댁 그럼. 너무 일찍 해도 맛없다. 내일도 저녁이나 되야 손님 칠
건데... 벌씨로 뭐.
정희, 행주 들고 들어온다.
어머니 큰애야, 안방이랑 마루랑, 집 좀 깨끗이 치워라. 손님들 오면
흉잡힌다.
정희 네.
어머니 군데군데. 잡동사니들, 확 쓸어다 버려. 짐만 되지. 생전 쓸데
도 없다.
정희 (웃으며) 그럴 게요. 나중에 다 버렸다고 뭐라 그러심 안 되요.
$#38. 안방
정희와 정민, 안방을 치운다.
먼지털이로 사방을 털고,
걸레로 가구 닦고,
정민, 다락문을 연다.
아버지의 낡은 책들.
정민과 정희 바닥으로 책을 끄집어낸다.
정민 (푹 웃으며) 옛날에는 우리 이런 책에다 돈도 넣고, 꽃두 따서
넣구 그랬는데... 그지?
왜 새재돈, 빠빠 돈 받으면 구겨지지 말라구, 책 속에다 넣어
놓구, 못 찾아서 울구 그랬는데...
정희 (웃으며) 그랬지. 어디 한 번 찾아봐. 그 때 숨겨놓은 거 들었
나?
정민, 웃으며 후르르 건성으로 책갈피를 넘기기 시작한다.
7부에 아버지가 뽑아 들었던, 양장본 책 케이스를 벗긴다.
정민, 책을 흔들면 사진 한 장이 툭 떨어진다.
$#39. 부엌
어머니, 정민에게서 사진을 받아든다.
그 옆에 묵골댁과 정희.
어머니와 묵골댁, 눈을 가늘게 뜨고 사진을 본다.
(인서트)
아버지의 옛 연인 혜선이 활짝 웃고있는 흑백 사진.
묵골댁 가만있어 보자. 이기 누고... (깜짝 놀라) 어이! 이기 왜 여깃
노... (말끝을 흐리며, 어머니를 본다)
어머니 !
어머니,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지고,
정희와 정민, 영문을 몰라보고,
'묵골댁, 어머니의 눈치보며 '그기 왜 거 있노...' 애드립 대사 한다.
$#40. 아버지의 집, 안방
어머니, 화가 나서 방 한가운데 앉아있다.
문 열리고, 아버지 들어온다.
아버지, 점퍼를 벗어주며
아버지 겨울날씨는 몰라. 그새 기온이 뚝 떨어진 걸.
어머니 ... (받을 생각을 안 한다)
아버지 (한 번 보다, 옷걸이대에 건다) 왜, 무슨 일 있었소?
어머니 (아버지를 보는 눈빛에 냉기가 흐른다)
아버지 ...(의아해서)
어머니 (벌떡 일어나서, TV위에 얹힌 책을 바닥에 집어 던진다)
아버지 정희 엄마.
어머니 그렇게 그 여자가 애틋합디까?
왜? 애들한테 유언이라두 하시구려.
그 여자 옆에 묻어 달라구. 이렇게 당신 마지막까지 사람 가슴
에 못을 박아요?
아버지 ...이미 죽은 사람일세.
어머니 죽긴 누가 죽어! 평생 당신 가슴속에 시퍼런 고등어처럼 살아
펄펄 뛰는데 죽긴 누가 죽어요!
평생 당신 거죽하고만 산 여편네, 이렇게 한 심는 거 아니에
요!
아버지 ...
어머니 (악을 쓴다) 나 그거 못해요! 당신 죽어도 나, 용서 못해요! 내
가 지금 지난 일 다 용서해서 이러구 있다구, 다시 들어 왔다
구 생각하지 맛요. 나, 용서 못해요!
어머니, 반지고리와 그 위에 짓단 만 한복을 집어던진다.
어머니 바닥에 주저앉아서 운다.
아버지, 그 옆에 앉는다.
아버지 그만 하게.
어머니 억울해서 그러잖아요! (울면서 넋두리) 어느 년은 복 많아 죽
어서도, 끔찍하고, 이년은 한 평생 쉰 밥, 찬 밥 취급받다. 하
다하다 병수발까지 하고... 억울해서 그래요.
내 인생이 억울해서!
아버지 ...
어머니 우리 다음에는 부부로 만나지 맙시다.
서로 짝 잘못 골라 평생 애 태우고, 지지고 볶고 살 거 없잖아
요. 다음 생에선 혜선인지 뭔지 그 여자랑 만나서 사시구랴.
아버지, 착잡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본다.
$#41. 아버지의 집, 마당 (밤)
아버지, 신발장에서 담배를 꺼낸다.
아버지, 나무 의자에 앉아 깊게, 깊게 담배를 피운다.
정수, 화장실에서 나오다 아버지의 그 모습을 본다.
$#42. 마루 (새벽)
마루 불 환하게 밝혀져 있다.
묵골댁, 스웨터 단추를 잠그며 문 쪽으로 간다.
안방에서 아버지의 신음소리 흘러나온다.
묵골댁, 긴가민가해서 안방 쪽을 본다.
$#43. 안방 (새벽)
문 열리고 묵골댁 들어온다.
아버지, 악몽을 꾼 듯 소리 지르며 벌떡 일어난다.
묵골댁, 일어나 불을 켠다.
환하게 밝혀지는 실내.
묵골댁 (아버지를 보고) 야야... 이 땀 좀 보래. 와 무신 일이고?
아버지 ...
묵골댁 (수건으로 동생의 땀을 닦아주며) 험한 꿈 꿨나? 말해 봐라.
원래 흉몽은 말을 해야 털어지는 기다.
아버지 (잠시 망설이다) 발치 끝에 아버지하고 자형이 서 계시데요.
묵골댁 아버지랑 기영 아배가?
아버지 예. 까만 두루마기에 까만 갓을 쓰셨는데,
묵골댁 (표정이 굳어진다)
아버지 아무 말씀 없이 언짢은 얼굴로 가만히 보시다 팔을 잡아 끄시
더라구요.
묵골댁 (화를 낸다) 더 말할 것도 없다. 개꿈이구마.
아버지하고 기영아배가 널 을매나 끔찍히 여깃는데.
아부지가 닐로 해롭구러 하시겠나.
신경 쓸 거 하나 없다.
밝을라믄 멀었다.
한숨 더 붙이라.
아버지 ...
$#44. 아버지의 집, 마당 (새벽)
묵골댁, 장독대 앞에 쪼그려 앉아 있다.
바가지에 물이 담겨 있고, 밥알이 조금 들어 있다.
묵골댁, 두 손을 비비며 비손한다.
묵골댁 아부지, 동상 좀 살펴 주이소.
뭐하로 꿈에 그리 오십니꺼.
아직 우리 동상 아부지한테 갈 때 안됐십니더.
이제 오지 마이소.
올라믄 늙은 내한테 오시야지예.
이 밥 잡숫고 다시는 동상한테 오심 안 됩니더.
묵골댁, 빌다 말고, 코를 훌쩍인다.
묵골댁, 주저앉아 울기 시작한다.
$#45. 아버지의 집, 마루 (아침)
아버지의 생신상이 차려져 있다.
어머니, 생그란 표정으로 아버지와 반대 편에 서 있고.
정희, 정민, 정수, 눈치 본다.
원정은 아무것도 모르고 맛있게 먹고.
아버지 (숟가락을 놓는다)
묵골댁 와?
아버지 많이 먹었습니다.
정희 아버지, 더 드세요.
아버지 됐다. 나중에 먹지. 너희들 많이 먹어라.
아버지, 일어나 마당 쪽으로.
어머니, 그 모습 미운 듯 보다가 열심히 먹기 시작한다.
묵골댁, 어머니에게 무슨 말인가 하려다 관두고, 혀 찬다.
$#46. 아버지의 집, 마당
아버지, 의자에 앉아 있다.
대문 열리며, 선물꾸러미를 든 태준 들어온다.
태준 선생님.
아버지 어. 자네 왔는가.
태준 생신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아버지 고맙네. 태준이, 오늘 안 바쁜가?
태준 (보는)
$#47. 혜선의 산소.
무덤 앞에 꽃과 술, 놓여있다.
아버지와 태준, 앉아있다.
아버지, 태준에게 책을 내민다.
태준 오래 된 책이네요.
아버지 펴 보게.
태준 ? (의아해 하며 책을 넘겨본다. 책갈피에 꼽혀있는 어머니의
사진)...
태준, 사진을 들고 물끄러미 본다.
태준 (미소) 어머니가 이렇게 고우셨군요. 저한테는 사진이 하나도
없어서요.
아버지 언제고 자넬 만나면 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네... 너무
늦었군.
태준 (쓸쓸히 웃으며 사진을 책 안에 깊이 갈무리한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아버지 ....
태준 돌아가신 제 친아버님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버지 (본다)
태준 선생님을 마음속으로 늘 아버님이라 여기고 지냈습니다.
아버지 ... (측은하게 보는)
태준 차라리 뵙지 않는 편이 좋았을 걸요.
아버지 미안하네.
태준 친아버님, 선생님... 이렇게 아버님을 두 번 잃게 된다 생각하
니... (말을 못 잇는다)
아버지 ...
태준 선생님, 부탁이 있습니다.
아버지 말해 보게.
태준 아버님이라 부르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그래. 그리 부르게. 나한테 그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구만..
(측은하게 태준을 보다, 고개를 끄덕인다)
태준 아버님...
아버지 (태준의 손을 잡는다)
태준 아버님.
태준, 아버지의 품에 안긴다.
어깨가 떨리는 태준.
아버지, 태준의 등을 쓸어준다.
아버지의 시선에 들어오는 혜선의 무덤.
$#48. 아버지의 집, 안방
아버지, 이부자리 펴고 누워있다.
정수와 정희, 앉아있다.
정희, 아버지의 이마 만져보고.
정희 정수야. 나가자. 아버지 주무시게.
정수 ...
정희 멀리 다녀오셔서 고단하신가 보다 얼른.
정희, 먼저 나가고,
정수 마지못해 일어난다.
아버지, 눈을 뜬다.
아버지, 정수에게 뭐라 말을 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막내딸의 모습이 가물가물하니 흐려진다.
정수, 아버지를 한 번 돌아보고 나간다.
문 닫힌다.
아버지, 정수를 다시 한 번 바라본다.
입술만 달싹 거리는 아버지.
아버지의 눈가로 눈물이 조금 흐른다.
$#49. 부엌
어머니, 전복을 다져, 불려 놓은 쌀과 함께 볶는다.
$350. 안방
아버지, 햇살이 가득한 방에 미동 없이 누워있다.
$#51. 안방
어머니, 소반에 전복죽을 들고 들어온다.
아버지를 흘깃 보고, 돌아 나가려다 전복죽 놓고 앉는다.
어머니 아직 자요? 밤에 못 잘려구... 그만 자요.
아버지 ...
어머니 자더라두 죽이라두 한 술 뜨고 자든지.
당신 좋아하는 전복 끓였어요.
아버지 ...
어머니 생일상 제대로 안 차려줬다구 화난 거예요? 내가 잘못했어요.
아버지 ...
어머니 어딜 그렇게 하루종일 나갔다 왔어요. 점심도 안 먹고.
아버지 ...
어머니 아니, 무슨 잠을 그렇게 깊이 자. 정희 아버지!
어머니,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든다.
어머니 정희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의 이불을 정신없이 벗겨낸다.
어머니 정희 아버지! (아버지의 가슴에 귀를 대어본다)
아버지 ...
어머니, 아버지의 가슴에 그대로 쓰러져 눈물을 떨군다.
$#52. 아버지의 산소 (다른 날, 낮)
아버지의 하관절차가 시작된다.
가족들, 성수, 기영의 모습 보인다.
묵골댁, 땅을 치며 동생을 부르고 운다.
기영, 외삼촌을 부르며 운다.
묵골댁 못 간다. 이렇게는 못 간다. 동상.
이제 나더러 어쩌라고...
내도 데려가야제 동상.
정희, 정민, 흐느끼고,
어머니와 정수, 울지 않는다.
정수, 물끄러미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본다.
정희, 몹시 애달프게 울면,
성수, 정희를 가만 잡아준다.
$#53. 아버지의 집, 안방 (밤)
소복 차림의 어머니와 정수.
문 열리고, 정희 들어온다.
어머니 고모는?
정희 지쳐서 주무세요.
어머니 니들도 가, 자.
정민 여기서 잘게요.
어머니 일없어. 괜히 걸거적 거리지 말고, 니들 방에 가서 자.
정희 (어머니를 보다) 이부자리 봐 놓을게요.
정수, 씻구 자. (장 열고 이부자리 깐다)
어머니 정수는 여기서 자든가.
정희, 무의식중에 아버지 이부자리를 깐다.
어머니 ... (보다가) 그건 다시, 넣어라.
정희 ... (이불 개킨다)
정수 (아버지의 베개를 보다, 손을 뻗는다)
정수, 아버지의 베개를 베고 눕는다.
어머니 옷 벗구 자. 제대루.
정수 (아버지의 베개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다. 울컥 눈물이 치미
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한다) 아빠! 아빠!
어머니 (놀라서 본다)
정수 (애절하게 아버지를 부르며 울기 시작한다)
정희 정수야...
어머니 (소리를 꽥지른다) 이 기집애가.
니방 가서 자!
정수, 천천히 일어난다.
정수, 아버지의 베개를 꼭 안고 일어나, 문 쪽으로 간다.
어머니 그거 못 놓구 가!
정수 (훌쩍이며, 아버지의 베개를 꼭 안고 밖으로 나간다)
그 모습을 눈물이 흥건해서 보는 정희.
$#54. 마루 (밤)
어머니, 문 열고 나온다.
불을 켜면, 환하게 밝혀지는 마루.
어머니, 마루 안쪽에 놓인 귤술을 본다.
아버지의 육순에 쓰려고 담은 그 술.
어머니, 물컵을 들고 그 술병으로 다가간다.
어머니, 술을 물컵으로 한 잔 뜬다.
술병 갈무리하고, 일어나서 조금 술을 마신다.
어머니, 마루를 둘러본다.
문을 열고, 장독대를 본다.
(인서트)
아버지, 마루에서 감자반 하며, 어머니의 머리칼을 쓸어주던.
아버지, 장독대에 김자반이 담긴 채반을 올려놓고.
아버지E 여보. 고맙소...
어머니, 술을 조금 마신다.
$#55. 안방 (밤)
어머니, 짓다만 아버지의 한복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한다.
어머니, 애써 소리를 누르고 어깨를 떨며 운다.
(시간 경과)
어머니, 반지고리를 앞에 놓고 한복을 짓는다.
마지막 동정을 달고, 실밥을 매듭짓는다.
이로 물어, 실을 끊고.
어머니, 그 한복을 펴보며 애잔한 눈빛이 된다.
$#56. 아버지의 산소 (아침)
제법 눈이 쌓여있다.
아버지의 산소 봉분에 분홍색 고운 한복이 펼쳐진다.
어머니, 상석이며 묘비에 쌓인 눈을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어머니 따뜻해요? 그 옷 당신 살았을 때 한 번 입혀 봤음 좋았을 걸.
어머니, 단정히 앉아있고, 그 위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시간 경과)
어머니, 분홍 한복을 걷어낸다.
어머니 이젠 안 춥죠? 잠깐만 기다려요. 어디만큼 갔어요? 지금.
아직 황천은 못 건넜죠? 이 옷 입구 가려구 기다리고 있죠?
당신. 그래요 새 옷 입고, 따듯하게, 편히 가세요.
어머니, 무덤 옆 공터에 옷을 놓고, 불을 붙인다.
준비해온 성냥으로 몇번 불을 붙이지만, 눅눅한 옷에 불이 쉽게 붙지 않는다.
어머니 꼭 우리 두 사람 같네.
어머니, 생각난 듯 가방에서 콩기름을 꺼내 옷에 붓고, 불 붙은 성냥을 던진다.
옷에 불이 확 일어난다.
그것을 보는 어머니.
회한에 잠긴 표정이다.
어머니 사람한테는 생이 세 번은 온다지요? 전생이 한번, 금생에 한
번, 또 후생에 한번.
여보. 우리한테 한번 더 기회가 있네요. 이젠 나 좀 기다려줘
요. 다른 사람한테 한눈 팔지 말구요.
$#57. 공원묘지 입구
정희와 정민, 정수 걸어 올라온다.
어머니, 가방을 들고 휘적휘적 내려온다.
마주치는 네 모녀.
어머니와 딸들, 말없이 눈길을 걸어 내려온다.
E 화면에 겹치듯이 호루라기 소리 들린다.
$#58. 아버지의 집 앞 (다른 날, 낮)
바람이 몹시 세게 부는 어느 봄날.
정수, 긴치마에 봄옷 입고 담에 기대서 있다.
불어오는 바람이 정수의 머리칼 (핀 꼽지 말 것)과 치마를 마구 헤집는다.
정수, 고 손등으로 눈물을 쓱 닦고, 호루라기 열심히 불고 있다.
그 위로 정수의 소리.
정수E 어머니는 그날 이후, 다시는 김자반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큰언니... 형부는 다시 정희언니에게로 떠날 때처럼 커
다란 가방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작은언니는, 예전에 다니던 중학교에 음악선생님이 되었지요.
아버지는 참 많은 것을 두고 떠나셨습니다.
어머니에게도, 큰언니, 작은언니... 내게 아버지가 남긴 것은
한없는 그리움입니다.
제 8 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