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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
대보름의 의미
율력서(律曆書)에서의 정월(正月)은 천지인(天地人)이 합일(合一)하고 사람을 받들어 일을 이루는 날이라고 하였다. 정월은 사람과 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나로 화합하고, 한 해 동안 행할 일을 계획하고 기원하며 그 가능성을 점쳐보는 달인 것이다.
음력으로 정월 15일은 새해 들어 첫 번째 맞는 보름으로 상원(上元) 또는 대보름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도교에서 1월 15일은 상원(上元), 7월 15일은 중원(中元), 12월 15일은 하원(下元)으로 삼아왔으며, 그중에서 상원이 가장 큰 명절에 속했다.
대보름의 환경
대보름을 전후하여 우수가 들어있다. 우수는 언 땅이 녹아 물을 보낸다는 의미가 있고, 눈이 녹아 물이 된다는 뜻도 있다. 그렇다면 날씨가 풀리고 활동하기에 무리가 없다는 말이 된다. 반대로 생각하면 우수에 봄비가 올 수도 있으니 대보름이라 하여도 둥근 달을 볼 수 없는 날이 가끔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이날은 달이 가득 찬 날이라 하여 재앙과 액운을 막는 기운이 있어 제일(祭日)로 삼았다. 설날을 맞아 서로의 복을 빌어주고 공동 잔치의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며, 신년(新年)에 대한 두려움과 근심걱정을 떨치는 날이다.
이것은 설날부터 대보름까지 마을공동의 신앙숭배 대상에 대한 대동의례와 대동회의 그리고 대동놀이가 집중된 걸립(乞粒)에서 벗어나, 한해의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때를 알리는 의미다. 대보름이 되면 새해 농사가 풍년들기를 기원하는 달불을 놓기도 한다. 이때 보름달을 보고 절하면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믿었고, 달불에 액을 태워 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예전사람들은 달에 월백(月魄)이라는 정령(精靈)이 있어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었기에 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삼국유사에서도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는 해와 달의 정령(精靈)인데,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가니 신라 천지는 광명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이들 일월신(日月神)을 모셔오기 위하여 관리(官吏)를 보내는 등 특별히 노력하였다고 한다.
또 달빛을 보고 1년 농사를 점치기도 하였는데, 달빛이 진하고 뚜렷하면 풍년이 들며 흐리고 어두우면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달 표면의 무늬를 보면 마치 월계수와 토끼가 있는 것처럼 보여 달에는 토끼가 산다고 믿기도 하였다. 추석 때 즐겨 행하는 ‘강강수월래’의 가사 속에는 달에 계수나무가 있다는 구절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예전부터 그렇게 믿어온 것으로 보인다.
대보름의 유래
전통사회의 농가에서는 정월을 노달기 즉 농한기라 하였다. 따라서 한 해 농사철 중 가장 한가한 때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다양한 제의(祭儀)와 점괘(占卦), 놀이 등으로 새 기운을 얻어 농사준비를 하였던 시기다. 이런 대보름날의 풍속은 농사를 기본으로 하는 고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였으며, 복을 비는 기복신앙에서 유래하였다. 이때의 세시풍속은 1년 전체 풍속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조선 후기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대보름에 섣달그믐과 같이 수세(守歲)하는 풍습이 있다고 하였으며, 중국에서는 대보름을 8대 축일(祝日)로 여기고, 일본에서도 소정월(小正月)이라 하여 한 해의 시작으로 보았었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는 대보름날이 본격적으로 행동하는 한 해가 시작되는 것으로 여기고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우리 기록에 나타난 대보름을 살펴보면 신라 제21대 비처왕(毗處王, 일명=炤知王) 즉위 10년 무진(4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처왕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였을 때 갑자기 까마귀와 쥐가 나타나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 가는 곳을 찾아보라’ 하였다.
왕이 기사(騎士)에게 뒤쫓게 하였으나 남쪽 피촌(避村)에 이르러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까마귀 놓치고 헤맬 때, 한 노인이 못 가운데서 나와 글을 올리는데 겉봉에 ‘이를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씌어 있었다. 왕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야 한 사람만 죽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자,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두 사람이란 평민을 의미하며 한 사람이란 왕이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고 글을 읽어보니 ‘금갑을 쏘라’고 하였기에, 급히 궁에 돌아가 금갑을 쏘았다. 마침 내전의 금갑 뒤에서는 분향수도(焚香修道)중인 중과 궁주(宮主) 비빈(妃嬪)이 간통하던 중에 둘이 죽고 말았다. 항간에서는 이 연못을 글이 나왔다는 뜻의 서출지(書出池)라 부르고, 이 일을 두고 슬퍼하며 근심하고 금기(禁忌)한다고 하여 달도(怛忉)라고 하였다.
이 후로 매년 정월 첫 돼지날(上亥日)과 첫 쥐날(上子日), 첫 말날(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삼가 조심하라는 정초 12지(十二支日)과 연관이 있으며, 보름에는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으로 제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1 ‘신라 본기’에는 박혁거세의 즉위일이 4월 병진일(丙辰日)이라고도 하고 또 정월 보름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나오는 정월 보름의 즉위기념행사는 오늘날에 행하는 정월 대보름의 동제와 연계시킬 수 있는 것이다.
대보름 풍속
설날부터 이어져온 정월기분이 대보름을 정점으로 변환점을 맞는다. 따라서 대보름날의 전날인 음력 1월 14일은 서운하여 그냥 보낼 수 없는 연유로 작은 보름이라는 이름을 부쳐주었다. 또 어촌에서는 음력 정월 16일을 귀신날이라 하여 배를 띄우지 않았으니, 대보름의 명절휴식이 16일까지 이어지기도 하였다.
작은 보름에는 수숫대의 껍질과 속대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잘라서 물감으로 색을 입혔다. 그리고 벼나 보리, 밀, 옥수수, 콩. 목화 등의 이삭 모양으로 만들어서 짚단에 꽂아 긴 장대 끝에 묶었다. 이 장대는 집 옆에 세우거나 마구간 앞 거름더미에 꽂아 풍년을 기원하였다. 이 모양은 낟가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해의 곡식더미가 이 낟가리처럼 풍성하게 수확되기를 바라는 행사였다. 이 행사는 매우 오래전부터 전해왔으며, 직접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궁중에서는 내농작(內農作)이라 하여 별도의 행사로 채택하였다.
정월 15일인 대보름이 되면 집집마다 약밥을 만들어 먹었으며, 저녁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달맞이를 하였다. 또 밤에는 들판에 나가 그해 곡식들의 새싹이 잘 자라고 전답의 해충이 소멸되기 바라면서 쥐불을 놓았다. 아이들은 연날리기, 바람개비돌리기, 실싸움, 돈치기 등을 즐겼다. 또 어른들은 다리밟기, 편싸움, 횃불싸움, 줄다리기, 동채싸움, 놋다리밟기 등을 했다.
그런가하면 이날은 흰쌀밥을 하지 않고 오곡밥을 하였으며, 각종 나물을 무쳐먹었다. 특히 다른 성받이의 세 집 밥을 먹어야 그 해의 운이 좋다고 하여, 서로 다른 집의 오곡밥을 나누어 먹으며 우의를 다졌다. 따라서 이날은 하루 세 번 먹던 밥을 특별히 아홉 번 먹어야 좋다고 하여 밥 얻으러 다니는 총각들이 줄을 이었다.
이와 같이 흥겨운 대보름날 밤에는 온 마을이, 때로는 마을과 마을이 대결하는 경기를 벌이기도 하였다. 또 개인적으로는 한 해의 액(厄)을 없애는 액막이를 하였으며, 연날리기와 같이 개인이 즐길 수 있는 놀이로 개인 또는 단체가 즐기기도 하였다.
이런 행사는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마을 공동의식 함양과 무병장수 그리고 풍농을 기원하는 내용은 대체로 같다. 주요행사로는 동제, 줄다리기, 지신밟기, 부럼깨기, 더위팔기, 귀밝이술 마시기 등이 있다. 귀밝이술은 이명주, 명이주, 치롱주, 총이주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낮에는 연날리기, 윷놀이, 널뛰기 등을 하였고, 밤에는 망월(望月)이라 하여 횃불을 태우며 달맞이를 하였다. 옛 사람들은 보름달이 떠오르는 순간 절을 하며 그 해의 풍년과 자기의 소원을 빌었다.
이밖에도 ‘대튀기’는 대나무를 태우면 뻥뻥 터지는 소리에 놀란 잡귀가 물러간다고 하는 것이며, 사내기짓기는 대나무에 새끼를 매달고 끌고 다니면서 사내기짓자고 외치는 것이며, 제웅치기, 디딜방아세우기, 동토맥이 등도 있었다.
제웅치기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홍수막이라는 액막이 고사를 한 뒤, ‘제웅’ 혹은 처용(處容)이라 부르는 짚으로 만든 인형을 내 팽개친다. 재웅의 뱃속에는 삼재 든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적은 종이와 노잣돈인 동전 따위를 넣은 것으로, 고사 대신 이것으로 액막이를 하기도 하였다. 자신의 액(厄)을 제웅에 실어 버림으로써 방액(防厄) 도는 송액(送厄)을 하는 것이다.
사람의 나이에 따라 운명을 맡은 9개의 별을 직성(直星)이라 하는데, 제웅직성(處容直星)을 비롯하여 토직성(土直星), 수직성(水直星), 금직성(金直星), 화직성(火直星), 목직성(木直星), 일직성(日直星), 월직성(月直星), 계도직성(計都直星)으로 구분한다. 이들은 9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오고, 제웅직성 일명 나후직성(羅睺直星)은 10세의 남자 또는 11세의 여자아이부터 들게 된다고 한다.
대보름의 민속놀이
대보름은 유명한 명절로 오래 전부터 이어져온 풍속이 많고, 각 지역별로 조금씩 변화된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전날은 작은 보름이라 하여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하는 등 분주한 하루를 보낸다. 이때 일손을 덜기 위하여 밤잠을 자지 않는 풍습이 있는데, 간혹 잠든 사람의 눈썹에 쌀가루나 밀가루를 발라 놓은 것은 섣달 그믐날밤과 같은 이치다.
온갖 곡식과 채소로 음식을 차려 맛있게 먹는 것은 물론이지만, 먹기 전에 조상께 제사지내고 성주신, 조왕신, 삼신, 용단지 등의 주요 가신(家神)에게 먼저 떠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음은 많은 지역에서 전하는 풍습에 대하여 알아본다.
농점(農占)
음력 정월 14일 저녁에 보리 풍년을 기원하는데 이를 보리기원풍(麥祈風)이라고 한다. 각 가정에서 수수깡을 잘라 보리모양을 만든 뒤, 거름 속에 꽂아두었다가 대보름날 아침에 불사른다. 이때 나온 재를 모았다가 봄보리 갈 때 뿌리면 보리농사가 잘 된다고 믿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2월 9일 아침에 걷어냈는데 이렇게 하면 곡식이 많이 열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또 낟가릿대(禾竿)를 헐기 전에 가마니 같은 부대를 갖다놓고 곡식을 담는 시늉을 하며 ‘벼가 삼만석이요’ 또는 ‘콩이 오백석이요’ 하는 말들로 기원하였다.
또 대보름날 아침이 되면 사람이 먹는 찰밥과 나물을 키에 담아가지고 소에게 먹였다. 외양간의 소가 이 음식을 잘 먹으면 그해 농사는 풍년이 든다고 하였다. 만약 찰밥을 먼저 먹으면 그 해 논농사가 잘되고, 나물을 먼저 먹으면 밭농사가 잘 된다고 보았다.
1년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콩을 물에 불리는 방법도 있다. 1년을 상징하는 사발이나 종자기 같은 그릇 12개에 물을 붓고 콩을 하나씩 담아 상태를 살핀다. 대보름날 아침에 콩이 부푸는 상태를 보아 비가 많고 적음을 점쳤다. 예를 들어 다섯 번째 그릇의 콩이 크게 부풀어 있으면 5월에 비가 많이 내려 농사일이 순조롭게 될 것을 짐작하고, 6월에 해당하는 콩이 부풀지 않았으면 6월에 가뭄이 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콩을 가지고 짐작하는 농점은 달부름(月滋)이라고도 한다.
닭울음점은 닭이 몇 번을 우는지를 세어 10번 이상을 울면 풍년이 들고, 그보다 적게 울면 흉년이 든다고 하였다. 또 나무그림자점은 한 자 정도 되는 길이의 나무를 마당 가운데 세워 놓고, 자정 무렵에 그 나무의 그림자를 재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풍속이다.
영남지방에서는 칡으로 길이가 4,50발쯤 되는 굵은 줄을 만들고, 이 줄을 사용하여 줄다리기를 한다. 이때 어느 편이 이기는 가에 따라 농사의 풍흉이 점치는데, 이를 갈전(葛戰)놀이 혹은 갈전희(葛戰戱)라고 부른다.
강원도 춘천지방에서는 동네별로 편을 갈라 외바퀴수레를 끌고나와 싸우는 풍속이 있다. 이를 차전놀이 혹은 차전희(車戰戱)라고 부른다. 경기도 가평에서도 이와 비슷한 풍속이 전하는데 모두 그해의 풍년을 점치는 놀이의 일종이다.
도돔떡먹기는 마을 사람들이 가져온 쌀을 모아 떡을 찌는데, 한 켜마다 각자 이름을 적은 종이를 넣었다가 떡이 다 되면 이를 살펴 점을 쳤다. 자기 이름이 있는 부분에서 떡이 설익으면 운이 나쁘다고 하였으며, 그런 떡은 여러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에 내다 버렸다.
곡식안내기는 이날 곡식을 집밖으로 내면, 일 년 내내 곡식 나갈 일이 생기며 농사도 흉년이 든다고 믿어 남에게 빌려주거나 판매하지도 않았다.
사발점은 대보름날 밤에 사발에 재를 담고 그 위에 여러 가지 곡식의 씨를 놓은 다음, 그 사발을 지붕 위에 올려놓는다. 이튿날 아침에 곡식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고 점을 치는데, 놓았던 곡식 중에서 날아간 것이 많은 곡식은 그 해에 흉작이 되며, 남아있는 것이 많은 곡식은 풍작이 된다고 하였다.
달집태우기
여느 지역에서나 달집은 태웠지만, 특히 구례 문척지방의 달집태우기는 어른들의 불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달집은 달이 막 떠오르는 순간에 불을 붙여 태워야 하였는데, 달집에 먼저 불을 붙이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맨 먼저 달집에 불을 붙인 사람이 총각이면 장가를 들게 되고 결혼한 사람이면 득남을 한다고 믿었다. 또 달집 불에 콩을 볶아 먹으면 한 해 동안 이를 앓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때 달집의 불이 활활 잘 타고 연기가 많이 나면 날수록 마을이 태평하고 농사가 풍년든다고 믿었다.
새쫓기
농사철이 되면 참새의 피해가 많기 때문에 대보름날 아침에 새를 막는 시늉을 한다. 아이들이 들에 나가 ‘후여 후여’ 하는데 이는 여름에 모여들 새를 미리 쫓아내는 것이다. 또 모기를 쫒는 시늉을 하여 여름에 기승을 부릴 모기가 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하였다.
동제(洞祭)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제(祭)를 올린 후 크게 굿을 하였다. 또 밤이면 마을의 수호신인 골매기에도 제를 지낸다. 먼저 왼손잡이가 꼰 새끼의 매듭에 백지를 드문드문 끼워 금줄을 만들었다. 다 만들어진 금줄은 골매기돌에 매어놓고 풍악을 울리며 한바탕 신나게 논다. 이는 마을단위의 제사로써 동제(洞祭)라고 부른다.
동제는 산신, 용신, 서낭신 등 마을에서 섬기는 수호신에게 마을 사람들이 합동으로 올리는 제의(祭儀)로서, 마을신앙의 행위적 표현이다. 이들 신의 종류는 마을마다 각기 다르며, 이들의 수호신의 서열도 각기 달랐다.
제를 지내는 시기도 정월초하루에 지내는 곳도 있지만, 대보름에 혹은 삼월삼짇날에 지내는 곳도 있다. 횟수도 정월 대보름과 단오를 기해 지내는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정월 초하루 저녁에 지내기도 하고, 음력 10월에 지내는 곳도 있었다.
동제는 산고사, 동고사, 별신굿, 용궁맞이, 장승제 등 지역의 생태적인 조건과 환경적 영향을 받아 차이가 났다. 반면 제례 즉 유교식으로 치르면 비교적 간단하지만, 당굿으로 할 경우에는 줄다리기나 풍물 등 복잡하고 다양한 부대행사가 뒤를 따른다. 이때 제관(祭官)은 마을의 원로가 하기도 하였으며, 중부지방의 도당굿이나 서해안의 풍어제를 비롯하여 제주도의 입춘굿 등에서는 무당이 주재(主宰)하였다. 제주도에서는 무당이라는 이름대신 심방이라고 불렀다.
유교식 동제는 참여자 수(數)도 제한적이며, 일부에서는 제관만 참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을 단위의 제사인 만큼 부정이 없는 남자들이 참여하고, 마을 사람 전체가 이를 구경하는 곳도 있었다. 어촌에서는 이를 더 넓게 해석하여 풍어를 위한 마을축제로 승화시켰다.
충남 서산군 고남면 고남리에서 행하던 '홍합제'는 어촌의 동제로 소를 잡아 지낼 정도로 성행하였었다. 홍합제는 며칠 전에 제관을 선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섣달 그믐날 당산(堂山)에서는 당제(堂祭)를 준비하고, 바닷가에서는 썰물 때에 개펄에서 홍합제를 지낸다. 제관은 제물로 밥 세 그릇과 삼색(三色) 실과(實果)를 차린 후, 얻고자 하는 지역의 특산물을 불러들인다.
예를 들어 제관은 ‘영산포 조개요, 영산포 조개 오너라’ 혹은 ‘정산물 조개요, 정산물 조개오너라’ 한다든가 ‘진도 해태요, 진도 해태오너라’고 외쳤다. 그러면 청년들이 ‘우~~ ’하면서 조개가 몰려오는 시늉을 한다. 이렇게 하면 해산물이 많아져서 풍어를 이루고, 어로 역시 안전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의 동제는 유교식 가례를 약식(弱式)으로 줄여서 하는 편이지만, 일부에서는 무당을 불러 지내기도 한다.
강릉단오제도 이런 동제에서 출발하였으나, 오늘날에는 하나의 지역축제로 독립한 경우다. 따라서 축제 속에 제사와 굿이 등장하고, 탈놀이나 은산별신제 같은 작은 제(祭)가 포함되어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해남의 도둑잡이굿, 완도의 장보고당제, 보성의 벌교갯제, 연기의 전의장승제, 고창의 오거리당산제, 안동의 도산부인당제, 안동의 마령동별신제, 삼척의 원덕남근제, 김제의 마현당제 등이 있다.
연싸움
연날리기는 겨울이 시작되면 같이 따라오는 놀이다. 다양한 종류의 연(鳶)과 자신의 취향에 맞는 얼레를 만들고 연줄을 감아 연을 공중에 띄워 날리는 것이다. 바람을 맞은 연은 높이 올라가는데, 고려 때 최영(崔瑩) 장군이 탐라(眈羅)를 정벌할 때 연을 만들어 썼다고 전한다.
연을 날리다가 다른 사람의 연줄과 서로 맞걸어 비비는 것을 연싸움이라 하고, 연줄이 끊어지는 쪽이 지는 것이다. 이 연싸움을 이기고 싶은 사람은 연실에 사금파리가루나 구리가루 등을 입혀 튼튼하면서도 날카롭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정하지 못한 경기로써 연줄을 거는 방식과 당기는 기술로 싸우는 것이 정당하다 하겠다.
연날리기에 대한 유래는 신라 김유신조 열전에 ‘647년 진덕여왕 때에 대신 비담과 염종에 의해 반란이 일어났을 때, 월성(月城)에 큰 별이 떨어져 왕과 백성들이 크게 두려워하므로 김유신이 허수아비를 만들어 연에 달아 띄웠다.’고 적고 있다. 이 또한 난을 평정하려고 하늘에서 장수가 내려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주술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놋다리밟기
안동지방에 전하는 풍속으로 대보름날 저녁에 부녀자들 중에 늙고 약한 자들이 성 밖으로 몰려나와 줄을 섰다. 이들은 마치 생선을 길이대로 꿴 형상을 하였는데, 헤성헤성하거나 끊어지지 않도록 총총하게 늘어섰다. 그 위로 양쪽에서 부축한 어린 여자아이가 걸어가면서 흥을 돋운다. 소녀가 ‘이것이 무슨 다리인가?’ 하고 선창을 하면 엎드려 있는 부녀자들은 일제히 ‘청계산(淸溪山) 놋다리지~’하고 후창(後唱)하는 놀이다. 여자아이는 이렇게 인간 매듭위로 왔다갔다하면서 놀며 새벽이 되어 돌아간다.
기복풍속
기복풍속은 글자 그대로 복을 기원하는 풍속이다. 앞으로 다가올 여러 재액(災厄)을 물리치고 복을 받기 원하는 속내를 표현하는 것으로 지역에 따라 그리고 직업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전한다.
달맞이 놀이
정월 대보름날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산에 올라서 달이 떠오르는 광경을 바라보는 것이 달맞이다. 이때 남보다 먼저 달을 본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여 길을 서둘러 산에 올랐다. 각자가 바라는 소원은 다르겠지만, 그래도 개인의 형편과 능력에 따라 소원을 비는 것은 소박한 꿈이라 할 것이다.
시절은 아직 한겨울이라 춥기도 하겠지만 남보다 먼저 달을 보려는 마음에 추위도 잊게 마련이다. 또 달빛을 보면서 그 해 농사의 풍흉(豊凶)을 점치는데, 달이 남으로 치우치면 해변지역에 풍년이 들고, 북으로 치우치면 산촌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또 달빛이 붉으면 한발이 있으며, 달빛이 희면 비가 많다고 하였다. 또 달빛이 진하면 풍년이 들고, 달빛이 흐리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일부지역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꽹과리와 징 그리고 북 등 온갖 악기를 동원한 농악대를 이끌고 올라가기도 한다. 달이 뜨기 전까지는 풍악으로 흥을 돋우다가, 보름달이 떠오르는 순간 상쇠의 신호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고 마음속으로는 소망을 빌기도 한다.
과일나무 시집보내기
과일나무의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두면 그 해에는 많은 과일이 열린다고 한다. 또 석류나무의 가지는 설날에 돌맹이를 끼우면 열매가 커진다고 믿어 여러 과일나무에 돌을 얹어놓는 풍속이 생겼다. 이는 그렇게 돌을 올리면서 나무를 살피고 과수농사를 준비하라는 말로 들린다.
안택(安宅)
안택은 집안에 탈이 없게 하기 위하여 지내는 제사를 말하며, 마을단위의 공동제사에 비교하여 개인이 지내는 제사다. 안택은 정초에 지내는 것이 보통인데 조상신, 조왕신, 동신(洞神)등에게 지내며, 재앙이나 질병 그리고 화액을 쫓아내고 가내의 평안을 비는 제사다. 제사가 끝나면 차려진 음식을 나누어 먹고 서로의 무병무탈을 빌었다. 지금도 개업하여 번창하기를 바란다든지 새로운 집을 지어 행복하기를 바란다든지 하는 등 목적을 정하여 차려지는 제사를 고사라 부르는데,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풍습으로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까지 전하고 있다.
무사(無事) 안녕(安寧)을 비는 것에서는 안택과 무당굿이 같지만, 안택은 무당이 신과 접속하는 것에 비해, 안택은 순수하고 소박한 기원에 해당한다.
복토(福土) 훔치기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꼭두새벽에 종각 네거리의 흙을 파다가 집 네 귀퉁이에 뿌리거나 부뚜막에 바르는데, 이는 재산모으기를 바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땅은 농사를 짓는 터전으로 지모신(地母神)이라 여겼으며, 풍요로 복락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이것이 변하여 보름 전야에 부잣집의 흙을 훔쳐다 보름날 아침 자기 집 부뚜막에 바르는 풍속이 생겼다. 이는 자기도 그 집과 같이 부자가 되고 싶은 심정에서 비롯되었으니, 부자는 흙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불을 밝히고 지키기도 하였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 집의 터줏대감이 따라가서 복이 모두 달아나고 재물을 잃고 말 것이라는 우려에서 나온 것이다. 이를 두고 복을 부르는 흙을 훔쳐왔다고 하여 복토훔치기라고 한다.
산제(山祭)지내기
산제는 동리의 수호신인 산신(山神)을 제사하는 것으로 동신제(洞神祭)로 통하기도 한다. 산제는 정월 대보름날 혹은 보름을 전후한 길일을 택하여 지내는데, 마을 진산(鎭山)의 산제단 또는 산제당이라고 부르는 단(壇)이나 당우(堂宇)에서 지냈다.
제사를 맡을 제주의 집에 농기를 세워 알림으로써 제사가 시작되며, 제주(祭主)는 부정이 없어야 한다. 목욕재계하여 몸을 청결하게 함은 물론 마음가짐도 선량하여 거리낄 것이 없어야 한다. 제사를 지내는 제기는 해마다 새로이 장만하는 것이 상례이고 제수(祭水)로 쓸 우물에도 황토(黃土)를 놓아 악귀를 쫓고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또 제사가 끝나기 전에는 함부로 우물을 사용할 수 없도록 멍석을 덮어 보호하였다.
드디어 제삿날이 되면 농기(農旗)를 앞세우고 농악대와 동민(洞民)이 뒤를 따라 산에 올랐다. 자정이 지나고 첫 닭이 울면 산제를 올리며, 새 그릇에 새 음식을 담아 정성을 들였다. 제수(祭需)는 모두 제주가 직접 만들고 축관(祝官)의 독축(讀祝)이 끝나면, 마을 주민 모든 호주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태워 올린다. 농기는 그 옆에 그렇게 세워둔다.
달집 짓기
낮에 달집을 지어놓았다가 보름달이 떠오르면 불을 질러 태우면서 그 해 소원을 빌었다. 그동안 날렸던 연을 모아 달집이 탈 때 같이 태워 액막이를 하였다. 그해 운수가 좋지 않은 사람은 입고 있던 저고리의 동정을 따서 태우는 것으로 액막이를 하기도 하였다. 달집이 타고 난 뒤 타다 남은 대나무를 부지깽이로 사용하면 아들 못 낳는 사람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서로 가져가기를 원했다. 요즘에는 때는 불이 많이 사라져서 그냥 전하는 말로만 남아있다.
이것은 소지(燒紙)와 같은 소액(燒厄)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용왕먹이기
보름날 바닷가나 개울가에 제수(祭需)를 차려놓고 비는 것을 용왕먹인다고 한다. 흔히 행하던 용왕제나 풍어제는 집단적인 마을 단위의 동제(洞祭)인 반면, 용왕먹이기는 개인이 고사를 지내는 작은 행사로 용왕에게 음식을 먹여 마음을 유(柔)하게 한다는 것이다.
까마귀 밥주기
엄동설한에 새들이 먹을 식량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따라서 보름날 아침 오곡밥을 도마 위에 담아서 지붕이나 담장 위에 놓아두면 새들이 와서 먹었다. 이것은 내가 먹고 살기 힘들더라도, 먹이가 부족한 겨울철에 주변의 새들을 배려하는 심성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풍습이라 할 것이다. 늦가을 감나무 가지 끝에 까치밥을 남겨두었던 선조들의 자연사랑 동물사랑을 확인하는 듯하다.
그을음 쓸기
우리의 옛 부엌은 환기창이 작아 불을 때면 그을음이 앉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보름날 그을음을 쓸면서 ‘끄스름 쓸자 끄스름 쓸자’고 하면 근심이 없어진다고 여겼다. 당시 부엌은 많은 거미줄과 함께 시커먼 그을음이 있어 어둡게 보였는데, 이렇게 청소를 함으로써 새로운 기분이 들고 위생상에도 좋았을 것이 분명하다. 이제 곧 바쁜 농사철이 되면 이런 청소도 할 수가 없으니 한가한 대보름에 미리 청소하던 지혜가 엿보인다.
쥐불놀이
정월 14일 밤이나 혹은 보름밤에 밭둑 혹은 논둑을 태우는 행사로 이것을 쥐불놀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면 잡귀를 쫓고 풍작을 거둘 수 있으며, 1년 동안 무병하고 액을 미리 방지할 수 있다고 여겼다. 여름내 자랐던 풀을 태워 거름으로 만들어서 농사에 보탬이 되며, 병충해의 서식지를 없애는 것으로 풍년을 예약하는 것과 같았다.
이날은 딱히 정월 14일이 아니더라도, 새해 들어 처음 맞는 쥐날 즉 상자일(上子日)에 실시하기도 하였다. 어린 아이들은 깡통에 불씨를 담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불을 질렀다. 이때 발생하는 불의 크기에 따라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특히 쥐구멍이 있으면 일부러 불을 놓아 쥐들이 튀어나오게 하여 잡기도 하였다. 이때 불씨가 오랫동안 남아있도록 하기 위하여 솔방울이나 작은 장작개비를 넣어 불을 살랐다.
아이들이 불깡통을 돌리면 마치 달처럼 둥근 모양을 이루어 망월 곧 ‘망우리를 돌린다’고 하였다. 요즘은 쥐불로 인한 병충해의 소각(燒却)이 농상 별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화재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금지하고 있다.
석전(石戰)
석전은 글자 그대로 돌싸움으로 편싸움이라고 보면 된다. 상원(上元)에 마을과 마을이 싸우기도 하고, 마을을 동서로 혹은 남북으로 나누거나 하천 또는 구릉을 기준하여 가르기도 한다. 서로가 돌팔매질을 하며 미리 정해진 시간동안 싸우는데, 먼저 도망하는 편이 지는 경기다.
이때 서울에서는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의 삼문(三門) 안 마을과 애오개(阿峴) 마을이 싸워 삼문 안 마을이 이기면 풍년이 든다고 하였다. 싸우는 장소는 대체로 만리현(萬里峴)이었으며 몽둥이와 돌을 들고 싸웠다. 이 경기는 자칫하면 부상으로 이어지기도 하였지만, 용감무쌍한 상무정신(尙武精神)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단결된 힘을 기르는 좋은 훈련이었다.
줄다리기
줄다리기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남아시아의 일본과 중국 등 여러 지역에서 고르게 즐겼던 민속이다. 마을과 마을 또는 면단위로 편을 나누어 주민 대다수가 참여하던 놀이다. 정초(正初)가 되면 벌써 집집마다 염출한 짚을 틀어 꼬아서 줄을 만들기 시작한다.
줄은 외줄 혹은 두 줄로 엮었으며, 뱀이 달걀을 삼킨 모양, 중앙이 양끝보다 굵은 구렁이 모양 등으로 만들었다. 줄은 마치 지네다리를 연상하듯 8개로 갈라졌고, 남녀 혹은 동서로 나뉘어 시합을 하였다. 그리하여 동쪽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서쪽이 이기면 풍어가 든다고 믿었다. 대보름에 행해진 줄다리기가 가물거나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불편해지면 다시 실시하던 지역도 있다.
현재의 일반 행사에서는 짚 대신 화학실로 만든 줄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로써는 준비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단합(團合)과 상부상조(相扶相助)의 정신을 배울 수가 없다.
이러한 줄다리기는 농경의례(農耕儀禮)의 하나로, 풍년과 다산을 기원하는 기복신앙이었다. 줄다리기에 쓰이는 줄은 용(龍)에 비유되며, 물의 신(水神)으로 지역에 따라서는 청룡과 백룡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보통 암줄과 수줄로 구성되는데, 이는 음과 양을 나타내며, 여자와 남자, 그리고 태양과 달을 의미한다.
줄다리기는 주로 여자들이 이기지만 이것은 많은 남자들이 여자줄에 참가하여 승리를 유도하는 것으로, 땅에서 얻는 지신(地神)의 도움으로 다산과 풍요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이런 일을 시작할 때는 지신밟기부터 걸립(乞粒)에 이르기까지 마을 전체의 행사로 승화시켰는데, 이는 힘든 농사일을 서로 돕고 슬기롭게 헤쳐 나가자는 대동(大同)의 의미도 담겨있었다.
한편 줄다리기는 설 명절의 대표적인 세시놀이에 속하지만, 추석에 즐기기도 하였다. 일정 지역에서 성행하는 고싸움은 전국에 널리 퍼져 있는 줄다리기에서 변형된 놀이로 볼 수 있다. 줄을 만들 때에도 일정한 금기를 지켰으며, 줄다리기가 끝나면 돌을 세운 입석(立石)이나 마을의 당산에 감아놓는 것도 대동소이하다.
귀신날
정월 열엿새를 귀신날이라고 한다. 이 날 귀신이 집안에 범접하지 못하도록 대문에 체를 걸어놓는다거나 문 밖에서 목화씨나 고추씨를 태운다. 그러면 귀신이 체의 눈을 세는 도중에 날이 밝으면 도망가고, 또 목화씨나 고추씨를 태우면 매워서 겁을 먹고 도망간다는 것이다. 또 귀신이 신발을 신어보고 맞으면 신고 간다고 하여 모두 엎어놓거나 감추기도 하였다. 귀신이 신발을 신고 간다면 그것은 아주 불길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상원(上元)의 민속놀이로는 탑돌이가 있다. 탑돌이를 하는 동안 잠깐 스치는 사이 마음에 드는 연인을 만난 후, 바로 헤어져서 사랑을 이루지 못하여 얻은 상사병(相思病)을 ‘보름병’이라 할 정도로 흔한 일이 되었었다. 따라서 조선 세조는 서울 원각사(圓覺寺)의 '탑돌이'를 풍기가 문란하다고 하여 제한하는 금지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일명 소머리 싸움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나무쇠싸움, 봉죽놀이, 주지놀음 일명 사자놀이, 고싸움놀이, 당산옷 입히기, 감영놀이 혹은 관원놀이, 농기세배, 섣달그믐의 수세와 같은 보름새기, 제웅치기, 나무조롱달기, 개보름쇠기, 모기불놓기, 방실놀이, 동채싸움, 뱀치기 등도 있다.
액(厄)막이 풍속
대보름이 되면 한해를 잘 지내게 해달라고 복을 빌며, 자신에게 닥칠 액운을 떨쳐버리기 원한다. 이때 행하는 모든 것이 바로 액막이가 된다.
부럼깨기
보름날 아침이면 전날 준비해두었던 밤이나 호두 그리고 은행과 잣, 무, 땅콩 등을 깨물면서 ‘1년 내내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주십시오’하고 기원한다. 이는 건과류(乾果類)가 가진 영양적 효과도 훌륭하였으며, 치아를 단단하게 하는 것이 모든 건강의 시초(始初)라고 믿었던 때문이다.
따라서 부럼을 한꺼번에 톡소리가 나도록 힘차게 물어 깨야 좋다고 믿었다. 부럼은 원래 나이 수대로 깨야한다고 하였지만, 점차 그 숫자가 줄어들어 이제는 그런 말만 전하고 있다. 지방에 따라서는 엿을 먹는 곳도 있었는데, 이것 역시 치아를 단단하게 하는 ‘이굳히엿’이라 불러 부럼과 같이 대하였다.
부럼에 사용되던 땅콩은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하며, 생리작용을 원활하게 해주는 성질이 있다. 구워서 먹거나 삶아서 먹어도 상관은 없지만, 볶은 후 오래두면 기름이 산화되어 변질되기 쉽다. 특히 땅콩에 피어나는 곰팡이는 독성이 아주 강한 균으로 알려져 있다.
호두는 살을 찌게하고 몸을 튼튼하게 하며, 피부를 윤택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또 머리를 검게 하는 작용을 하고, 기혈(氣穴)을 보호하여 하초명문(下焦命門)을 보한다고 알려져 있다. 불포화지방산, 단백질, 마그네슘, 망간, 철분, 칼슘, 비타민A, B, C, E 등이 풍부하여 강정식으로도 인기가 좋다. 또 호두는 보온성이 좋아 감기와 천식을 예방하며, 뇌세포활성화 및 노화방지를 돕는다. 그런가 하면 불면증이나 탈모증에 효과가 있다. 그러나 지방도 많아 지성피부인 사람과 다이어트 중인 사람에게는 권장하지 않는 식품이다.
더위팔기(賣暑)
상원날 아침은 춥고 활동하기 어설픈 날이다. 그러나 아침 일찍 일어나 더위를 팔면 다가올 여름을 잘 지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이웃 친구를 찾아가 이름을 부른 뒤, 대답을 하면 ‘내 더위 다 사가라’ 하며 팔았다. 그러나 부름을 받은 친구가 대답대신 ‘내 더위 네 더위 먼디 더위’하면 오히려 더위를 팔려던 친구에게 내 더위까지 보태지는 놀이였다. 그래서 이날은 친구가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고 더위를 파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도 해가 뜨고 나면 이미 더위를 보았으니 아무 소용이 없다고 믿어 더 이상 더위팔기놀이를 하지 않았다.
경도잡지(京都雜誌)에도 ‘남녀들은 꼭두새벽에 갑자기 서로 부른다. 대답을 하면, ‘내 더위 사가게’라고 한다. 그리하여 온갖 계교로 불러도 여간해서는 대답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느 지역에서는 해가 뜨기 전에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 가지를 꺾어 둥글게 만든 다음 개의 목에 걸어주었고, 소에게는 왼쪽으로 꼰 새끼를 목에 매어 주면서 ‘금년에는 더위를 먹지 말아라.’고 하였다.
액날리기
정월 초 추운 날씨에 특별한 놀이가 없던 아이들은 동네 고샅에 나와 연(鳶)을 띄웠다. 그 연에는 각자 집안 식구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쓰고 ‘신액소멸(身厄消滅)’이라는 글자를 썼다. 그리고 연을 띄우다가 해질 무렵이 되면 연줄을 끊어 날려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연이 모든 액을 실어 멀리멀리 떠난다는 의미다. 이 놀이를 연날리기라고도 부른다.
다리밟기(踏橋)
보름날 밤에 서울 장안의 많은 사람들은 종로네거리인 열운가(閱雲街)에 모여 보신각(寶信閣) 종소리를 들었다. 그 뒤 흩어져 근처의 다리로 가서 거니는데, 이런 행렬은 밤이 새도록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사람이 많은 지역에서는 삼일밤낮 동안 북적댔다고도 한다.
다리밟기는 고려때부터 내려오는 행사로, 서울에서는 주로 대광통교(大廣通橋)와 소광통교(小廣通橋), 수표교(水標橋)에서 성행을 이뤘다. 이 다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어 북을 치고 퉁소를 불며 매우 소란스러웠다. 이렇게 다리 위를 걸으면 모든 병을 물리치는 액막이가 된다고 믿었다. 이것은 튼튼한 다리로 모든 일을 잘 하여 건강하게 지내는 밑거름이 될 것을 믿었다고 풀이된다. 이런 행사는 각 지역마다 처해진 형편에 따라 실시되었다.
다른 해석으로는 다리밟기를 하면 다리에 병이 나지 않고 건강하다고 하여, 열두 다리를 밟아 1년 12달 동안 건강해지기 위하여 열두 다리를 밟았다고 한다. 이는 평소 외출이 적은 부녀자들에게 건강을 생각하여 즐겁게 놀면서 운동을 하라는 방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때의 다리밟기는 가족단위 놀이가 마땅치 않을 경우 모두가 함께 나서는 좋은 놀이에 속했다. 지금도 별다른 준비물이 없어도 나설 수 있는 운동이며, 가족끼리 오순도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하는 놀이 중의 하나다.
송파다리밟기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될 만큼 유명한 놀이로 전한다.
아홉차례
대보름에는 밥을 아홉 그릇 먹고, 나무도 아홉 지게를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와 더불어 대보름 전날의 세시풍속으로 ‘아홉차례’가 있었다. 다른 말로 아홉 차리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글자 그대로 아홉 번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글방에 다니는 아이는 천자문을 읽어도 아홉 차례 읽어야 하고, 농부가 새끼를 꼬아도 아홉 발을 꼬야야 하며, 아낙이 빨래를 해도 아홉 가지를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심지어 물을 길어도 아홉 동이를 길어야 하며, 매를 맞아도 아홉 대를 맞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9’라는 숫자가 길수(吉數)로 꽉찬 숫자이며, 양의 수 ‘3’을 세 번이나 곱해서 얻어지는 수로 아주 좋게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이런 아홉 수를 행여 시기하는 악귀가 있을까 걱정하여, 아홉 수에는 혼인(婚姻)을 하지 말라는 속설이 생겨났다.
대보름의 먹을거리(上元節食)
대보름에 먹는 음식은 대보름 풍속에 속하는 것도 있는가 하면 별도의 특별한 음식에 해당하는 것도 있다. 이날은 각기 다른 성바지 집에서 얻어온 밥으로 아홉 번을 먹어야 하며, 그 대가로 땔감나무 아홉 지게를 해야 한다는 말도 하였다. 이것은 아무리 잔치라 하더라도 그냥 먹고 놀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라 할 것이다. 대보름에는 흰쌀밥만을 먹던 부잣집에서는 체면에 밥을 얻으러 다니지는 못하여, 남의 오곡밥을 서리해서 먹는 풍습도 있었다.
농부월령가에서도 ‘묵은 산채 삶아 내니 육미(肉味)와 바꿀소냐, 귀 밝히는 약술이며 부스럼 삭는 생밤이라···’라고 적혀 있을 정도로 산채(山菜)는 중요한 음식이었다.
그런가하면 대보름에 먹어서는 안 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보름의 금기 식품으로는 아침밥을 물에 말아먹지 않으며, 아침상에 생파래를 올리지 않았다. 또 찬물이나 눌은밥을 먹지 않았고, 김치처럼 고춧가루가 들어간 음식을 먹지 않았다. 파래는 논에 난 잡초를 연상하여 풀이 무성하면 농사에 좋지 않다고 여겼으며, 고춧가루의 매운 맛은 벌레가 쏘아 아픈 것을 비유하였다. 찬물은 작물의 냉해(冷害)를 의미하며, 눌은밥은 정상적인 소출이 줄어드는 것에 비유하였다.
오곡밥먹기
상원날은 정월 대보름을 말하며, 이날 아침밥은 다섯 가지 이상의 곡식을 섞어서 만든 밥을 지어서 먹으니 이것이 바로 오곡밥이다. 원래는 찹쌀과 팥, 콩, 기장, 조를 넣은 잡곡으로 지었으나, 보통은 찹쌀 대신 백미로 짓는 경향이 있다. 오곡밥은 탄수화물 위주의 편식하던 식습관에서 비타민이나 미네랄 그리고 식이섬유 등 여러 잡곡이 가진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함으로써 건강한 신체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때문이다.
속을 따뜻하게 해주는 찹쌀과, 비위의 열을 다스리는 차조, 콩과 팥은 쌀에 없는 비타민을 함유한 좋은 영양식이다. 수수는 소화가 잘 안되지만 몸의 습(濕)을 없애주고 열을 내리며, 콩은 고단백으로 오장(五臟)을 보(保)하고 십이경락의 순환을 돕는다. 또 붉은 팥은 부종을 빼주고 이뇨작용(利尿作用)을 도우며, 화(火)와 열(熱)을 낮추는 작용을 한다. 오곡밥은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것에 주의하여야 한다.
오곡밥에 대한 정확한 유래는 알려지지 않으나, 예전에 씨앗으로 받아 놓았던 곡식을 골라 종자를 하고 남은 것을 섞어 지은 밥이라는 설(說)에도 일리가 있다. 진채(陣菜) 역시 이제 곧 새로운 풋나물이 나올 터이니 묵은 나물을 모두 먹어 없애야 된다는 데서 비롯한 것이라는 설(說)도 그럴듯하다.
이날은 서로 다른 곡식을 넣어 만든 오곡밥으로 이웃끼리 나누어먹는 여유도 가졌다. 이것은 나중에 제삿밥을 나누어먹는 풍속으로 발전하였고,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헛제삿밥을 나누는 풍속까지도 만들어냈다.
제삿밥을 나누어 먹는 것은 제사를 지낸 다음 음식을 나누는 미풍양속이며, 헛제삿밥은 이웃사람들이 굶주린다든지 뭔가 다른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먹지 못하고 있을 때 이를 가엽게 여겨, 제사가 아니지만 제사(祭祀)인척 거짓으로 꾸며 음식을 나누어 먹는 풍습이다.
백가반(百家飯) 먹기
대보름날에는 여러 집에서 얻어 온 오곡밥을 먹어야 좋다고 하였다. 이는 백(百)집의 밥을 먹어야 좋다는 말로 해석되어, 일부러 다른 집을 찾아다니며 각기 다른 밥을 얻어오는 풍습이 있다. 이렇게 하면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든 밥을 먹음으로써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는 수단으로 삼았었다.
또한 이렇게 걸식(乞食)을 하러 돌아다니면서, 겨우내 굳었던 몸을 풀어주는 효과도 있었으니 백가반을 먹지 않으면 발병(發病)하고 몸이 마른다는 말도 만들어 냈다.
약밥(藥飯)먹기
대보름 음식 중에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약밥은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풍속으로 찹쌀을 찌고 대추, 밤, 기름, 꿀, 간장, 잣 등을 넣어 함께 버무린다.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그 외에도 호두, 팥, 밀, 조 등 10여 가지 이상을 넣어 만들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약밥은 작은보름에 만들어서 하룻밤을 식힌 다음, 대보름에 먹는 것이 특이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소지왕(炤智王) 10년 정월 보름날에 왕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였을 때 갑자기 까마귀가 날아들었다. 이 까마귀가 지금 내전(內殿)에서 승(僧)과 궁주(宮主)가 잠통(潛通)한다는 사실을 왕에게 알려주었다는 고사(故事)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정월 대보름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고, 그 뒤로 보름날에는 까마귀 제사상에 까마귀와 같이 검은 약밥을 만들어 놓아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
약식(藥食)은 좋은 찹쌀을 물에 충분히 불린 후 고두밥을 찌고, 대추살과 황률(黃栗) 불린 것과 꿀, 참기름, 전래 간장(眞醬), 흑설탕을 넣어 버무린다. 이것을 시루나 질그릇 밥통에 넣고 약한 불에서 오래도록 쪄낸 다음, 잣으로 고명을 얹는다. 이 약밥 혹은 약식은 사람의 제사상에는 물론이며 각종 잔칫상에도 빠지지 않는 전통음식이 되었다.
진채(陣菜)먹기
보름날 아침 밥상에는 오곡밥과 작년 가을에 준비해두었던 묵은 나물 즉 진채(陣菜)를 먹었는데 호박고지, 곰취, 박나물, 표고버섯, 시래기, 박고지, 무고지, 외고지, 가지나물, 석이버섯, 표고버섯, 호박나물, 시금치나물, 고사리, 도라지, 숙주나물, 토란줄기, 나물빈대떡, 나물비빔국수 등 여름에 말려 두었던 온갖 나물을 삶아 먹었다. 이때 9가지 이상의 나물을 볶아야 진채먹기가 된다.
무는 한자로 나복(蘿蔔)이라고 하며, 청근채(菁根菜)라고도 한다. 시래기나물은 청경채(菁莖寀)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도 무가 우리 몸에 아주 좋은 채소임을 알 수 있다.
여름에 나는 채소를 겨울에 먹는 방법으로 말리기도 하였지만, 이는 태양에 말리면 없던 영양소가 생겨나고 우리 몸에 더 좋게 변한다는 것을 십분 활용한 셈이다. 이렇게 여름에 말린 나물을 먹음으로써 다가오는 여름철 더위를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마른 나물은 젖은 나물에 비해 훨씬 많은 식이섬유를 가지고 있어서 변비나 대장암예방에 효과적이다. 현재는 이들을 보완하여 쇠고기산적푸성귀냉채, 버섯나물옥수수볶음밥, 복어포찹쌀구이, 삼색나물잡채달걀말이, 쇠고기콩나물매콤찌개, 찐조기매콤양념조림, 물김치, 나박김치 등을 만들어먹기도 한다.
귀밝이술(耳明酒)
상원날 이른 아침에 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믿어 모두 술 한 잔씩을 마시는데 이를 ‘귀밝이술’이라고 한다. 귀밝이술은 따뜻하게 데우지 않고 찬 술을 그냥 마시며, 일설에는 귀가 밝아지는 것은 물론 일 년 동안 좋은 소식만을 듣는다고도 믿었다. 그러기에 귀밝이술은 부녀자와 아이를 가지지 않고 마셨는데, 다른 약품을 넣지 않고 집에서 만든 전통주였으며, 유산균을 비롯하여 각종 효소가 들어있어서 몸에 좋았던 것이다.
복쌈먹기
대보름날 아침밥을 먹을 때 첫술은 꼭 쌈을 싸서 먹는데 이를 ‘복(福)쌈’이라고 한다. 복을 받아 오래 살라는 의미에서 ‘명(命)쌈’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하면 들어왔던 모든 복이 나갈 수가 없어 집안이 1년 내내 좋을 뿐 아니라,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한다.
이때 쌈의 재료로는 아주까리 잎이나 취나물, 배춧잎, 토란잎 등을 사용하였고 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집에서는 김을 대용하기도 한다. 사실 현재도 김은 대보름날의 음식 중에서 필수로 꼽히며, 모든 잔치나 기념일에 등장하여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쌈을 싸먹는 음식이다.
청어 구워먹기
대보름에 아침밥을 먹을 때 청어(靑魚)를 통째로 구워서 먹었다. 만약 생선을 자르게 되면 논두렁에 구멍이 나서 물이 새며 쥐가 드나든다고 하여 좋지 않게 여긴 때문이다. 또 날것으로 먹으면 몸에 비루가 생긴다고 하여 반드시 구워먹도록 하였다. 요즘은 청어가 귀하여 다른 생선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대보름 회고
대보름이 되면 예전에 아홉 그릇을 먹어야 한다던 말이 생각난다. 그때는 아침밥을 먹고 나서 바로 참으로 먹고, 한참 놀다가 들어와서 또 먹곤 하였었다. 그래도 하루 종일 따지고 보면 아홉 그릇이 채 안 되었다. 밥을 한 번 먹을 때마다 한 짐씩 계산하여 아홉 지게를 해 와야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짐은 땔감을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는 장작으로 불을 지피던 시절이 아니라서 마음놓고 먹었던 기억이 난다.
또 대보름의 기억으로는 오랜만에 먹어보는 김이 빠질 수 없다. 해안가가 아닌 덕분에 김을 무시(無時)로 먹을 수가 없었기에 어쩌다 한 번 먹는 김은 아주 꿀맛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구운 김 자체로도 바삭바삭하여 입맛이 새롭지만, 그 위에 참기름을 발라 두었으니 어찌 고소하지 않을 것인가.
대보름이 되면 아이들은 동네 어귀에 모여 연날리기도 하였지만, 꽁꽁 언 논에서는 팽이치기와 들판에서는 썰매타기도 빠지지 않았다. 어떤 날은 날이 풀려서 어름이 얇아진 것도 모르고 지치다가 그만 빠져버려 옷을 적시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때면 항상 짚불을 피우고 말리던 기억도 새롭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쥐불놀이로 마감을 하였다. 어른들은 낮에 논밭의 두렁을 태웠지만, 아이들은 저녁에 넓은 공터로 나와 불깡통을 돌리기에 정신이 없었다. 솔가지나 솔방울을 넣어 만든 불깡통이 휙휙 돌아가면 마치 도깨비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불이 여러 개가 합쳐지면 깜깜한 밤하늘에 장관을 이룬다. 그러다가 힘을 주어 내던지면 땅바닥에 떨어진 불씨가 온 사방에 퍼지면서 불꽃놀이의 불티가 되어 날아갔다. 그러면 모든 불깡통 돌리기가 끝나고 아이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집으로 돌아갔던 생각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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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보름에 해야할 일들이 참 많기도 하네요 어릴적 논두렁에서 내 나이만큼 쥐불을 놓았던 기억이 생생하게 납니다. 어머니는 왜 하필 마을 앞 우리집 논두렁에 가서 친구들이랑 쥐불을 놓으라고 했는지 어릴적에는 정말로 몰랐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