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당 조순화
포덕59년(1918) 평양 출생
서울지부 여성회장
"천도교,
대대손손 잘 될겁니다"
우리 어머니( #차기숙) 아버지( #조기간) 다 조상 때부터 천도교 해 오셨으니까 나는 배 안의 교인입니다.
이북 평양서 났는데 어머니가 세 살 때 날 업고 서울로 오셨어요.
어머니 손목 붙 잡고 교회에 따라다녔지.
뭘 하는 덴지도 모르고, 천도교인 것 만 알았지,
자세한 건 모르고, 학교도 아직 들어가지 않았을 때니까.
아버지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천도교에 평생을 바치셨지
아버지는 육이오때 납치 당해서 가신 다음에는 그만이야.
최 린 선생님하고 같이 돌아가셨지.
우리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적에 소련으로 무정부주의가 좋다고 하면서 가셨어요.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땐데 한 번은 어머니 보고 물어보더래요. 내가 없어도 살겠냐고.
어머니가 내가 어떻게 사느냐고 하니까 왜 못 사느냐고 교회에서 의논해서 살라고.
그러곤 다음 날 소련으로 도망갔다구, 아버지가 .
그런데 소련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꾸 들어오니까
일단은 다 해산시킨다고 해서 도로 쫓겨나왔 다구.
빵집에 가서도 이름을 몰라서 저거 달라구 하면서 1년을 살다가 오셨다구.
내 동생 둘하고 어머니하고는 평양 어머니집 으로 보내고 아버지는 소련으로 가시고
그렇게 일 년 계시다가 쫓겨나왔다구.
우리 아버지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에요
새옷을 해서 주면 강연 때 옷을 제일 허름하게 입은 사람하구 다 바꿔입고 오세요.
그렇게 참 착하고, 최린 씨가 최고로 치던 분이에요.
어미님도 어려서부터 아버지하고 이웃해 사셨는데
아버지가 원래 살던 그 분하고 의가 나빠서 늘 그러다가 안 되겠다 해서
기숙이를 얻어야 자손도 많이 낫겠다 해서
우리 어머니하고 다시 재혼을 하셨어요.
내가 첫딸이고 아들은 다섯을 나셨어.
아버지 납치 당하실 때 명륜동에 살았는데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최린 선생 댁에 먼저 가서 차를 타고 같이 내려오면서,
그 다음에 우리집에 와서 아버지한테 잠깐 말만 물어보겠다고 하고 한 차에 타고서 가고는 그만이에요.
그 당시에 저는 아주 어렸지요.
가시자마자 한 열흘 후인데 소문이 나더라구 돌아가셨다구.
두 분이 같이 차 타고 한 마디만 물어보고 보내 드리겠습니다, 했다구.
세 사람이 와서. 이북 사람이지.
나중에 얘기 들으니까 부산까지 내려가면서 같이 있으면 모의할까 봐 갈라서 따로따로 데려가셨대요.
그러곤 그냥 소식 모르지.
나는 스물다섯에 결혼했지.
그 때만 해도 늦은 편이었어.
교회와는 중간에 좀 떨어졌었죠.
학교 들어가서 공부하 느라고 여기 못 오고 그래서
크면서 따라다니면서 보고 듣고 하는 그 정도로 알고 그랬는데,
서울교구 여성회에서 회장을 좀 하라 그래서 내가 6년을 했지.
여성회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어.
그래서 아무 것도 못하고 삼 년 했는데
본부 박공주 회장님 계실 때 아래위층에서 삼백 만 원을 모아놓고 삼 년 더 했더니
그 배가 되대요.
그래서 육백 만 원 모이놓고.
지부에서는 초대 회장이죠.
아무 것도 한 건 없어요. 터만 잡아놨지.
그 다음에 이성자 씨는 집을 지은 거나 마 찬가지지.
그렇게 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돈이 참 부족하고 돈 모으기가 힘들 때였어요.
우리 지부 회장 들어오는 사람들은
나만 빼놓고 다 미인이에요. 저는 뭐 한 거 없습니다. 자리만 지켰지.
그 다음에 주욱 내려오면서 잘들 해 주셔서 잘 되갑니다.
맡은 분마다 운이 좋아서인지 착 뽑아놓으면
그 기간 동안은 잘 해 나가시고 그러더라구요.
천도교 참 좋은 교지요.
동양에서는 제일일 겁니다 .
우리 부모네들이 나서부터
일평생을 속해서 계셨던 만큼
저희들도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서
좋은 사람들 많이 만들어 놓으시고
들어 오는 사람마다 잘 해서 천도교 이만큼 커졌습니다 .
대대손손 잘될 겁니다.
■구술일 : 포덕 147년(2006년) 10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