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朝人物考四十二
이필진(李必進) 묘갈명(墓碣銘) - 이현석(李玄錫)
공의 휘(諱)는 필진(必進)이요, 자(字)는 퇴부(退夫)이다.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둔촌(遁村, 이집(李集)) 이래로 큰 인물과 고관(高官)이 대를 이어 끊어지지 않고 배출되었다. 명상(名相) 충정공(忠正公) 이준경(李浚慶)이 실로 공의 증조(曾祖)요,
이분이 좌승지(左承旨) 이덕열(李德悅)을 낳았는데 종숙부(從叔父) 군수(郡守) 이유경(李有慶)의 후사(後嗣)가 되었으며, 이분이 별제(別提) 이사성(李士星)을 낳았는데 바로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양천 허씨(陽川許氏)로, 선조(宣祖) 때의 명신(名臣) 관찰사(觀察使) 허엽(許曄)의 아들 허균(許筠)이 공의 외조(外祖)가 된다.
공은 명(明)나라 만력(萬曆) 경술년(庚戌年, 1609, 광해군 2) 중동(仲冬)에 태어났는데, 모습이 깨끗하고 조용하여 문재(文才)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외가(外家)의 화(禍)를 입어 별제공(別提公, 이사성)을 따라 흥양(興陽)으로 귀양을 갔다가 풍토병(風土病)에 걸려 고질이 되어 마침내 세상을 등지고 은거(隱居)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학(文學)을 좋아하여 책 보기를 즐거워하였으며,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산업(産業)을 일삼지 않아 쓸쓸했지만 시(詩) 읊기를 좋아하고 교유(交遊)를 일삼지 않았다. 호남(湖南)의 대방(帶方, 남원(南原)의 옛이름) 깊숙한 골짜기에 대나무 숲과 소나무 숲 우거진 언덕에다 작은 집을 지어 방장산(方丈山, 지리산(智異山)의 별칭)에 읍(挹)하듯 하고 큰 들판을 굽어보는 데서 기거하며 소요 자적(逍遙自適)하였다.
날씨 좋은 날이면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회포를 풀고 근심을 털었는데, 시문(詩文)으로 쓴 것이 매우 많다. 비록 병으로 귀찮아 스스로를 검속(檢束)하지는 못하였으나 여묘(廬墓)를 살아 부모를 사모하였고 동기(同氣)를 독실히 사랑하는 것이 천성에서 나왔다.
성현(聖賢)의 책에 침잠(沈潛)하고 공부할 송유(宋儒)의 성리학(性理學) 글을 손수 베껴 보았다. 일찍이 세상일에 마음을 쓰지 않았는데, 그의 조행(操行)은 비단 사장(詞章)에 나타날 뿐만 아니었다. 향리(鄕里)의 지친으로 공을 논의하는 자가 반드시 “아사(雅士)이다.” 하고, 또 “선인(善人)이다.” 하였으며, “고상 담박(高尙澹泊)하고 사한(詞翰)을 좋아한다.” 하고, 또 “청수(淸修)한 군자(君子)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모두 공을 칭송한 것이지만 공의 전부를 들어 나타냈다고는 할 수 없으니, 여기에서도 공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지은 시(詩)는 맑고 아름다워 격조(格調)가 높아 당시의 시인들이 모두 추허(推許)하였으며 읽고 감상(鑑賞)해 보면 역시 그 사람을 상상할 수 있다고 한다.
만년에 수성(隋城, 수원(水原)의 옛이름) 옛집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나니, 수(壽)는 62세였다. 수성의 척령동(鶺鴒洞)에 장사지냈는데, 그 22년 뒤 임신년(壬申年, 1692, 숙종 18)에 독성(禿城) 남쪽 건좌(乾坐) 언덕 성조동(聖祖洞)으로 이장(移葬)하면서 유인(孺人) 장씨(張氏)를 부장(祔葬)하였다.
장씨 역시 호남의 거벌(巨閥)로 흥양(興陽)이 본관(本貫)인데, 시조 고려 광평 시랑(廣評侍郞) 장유(張儒) 이래로 높은 벼슬과 과거(科擧)에 급제한 사람이 이어졌다. 아버지 장회(張晦)는 일찍 졸(卒)하였는데, 유인(孺人)은 만력(萬曆) 임자년(壬子年, 1612, 광해군 4)에 태어나 18세에 공에게 시집왔다.
군자(君子)의 배우자가 되어 덕의(德義)의 아름다움을 도와서 이루게 하였으며, 방정하고 엄격한 성품의 시부모를 잘 모시고 순종하였다. 상화(喪禍)로 이사를 다니느라 집안 살림이 탕진되었으나 집안을 안정시켰다. 제사를 공경히 받들고 손님과 친척을 예(禮)로 대접하며 부지런히 일해 살림에 보태는 등 모든 집안일을 책임져 넉넉하게 수응(酬應)하여 종당(宗黨) 부녀들이 모두 따르지 못한다고 여겼으며 내외 친속(內外親屬)들이 모두 감탄하며 아름답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81세의 수(壽)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장남은 이상징(李相徵)이요, 차남은 이화징(李和徵)인데, 모두 선비로 그 집안을 계승하였다. 이상징의 아들은 이붕만(李鵬晩)과 이동만(李東晩)이며, 이화징의 두 아들과 두 딸은 모두 어리다. 큰딸은 사인(士人) 김하삼(金夏三)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찰방(察訪) 임대년(任大年)과 진사(進士) 김주(金霔), 사인(士人) 윤하서(尹夏瑞)ㆍ권흡(權)ㆍ신여호(申汝虎)에게 각각 시집갔는데 모두 자녀(子女)가 있으며 벼슬하는 이는 없다.
아! 공은 명성과 재능을 산골에 감추어 진실로 하늘이 부여한 천성에 흠결(欠缺)이 없었는데 그 누구만 못하여 공경(公卿)이 되지 못했는가? 상론(尙論)하는 자들은 재삼 이를 개탄한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재능을 간직하고도 베풀지 못하고 시(詩)로써 울렸네. 그 자신이 누리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후손이 넉넉하게 누리리라. 하늘은 기필할 수 있으니, 내 명(銘)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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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李必進 墓碣銘[李玄錫]
公諱必進, 字退夫。 廣州之李, 自遁村以來, 鉅人巍秩, 綿代不匱。 名相忠正公諱俊慶, 寔公曾祖。 生左承旨諱德悅, 爲從叔郡守諱有慶後。 是生別提諱士星, 卽公考也。 妣陽川許氏, 宣廟名臣觀察使諱曄有子曰筠, 爲公外祖。
公以皇明萬曆庚戌仲冬生。 姿豐潔恬靜, 有文才。 髫齔罹外家禍, 隨別提公謫興陽, 傷水土疾痼, 長而遂偃蹇於世。 然好文學, 以書籍自娛。 家貧不治産業, 蕭散喜吟詩, 不事交遊。 居湖南之帶方, 幽崖、小築、竹林、松岡, 挹方丈、俯大野。 逍遙自適, 良辰美景, 遣懷寫憂, 發之篇章者甚夥。 雖其病慵不能自檢束, 而廬憂孺慕, 篤愛同氣, 出於天性。 沈潛聖賢書, 手錄宋儒工夫上文字以省之。 未嘗以世務嬰其心, 其操尙不獨在於詞章。 鄕黨親懿之擬議公者, 必曰: “雅士也。” 曰: “善人也。” 曰: “高澹而嗜詞翰。” 曰: “淸修君子。” 俱足以稱公, 而俱非擧其全者, 卽此而公可知已。 所著詩淸婉有格致, 當世作者, 皆推許之, 讀而味之, 亦可想見其人云。
晩歲, 歸隋城舊莊以終, 壽六十二。 葬于隋之鶺鴒洞後, 二十二年壬申, 改窆于禿城南坐乾之原聖祖洞。 孺人張氏祔。 張亦湖南巨閥, 系興陽。 自始祖高麗廣評侍郞諱儒以來, 冠冕科甲, 赫世相嬗。 考諱晦早卒。 孺人生於萬曆壬子年, 十八歸公。 配君子而助成德義之美, 奉尊章而順適方嚴之性。 喪禍遷徙, 家緖零敗, 而梱政密如也。 敬承祭祀, 禮接賓戚, 拮据補苴, 百責攸萃, 而酬應裕如也, 宗黨婦女俱以爲不可及, 內外親屬, 莫不歎嘉之。 壽八十一而逝。
男長相徵, 次和徵, 俱以儒世其家。 相徵有子曰鵬晩、東晩: 和徵二子二女, 皆幼。 女長適士人金夏三, 次察訪任大年、進士金霔、士人尹夏瑞、權㯓、申汝虎, 各有子女, 不官祿。
嘻! 韜光藏器一丘一壑, 於天所畀與者, 固無所疵缺乎! 而誰之不如而不公卿? 尙論者所爲三致嘅也, 遂係以銘曰:
蘊而莫施詩以鳴。 不享其躬後宜贏。 天其可必視余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