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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큰믿음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낮아진 하늘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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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Whitefield,1714년∼1770년)또는 조지 휘트필드 신부는 영국 성공회 사제이자 설교자이다. 18세기 영국 칼뱅주의 부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생애 1714년 영국 글로스터에서 태어났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존 웨슬리의 홀리 클럽 운동에 참여하였다. 주교에게 사제서품을 받은 그는 1736년 6월 27일 자신이 세례를 받은 글로스터 교회에서 3년간 사목을 하였다. 1739년부터 옥외 설교를 시작했는데, 당시 휫필드 신부는 감성적인 설교로 많은 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다. 그는 미국에서도 활동하였는데, 1740년 2차 미국 방문 시 조지아에 보육원을 설립하고, 순회 설교로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였다. 특히 그의 노스햄프턴 교회(장로교 목사인 조너선 에드워즈 목사가 사목한 개신교회이다.)설교는 미국 개신교 부흥 운동 중 하나인 1차 대각성 운동에 영향을 줄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 그는 존 웨슬리 신부와 동역 관계였는데, 웨슬리 신부를 '앞으로 죽어서 하느님 나라에 가면 주님 곁에 가까이 있을 사람'이라고 부를 정도로 존경하였다. 하지만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은 달라서 존 웨슬리 신부는 노예해방 문제에, 조지 휫필드 신부는 아동복지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실제로 존 웨슬리 신부는 성공회 신자인 윌리엄 윌버포스의 노예해방 운동을 격려하였고, 조지 휫필드 신부는 미국에서의 순회 설교 시 보육원 기금 마련을 위한 설교를 하였다.
탁월한 옥외 설교가 조지 휫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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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가는조지윗필드신부가 아니었을까생각한다. 후에감리교의 창시까지
이르게되는 18세기부흥운동의 지도자는 존웨슬리신부였지만, 부흥운동을 먼저일으킨 사람은 윗필드였고
역사가들은 설교가로서는 윗필드가 더 인정받았다고 말한다.
윗필드는 옥스포드대학시절 웨슬리가 만든신성클럽(Holy Club)에 들어감으로 후에 웨슬리형제와 같이
부흥운동의 주역이 된다. 존웨슬리신부가 미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동안 윗필드는 서품을 받고 (1736)
바로 설교를 하기 시작하는데 설교를 할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그 말씀을 듣게되었다.
이것이 바로 부흥 운동의 시작이었다. 존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교회에서 회심을 하고 능력으로 설교를
시작하기 2년전의 일이었다. 노방 설교를 먼저 시작한 것도 윗필드였다. 그는 여러교회를 순회하면서
설교했는데 이러한 그의 방법을 싫어하거나 그의 설교를 좋아하지 않는 성직자들이 그에게 교회를
개방하지 않자 그는 사람들이 많이 모일수있는 다른 장소를 찾아 설교를 하기 시작한것이다.
지금은 이런일이 흔하지만 그 당시에는 획기적인 사고 전환이었다. 웨슬리는 그의일기에서 윗필드가
이렇게 설교하는 모습을 보았을때 얼만큼 놀랐는지를 묘사하고있다. 그러나, 웨슬리도 윗필드의 방법을
따라하기 시작했고 뒤에 신성클럽의 많은 설교가들이 계속 순회설교를 하면서 영국과 미국에
대부흥이일어난것이다.
윗필드는 웨슬리를 좋아했지만 결국 신성 클럽을 떠나게된다. 예정론에 있어서 웨슬리가 캘빈주의를
철저하게 반대해서 신성클럽회원들이 캘빈주의를 따르지 못하게했기때문이다. 윗필드는 캘빈주의를
믿었기때문에 웨슬리와 길은 달리할수 밖에없었다.
윗필드는 선교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배로 몇달씩 항해해서만 대서양을 건널수 있던시절에
미국(당시에는영국의식민지)을 일곱번이나 방문한것만을 봐도 그의 열정을 짐작할수있다.
그는 결국 미국에서 56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는데 그의 무덤은 매사추세츠주의 뉴베리포트제일장로교회의
지하실에 있다. 신학교 시절 나와 친한 친구였던 랍존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이다.
그의 죽음과 무덤은 그의 삶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해주고있다.
첫째, 그의 무덤이 미국에 있다는 사실이다. 영국 사람인 그가 죽음의 순간까지 미국에서 선교를 했다는
사실은 그의 선교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다.
둘째, 그의 무덤이 장로교회에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 주의할만한것은 그 교회가 윗필드의 제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라는점이다. 그는 분명히 성공회 사제였고 성공회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다른 교단과도 같이 일했던것이다.
셋째, 그는 자신의 장례예배에서 존웨슬리가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죽었다는점이다.
윗필드는 웨슬리의 완고한 태도때문에 신성 클럽을 떠났지만 웨슬리를 원망하지않고 죽을때까지 그를
존경했던것이다. 그것은 웨슬리도 마찬가지였다. 윗필드가 죽었을때 웨슬리는 영국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영국에서 그의 장례 설교를 하며 그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우리에게는 그의 사역을 이어갈 사람이 없습니다. 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그만큼 유용하게
쓰일사람은없습니다.”
교단과 신학의 차이를 넘어서 선교의 열정으로 주님의 말씀을 전포하는 모습. 그것이 윗필드의 무덤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아닐까?
조지 휘트필드는 18세기 영국 대각성 운동의 주역이었고, 칼뱅주의 부흥을 이끌었던 주인공이며, 바울 사도 이후 가장 위대한 전도자, 설교자로 불리는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할 당시 홀리 클럽 활동을 통해 웨슬리 형제와 친목을 다졌고 보다 진지하게 거룩한 신앙의 삶을 꿈꾸게 되었다. 1735년 진정한 회심을 경험한 그는 졸업 후 고향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는데, 1736년 그가 외쳤던 첫 설교는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놀라운 영적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이후로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복음에 대한 변하지 않는 열정을 안고 하루에 서너 번씩 설교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웨일스와 스코틀랜드를 포함하여 영국 전역을 누비고 다니며 설교를 하였고, 7차례나 미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뜨거운 영성에 기초한 그의 설교는 엄청난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갔고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인간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얼마나 잘 들추어냈던지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영혼의 고뇌를 느끼지 않는 이는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거듭나야 한다."는 그의 피맺힌 외침은 수많은 심령들을 주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돌이켰고 결국 미국 대각성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되기도 했다.
조지 휘트필드는 자신의 삶에서도 엄격한 태도를 고수했는데, 하루를 식사와 수면 8시간, 기도, 방문, 교리 공부를 위한 8시간, 연구와 묵상을 위한 8시간으로 세 등분해서 사용할 정도로 철저하였다. 그가 매일 밤 점검했던 목록을 보면 얼마나 빈큼없이 자기를 관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나는 개인 기도 시간에 뜨겁게 기도했는가?
정해진 기도의 시간을 지켰는가?
모든 대화나 행동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했는가?
어떤 기쁨 후에 즉시 감사했는가?
하루의 일을 계획 가운데 진행했는가?
모든 면에서 검소하고 침착했는가?
무슨 일을 행할 때 열심히 혹은 힘있게 했는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면에서 온화하고 상냥하고 친절했는가?
거만하거나 허영을 일삼거나 난잡하거나 시기하지 않았는가?
모든 죄를 고백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