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변정담 12
이신웅 장로
2016. 3. 10 오후 7시
군산 수송동 소재 중국집, 하이난
나의 멘토, 나의 선생님들
내 진찰실 책상 유리 밑에는 두 분의 흑백 반명함판 사진이 들어있습니다. 두 분 모두 이제는 작고하셨지만 나를 만들어주신 나의 멘토, 나의 선생님들이십니다.
한 분은 나를 외과의사로 만들어주시고 끝까지 이끌어주신 나의 존경하는 스승, 이근영 박사님이십니다. 명문가 출신의 이 박사님은 미국에서 외과 수련을 마치시고 예수병원 외과과장으로 일하실 때 제가 처음 만났습니다. 정확한 지식과 기술로 저를 가르치셨습니다. 특히 생각나는 것은 갑상선 수술을 할 때 안전하게 신경을 찾아내어 분리하는 방법을 세세하게 가르쳐주신 일입니다. 한 번은 위암 수술을 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보셨던 모양입니다. 수술을 끝내고 나오는데 “야! S.U.Rhee, 수술 잘 하던데, 아주 깨끗하게 림프절을 벗겨냈어.” 칭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주일 아침이면 6시에 아침 회진을 마치고 당직이 아니면 다시 잠자기 마련인데 의사숙소 방마다 다니며 문을 두드리며 “S.U.Rhee, G.Kim, C.K.Kim" 부르며 잠을 깨우는 것입니다. 예수병원 옆의 시온교회 장로님이셨는데 모두 교회에 잡혀가 선생님 손수 만드신 피스를 받아들고 성가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덕분에 결혼도 하기 전, 27살에 총각 집사가 되었습니다.
수련을 마치고 전문의 시험을 서울에서 보던 날, 신촌에 있는 선생님 댁에서 잤습니다. 잔디가 파랗게 깔린 마당에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저택이었습니다. 시험을 마치고 전주로 내려오기 전 일부러 파고다 공원에 갔습니다. 노인들이 이곳저곳에서 쉬는 곳이었지만 아무 말 없이 나를 데리고 탑과 부조들을 둘러보시고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은 33인의 민족대표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곳입니다. 선생님이 오랫동안 외국에서 사셨지만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애국심을 저에게 이야기하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의 부친은 군정 당시 초대 후생부 부장(현 보사부 장관)을 하셨던 이용설 박사님이신데 일제 때는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셨고 안창호 선생님과 친분이 두터우셨고 당시에는 흥사단을 이끌고 계셨습니다. 예수병원 외과가 학회에서 인정받게 된 것도 우리 선생님 때문이었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전문의가 된 후 입대하기 위해 대구 군의학교로 가기 전날 밤, 사모님은 나를 위해 엄청난 저녁을 준비해주셨습니다. 대구 군의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50사단에서 야간 훈련을 할 때 10분간 휴식시간에 별을 보고 누워있으면 사모님이 주셨던 구운 갈비가 제일 생각났습니다. 4주간의 1차 훈련이 끝나면 처음으로 면회가 되는데 대구까지 면회를 오신 것은 선생님이셨습니다.
은퇴 후, 선생님은 뉴저지 미들섹스에서 사셨는데 2000년 가을 우리 김 권사와 댁을 방문했을 때, 이미 사모님은 작고하셨고 늙고 병든 작은 개 한 마리와 노년을 살고 계셨습니다. 명년에는 봄철에 와서 내 차를 운전하고 남쪽으로 플로리다까지 여행하자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고 선생님은 86세를 일기로 작고하셨습니다.
젊은 시절의 외과의사로 제가 정확한 결정과 신속한 실행, 서두르지 않지만 우물쭈물 하지 않는 것, 날카롭고 인정이 없다고 비난 받는 것 등은 모두 선생님에게 배운 대로입니다.
또 한 분 나의 스승은 군산 중동교회 원로장로이셨던 이병렬 장로님이십니다. 물론 저는 모태신앙이었고 새벽마다 끊임없는 가정예배로 자라났지만 성경 말씀의 깊은 의미와 그 향취를 알게 된 것은 장로님을 만난 이후였습니다. 1977년 내가 이외과의원을 개원하고 다음 해 첫 주부터 동신교회로 옮겼는데 그해 어느 날, 장로님이 우리 병원을 찾아오셨습니다. 키가 크시고 옷을 잘 입으셨고 말씀을 무척 빨리 하시는 신사분이 오셔서 자기를 소개하며 나에게 한국 국제 기드온협회 군산 캠프에 들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드온협회는 미국에서 시작한 평신도 선교단체인데 전 세계의 나라에 조직되어 있고 호텔에 성경을 비치하고 중 고등, 대학생, 군인, 경찰, 교도소, 간호사에게 성경을 무료로 배부하여 그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선교단체입니다. 군산 기드온 캠프는 매 월요일 아침, 영광여고 이사장실에서 주간 기도회를 드렸는데 이병렬 장로님이 성경을 강해하고 계셨습니다. 미가서를 공부했는데 흥분하여 말씀하실 때는 눈에 광기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아마 예언자라는 사람들이 저런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로님은 이스라엘 키브츠에서 수년간 생활하시며 히브리어를 익히셨고 히브리 대학 대학원에서 Intensive Language Course 1.2를 마치셔서 구약을 사역하고 석의하셨습니다. 당시에 여러 신학교에 출강하셨는데 전주 한일신학교(장신대 전신),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오래 강의하셔서 제자들이 많았습니다. 장로님은 끊임없이 공부하시고 집필하셨는데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룰 수 없는 경지에 오르셨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집필하실 때, 강의하실 때 그 천재성이 빛나게 나타납니다.
82년 1월 첫 번째 저서 ‘다트 이스라엘, 히브리 민족의 언어의 뿌리와 향취(교민사)’가 나왔을 때 기뻐하시면서 맨 먼저 저에게 그 책을 가져다주셨습니다. 86년 8월부터 군산시내 각 교회 장로들이 토요일 아침마다 시내 제과점 조화당에서 장로님으로부터 성경을 배웠고 40-50 명이 공부 후 빵으로 식사를 대신하고 직장으로 출근했습니다. 이 모임은 장로님의 건강이 나빠질 때까지 3년 8개월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공부 않고 비는 종교는 미신종교다. 미신종교는 역사의식 없고 책임도 없다. 의식은 곧 책임이다. 기독교는 공부하는 종교다. 베소라, 기쁜 소식은 육체(바소르)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영이 구원 받는다는 것은 헬라적 발상이다. 전 인간이 구원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 강의의 첫 말씀이었습니다.
또 격월로 발행되는 개인 신앙잡지 ‘성서세계’도 만드셨습니다. 제가 그 잡지에 기고했던 글을 모아 만든 책이 ‘예수의 치유 문제 연구’와 ‘그리스도교의 발자취를 찾아서’입니다. 선생님은 79세를 일기로 작고하실 때까지 총 24권의 책을 쓰셨고 초기 작품들은 히브리어가 의미하는 단상 형식의 책이 많았고 다음엔 이스라엘 역사와 지리에 관한 책, 마지막엔 성경의 원전석의 등의 전문적인 내용의 책입니다.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한국에서 출판된 자국에 관련된 책을 선정한 일이 있었는데 그 안에 선생님의 책 3권의 명단이 들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오실 때는 주로 유대인들이 쓴 신간을 한 권씩 사다주셨는데 나는 열심히 읽었고 선생님과 식사하며 토론도 했습니다. 1993년 추운 겨울 아침에 선생님은 긴 액자 하나를 들고 오셨습니다. 고전 13장을 번역하시고 손수 쓰셔서 액자를 만들어 들고 오신 것입니다. ‘1993년 새해 아침. 석청 이병렬 번역 씀’ 이라는 글을 보며 나는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두 장을 만들어 하나는 장남을 주시고 두 번째 것을 저에게 주신다고 했습니다.
임종하시기 하루 전, 아직 의식이 있으셨을 때 저에게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지켜주시라고, 주저하지 말고 담대하게 두려움 없이 주님 앞에 나아가게 해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선생님은 아멘 아멘 하셨습니다.
생전에 왜 자주 만나 뵙고 말씀을 더 배우지 못했는지, 히브리어를 좀 배울 수는 없었는지 하는 회한이 남습니다. 선생님이 남겨주신 책만 곁에 있습니다. 내 생애에 이런 스승들을 주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