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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0:1-6
▣ 문이신 그리스도-요한복음 10장-
이 장의 전반부(1-21절)는 9장 34절에서 그 사람이 출회당한 후 즉시 일어난 일이지만, 후반부(22-42절)는 두세 달 후의 일이다. 전 장은 목자와 그의 양에 대한 상징으로 묶여져 있다.
1. 예증(10:1-6)
처음 여섯 절은 목자와 양의 관계에 대한 상징이다. 6절은 이것을 “비유“로 부르지만 더 적절한 말은 격언 또는 풍유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단지 목자와 양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상기시키신다. 그리고 후에 그 적용을 말씀하셨다.
동양의 양우리는 무척 단순하다. 약 3미터높이의 돌담이 둘려져 있고 열려진 틈이 문으로 사용되었다. 마을에 사는 목자들은 해질 무렵에 그들의 양을 우리에 몰아 넣고 문지기에게 지키게 한다. 아침이면 목자들은 자기의 양들을 부르는데,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우리 밖으로 나온다. 문지기(또는 목자)는 입구에서 잠자기 때문에 사실상 “문“이 되는 것이다. 목자를 지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들어가거나 나갈 수가 없다.
예수께서는 참 목자는 문을 통해 들어오며(1절), 양의 이름을 불러 모으고 양들이 그를 알아들으며(3절), 양을 인도하고 양들이 그를 따른다(4-5절)는 것을 지적하신다. 거짓 목자와 타인들, 즉 도둑이나 강도들은 다른 교묘한 방법으로 들어오려 하며, 양들은 그들을 분별하지도 따르지도 않는다."
요 10:7-21
2. 설명(10:7-21)
문(7-10절)-그리스도는 문이시며, 문으로 양을 “들어오며 나가도록“ 인도하신다. 9장에서의 소경은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서 추방(출회)되었으나, 그리스도에 의해 새 우리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더 핑크(Arther Pink)는 이 장에 실제로 세 가지의 문이 언급되어 있다고 지적하는데, 충분한 설명을 얻으려면 이 것들을 구분해야 한다.
-양 우리로 들어가는 문(1절)-여기서 양 우리는 천국이 아니라 이스라엘민족이다. 그리스도는 지시되어 있는 성경적인 길을 통해 이스라엘에 오셨으며, 문지기인 세례(침례)요한은 그를 위해 문을 열었다.
-양의 문(7절)-이것은 현재의 그들의 우리 밖으로, 이 경우 유대교의 밖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문이다. 그리스도는 무리들을 위하여 구 종교 체제를 떠나 새로운 생명을 발견하도록 길을 여셨다.
-구원의 문(9절)-양들은 들어가고 나가는 데에 이 문을 사용한다. 그것은 자유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영생을 얻게 되며 하나님의 말씀의 꼴을 즐긴다. 사단은 자기의 거짓 교사들(도적이나 강도들)을 통하여 양들을 훔치고 죽이며 파멸시키기를 원하지만, 그리스도는 풍성한 생명을 주시며 양들을 돌보신다.
목자(11-15절)-여기에는 양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삯군 목자인 바리새인과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 간의 대조가 나온다. 그들은 원수가 올 때에 도망치며 자신만을 보호하지만, 그리스도는 양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기꺼이 포기하신다(행 20:29).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자기의 생명을 주셨다(시 22편). 큰 목자로서 그는 양을 돌보시며(히 13:20 /시 23편), 목자장으로서 그의 양을 위하여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시 24편/ 벧전 5:4). 18절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신다.
한 무리(16-21절)-“다른 양들“이란 유대인의 우리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들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데려와야만 하시며, 그의 목소리, 즉 말씀으로 그 일을 하신다. 이것은 우리를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로 가서 그들을 구원받게 하는 데에서 본다. 16절은 “그리고 한 무리(참 교회)가 되어 한 목자(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읽을 수 있다.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되었고, 한 몸과 한 떼, 그리고 한 공통적인 영적 생명이 있다(엡 4:1-5).
그리스도는 양을 위해 죽는 선한 목자이시다. 구약에서는 양이 목자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스도는 그의 말씀으로 부르시며, 믿는 이들을 그 문을 통하여 그들의 종교 집단에서 나와 그리스도의 참된 떼 곧 교회로 들어가게 하신다."
요 10:22-42
3. 적용(10:22-42)
두세 달 후에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데에 대하여 논쟁하였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그의 양“이 아니므로 믿을 수 없다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그의 양인 참된 그리스도인에 대해 아름답게 묘사하신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는다-이 말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에 대해 반응한다는 뜻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는 성경에 대해 무관심하나, 참된 양은 그의 말씀으로 산다.그들은 그리스도를 알며 또한 그리스도도 그들을 아신다(14, 27절)-따라서, 그들은 거짓 목자를 따르지 않는다. 한 종교 체계에서 다른 데로, 그리고 다른 이단 신앙으로 달려가는 교회 회원들은 그들이 참된 양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이것은 순종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고집과 저항, 노골적인 불순종, 또한 순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양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거짓 목자들이 있듯이 “양“으로 간주되려는 “염소“들이 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실 것이다(마 7:23).
그들은 영생을 가졌으며 안전하다-28, 29절은 참된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놀라운 안전에 대해 나타낸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는 한“ 생명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양으로서, 영원한 보호에 대한 이중의 확신으로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우리는 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은 그 선물을 다시 빼앗지 않으신다.
양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완전한 상징이다. 성경에서 양은 정한 동물이며,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죄로부터 깨끗함을 받았다. 양떼는 함께 모여 있는데, 참된 신자들도 그와 같다. 양들은 순전한데,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러해야 한다. 양들은 배회하는데, 우리 또한 그러하다. 양들에게 목자의 보호와 안내와 꼴이 필요하듯이, 우리도 영적인 보호와 매일의 인도와 영적 양식을 위해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양들이 유용하고 생산적이듯 참 그리스도인도 그러하다. 마지막으로, 양들은 희생제물로 사용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들을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죽이려 함으로써 그들의 불신앙을 드러내었다. 그리스도는 시편 82편 6절을 인용하셔서 구약성경으로부터 그들을 논파하셨다. 만약 여호와께서 이 세상의 재판관들을 “신들“이라고 부르셨다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를 수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장면을 떠나심으로써, 불필요한 위험 속에 자신을 내놓지 않으셨음을 주의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모여들어 그리스도를 신뢰하였다. 그들은 유대 종교의 무리를 빠져 나와 그 문을 통하여 믿음으로 들어섰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는 자유와 영생으로 들어갔다."
요 1
▣ 생명을 주는 분이신 그리스도-요한복음 11장-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이전 요한이 기록한 기적들 중의 일곱번째의 것으로서, 구원의 계획을 보여 준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여 생명을 얻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음을 본다. 요한복음이 생명에 대해 얼마나 많이 말하고 있는지를 성구사전을 사용해서 알아보라. 나사로는 일곱 가지면에 있어서 잃어버린 죄인의 구원을 상징하고 있다.
그는 죽었다 1. 그는 죽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병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이다(엡 2:1-3/골 2:13).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을 때에 육체적인 것들, 즉 음식이나 기온, 고통 등에 반응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죽으면 영적인 것들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과 성경, 그리스도인, 교회 등에 대해 관심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불순종이 죽음을 가져올 것임을 경고하셨는데(창 2:15-17), 이는 영혼이 몸과 분리되는 육체적인 죽음과, 하나님으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영적인 죽음이다. 요한계시록 20장 14절은 지옥을 두번째 사망, 영원한 죽음이라고 부른다. 실로, 죄인에게는 교육이나 의약품, 도덕성 또는 종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이 필요하다.
2. 그는 부패하였다
복음서에는 주님의 부활 이외에 세 번의 부활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리스도는 방금 죽은 열 두살된 소녀를 살리셨으며(눅 8:49-56), 죽은 지 몇시간이 지난 청년(눅 7:11-17)과, 무덤에서 4일이나 지난 노인(요 11:1-)을 살리셨다. 여기서 우리는 죄인들의 각기 다른 세 종류의 상징을 보게 된다.
-어린 소녀-아직 공개적으로 부패되지는 않았다.
-청년-외부적으로 부패됨이 보이기 시작한다.
-노인-외부적으로 부패된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
요점은 이들 모두가 죽어 있다는 사실이다 !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죽어 있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다만 차이점은 부패된 정도에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죄인들에게도 사실이다. 도덕적인 교회 회원도 나사로처럼 부패되어 있지는 않을지라도 여전히 죽어 있는 것이다."
그는 일으켜져 생명을 받았다
3. 그는 일으켜져 생명을 받았다
누이들의 유대 친구들은 다만 동정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데에는 그리스도를 요한다. 종교 체계는 결코 생명을 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어떻게 생명을 주셨는가? 그는 말씀을 하셨을 뿐이다 ! 이것은 위에 언급된 세 명의 죽은 이들을 살려 내는 데에 사용하신 방법이다(요 5:24/엡 2:1-10).
그리스도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이유는 무엇인가 ? 이는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며(5, 36절),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었다(4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죽어서 지옥에 가기에 마땅하지만, 그리스도는 그의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엡 1:3-14/ 엡 2:1-10).
구원은 규범이 아니라 생명임을 기억하자(요 3:14-21/요 3:36/요 5:24/ 요 10:10/요일 5:10-13). 이 생명은 한 인격으로서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죽은 죄인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믿을 때에 그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요 5:25). 말씀을 거절하는 자는 영원히 죽게 된다.
4. 그는 매임에서 풀려졌다
나사로는 손발을 묶였으므로 스스로는 자유롭게 될 수가 없었다. 신자는 옛 생활의 수의로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새 생활의 자유로움 안에서 행해야 한다. 골로새서 3장 1-15절은 그리스도인이 수의를 벗고 새 생활의 “은혜의 옷“을 입었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옛 생활의 일들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가련한 간증이다."
그는 다른 이들에게 증거했다
5. 그는 다른 이들에게 증거했다
11장 45절, 12장 9-11, 17절에서, 우리는 나사로가 그 지역에 물의를 빚어 놓았음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그리스도를 믿었다 ! 사실상, 그는 걸어다니는 기적이었는데,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 종려 주일에 거대한 군중들이 모였던 이유는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나사로 때문이기도 하였다. 12장 11절에서 우리는 나사로가 다른 이들을 그리스도의 구원의 지식으로 인도하였음을 보게 되는데, 이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며 의무이다.는 핍박을 받았다
6. 그는 핍박을 받았다
유대인들은 나사로가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하여 납득시켰기 때문에 그를 미워하였다(12:10-11). 중심적인 제사장들 중의 다수가 사두개인들이었으며,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는데, 나사로는 그들의 어리석은 논의에 있어서 산 대답이었다.
하나님에 의해 그 제사장들이 조정을 받지 않았다면, 그들은 갈보리에 나사로를 위한 특별한 십자가를 세웠을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들은 박해를 받을 것이다(딤후 3:12). 사단은 항상 살아 있는 기적과 싸운다.
7. 그는 그리스도와 친교하였다
12장 1-2절에서 우리는 나사로가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에 앉아 축연을 즐기고 있음을 본다. 이는 “일으켜져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함께 앉게된“(엡 2:5-6) 그리스도인이 있을 올바른 장소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시간을 보냄으로써, 나사로는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에 감사를 보이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면서 증거할 새 힘을 얻었다. 구원의 기적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인 생명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와 매일 교제를 나누어야만 한다.
베다니의 온 가족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어떠해야 함을 보여 주고 있음에 주목하는 일은 흥미있다. 마리아는 늘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다(눅 10:38-42/요 11:32/요 12:3). 그리고 마르다는 봉사의 상징으로서, 항상 그리스도를 위해 바삐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 나사로는 간증하며 날마다 그리스도께로 다른 사람들을 인도한다. 이 세 가지 실례 곧 예배(마리아), 봉사(마르다), 행함(나사로)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있어야 할 일들이다.
▣ 부가적 연구
이 기적의 또다른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본향으로 데려가시려 돌아오실 날을 예시하는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성도이며 나사로는 잠들어 있는 자들을 상징한다(요 11:11-14/살전 4:13-18). 마리아와 마르다가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오듯, 살아 있는 성도들은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다. 나사로는 “큰 소리“에 의해 불려졌는데(43절),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에도 “외침“이 있을 것이다(살전 4:16). 그리스도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탄식하셨는데, 오늘날 모든 피조물들은 탄식하며마지막 구속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롬 8:8-25).
그리스도의 오심이 지연되는 것은 오직 우리에게 유익이 되게 함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그 자매들은 왜 주님께서 나흘씩이나 지체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사야 30장 18절은 그 대답을 주고 있다.
예수께서 이 때 외에 눈물을 흘리신 다른 두 번의 경우를 눈여겨보라(눅 19:41/히 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