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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나균용 목사님 설교요약
본문: 요한복음 20:21–23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시고,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날 저녁, 제자들은 문을 닫고 두려움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그들 가운데 나타나시며 첫마디로 하신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주님은 죽음을 이기신 평강으로 제자들의 두려움을 덮으시고,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은 제자들의 인생이 이제 단순히 생존이 아니라 보냄 받은 자의 삶으로 변화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중심에 있는 구절, 바로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이 한 문장 속에 인간의 창조와 구원의 완성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성경에서 “숨”은 단순한 호흡이 아니라 생명과 영의 전달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숨을 내쉬셨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냥 “말씀하셨다”가 아니라, 굳이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고 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창세기 2장 7절의 재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은 흙덩이에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 숨이 들어가자 사람은 산 존재, ‘생혼’이 되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신 것도 동일한 의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새 창조의 주로서 제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계신 것입니다. 창세기의 생기가 생명이라면, 요한복음의 숨은 성령의 생명입니다. 창조의 숨이 인간을 ‘살게’ 했다면, 부활의 숨은 인간을 영적으로 다시 살게 합니다.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골짜기에서도 동일한 일이 일어납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뼈들에게 불어라!” 그 말씀에 순종하자, 뼈들이 서로 연결되고, 힘줄이 붙고, 살이 덮이고, 큰 군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창조 때 불어넣어진 숨이 인간을 살아있는 존재로 만들었다면, 부활하신 주님의 숨은 교회를 살아있는 사명 공동체로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새 창조의 비밀입니다.
성령의 생기가 없으면 인간은 단지 종교적인 존재에 불과합니다. 유대교가 왜 무너졌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가졌지만 성령의 생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건물이 크고, 예배는 많고, 봉사는 많지만 성령의 숨결이 없는 교회, 기도 없는 교회, 말씀으로 살아 숨 쉬지 않는 교회는 마른 뼈 무더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첫 명령으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성령의 역사는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이들이 말합니다. “우린 이미 성령 받았어요. 세례받았잖아요. 교회 다니잖아요.” 하지만 성령의 열매가 없고, 기도의 불이 꺼지고, 사랑의 생기가 없다면 그건 단지 이름뿐인 신앙입니다. 사람이 숨을 멈추면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성령의 숨을 잃으면 죽은 교회입니다. 예배는 형식이 되고, 말씀은 지식이 되고, 사랑은 제도가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하나님은 시대마다 마른 뼈 같은 민족을 살리십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회복되었듯이, 하나님은 오늘 대한민국을 세우셨습니다. 일제의 압제 속에서,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하나님은 기도하는 교회, 새벽마다 부르짖는 성도들을 통해 이 나라를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경제의 기적이 아닙니다. 한강의 기적은 곧 성령의 생기 역사입니다. 무너진 뼈들 위에 생기가 들어가서 군대가 된 것처럼, 하나님은 이 땅의 교회를 군대로 세우고 계십니다.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들은 완전히 소망을 잃은 이스라엘을 상징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하나님의 군대로 만드셨습니다. 우리 민족 또한 마른 뼈와 같았습니다. 식민지로 짓밟히고, 전쟁으로 불타고, 남북으로 찢겨졌습니다. 그런데 그 절망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은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기도하는 어머니들, 눈물로 부르짖는 교회들, 순교자들의 피 위에 하나님은 새로운 영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이 민족을 통해 세계 복음화의 마지막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에스겔의 뼈들이 군대가 되었듯이 주님은 우리를 성령의 군대로 세우십니다. 이 군대는 총과 칼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 사랑과 복음으로 싸웁니다. 이 군대는 세상의 어둠과 싸우고, 생명의 빛을 전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바로 이 사명을 다시 붙잡아야 합니다. 성령의 생기가 없는 프로그램, 행사, 형식은 사람은 모일지 몰라도 능력은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마른 뼈들이 군대가 되듯 죽은 심령이 살아나고, 교회가 회복되고, 나라가 새로워집니다.
성경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역사로 기록되었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지금 이 동방 끝 한국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나라를 통해 죽은 신앙의 세계를 다시 살리는 영적 에스겔의 군대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케이팝이나 드라마보다 더 큰 하나님의 역사는 성령의 바람이 한국 교회를 통해 온 세계로 불어가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부흥은 정치의 결과가 아니라 성령의 결과입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 이 뼈들 속에 들어가라!” 이 명령은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숨을 내쉬십니다. 그분의 숨결은 단지 공기의 움직임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삶이 이 성령의 숨결로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이 나라에 성령의 바람이 다시 불게 하소서. 마른 뼈가 다시 일어나게 하시고, 죽은 영혼이 살아나게 하시며, 주의 군대가 되게 하소서. 아멘!
38. 안식일의 주인(2)/나균용 목사님 설교요약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유명한 선언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이 말씀은 단순히 “안식일에도 일을 해도 된다”는 허락의 선언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간의 주인, 생명의 주인, 구원의 주인이심을 드러내는 깊은 신앙의 선언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돈이나 땅, 집, 생명에는 주인이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날에도 주인이 있다’, 곧 시간에도 주인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주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안식일이란 무엇인가”, “왜 지켜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왜 안식일의 주인이신가”를 함께 묵상하며, 형식적인 주일 신앙을 넘어서 진정한 안식의 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첫째로,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쉬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놀라운 신앙의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존재한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 존재다.” 이것이 안식일의 출발점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우리의 날들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십니다”라는 신앙의 고백이요, 하나님의 소유권과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주일을 단지 ‘교회 한 번 갔다 오는 날’로 생각합니다. 예배당에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안식일을 지켰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안식일의 본질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날입니다. 이 날은 “나의 시간도, 나의 생명도, 나의 일도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이 고백이 회복되는 날이어야 합니다. 이날,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를 기억하고 그분의 창조하심을 찬양하며 “주님,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안식일은 복을 받는 날이며 거룩하게 되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일 예배를 드릴 때마다 마지막에 축도를 받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모두에게 있을지어다.” 이 축복의 말씀이 곧 안식일의 완성입니다. 구약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수기 6장 24절에 보면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고 그의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이 축복의 말씀을 제사장들의 입술을 통해 선포하게 하셨고 그 말씀을 들은 백성들에게 실제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일 예배는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의무’가 아닙니다. 이날은 하나님께 복을 받는 날, 은혜를 공급받는 날입니다. 예배를 통해 마음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얼굴빛을 경험하고 한 주 동안 승리할 힘을 얻는 날입니다. 이날 은혜 받지 못하면, 한 주간의 영적 전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마다 반드시 복을 받아야 합니다. “주여, 오늘 나에게 은혜와 평강을 부어 주옵소서.” 이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안식일은 구원의 기념일입니다.
구약에서 안식일은 출애굽의 기념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기억하며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신약에서는 이 안식일이 예수님의 부활의 날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토요일이 아니라 일요일, 곧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날을 주일로 지킵니다. 이날은 부활의 기념일이며, 동시에 성령 강림의 기념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중에 반드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우리는 권능을 잃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이 임해야 능력이 생깁니다. 성령이 임해야 예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힘을 잃은 이유는 성령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날이어야 합니다.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심으로 하나님과의 동행이 회복되고 마음에 참된 평강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안식입니다. 육신의 쉼이 아니라, 영혼의 평강, 구원의 감격,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이것이 안식일의 본질입니다.
넷째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복음적 혁명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의 생명까지도 희생시켰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안식일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기 위해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친 인생들에게 쉼을 주시고 억눌린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안식일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노동자와 약자를 보호하는 하나님의 제도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일주일에 하루는 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일꾼들을 착취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정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날은 억눌린 자가 해방되고 마음이 상한 자가 치유되고 하나님 안에서 참된 쉼을 누리는 날입니다. 이제 우리는 안식일을 단순한 ‘날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배는 형식이 아니라 성령과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이 말씀의 ‘영’은 단순히 인간의 영이 아닙니다. 성령은 Sprit, 대문자 S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예배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십니다. 따라서 주일 예배는 성령 충만의 자리, 하나님 임재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는 예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강단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형식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매 주일마다 “주님, 오늘도 저에게 새 힘을 주옵소서!”이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면 우리의 예배는 살아있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처럼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주신 날이며 그 날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그 주님을 우리의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과 동행하는 참된 안식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39. 빛이 있으라/나균용 목사님 설교 요약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성경의 첫 장면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입니다. 아무것도 질서가 없고, 방향도 없고, 생명도 없는 상태. 그런데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집니다. “빛이 있으라.” 이 한마디가 모든 창조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 한 마디로 어둠은 물러가고, 생명의 질서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첫째 날,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빛’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빛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과 지혜와 진리의 근원인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빛이 있으라” 하면 햇빛이나 달빛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태양과 달과 별은 넷째 날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날의 빛은 물리적 광원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영적인 빛이었습니다. 시편 104편 2절은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셨다”고 말합니다. 빛은 하나님의 본질, 그분의 성품, 그분의 임재를 드러내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어둠을 뚫고 빛을 말씀하심으로 무질서한 혼돈에 질서를 주시고 죽음 같은 어둠 속에 생명의 기초를 놓으신 것입니다.
빛이 생기자 세상은 구별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 이 말은 단순히 낮과 밤을 구분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빛은 분별을 가능하게 합니다. 빛이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무엇이 사단의 속삭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의 시작입니다. 지혜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선과 악, 의와 불의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감각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요,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빛이 없으면 사람은 판단력을 잃습니다. 죄를 죄로 보지 못하고 불의한 것을 옳다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의 첫날부터 우리에게 ‘빛’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빛을 잃었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려 했습니다. 그 순간, 그들의 눈은 열렸으나 영적인 눈은 닫혔습니다. 빛을 잃은 인간은 어둠 속을 걷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것은 단순히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빛에서 어둠으로, 생명에서 죽음으로 옮겨간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문명이 발전해도, 그 속은 여전히 어둠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이 바로 그렇습니다. 전기가 넘치고, 정보가 쏟아지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갑니다. 이 어둠의 세상에 하나님은 다시 한 번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4–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존재하셨던 그 빛, 곧 창세기 1장의 “빛이 있으라”의 실체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를 드러내신 분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 11절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님이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요? 어둠 속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빛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창조가 일어납니다. 그의 영혼 속에서 다시 창세기 1장의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혼돈이 물러가고, 빛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그 안에 새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그의 인생 속에 질서와 의미와 방향을 주십니다. 이것이 구원이고 거듭남입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빛의자녀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의 성품이 내 안에서 드러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과 행동 우리의 선택 하나하나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빛을 비추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그것이 바로 빛의 사람의 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둠을 “이 세상 임금”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어둠은 단지 죄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세력, 즉 마귀의 권세입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은 반드시 물러갑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6장 17절은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라고 말씀합니다. 빛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어둠에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오히려 빛의 권세로 어둠을 몰아내는 자가 됩니다. 기도로, 말씀으로, 사랑으로 세상을 밝히는 빛의 군대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도 “빛이 있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전쟁과 폐허 속에서도, 한국 교회는 기도로 일어섰습니다. 마른 뼈 같은 이 땅에 생기가 들어온 것은 정치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빛의 역사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다시 한 번 북한과 중국, 시베리아까지 복음의 빛을 비추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빛을 받아야 합니다.그래야 그 빛으로 어둠의 땅을 비출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빛이 있으라.”이 말씀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내 영혼 속에서 다시 이루어져야 할 말씀입니다. 내 안의 어둠, 죄, 두려움, 미움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빛이 비추어 새 창조가 시작되기를 원하십니다. 이사야 60장 1절의 말씀처럼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라.” 오늘 우리의 가정, 교회, 이 나라 위에 하나님의 빛이 비추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어둠을 몰아내는 빛의 사람,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빛의 백성으로 세워지기를 축원합니다.
40. 이사야서의 하나님/나균용 목사님 설교 요약
이사야서는 구약 전체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가장 풍성하게 나타나는 책입니다. 스가랴서나 시편에도 메시아의 예언이 나오지만 이사야서는 그중에서도 가장 깊고 분명하게 예수님을 예언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구절은 예수님의 탄생을 가장 명확히 예언한 말씀입니다.
또 하나,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예언한 장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오늘날 유대인들은 이사야 53장을 읽기를 꺼린다고 합니다. 그들의 양심이 찔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세 번째로 중요한 부분, 바로 이사야 9장 6–7절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네 가지 이름”으로 소개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한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는 먼저 말합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다”고 말합니다. 정사는 통치권을 뜻합니다. 즉, 세상의 모든 주권과 다스림이 예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입법, 사법, 행정 모든 권세를 주님이 지니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아기가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은 네 가지로 소개됩니다. 기묘한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이 네 가지 이름 속에는 예수님의 본성과 사역 그리고 우리를 향한 구속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모사’는 영어로 Counselor, 곧 조언자, 전략가, 스승을 뜻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모사는 나쁜 의미의 모략꾼이 아니라, 지혜로운 지도자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기묘한 모사”, 즉 놀랍고 신묘막측한 지혜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중국 역사에도 장량, 제갈량 같은 모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전략가로서 왕들을 도와 나라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지혜는 인간의 한계를 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지혜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지혜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시편 1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좋은 스승을 만나고, 선한 모사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스승,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는 복된 길을 걸어갑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완전한 카운슬러이십니다. 그분의 조언은 항상 옳고, 그분의 길은 언제나 선합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해도, 그분의 계획은 완전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기도를 그대로 이루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보기엔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나?” 싶지만 그분의 뜻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크고 깊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 국가의 정치, 인생의 시련, 교회의 고난이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완더풀 카운슬러 기묘한 모사로서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주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길을 가장 완벽하게 인도하십니다.
둘째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단순한 선지자나 인간의 스승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아버지와 하나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분노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를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요 참 인간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 죽음을 통해 구원의 길을 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우리는 낙심하기 쉽지만 하나님은 더 큰 계획을 이루고 계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셋째 이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영원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하시는 아버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 그분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며, 우리를 돌보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담대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 오늘도 나를 붙드소서.”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넷째 이름은 “평강의 왕”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전쟁과 분쟁을 멈추게 하시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필요한 것도 바로 이 평강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니,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세상이 주는 평안은 조건적입니다. 돈이 있으면 평안하고, 건강하면 평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은 상황을 초월한 평강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병중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우리의 마음을 지킵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평강을 잃었습니다.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그러나 평강의 왕을 마음에 모시면 관계가 회복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내면을 다스리시는 평강의 왕이십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네 가지 이름은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을 완벽하게 요약합니다. 기묘한 모사는 우리의 길을 완벽히 인도하시는 지혜의 주님,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권세와 능력의 근원이신 주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생명의 주님, 평강의 왕은 우리 마음과 세상에 평화를 주시는 주님입니다. 이 네 가지 이름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성경 속 인물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이 혼란스럽고 세상이 어지러워도 예수님이 우리의 모사로, 하나님으로, 아버지로, 평강의 왕으로 계시기에 우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도 그분의 이름을 찬양합시다. 그분 안에서 지혜와 능력과 평강이 넘치게 되기를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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