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배우사 - 김송미 (goldpapa)
스타 제 1호 - 이 월화
이땅에 영화문명이 처음으로 상륙한 것은 1905년 영미연초회사의 창고
에서 활동사진이라는 짤막한 단편이 상영된 것을 훈시로 삼고 있지만 임
성구와 김 도산의 "혁신단"이라는 연쇄극 (키노드라마)이 <의리적 구투>
라는 연쇄극에서 활동사진을 시도하였던 것을 한국 영화사의 원류로 보는
설도 있다. 그러나 1923년 윤백남에 의한 최초의 활동사진 <월하의 맹
세>를 국산 영화 제 1호로 꼽는 것이 정설이다. 이때의 영화사는 영화의
전사로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영화배우란 직업이 정립되지 않았으며 신파극 남배
우들이 영화의 배우노릇을 대신했다. 연쇄극 시대에는 이경환, 윤순복,
도원환, 최일, 강문형, 이응수, 최여환등은 여역을 맡았다. 당시만 해도
여자배우는 어림도 없었다.
그러나 마호정이란 여인이 여배우로 등장했다. 마호정은 개성 출신이며
구왕실 나인 출신으로 걸걸한 성격을 지닌 여걸풍의 여배우였다.
당시의 작품내용은 거의가 학대받은 여인과 바람난 남편과의 갈등 등을
다룬 신파조 가정극이었다. 마호정은 개화기의 여성상을 상징하며 주로
소실과 계모등 악역을 맡았다고 한다.
1923년 개봉된 윤백남의 <월하의 맹세>는 저축 장려를 주제로한 계몽극
이었는데 여기서 이월화라는 여배우가 탄생된다. 이월화는 미모와 육체
적 매력을 지닌 진짜 여배우로서 초창기 국산 영화에서 장안의 갈채와 인
기를 담뿍 받은, 그야말로 본격 스타 제 1호라고 영화사에는 기록되고 있
다.
그러나 이 당시에 여역을 했던 신파배우나 김조성, 소리배우인 심연옥,
최병룡등 변사들도 대중들로부터 갈채를 받은 스타들이었으며 이월화와
같이 스타담에 오른 이채전, 1925년 이경손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개척
자>에서 데뷔한 여배우 김정숙, <농중조>에서 데뷔한 복혜숙, 나운규의
<아리랑>(1926)에서 갈채를 받은 신일선등이 당시의 여배우로서 갈채를
받은 신일선등이 당시의 여배우로서 대중들의 하이라이트를 받은 스타들
이었다.
남자배우로는 이경손, 주삼손, 안종화, 윤봉춘, 남궁운, 나운규, 이금
룡등이 1920년대부터 명성을 떨쳤다
영웅적 갈채받은 나운규 -
나운규는 감독으로서 <아리랑>, <들쥐> (1927), <잘 있거라> (1927)등
으로 한국영화사에 남는 명작을 내놓기도 했지만, 연기자로서도 천재적인
재질을 발휘해 당시 대중의 영웅적인 갈채와 인기를 누렸다. 나운규와
같은 스타는 미모나 육체적인 조건에서가 아니라 명배우로서의 평판을 얻
은, 진정한 의미의 스타였던 것이다.
나운규는 민족의 수난과 나라 잃은 절망을 드러마의 밑바닥에 깐 저항
적인 영화인이었다. 그가 첫 출연한 것은 세종대왕의 네째 아들인 안평
대군의 총희 운영을다룬 시대극 <운영전>이었는데, 이때 단역인 교군에
출연함으로써 영화에 발을 디딘다. <운영전>에서 발탁된 신인 여배우 김
우연은 윤백남 감독과의 러브로맨스로 장안에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무성영화 초기에 등장한 여배우 이채전 역시 무성 영화시대를 장식한
인기있는 별이었다. 이채전은 상당한 인텔리 여성으로 유부녀였다. 스
타중의 스타는 이 월화 (본명 이정숙)였는데, 예명은 그녀를 스카웃한 윤
백남 감독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박복한 가정에서 자란 이월화는 소녀시절 윤백남의 연극무대에 서게 된
것을 계기로 영화스타로서 그야말로 탑의 자리에 올랐다. 수많은 남성과
의 연분과 스캔들 소문도 자자했다. 그러나 그녀는 26세때 일본으로 가
는 연락선에서 투신자살, 현해탄의 물속으로 사라져 장안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김정숙은 윤백남의 <심청전>에서 데뷔한 이후 <장한몽> (1926)에서 명
성을 얻어 한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끝내는 마약중독자가 되고 카페
여급으로 전락, 종적없는 죽음으로 끝난 비운의 스타였다.
1920년대에 등장한 복혜숙 (농중조)은 <세동무>등에서 스타의 자리를
굳히고 1970년대까지 장수하여 한국영화의 산 증인이 되었고, '눈물의 여
왕'이란 애칭을 받은 전옥은 1927년의 나운규 작품 <잘 있거라>에서 데뷔
했다. 이 작품에는 뒤에 대스타가 된 이금룡, 김연실 (월북)등 대배우가
등장한다.
이밖에 뒤에 연출가로 전신한 이경손, 안종화, 윤봉춘, 주삼손등 국산
영화 초창기의 개척자들인 대원로들 (모두 작고)이 감독으로뿐 아니라 연
기자로서 활약하였다. 이경손 감독은 얼마뒤에 태국으로 이민갔고, 신일
선은 아직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0대 이후 명성이 높았
던 이금룡은 8.15 해방후까지 생존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도 나운규의 활동은 눈부셨다. 이운학, 주인규,
이금룡, 서월영, 윤봉춘, 심영, 노강, 나웅, 함춘아등 남배우와 신일선,
김소영, 김신재, 김연실, 복혜숙, 김선영, 문예봉, 노재신, 안금향, 하소
양, 김보신, 김영란, 유신방, 서화정, 조경희등이 무성영화시대에 배출된
여자스타들이다. 이들은 이월화, 이채전, 김정숙등에 이은 무성영화시대
(1934년까지)에서 은막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이중에서 특히 명성을 떨친 스타로는 나운규, 윤봉춘, 이금룡과 김소
영, 문예봉 (월북),김연실(월북), 복혜숙, 김신재, 신일선등으로 꼽히고
있다. 문예봉과 김연실은 이규환 감독의 명작 <임자없는 나룻배>에 등장
했다.
1934년으로 무성영화시대는 막을 내리고 발성기로 접어든다.
일제수난기를 영화로 산 배우들 -
<춘향전> (이 명우 감독, 1935)은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였다.
심영은 연극 출신 배우였으나 이규환 감독의 <바다여 말하라> (1935)를
비롯해 많은 영화에 출연하였다. (6.25때 월북) 35년 이후 김일해, 김성
춘 (후에 녹음기사), 전택이 (1935년 <강건너 마을>), 조택원 (무용가),
박재행, 이원용, 독은기등 남배우들이 활동했고, 나운규, 윤봉춘등은 계
속 명성을 떨친 스타였다. 여자배우로는 김연실, 문예봉, 현방란, 복혜
숙, 노재신, 김소영, 현순미, 김신재등의 이름이 드높았다.
1939년작 최인규 감독의 <무정> (이광수 원작)에는 지금까지도 연기활
동을 계속하고 있는 한은진이 출연했고, 연극배우로 이름높던 환철 (월
북, 6.25때 죽음)이 이명우 감독의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을고>
(1939)에 등장한다. 역시 이 시대의 탑스타로는 나운규, 이금룡, 그리고
문예봉, 김연실, 김소영, 김신재등을 꼽을 수 있다.
1940년대부터 1944년까지를 한국영화사의 수난기로 표현한다. 일제 식
민통치가 극심하여 영화도 완전히 일제의 강압적인 문화통제하에 들어가
게된 시기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영화는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이금룡, 최운봉, 김일해, 전창근, 전택이, 서월영등 남배우들의 활동과
여배우로는 문예봉, 김신재, 전옥, 유계선 (전창근 부인), 복혜숙등의 활
약이 돋보였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일본과의 합작영화, 일본어 영화등
이 제작되던 시기였다. 이로써 8.15 해방까지 국산영화는 막을 내리고
1945년부터 본격적인 국산영화사가 시작된다.
좌.우 분열 속 최은희의 등장 -
8.15 광복 후 한국 영화의 새로운 출발에 기폭제 역할을 한 영화는
1946년 최인규 감독에 의하여 공개된 <자유만세>였다. 이 영화에서 황려
희라는 신인 여자 스타가 탄생되었다. 남배우로서는 전창근 감독의 <해방
된 내 고향> (1947)으로 김승호가 등장한다. 김승호는 1960년대까지 노
련한 연기력으로 탑 스타의 자리에 군림한 대배우였다.
1947년 <새로운 맹세> (1947)에 최은희가 데뷔하는데, 그녀는 그후 신
상옥 감독과 결혼, 1970년대까지 스타의 왕좌를 지켰던 탑 스타의 한사람
이다. 해빙기에 등장한 새 얼굴로는 앞서 언급한 김승호, 최은희를 비롯
하여 황해 (성벽을 뚫고, 1949), 주선태 (청춘행로), 윤일봉 (푸른언덕),
최남현 (돌아온 어머니), 김웅 (사랑의 교실), 남해연 (사랑의 교실), 이
방원 (바다의 정열), 이향 (심판자)등이다. 윤일봉.김웅.남해연등은 주로
멜러드라마에, 황해.이향등은 액션드라마에, 최남현.주선태등은 중후한
연기파로 조연으로 활약한다. 여배우로는 한림 (모란등기), 황정순 (여
성일기), 조미령 (갈매기), 최지애 (국민투표), 유계선 (민족의 새벽),
이영애 (검사와 여선생), 고춘희 (유관순), 주증녀 (조극의 어머니)등에
서 각광을 받았다.
문예봉, 김연실등 해방전부터 활동하던 일부 스타들은 8.15 해방 직후
1950년까지는 계속 연기자의 자리를 지켰지만, 영화계도 좌우로 갈라지고
6.25를 분기점으로 황철, 심영, 문예봉, 김연실등은 북으로 넘어가고 김
소영등은 미국으로 건너가는 등 스타판도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중 대중들의 인기 갈채를 얻은 스타로는 조미령, 최지애, 주증녀등이
있고 50년대까지 주로 애정멜로드라마등에서 대중들의 매력을 끌어 당겼
다. 김신재, 한은진, 황정순등은 조연 역할로서 연기를 과시했다.
청순한 이미지로 나타난 조미령 -
스타란 어느 의미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훌륭한 연출가에 의해 작품
면에서 성공했을 때, 특히 흥행에 성공했을 때 갈채도 실체화되는 것이
다. 또한 매스미디어의 역할도 대단한 힘이다. 해방후 신문.잡지등의
발간이 홍수를 이루고 특히 대중 상업지가 나타남으로써 스타에 관한 가
십과 흥미거리 기사들이 쏟아지게 되었다. 스타를 만드는데 큰 구실을
하는 것이 저널리즘이란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때로는 사회 풍속의
모럴에 파문을 던지는 스캔들 등은 스타의 인기를 부채질하는데 한몫을
하는 경우가 있다.
대체로 배우나 스타에 관한 악평은 역사적으로 뿌리 깊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스타에 대한 그러한 비난은 그 예술의 본성과 관련없는 이유
에서 나타난 경우들이 많다. 옛날에는 교회로부터 파문당하기도 하고 봉
건시대에는 천민으로 따돌림을 당했지만, 대중예술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대중들로부터 가장 사랑과 동경을 받는 인기의 우상으로 존재하게 되었
다.
스타는 명성과 함께 돈도 얻는다. 어쩌면 스타에 대한 대중들의 동경
은 육체 하나로 돈과 명성을 얻을 수 있다는 현대 사회의 대중적 욕망에
근사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지만, 대중들의 꿈의 분
신으로서 스타에 대한 선망과 대상적 만족감이 보다 큰것이라 생각된다.
다시 스타들의 얘기로 되돌아가 보자.
조미령은 미모와 청순한 이미지로 한때 스타계를 주름잡았다. 어쩌면
조미령 같은 스타일은 현대의 스타에 가장 아울리는 존재였을지 모른다.
그의 인기는 <시집가는 날> (이병일 감독, 1956)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스타가 스타덤에 오르는데는 유능한 프로듀서였던 남편 이철혁의 후원
이 컸다.
최은희가 각광을 받게 된 것은 윤용규 감독의 명작 <마음의 고향>에서
청순한 이미지로 돋보인데서 부터이다. 당시 최은희를 명우 문예봉을 이
을 스타라고 말한 사람들도 있었다.
1949년 제작된 한영모 감독의 <성벽을 뚫고서>에서는 이림길이라는 남
자 배우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
최지애는 1949년 최인규 감독의 명작<파시>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월북.납북된 배우들 -
6.25의 발발로 영화사는 동란기로 접어든다. 6.25는 민족분단을 고정
화 시킨 비극이었던 동시에 영화계를 남북으로 양분하였다.
좋은 배우들이 월북하거나 납북되기도 하였다. 월북한 명배우들은 북
한의 영화계에서 최고 인민 배우로 활동했다.
동란기 무렵 등장한 스타들도 적지 않다. 이빈화, 이민, 염매리, 노경
희, 최현, 박암, 이택균, 이민자, 허장강, 윤인자, 문정숙등이 그들이다.
염매리는 1950년 강춘 감독의 <화랑도>에서, 노경희는 이강천 감독의
명작 <파아골>에서 각각 등장한다. 이빈화는 1952년 윤봉춘 감독의 <성
불사>에, 문정숙과 이민자는 신상옥 감독의 <악야> (1952)에서 각광을 바
았고 그후 문정숙.이민자.이빈화등은 오랫동안 연기생활을 지속했다.
1954년부터 한국영화는 급속한 성장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1955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은 한국영화 부흥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작품이었
다. 이영화에서 이민과 조미령이 컴비가 되어 춘향전의 주가를 다시 한
번 올렸다. 이민은 현대풍의 감각을 지닌 면모로써 미남 배우로 여성팬
들을 사로잡았다.
김진규가 등장한 것도 이무렵이다.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에서 노경
희와 함께 열연한 김진규는 미남적인 마스크와 체취로 그후 오랫동안 남
성스타의 탑을 지켰다.
허장강, 이예춘, 주선태, 박암등은 주로 좋은 조연배우로서, 또 연기파
배우로 성장하였다. 이금룡은 50년대초에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명성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한때 '금룡상'까지 재정되기도 했다.
1960-70년대 청춘스타로 화려한 인기를 누렸던 노재신의 딸 엄앵란이
데뷔한 것은 1956년 전창근 감독의 <단종애사>에서 부터이다.
1956년, 한국영화흥행사에 기록을 남긴 <자유부인> (한형모 감독)에서
신인 김정림이 자유부인으로 등장했으나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애련
한 이미지로 등장한 이경희는 1956년 <장화홍련전>에서, 그리고 최무룡이
1956년 유현목 감독의 <유전의 애수>에 등장, <오발탄>에 이르기까지 남
자 스타의 자리는 급속도로 올라가기 사작했다.
육체파 배우로 이름지어졌던 도금봉은 1957년 조긍하 감독의 황진이로
데뷔했고, 윤인자도 관록을 자랑했다. <아리랑>에서는 장동휘가 중후한
개성파로 또 액션스타로 등장했고, 김동원은 원래 신극 배우였으나 연극
계가 부진하자 영화계에서 중후한 연기와 주연급 배역으로 한때 대단한
활약을 했다. 김삼화가 나타난 것도 이 무렵이었으며 박노식은 개성적인
연기파로 액션스타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빅스타 김지미 데뷔와 황금시절 -
1957년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에 신인 김지미가 혜성과 같이 나타났
다. 김지미는 빼어난 미모로 이내 스타덤에 올랐으며, 50년대 이후 스타
의 여왕자리를 구축하기까지 탄탄대로를 걸었다.
1958년부터 국산영화계는 한층 산업적 뿌리를 내리고 대중들간에 시장
을 확대해갔다. 이민, 조미령, 주증녀, 김동원, 김진규, 최무룡등이 은
막을 주름잡았고, 양미희, 최지희 (<아름다운 악녀> 1958), 김혜정 <봄은
다시오려나), 문혜란 (<수정탑>, 1958), 방수일 (<산넘어 바다건너>,
1958), 서애자등이 나타난다.
이때부터 섹시한 육체파 배우들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기 시작하여 스타
도 연기파보다는 육체적 조건이 더욱 관객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
러는 한편 김희갑, 구봉서, 곽규석 (후라이보이), 양석천, 양훈등이 코미
디 스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황금기였다.
이시대에는 스타들이 거의 흥행을 좌우하다시피했다. 스타시스템의 전성
기라고 해도 좋은 것이다. 조미령은 차츰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대신 최
은희, 김지미, 주증녀, 문정숙, 김진규, 김동원, 최무룡 시대가왔다.
1960년 이성구 감독의 <젊은 표정>에 신성일이 잠시 출연하기도 했으나
그의 공식적인 데뷔작은 <아낌없이 주련다> (유현목, 1962)라고 할만다.
신상옥 감독과 컴비인 최은희, 홍성기 감독과의 컴비인 김지미가 스타
의 왕좌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던 때도 이무렵이었다. 육체파 배우 김혜
정이 잠시 반짝했으나 결혼을 하게되면서 은퇴하게 되었고, 전계현도 가
정을 택하게 되었다. 이대엽이 개성적인 역할로 경쾌하게 등장했는가하
면, <박서방>, <마부>등에서 김승호는 노련한 연기파로, 허장강도 개성있
는 명역을 해내고 있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등에서 최은희는 절정
을 이루기 시작했으며, 김지미는 계속 상승세를 유지했다. 신영균이 <과
부>라는 영화로 주목을 받기 시작, <연산군>등에서 남성적인 연기파로 스
타덤에 뛰어올랐고 김진규도 확고하게 전성기를 누렸다. 추석양, 이예
춘, 고설봉, 최남현, 박암, 주선태등은 연기파로 명맥을 지켜갔다. 안성
기, 전영선, 이영옥등은 아역시절부터 깜찍한 연기로 명아역의 소문이 높
았다.
남궁원이라는 남성미 넘치는 스타가 등장한 것도 이때. 태현실과 최난
경은 이형표 감독의 <아름다운 수의> (1962)에서 데뷔, 최난경은 얼마 후
은퇴했으나, 태현실은 꾸준히 활동했고 70년대 이후에는 TV계로 옮겨 지
금까지도 활동중이다.
신성일, 엄앵란 컴비의 활약 -
엄앵란은 60년대부터 급속도로 성장, 학사배우라는 애칭과 함께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60년대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이른바 청춘영화 시대에
신성일과 컴비로 한세상을 화려하게 주름잡게 된다.
엄앵란과 신성일은 <가정교사> (김기덕 감독, 1963)에서 결정적으로 스
타덤에 오르게 된다.
선우용녀가 이무렵 나타나는데 이빈화, 김혜정과 함께 분위기 있는 여
배우로 인기가 있었다. 최지희는 독특한 현대적 마스크로 관심을 끌었
고, 박노식, 이대엽등이 성격적 매력으로 주가가 높았다.
스타의 인기판도가 조금은 달라지기도 했으나 김지미, 최은희, 신영균,
신성일, 김진규등의 주역감들의 자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신성일과 엄앵
란은 <맨발의 청춘> (김기덕 감독, 1964)에서 결정적었다.
남석훈, 최성호, 강민호등의 액션스타들이 액션영화의 유행과 함께 화
려했다. 그들의 보스격은 대체로 장동휘, 허장강등이 맡았고, 독고성,
이해룡등과 함께 황해, 박노식등의 활약이 돋보였다. 이순재, 김성옥등
연극출신 남배우들이 가세하기 시작했고, 트위스트 김이라는 개성파 배우
가 나타나게된 것도 60년대 중반이다.
1965년 <란의 비가> (정진우 감독)에서 고은아가 등장하게 되지만, 결
정적으로 스타덤에 오르게된 작품은 김수용 감독의 <갯마을>이었다.
문희.남정임.윤정희 경쟁 -
60년대 후반 문희, 윤정희, 남정임등 세 신인 스타가 혜성과 같이 나타
났다. 문희는 <초우>에서, 남정임은 <유정> (김수용 감독)에서 돋보였
다.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에 이르기까지 문희, 남정임, 윤정희등의 탑
스타들이 자리를 걸고 흥행에서 대결하는 양상을 보임으로써 스타시스템
에 의한 제작이 성행했다. 여기에 <갯마을>에서 스타덤에 오른 고은아가
가세했다. 신성일은 70년대 남성스타로서 군계일학이었다. 이어 문희와
남정임이 결혼으로 은퇴하게 되고 70년 후반에 윤정희마저 결혼, 파리로
옮겨 갔다. 김지미는 70년대 후반부터 활동이 주춤했으나 여전히 빅스타
의 자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70년대 후반부터 영화산업은 차츰 사양의 조짐을 나타나게
되었다. 이시기에 홍세미, 김창숙, 안인숙등 탤런트 출신의 신성이 떠올
랐다. 70년대부터 TV의 보급이 급속히 전파되고 TV시대가 열리게 되면서
영화스타의 인기에 대항하여 탤런트의 시대가 서서히 열리게 된 것이다.
기하급수로 늘어나 TV세트, 더우기 칼라시대에 이르러서는 TV드라마의 전
성기가 이루어짐에 따라 영화스타들도 TV로 이적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황정순, 김희갑, 구봉서, 이순재, 고은아, 태현실, 김창숙, 안인숙, 김희
준, 선우용녀등이 탤런트로 인기를 높여가는 한편 TV와 스크린을 왕래하
는 스타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신성일, 김지미, 남궁원, 신영균들은
여전히 스크린의 스타로 남았다.
80년대를 주름잡을 스타들 -
이러는 동안에 새로운 별들이 속속 나타나게 되었다.
김진규, 최무룡, 신영균등은 연령 때문에 "뷰파트 (미남주역)"에서 물러
나게 되고, 신성일, 신영일, 김희라, 이대근, 이덕화, 박근형, 최불암,
하명중, 이영하, 윤양하등과 임예진, 장미희, 유지인, 윤미라, 김자옥,
정윤희등이 80년대의 막을 준비중이다.
특히 장미희, 유지인, 정윤희는 80년대 초반까지 여자스타의 정상을 놓
고 치열한 경합을 보이고 서로가 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라이벌들이었다.
이영옥, 전영선, 안성기, 이승현등 왕년의 명아역들이 성장하여 스크린
에 성숙한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 것도 80년대부터이다. 80년대 후반부터
특히 각광을 받은 것은 안성기, 이영하, 하명중, 이덕화등이었고 여자스
타로는 장미희, 이보희, 나영희, 안소영등이었는데 안소영은 이른바 섹시
한 육체적 조건으로 주가를 높였다.
최은희가 납북되고 김지미는 사업가로, 윤정희는 음악가의 아내로, 장
미희는 미국으로, 유지인도 가정으로 가고 그밖에 많은 스타들이 TV황금
시대에 편승, 스크린을 외면하게 되는 등 스타의 판도도 눈에 띄게 달라
졌다.
영화산업은 해가 갈수록 불황의 늪에 빠져갔으며 흥청거리던 충무로 거
리도 경기가 시들했다. 프로듀서들은 옛날처럼 열정으로 새별을 찾는 일
이 한하게 되었고, 대중들도 그 옛날과 같이 스타들에 대한 선망과 동경
심을 조금씩 잃어갔다.
또한 스타들의 캐스팅을 보고 돈을 걸던 지방흥행사들의 투기적인 흥행
방식도 차츰 가셔지고 스타시스템은 쇠퇴하기에 이르렀다.
신영균, 남궁원 등은 사업가로 전신하고 이대엽, 최무룡등은 국회의원
으로 들어갔다. 그렇지만 여전히 스크린을 지켜가는 스타들도 많았다.
연령 때문에 부득이 바이플레이어로 물러서기도 했지만, 평생 스크린을
지킨 배우들도 많다.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강수연, 안성기 시대가 열린다. 강수연은
<씨받이>로 87년도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탔는데 실로 한국영
화 70년사의 쾌거였다. 이어 신인 신혜수가 88년 몬트로올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타게 됨으로써 한국의 스타들의 국제화시대가 열리게 되었
다.
이혜영, 박중훈, 김세준, 전세영등 신인들이 등장하게 되지만 안성기,
강수연이 역시 90년대의 주역을 맡게 될 탑스타란데는 이론이 없다.
영화제작의 문이 열리게 되고 개방, 국제화시대에 새로운 별들이 많이 나
타나게될 전망도 밝다.
에필로그 : 스타들에 가리운 '무명연기자'들을 위해 -
그동안 찬란했던 별들도 많이 사라졌다.
복혜숙, 윤봉춘 등 대원로들과 김승호, 허장강등 명연기자들, 그리고 노
강등 영화 70년사를 중언할 만한 연기자들도 차츰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
고 윤인자, 도금봉, 문정숙도 노년기에 들어섰다.
스타는 인기를 먹고 사는직업이란 말이 있듯이 인기에 따라 생성되고
소멸하는 습성을 강하게 타고난다.
70년 영화사를 수놓은 수많은 별들은 세상의 별천에 따라 마치 주마등
마냥 흘러가고 돌아갔다. 이제 스타라는 말은 영3화의 전유물이 아니 세
상으로 바뀌어, 농구선수, 야구선수를 비롯하여 직장과 주변에 인기있는
소영웅들도 요즘은 스타라고 불리운다. 그만큼 스타에 대한 신비감이 없
어지고 보편화됐다는 것이다.
현대는 보통사람의 시대라고 말한다. 대중 홍보 수단이 발달됨에 따라
스타는 자신의 명성과 인기를 관리하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순간적인
실수나 스캔들은 인기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사실인즉 한국 영화
70년 동안 스타들의 행적과 가지가지 신변잡화들을 뒤져만 보아도 스타들
이 자신의 인기를 관리하고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스타는 연전히 스크린의 주역들이고 영화의 꽃이다.
배우 없는 무대가 있을 수 없듯이 스타 없는 영화는 존재할 수 없다.
스타들은 여전히 대중의 우상이며 꿈의 분신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화려하게 분장을 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대중지에서 칭송을
받는 스타들 이외에도 작은 단역이나, 또는 미움을 사는 악역이거나, 더
라는 스턴트맨과 같이 동작만 하는 스타들까지도 모두가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지금도 충무로?타㠿【 평생 단역만 해온 연기자
들을 본다. 그들은 스크린의 그늘에서 살아온 무명초와 같은 연기자들로
정말 귀중한 존재이다.
끝으로 여기에 언급되지 못 되거나 누락된 분들에게는 필자의 무식과 태
만 때문이므로 용서를 빈다.
카페 게시글
은막의 여신들
한국 영화 배우사 ( 김송미 저 ) ( 펌 ) - 좋아하는 스타의 이름이 거론 됐는지 확인해 보세요.
명상그림
추천 0
조회 268
03.10.07 04:01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