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8년 1월13일자 <로로르>지 1면에 게재된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공개 선언문.
이 땅에서 권력의 무능과 부패에 저항하는 ‘갑오농민전쟁’과 그에 이은 ‘청일전쟁’으로 백성들이 고통 받던 1894년, ‘자유 · 평등 · 박애’를 기치로 하고 있던 프랑스공화국에서는 ‘반(反)유대주의’의 광풍이 유대계 육군 장교 드레퓌스 대위에게 간첩이라는 올가미를 씌우는 군사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거친 바람 앞에서 거의 모든 언론이 침묵하거나 오히려 선동하며 부채질을 하고 있었고, 가톨릭교회는 유대인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에밀 졸라는 이미 ‘목로주점’ 등으로 베스트셀러 작가의 명성을 누리고 있었지만 이 사태를 묵과할 수 없었다. 그는 편안하게 지내는 길을 버리고, 이 부당한 사태의 전말을 대중에 알리고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격문을 여러 편 발표하면서 본인도 피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그가 드레퓌스 사건 진행 과정에서 쓴 11편의 글을 묶은 이 책을 읽고서 책 뒤에 이렇게 적었다. ‘120년 전 프랑스의 양심적 지식인이 외롭게 냈던 목소리가 왜 지금 이 땅에서 생생하게 들리는가?’
“최악의 사실은 물줄기를 역류시켜야 할 이때 용감한 사람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 진실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들마저 진실을 밝히기를 주저하고 있으며, 애써 진실을 밝히는 고통을 모면할 수 있도록 진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교회는 황량해졌고, 민중은 더 이상 신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민중에게 반유태주의적 광기를 불러일으켰고 광신주의에 중독되게 했으며, 거리로 뛰쳐나가 이렇게 외치게 했다. ‘유태인을 타도하자! 유태인을 죽이자!’ 새로운 종교전쟁이 시작된다면, 교회로서는 얼마나 큰 승리일까!”
“우리는 독자의 타락한 호기심을 자극해서 돈을 버는 언론, 더러운 신문을 팔기 위해 대중을 탈선시키는 언론을 보았다. 방탕을 암시하는 제목을 대문자로 넣어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저속한 신문들은 어둠 속에서 호객 행위를 하는 매춘부와 다를 바 없다. 방탕의 암시야말로 그들이 흔히 쓰는 파렴치한 상술이다.”
언론계·가톨릭교회와 지식인들에게 ‘광신주의자’ ‘매춘부’ ‘파렴치한 상술’이라고 하는 이 절규가 120년 전 프랑스가 아니라 2015년 대한민국의 현실을 질타하고 있는 목소리로 들리지 않는가. 그러나 에밀 졸라는 잘못을 질타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진실은 전진하기에 묻어둘 수 없다’고 믿으며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 분노에 찬 군중들에 둘러싸인 졸라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 한쪽에는 햇빛이 비치기를 원치 않는 범죄자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햇빛이 비칠 때까지 목숨마저도 바칠 정의의 수호자들이 있습니다. (…) 진실이 땅속에 묻히면 그것은 조금씩 자라나 엄청난 폭발력을 획득하며, 마침내 그것이 터지는 날 세상 모든 것을 날려버릴 것입니다.”
당시 대통령 펠릭스 포르에게 보낸 위 글 중 한 구절은 시원하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 글을 쓴 사람이 저명한 작가 에밀 졸라가 아니라 보통 시민이었다면 징역형이 아니라 교수형에 처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배심원들 앞에서 분명하게 자신의 인생과 명예를 걸고 “드레퓌스는 무죄”라고 말한다. “제가 이룬 모든 것, 제가 획득한 명성, 프랑스 문학의 확산에 기여한 제 작품들에 기대어 저는 드레퓌스가 무죄가 아니라면, 제 작품이 사라져도, 제가 이룬 그 모든 것이 무너져도 좋습니다! 그는 무죄입니다.” 그러나 드레퓌스는 에밀 졸라가 의문의 가스 중독 사고로 사망한 지 5년 뒤인 1906년에야 무죄로 공식 인정되고 복권이 이루어졌다. 에밀 졸라의 말대로, 진실은 아무리 땅 속 깊이 묻어두려고 해도 언젠가 터져 나오는 것임을 증명하였지만, 그 진실의 회복에는 큰 희생이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 이 글은 가톨릭프레스와 법보신문에 동시 게재합니다.
[필진정보]
이병두 : 문화체육관광부 전 종무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