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양양 선림원지(禪林院址) 삼층석탑
양양군 서면 미천골 자연휴양림 초입
2025.1.18(토) 양양 천년사찰 명주사 및 양양 양수 홍보관인 에너지팜 탐방후 미천골 자연휴양림 초입의 선림원지로 이동하여
약 10여분간 통일 신라시대의 교종 사찰인 폐사지 선림원지 탐방시간을 갖는다(16:25~16:35)
16:20 양양 서면 미천골 입구 미천휴양림교
16:26 선림원지 계단 앞 안내판
강원도 양양군 서면 미천골 자연휴양림 초입에 자리한 선림원지는 통일신라 시대의 교종 사찰이다.
해방 후 1948년 선림원지에서 발굴된 절터에서 연대가 804년으로 적힌 신라 동종에 새겨진 글에 따르면
순응(順應)이라는 스님이 종을 만들고 창건하였다고 하며 순응은 교종 사찰인 해인사를 802년에 창건을 시작하고
불과 2년 후 804년에 이곳 선림원을 개창하였다.
신라 동종은 월정사에 옮겨 보관 중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현재는 일부 파편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춘천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선림원지로 올라가는 계단길에 들어서면 언덕 위 삼층석탑이 보인다.
선림원지가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는 계곡 이름에서 알 수 있다.
미천골 계곡은 쌀미(米) 자와 내천(川)자를 써서 미천골이라 부르는데 이 절에서 공부하는 승려들 먹일 쌀 씻은 물이
계곡 하류까지 흐른다고 해서 미천(米川) 골이란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발굴조사보고서는 지금으로부터 900년을 전후 대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절터가 완전히 매몰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오늘날 절터에는 정면 3칸, 측면 4칸 금당 건물의 주춧돌이 남아 있어 예전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선림원지 터에는 삼층석탑(보물)을 비롯하여 석등(보물), 홍각선사탑비(보물), 승탑(보물) 등 총 4점의 보물(444호~447호)이 있다.
보물 제444호 양양 선림원지 삼층석탑
선림원지 삼층석탑은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 정형양식의 석탑으로 높이는 4.1m 정도이다.
법당 터 남쪽의 원래 위치에 복원되었다고 하며 위, 아래 받침돌(두 기단) 위에 몸돌(탑신)을 세 층으로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탑이다.
탑신은 몸통과 지붕이 한돌이며, 몸돌의 모서리에는 기둥이 있고, 지붕돌은 기단에 비해 적어서 안정감은 있으나
다소 세련되지 않은 형상인 듯 보인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에 철제찰주를 꽂았던 구멍이 있다고 하며 탑 앞에는 안상을 새긴 배례석도 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모두 하나의 돌로 하였으며 초층 몸돌이 상대적으로 너무 높다.
2층 몸돌은 초층에 비하여 1/2로 대폭 줄었으며 각층 몸돌의 모서리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평박하고 밑면 받침은 모두 5단으로 하였고 낙수면 경사는 심하지 않고 전각에는 반전이 있어 경쾌하다.
지붕돌 상면에 각각 2단의 굄을 두어 상층 몸돌을 받치고 있다.
선림원지 삼층석탑 기단부 각면의 팔부신중
기단부는 여러 장의 판석으로 토대를 만들고 하층기단을 올렸으며 기단에는 우주와 탱주를 각 1주씩으로 하였다.
하층기단 갑석에는 호(弧), 각(角) 형의 2단의 굄을 새겨 상층기단의 면석을 받치고 있다.
상층기단에도 우주와 탱주를 1주를 두었고 상층기단에는 탱주로 분할된 각면에 2구씩 팔부신중을 돋을 새김하였다.
삼층석탑 뒤로 선림원지 금당지터
선림원지 석재들
보물 제447호 양양 선림원지 승탑(僧塔)
이 승탑의 높이 1.2m이며 일제강점기 때 완전히 파손된 것을 1965년 11월에 각 부분을 수습하여
현재 자리에 복원한 것으로 종탑이 없는 기단부(基壇部) 만이 남아 있다.
원래의 자리는 선림원터에서 뒤쪽 산기슭으로 약 50m 정도 올라간 곳이라고 전한다
원래 위치는 산 중턱으로 추정하고 바닥돌과 받침돌만 있었는데 2015년 발굴 때 지붕돌로 여겨진 유물이 발굴되었다.
가운데 받침돌은거의 둥그스럼한데 여기에 돋을새김한 용과 구름무늬는 정밀하고 웅장한 느낌을 준다.
기단의 구조로 보아 8각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신라시대의 특징을 보이는 승탑은
정사각형의 바닥돌에 아래 받침돌은 2단인데 아래단이 바닥돌과 한 돌로 짜여진 점이 특이하다.
정사각형의 바닥돌 위로 기단의 아래받침돌·중간받침돌·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2단인데, 아래단이 바닥돌과 한 돌로 짜여진 점이 특이하다.
윗단에는 두 겹으로 8장의 연꽃잎을 큼직하게 새기고, 그 위에 괴임을 2단으로 두툼하게 두었다.
중간받침돌은 거의 둥그스름한데 여기에 높게 돋을새김해 놓은 용과 구름무늬가 있다.
윗받침돌에 2겹으로 새긴 8장의 연꽃잎은 밑돌에서의 수법과 거의 같다.
통일신라 후기작품으뢰 추정하며 정확한 승탑의 건립시기는 절터에 남아있는 홍각선사비와
이 승탑이 홍각선사의 승탑인 점 등으로 신라 정강왕 1년(886)인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보물 제445호 양양 선림원지 석등
통일신라시대 담양 개선사지 석등과 거의 같은 모습이며 높이 약 3m, 화강암,
홍각선사 탑비와 함께 신라 헌강왕 원년(886)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식 이지만 받침돌의 구성만은 매우 독특하여 눈길을 끈다.
아래받침돌에 귀꽃조각이 앙증 맞게 돋아 있고 지지대는 마치 장고허리와 유사하다.
화사석은 8각에 4개의 창이 있는데 아래의 작은 공간에도 무늬가 있다.
지붕 돌 추녀엔 귀꽃조각이 장식이 있어 지붕돌 경사진 면은 둥글넙적하게 느껴진다.
꼭대기에는 연꽃이 새겨진 머리장식의 작은 받침돌만 남아 있어 위의 장식이 궁금하여 진다.
보물 제446호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석등의 옆에 자리한 건립 시기는 통일신라 886년(정강왕 1)으로 추정된다.
홍각선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한 탑비로 비받침 위에 비문이 없이 바로 비머리가 올려져 자리하고 있었으며
비문이 새겨지는 비몸은 파편만 남아 국립춘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글씨는 왕희지체다.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던 것을 2008년에 비신을 새로 복원한 모습이라 한다.
비받침의 거북은 용의 머리모양에 등에는 6각형의 무늬가 있고 비몸을 새우는 자리엔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 있다.
비머리에는 전체적으로 구름과 용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고 중앙에 비의 주인공이 홍각선사임을 밝히는 글씨가 있다.
몸돌은 다 깨져 이곳에 없고 이는 새로 만들어 넣은 것이며 받침돌과 머릿돌만 온전하다.
몸돌은 왕휘지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 한다.
조선 유학자들이 왕휘지 글자 자체를 탐하여 무수히 많은 탁본을 해갔다.
선비들(권세 있는 양반들)이 탁본을 하러 올 때마다 인근 민초들이 이유도 모른 채 노역에 동원되었다.
이를 견디다 못해 이 글자를 없애 버리면 노역을 면할까 하여 탑비에 불을 지르곤 하였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어 1700년대 중반에 이르러 드디어 깨지고 말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