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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조선일보
故 최창조 교수, 術을 學으로 높인 풍수학인… “그곳에도 단골술집 있겠죠”
2024년1월31일 별세 최창조 교수를 기리며
2013년 12월 17일 최창조가 30년 전‘한국의 풍수사상’을 펴낼 때만 해도 광화문 뒤에 일제가 세운 조선총독부 건물(옛 중앙청)이 버티고 있었다. 지금은 헐려 북악산이 훤히 보인다. 그는“일제는 조선사람들의 무덤을 건드리는 대신 왕궁인 경복궁의 목과 입에 해당하는 자리에 건물을 세워 단번에 조선의 기를 누르려했다”고 말했다.
2013년 12월 17일 최창조가 30년 전‘한국의 풍수사상’을 풍수쟁이는 많았어도 진정한 풍수 학인은 없었다. 최창조 교수가 등장하기 전까지 1980년대 상황이다. “지리학”이란 명칭으로 ‘국학(國學)’의 자격을 누렸던 풍수는 조선이 망하면서 공식 지위가 폐지되었다. 일제는 조선 풍수를 의도적으로 폄훼했다. 조선과 만주 땅을 식민지로 경영하려면 철도와 도로 신설이 필수였다. 지맥이 잘리고 그 위에 안장한 수많은 묘지가 파헤쳐졌다. 반발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잠재우려고 총독부는 묘지 풍수설이 미신임을 강조하였다.
2013년 12월 17일 1984년 '한국의 풍수사상'을 발간해 잡술취급을 받던 풍수를 학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풍수사상가 최창조씨가 최근 '한국 풍수 인물사'를 발간해 한국 자생풍수의 맥을 총정리했다.
그는“대한민국 전역과 북한의 평양과 개성을 모두 가봤지만 통일한국의 수도로 서울에 견줄만한 곳은 단 한곳도 없다”고 말했다.
또 한번 한국의 풍수설이 변화를 겪는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근대화에 필요한 것이 고속도로 건설이었다. 일제 때보다 더 대규모로 지맥이 잘리고 무덤들이 이장해야 했다. 새로운 대체지를 찾는 과정에서 풍수쟁이(지관)들이 성수기를 맞았다. 사주쟁이들이 풍수쟁이로 급하게 전업한 것도 이때다. 정부는 암묵적으로 묘지 풍수를 부정해야 했다. 1980년대까지 풍수 상황이다.
1984년 당시 전북대 최창조 교수가 ‘한국의 풍수 사상’(민음사)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때까지 ‘술(術)’로 치부되던 풍수가 당당하게 ‘학(學)’의 반열에 오르는 결정적 계기였다. 풍수쟁이들은 자기 편인 줄 알고 최창조와 ‘한국의 풍수 사상’을 열렬히 환호한다. 그러나 최창조 교수가 묘지 풍수를 부정하자 풍수쟁이들은 그를 집요하게 공격하였다. 동시에 오리엔탈리즘 관점에서 한국의 풍수를 무시하는 지식인들의 최창조 교수에 대한 경계심과 질시가 시작된 것도 이때였다.
1981년부터 1988년까지 전북대 지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일 때 그는 행복했다. 전주를 사랑했다. 딸이 태어나자 ‘전주[全]에서 얻는 경사[慶]라고 하여 ‘전경’으로 이름을 지었다.
또 그를 좋아하는 많은 동료 교수가 있었고, 수업이 끝나면 전북대 뒤쪽 언덕에서 막걸리를 기울이는 낭만이 있었다. 술친구이자 평생지기(知己)인 김기현(퇴계학) 전북대 명예 교수는 가끔 그때를 회상한다. “언젠가 강의가 끝나고 후문 막걸리 집으로 갈 때 일입니다. 갑자기 몸을 굽히더니 아스팔트 위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꿈틀거리는 지렁이 한 마리를 집어 풀숲 촉촉한 땅에 밀어넣은 것입니다. 그때 생각했지요. 최 선생이 땅속을 들여다볼 수 있던 것은 미물까지 사랑한 성정 덕이 아닐까?라고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분이었어요.”
1988년 그가 서울대로 자리를 옮긴 것은 불운이었다. 갈 마음이 없었고 동료 교수들도 적극 말렸다. 왜 그 ‘선배’는 최 교수를 굳이 서울대 자기 학과로 불러들였는지 알 수 없었다. ‘선배’ 교수는 거절하는 최 교수를 압박하려고 서울 청량리에 사시던 최 교수 어머니까지 찾아가 설득했다. 그러나 서울대에서 풍수 강의를 오래 하지 못했다. 정작 그를 불러들인 선배 교수부터 견제하였다. 1991년 자의 반 타의 반 학교를 그만두었다. 40대 초반 나이에 초등학교·중학교 자녀를 둔 가장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최창조는 땅의 풍수가 아니라, 사람의 풍수이자 마음의 풍수를 강조하였다. 그의 ‘자생 풍수’는 한반도 풍수의 비조(鼻祖)인 도선국사의 전통과 맥을 잇는다. 전 국토의 명당화였다. 땅이 불평등하면 사람도 불평등하다. 최창조 교수의 자생 풍수론은 불평등한 땅을 평등의 땅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서울대를 사직한 그는 저서 30여 권을 통해 그렇게 설파하고 실천하고자 했다.
필자는 최 교수의 책 몇 권에 발문을 썼고, 최 교수도 필자의 책에 발문과 추천사를 써 주셨다. 우리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필자의 독일 유학 시절 편지를 통해서였다. 1991년 귀국해서 처음 만났을 때 일이다. “독문학과 자리가 많지 않아서, 교수 자리 잡기 힘들 터인데, 우리 동네(풍수)로 오시지요.” 이후 가끔 뵈었다. 그의 자생 풍수론은 ‘조선 풍수 학인’을 자처하는 필자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1990년대 필자의 고향 마을을 찾아왔다. 필자 부모를 굳이 뵙고 인사를 하시겠다는 이유였다. 대문 앞에 화려한 모란이 필 즈음이었다. 당시 순창에서 출퇴근하던 필자의 ‘풍수 실력(?)’을 엿보려 하지 않았을까. 막연히 생각해본다. 이후 최 교수는 ‘의형제를 맺자!’ 하였다. 필자는 그럴 수 없었다. 최 교수 지기인 김기현 교수와 필자는 사제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기현 교수가 의형제 맺기를 적극 거들었다. 이후 우리는 형님 아우가 되었다. 그는 술을 좋아하였다. 필자 역시 술을 좋아하였다. 맨 정신일 때는 “형님, 아우!” 하다가 술에 취하면 ‘술친구’가 되었다. 1997년인가 그즈음 일이다. 답사차 순창에 온 최 교수가 필자에게 연락했다. 오후 3시에 ‘남원집’이란 한정식 집에서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하였다. ‘남원집’이 100일 동안 숙성시켜 만든 술이라 해서 ‘100일주’란 막걸리였다. 밤 10시쯤에 자리를 파했다. 막걸리가 동이 났기 때문이다. 훗날 그는 어느 글에다가 ‘김두규와 순창에서의 통음 사건’을 문자화하였다.
2024년 1월의 마지막 날, 최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그는 도선국사 이후 ‘한국 풍수’를 완성하였다. 시대의 소명을 다하였다. 만약에 저세상이 있다면 거기서 최 교수와 다시 통음하고 싶다. 글을 마무리하려는데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쏟아진다.
“형님, 그곳에서 주선(酒仙)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좋은 단골 술집 하나 만들어 놓으세요!”
유족으로 아내 박증숙씨와 아들 준보, 딸 전경씨 등이 있다. *******
나의 明堂은 신도림이지요 내 맘이 편하니까…
미신 취급당하던 풍수를 학문으로 정립… ‘風水인생 30년’ 최창조, 명당을 말하다 내가 편히 사는 곳이 곧 명당풍수의 본질은 원래 주관적 마음 평온 얻을수 있는 곳 情 붙이며 사는 곳이면 돼
‘자본이 명당’ 충격의 깨달음…공주 명당골 사는 村老에 명당 살아 좋겠다 말걸자 ‘돈 있으면 왜 여기 사나’…도시선 地價가 기준됐지
오후 4시 최창조(63)를 따라간 곳은 그의 단골 횟집이었다. 만원 취객의 소음과 드문드문 날아드는 사시미칼질 소리가 그의 말을 잘라먹었다. 취재하는 입장에선 흉당(凶堂)도 그런 흉당이 없었다. 며칠 뒤 광화문에서 다시 만난 최창조는 그날 기자를 횟집으로 이끈 이유를 털어놨다.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는 말을 잘 못합니다. 술 기운을 빌리지 않으면….” 그에겐 횟집이 인터뷰하기 좋은 명당(明堂)이었던 것이다.
올해로 풍수(風水) 인생 30년째를 맞은 최창조가 지론인 ‘자생풍수’의 맥을 정리한 ‘한국풍수인물사’를 냈다. 자생풍수의 핵심은 ‘풍수란 병든 땅을 치유하는 것이며, 고로 명당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라는 사상이다. 명당에 기대어 복을 바라는 중국 풍수와 명백히 다른 풍수관이다. 최창조는, 자생풍수가 신라 말 도선 국사에서 시작해 조선 건국 초기 무학대사, 그리고 조선 후기 홍경래를 거쳐 동학혁명의 지도자 전봉준까지 이어진다고 본다. 당대의 엘리트가 아니면서 변혁을 꿈꾼 불만 세력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은 모두 ‘당취(黨聚), 즉 땡추'로 볼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의 자생풍수론에 대해 “풍수를 학문으로 정착시키는 데 실패한 뒤 명당이 따로 없다는 식의 ‘풍수 허무주의’를 퍼뜨린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 30년 한국 풍수 담론의 최전선에 서 있었던 최창조에게 풍수와 명당은 과연 무엇인지 물었다.
◇도시에선 비싼 곳이 명당
최창조는 1984년 3월 대우학술총서로 ‘한국의 풍수 사상’을 출간했다. 그는 “30년전 그 책이 풍수학자로서 내 이력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중국 풍수서를 필사한 ‘비기(秘記)’들만이 통용되던 시절. 경기고·서울대를 나온 대학교수(당시 전북대)가 미신 취급을 받던 풍수를 학술적으로 정리했다는 것 자체가 화제였다. 그의 책은 일본 총독부의 지원을 받은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의 풍수’ 이후 우리 손에 의한 첫 풍수서이기도 했다.
―얼마나 팔렸습니까?
“수만 권은 팔렸을 겁니다. 대우학술총서의 기준은 ‘대학원생용 교재’라는 겁니다. 한자투성이의 굉장히 난해한 책인데, 몇주 동안 교보문고 종합 순위 1위에도 올랐고, 그해 베스트셀러로도 꼽혔습니다. ‘학계의 불우·부진 분야를 후원한다’는 취지가 무색할 만큼 잘 팔렸던 거죠. 저자 인지를 찍느라 팔이 아플 지경이었습니다.”
―1988년 서울대 지리학과로 옮긴 것도 그 영향이 컸죠?
“예. 그때 전국의 지관(地官)들이 무엇보다 반겼습니다. 잡술로 천대받던 풍수가 이제는 제대로 대접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던 거죠. 지창룡, 손석우 선생 같은 당대 최고의 지관들도 저를 좋게 평해주셨습니다.” 동양학자 조용헌은 후일 “풍수는 80년대 후반 최창조의 등장으로 학문적 영주권을 받았다”고 평했다.
하지만 그는 1992년 서울대를 떠났다. 그는 “씨름 선수가 권투 링을 떠난 격”이라고 말했다. 학계는 “풍수라는 말을 쓰는 한 우리 사회에 잡술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는다”며 그의 풍수론을 학문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서울대를 떠난 뒤 풍수가로서 최창조의 영향력은 오히려 더 커졌다. 그는 “신문 한 곳에서 연재를 끝내면 다른 신문에서 바로 필자 섭외가 들어왔다”며 “5개 신문에 6년 넘게 단 한 주도 빠짐없이 1개 면씩 풍수 답사기를 연재했다”고 말했다. 그의 답사기는 전남도청이 무안으로 결정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통일 이후 임시수도감으로 꼽은 교하의 땅값도 들썩이게 했다. 가히 지가(地價)와 지가(紙價)를 동시에 올리던 시절이었다. 그는 “섬을 빼면 면 단위 마을들은 웬만큼 다 가봤다”고 말했다.
그랬던 최창조이기에, 풍수강연 때마다 받는 질문이 있다. “명당에 사시겠군요?” 그는 10여년째 서울 구로구 신도림동의 한 아파트 1층(63평형)에 살고 있다. 청중은 그의 대답을 듣고는 대개 고개를 갸우뚱한다.
―왜 신도림입니까?
“당시 제가 가진 돈이 4억5000만원이었습니다. 그 돈으로 이만큼 넓은 아파트를 살 수 있는 곳이 서울에선 여기밖에 없었습니다.”
―명당이라서가 아니었군요.
“처음엔 경기도 과천 아니면 종로구 가회동을 생각했습니다. 과천은 아늑하기가 개성을 닮았습니다. 풍수상으로 바람을 막아주는 장풍(藏風)의 형국입니다. 알고 보니 서울 강남만큼이나 비싸더군요. 북악산 아래 북촌의 중심지인 가회동도 한옥 한 채를 사려면 그 돈 갖고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마음속에서 정을 주는 수밖에요.”
서울대를 나온 야인(野人) 최창조가 당초 정착을 꿈꾼 곳은 강원도 영월이었다. 풍수이론상 고전적인 명당이었다.
―왜 다시 서울로 왔습니까?
“눈이 내린 설경이 그림이었죠. 이틀 밤 자고 나니까 아들 녀석이 그래요. ‘아버지 언제 서울 가요?’라고. ‘가긴 어딜 가 여기서 살 거야’라고 했죠. ‘아버지, 지금 며칠째 눈만 보고 있잖아요. 여기서 뭘해요!’ 두말 않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전국 명승지 어디든 일주일만 살아보세요. 자동차 소리가 그립죠. 도시에서 나서 자란 사람들에겐 도시가 명당인 것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죠.”
―도시에선 어디가 명당입니까?
“지금으로선 서슴없이 지가(地價)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살고 싶은 곳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것 말고 다른 기준이 사실 뭐가 있겠습니까?” 최창조의 입에서 ‘지가(地價) 높은 곳이 곧 명당'이란 말을 들으니 왠지 허탈감이 들었다.
―자본이 곧 명당이라는 거네요.
‘자본이 명당’이라는 말은 충남 공주 명당골 한 촌로가 최창조에게 한 말이다. 최창조가 방송사 제작진과 답사를 마친 뒤 만난 마을 노인에게 “명당에 사시니 좋겠습니다”라고 말을 걸었다. 노인은 “명당이죠. 하지만 소생이 자본이 좀 있으면 왜 이 촌구석에 살겠습니까. 도시의 아파트에 나가 살죠”라고 말했다. 최창조는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제가 그때까지 해온 풍수가 암담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땅값이 다가 아니라는 걸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그걸 넘어서는 객관적인 명당의 조건을 현재로선 말하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자본이 없는 서민들은 어떻게 합니까. 사는 곳에 스스로 좋은 의미 부여를 할 수밖에요.”
―결국 명당이 마음속에 있다는 거네요. 풍수 무용론 내지는 허무주의로 들립니다.
“그건 아닙니다. 자신이 사는 곳에 의미를 부여하자는 게 왜 허무주의나 무용론입니까.”
◇재벌의 지관이란 건 오해
1992년 2월 최창조는 서울대 교수라는 ‘사회적 명당’을 제 발로 걸어 나와 백수가 됐다. 경기고·서울대의 학력, 서울대 교수 출신이라는 간판을 단 최창조는 마음만 먹는다면 쉬운 돈벌이의 길이 있었다. 묘터 잡기였다. 그는 그 길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때 이미 ‘어찌 부모님의 묘터를 잘 잡는다고 자식이 복을 받는다 말인가’ 하는 회의가 깊어진 상태”였던 것이다.
그가 지관으로 밥벌이하지 않고 풍수가로서 이후 21년간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던 건 재벌 덕분이었다. 삼성과 한화가 차례로 고문 계약을 맺고, 매월 적잖은 고문료를 챙겨준 것이다. 지금도 그를 고문으로 모신 곳은 한화 1곳이다. 그는 그래서 ‘의리의 한화’라고 한다.
그를 가장 먼저 부른 건 92년 당시 선경(현 SK)의 최종현 회장이었다. 최 회장은 최창조에게 거의 아무 조건 없이 월 300만원을 지원했다. 2년 뒤 최 회장이 별세하자, 후원금이 그날로 끊겨버렸지만.
인왕산 서울성곽을 배경으로 선 최창조. 그는 “대한민국 전역과 북한의 평양과 개성을 모두 가봤지만 통일한국의 수도로 서울에 견줄만한 곳은 단 한곳도 없다”고 말했다. /
―최창조를 ‘재벌의 지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해입니다. 최종현 회장님을 비롯해 단 한 번도 묏자리를 봐준 적이 없습니다. 그건 고문 계약을 할 때 제가 요구하는 사항이기도 합니다만, 제가 만난 재벌 총수 중 선대의 묏자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럼 뭘 하는 겁니까?
“대단위 공장이나 사옥, 건설 관련 계열사가 짓는 아파트 단지의 입지를 검토하는 일이죠. 회장님들의 별장 터를 정하는 일도 간혹 하죠. 가끔씩 투서를 검토하기도 하고요.”
―투서라니요?
“총수가 검찰에 불려가거나 재판을 받는 일이 생기면 ‘선영 풍수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투서가 비서실로 옵니다. ‘지금의 터에서 5m만 뒤로 옮기면 우환을 면할 수 있다’는 식이에요. ‘안 옮기면 더 나쁜 일이 생길 것’이라는 협박이 뒤따르는 경우도 있어요. 그때는 제가 조언을 하죠.”
대기업 사옥들이 각종 구설에 올랐을 때 그걸 풀어주는 비보(裨補·풍수상 모자라는 기운을 보완하는 것)책을 쓰는 것도 최창조의 몫이다.
―어떤 예가 있습니까?
“을지로 SK텔레콤 사옥이 휴대폰처럼 꺾인 모양 때문에 ‘살기 서렸다’는 소문에 시달렸죠. 신라호텔도 한때 ‘남산 2호 터널에서 나오는 기(氣) 때문에 장사가 안된다는 설도 있었습니다. 둘 다 과학적으론 근거가 없지만,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게 문제죠.”
―어떤 비보책을 썼습니까?
“SKT는 옥상에서 아래로 윈드차임(일종의 풍경·風磬)을 늘어뜨렸습니다. 살기를 흩어버린다는 의미죠. 신라호텔은 정문에 성황당의 돌무더기를 연상시키는 2m 높이의 돌탑을 정문 옆에 쌓았습니다. 그러고는 직원들을 중심으로 ‘최모라는 자가 이런 비보책을 썼다고 하더라’고 소문을 내죠. 그러면 구설은 금방 잦아듭니다.”
그는 “예컨대 고시 합격자가 많은 고장에 가보면 대개 동네에 ‘문필봉(文筆峰)’이라는 게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저기 문필봉 덕분에 너희 중에 큰 문장가가 나온다’는 말을 듣고 자라면 아무래도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죠. 거기다 이웃에서 고시 합격자가 나오면 더 자극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바로 풍수의 논리입니다.”
―재벌의 큰 투자 계획을 미리 알면 돈 벌 기회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네요. 제게 땅을 살 만한 그런 정도의 돈이 없기도 하고요.”
서울대 교수를 그만둔 이후 LG그룹의 파주 LCD 공장 터를 검토할 때 일이다. 한 임원이 공장 도면을 그에게 보여줬다. “선생님, 여기가 정문입니다만 점심을 먹으러 갈 때 여기로는 잘 안 나올 겁니다. 여기, 후문 쪽에 식당을 낸다면 좋겠죠?” 최창조는 ‘전자 공장 터를 정하는데 웬 점심 먹는 소리를 하는 거야?’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그게 주변에 땅을 좀 사두라는 귀띔이었던 거죠. 허허.”
그 LCD 공장 터를 봐주는 일을 하고는 정작 한 푼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날 회장님도 오시고 해서 사실 꽤 기대를 했죠. 나중에 한 임원이 오더니 ‘교수님은 돈 드리는 것을 모욕으로 여기신다 들었습니다’고 하더군요. ‘아닙니다. 저는 전혀 모욕으로 생각지 않는데요’ 이럴 수도 없고. 일단 돈을 주고 그렇게 말하면 ‘아니, 뭐 괜찮습니다’라고 돌려라도 주겠지만 주지도 않고 그렇게 얘기하니까…. 그분들은 예의를 지킨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정말 진심이었던 같아요.”
◇한화 김승연 회장 자택 풍수, 삼성가보다 낫다
―총수 자택의 풍수를 본 적은 없습니까?
“연못을 하나 팠으면 좋겠다는 등 대개 추가로 손을 볼 때죠. 예컨대 출가했던 자녀와 같이 살고 싶은 경우가 있죠. 옛 양반집에선 장성한 자식과는 한집에 살지 않는 게 전통입니다. 마당에 형식적인 담을 만들죠. 다른 사람들은 담이라는 걸 모르지만, 땅에 알려준다는 의미입니다.”
―총수들 자택의 풍수는 어떻습니까?
“서울 한남동 삼성가 자택들이야 누가 봐도 명당이죠. 풍수에선 강의 물살이 굽이치는 맞은편 퇴적지층을 명당으로 보는데, 삼성가 터가 그렇습니다. 남산 아래 한강을 바라보는 풍광도 좋고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삼성가보다 한화 김승연 회장의 가회동 자택이 더 나은 것 같아요.”
―어떤 점에서 그런가요?
“삼성가보다는 터가 넓지 않지만 지세(地勢) 자체가 밖에서 보면 전혀 안 들여다보이는데 안에서는 전혀 답답한 느낌이 없어요.”
―그런 명당 터에 사는 분이 왜 자꾸 횡액을 당합니까?
“아 그거야 문제를 일으키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이죠. 사실 김승연 회장은 밖에서는 나쁘게만 보지만 제가 겪어본 바로는 의리가 대단하고 인간적으로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분입니다.”
◇재벌 총수들 수줍음 많고 웅얼거려
집안에서조차 ‘막대기’로 불릴 만큼 재미없고 숫기 없는 최창조는 재벌 총수들과는 인연이 적잖다. 그는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와인 24병 한 박스를 선물로 받은 적도 있다. “매일 마시고 취했죠. 그러다가 딱 4병 남았을 때 집사람이 남은 걸 다 쏟아버렸어요. ‘이러다 당신 죽는다’고. 그 얘기를 백화점 업계에 있는 친구한테 했더니 ‘와인 브랜드가 뭐였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내가 브랜드를 어찌 아느냐’고 했습니다. ‘영어 스펠이라도 불러보라’고 해서 알려줬더니 ‘야, 창조야. 그 와인 아랍의 왕자들이나 마시는 거야. 우리나라에 수입도 안 되는 엄청난 와인이야.’ 제가 그랬어요. ‘야, 그래도 죽는 것보다 낫잖아!’”
그는 자신의 새 책이 나오면 인연이 닿은 재벌 회장가에 보낸다. 그때마다 ‘잘 받았다’는 답장을 보내오는 사람이 한 명 있다고 했다.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이다.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와는 다르군요.
“고급 양주에 육포나 견과류 같은 안주, 그리고 직접 쓴 카드를 보내옵니다. 글씨를 보면 누군가에게 시킨 필체는 아닌 게 분명합니다. 가까이서 본 그분들의 가정교육은 굉장히 엄격합니다.”
―예를 들면요?
“한화 김승연 회장댁에 가면 명절이든 아니든 아들들을 다 불러 제게 항상 큰절을 시킵니다. 삼성가의 가족 식사 자리에 함께 한 적이 있는데 이재용 부회장이 식사한 뒤 이쑤시개까지 챙겨줘 당혹스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실은 제가 이쑤시개를 안 쓰거든요.”
―곁에서 지켜본 재벌 회장들의 공통점은 뭡니까?
“다른 사람과 눈을 못 맞출 만큼 수줍음이 많습니다. 그리고 웅얼웅얼하는 버릇도 공통적이고요. 제가 보기엔 사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지는 않는데 계열사 사장들은 반드시 해석해야 할 말로 생각해 안달하죠. 누군가 그걸 해석해 결과가 좋으면 당연히 그건 회장님의 뜻이 되니까 그런 이가 승승장구하게 되겠죠.”
◇명당은 마음이 평온한 곳
‘한국풍수인물사’에서 최창조는 ‘돌아가신 부모님에게까지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은 이기심을 넘어 패륜’이라고 썼다.
―음택풍수에 대해 매우 비판적입니다.
“90년대 초반 移葬(이장)하는 현장마다 쫓아다녔습니다. 시신이 깨끗한 경우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끔찍하죠. 모두가 명당이라고 묻었을 텐데 시신을 파내면 예외가 없어요. 음택풍수론에 회의가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서울대 있을 때 저의 풍수론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했던 분들이 교회 다니는 교수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막상 부모님의 상(喪)을 당하면 묏자리를 봐달라는 부탁을 제게 합니다. 그런 이중성은 ‘음택풍수 망국론’을 주창했던 조선 후기 실학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생님의 풍수관은 기존 지관들의 풍수와는 어떻게 다른 겁니까?
“풍수이론의 각론(各論) 면에선 기존 지관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터를 잡는 첫 단계에서는 결정적으로 다르죠. 최초 입지 선정에서 그 사람들은 좋은 땅을 찾는다면 자생풍수에서는 위험한 땅, 병든 땅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정성으로 부족한 기운을 보충해 명당을 만드는 것이죠.”
―풍수가로서 경지를 스스로 평가한다면요?
“풍수가를 세 부류로 나눕니다. 마을마다 있는 동네 지관들 수준의 범안(凡眼), 이론을 열심히 배운 법안(法眼)의 단계, 그리고 현장과 이론이 합치되는 도안(道眼)의 단계. 돌아가신 손석우 선생처럼 신안(神眼)으로 일컬어지는 분도 있는데, 저는 그런 귀신의 경지는 당연히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는 법안에 가깝죠.”
―풍수 연구 30년입니다. 선생이 생각하는 명당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는 곳입니다. 대단히 주관적인 개념이죠. 풍수 허무주의, 풍수 무용론이라고 공격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주관성이 자생풍수의 본질입니다. 신도림도 제게 명당일 수 있는 이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