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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스크랩 주용부(74) 용호공업사 대표 `칼 명장` - 2014.5.29.조선
하늘나라(홍순창20) 추천 0 조회 300 14.05.30 09: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칼이 가르친다… 견뎌라, 더 강해질 테니

 

-국내 유일 칼 명장 주용부

 

열네살 때부터 60년 넘게 만져온 칼
한 자루에 담금·연마질만 1000번… 불꽃 튀어 얼굴엔 화상자국 얼룩덜룩

"한때 싸구려 칼에 밀리기도 했지만 땀은 배신 않는다는게 칼이 준 교훈"

 

악전고투 끝에 이름난 장인으로 우뚝 선 사람들이 있다. '대한민국 명장(名匠)'이란 공식 호칭을 받은 사람도 있고,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업계에서 단연 선두로 인정받는 명장도 있다. 이 시대 최고 수준의 숙련된 기술 보유자들이다. 분야도 다양하다. 용접, 금은 세공, 자동차 정비처럼 쉽게 떠오르는 직업이 있는가 하면 시계 수리, 잠수, 피아노 조율처럼 다소 의외로 여겨지는 직업도 있다. 그러나 말이 좋아 명장이지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3D 업종'에서 긴 시간 푸대접받아온 이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여전히 땀을 기피하고 현장 기술자를 무시한다. 그런 우리에게 명장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을까.

경기도 고양 화전역에서 100m쯤 떨어진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부엌칼 대장장이' 주용부(74) 용호공업사 대표의 대장간이 있다. 발 디딜 틈만 빼놓곤 눈길 닿는 곳마다 날카롭게 날이 선 칼, 길이 1m 넘는 칼, 어린애 손바닥만 한 칼, 쇠붙이 형태 갖춘 칼이 무더기로 쌓여 있다. 그가 "옆방엔 더 많다"며 작업실로 들어갔다. 부인 김광자씨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집은 온통 칼이에요. 평생 볼 칼 여기서 다 보세요."

칼날이 제대로 섰는지 살펴보는 주용부 장인의 얼굴은 이런 자잘한 화상 자국으로 가득하다.
섭씨 800도에서 구워진 쇳덩이를 물에 담가 식히면 뜨겁게 달아오른 물방울이 순식간에 튀어올라 온몸을 적신다. 칼날이 제대로 섰는지 살펴보는 주용부 장인의 얼굴은 이런 자잘한 화상 자국으로 가득하다. /성형주 기자
주 대표는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선정한 단조(鍛造) 분야 첫 대한민국 명장이다. 단조는 금속을 두들기거나 눌러서 도구를 만드는 일이다. 1986년 명장 제도가 도입된 후 나온 570명 명장 가운데 단조 명장은 2005년 주 대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열네 살 때부터 칼을 만들었으니 햇수로 60년이 넘었다. 전통 수작업으로만 하루 평균 네 자루를 만든다. "좋은 칼이 되려면 강함과 부드러움을 다 갖춰야 하는데, 섬세한 손끝 감각이 더해져야만 견고하면서 예리한 칼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일류 호텔 주방장들, 일식 전문 요리사들이 주 고객이다. 인터넷에서 '용호칼'을 검색하면 '녹슬지 않는다' '이가 안 빠진다' '한번 쓰면 이것만 쓴다'는 사용 후기들을 볼 수 있다.

처음부터 칼 만드는 사람이 되려던 건 아니었다. 충북도립병원 의사였던 아버지가 6·25전쟁으로 실종되면서 가장이 됐고, 어머니와 동생 넷을 먹여 살려야 했다. 닥치는 대로 일하다 '대장간 일을 하면 돈 잘 번다'는 소리를 들었다. 서울 서대문구청 앞 대장간에서 당시로선 드물게 생선회칼을 만들던 주인을 만났다. 어깨너머로 칼 만드는 법을 배워 시장에 팔았다. 피란 다녀와 칼 없는 집이 부지기수여서 만드는 족족 팔려나갔다. 월급도 1200원 받았다. 그제야 전쟁 전 어른들이 우스갯소리로 "용부는 커서 대장장이가 되려나, 뭘 저렇게 만날 두드리지?"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1965년 남가좌동 산꼭대기에 무허가 공장을 차리고 '주용부표 회칼'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본산 '스뎅(스테인리스) 칼'이 전국을 휩쓸 때다. 스테인리스가 정식 수입되기 전이어서 미군들이 버린 밥그릇을 녹여 만들었다. 자동차의 부러진 스프링, 버려진 철로(鐵路)도 재료였다.

주용부 장인이 개발한 복합강 기법으로 만든 회칼 세트.
주용부 장인이 개발한 복합강 기법으로 만든 회칼 세트. 위에서부터 채소 써는 데 쓰는 우스바, 300㎜ 생선회칼, 270㎜ 생선회칼, 지느러미 등을 자를 때 쓰는 생선절미도. /성형주 기자
먹고살 만해지자 '일본 칼을 능가하는 놈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싹텄다. 선배들이 끝이 뭉툭해진 호미에 다른 쇠붙이를 붙여 더 뾰족하게 만들었던 데서 실마리를 얻어 '복합강' 기법을 개발했다. 강한 쇠와 무른 쇠, 그러니까 스테인리스 스틸을 강철에 끼우거나 붙이니 날카로움이 훨씬 오래갔다.

1960년대 부엌칼 살인 사건이 종종 일어났다. 고민 끝에 칼끝을 붕어 입처럼 둥글게 마감해 범죄를 예방할 수 있게 했다. 칼날에 식재료가 붙지 않도록 돌기를 낸 칼, 칼등에 눈금을 새겨 재료의 양과 두께를 재주는 칼도 만들었다. 뜨겁게 열을 가한 칼날이 도라지꽃처럼 푸른 빛을 띨 때 때려 펴고 갈아주길 반복하면 이가 잘 빠지지 않음도 알아냈다. 칼날의 갈아주는 범위를 최대화해 절삭력을 극대화했다. 의장등록 특허 14개와 실용신안 12개를 따냈다. 그는 "포기김치를 무딘 칼로 자르면 배춧잎이 찢어져 영양이 다 빠져나간다. 음식의 맛과 영양을 지켜주는 칼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모룻돌에 쇠붙이를 놓고 두드리면 불꽃이 타다닥 튄다. 그의 손과 팔, 이마는 불꽃에 덴 화상 자국으로 얼룩덜룩하다. 사포를 촘촘히 붙인 연마기는 1분에 1700바퀴를 돈다. "칼 한 자루를 만드는 데 천 번의 담금질과 연마질이 필요해요. 고되지 않으냐고요? 칼날은 공들인 만큼 보답해요."

일본산 스테인리스 칼은 100만원 넘게 줘야 한다. 그는 35만원(전문가용 회칼)에 판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조리학과 학생들에게는 12만~15만원에 준다. 한때 기계로 찍어낸 싸구려 칼에 밀려 고전한 적도 있다. 그는 조바심 내지 않았다. "빨리 만들면 빨리 무뎌져요. 내 칼은 두꺼운 나뭇조각도 종잇장처럼 삭삭 벨 수 있는 최상품이라고 자신했어요. 그러려면 쇠 녹여 틀을 잡고 모양 내고 날을 세우는 모든 과정에 한 치 소홀함이 없어야 해요. 땀은 배신하는 법이 없어요."

"부엌칼만 만들어 온 인생이 아쉽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잘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그러면서 "담금질 잘된 칼은 겉이 녹슬어도 속은 하얗게 빛난다"고 했다. "시련을 잘 견뎌낸 사람과 닮았어요. 60년 동고동락해 온 칼이 준 교훈입니다."

김경은 | 기자(고양)

 


 부엌칼 대장장이 주용부 명장 "칼날은 공들인 만큼 보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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