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ncent Van Gogh (3)
Dutch(Hollander) Painter Post Impressionism
1853. 3.30 ~ 1890. 7. 27
Two Cypresses,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USA
1889년 고흐는 반복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면서
그 해 5월 생 레미(Aaint Remy) 정신병원에 자발적으로 찾아가 입원했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을 멈출 수 없었던 그는
그곳에서 감시원을 동행한 채로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반 고흐가 생 레미에서 발견한 중요한
모티브는 병원에서 바라보이는 밀밭과 싸이프러스 나무였다.
밭이나 산을 배경으로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싸이프러스 나무는
그에게 있어서 마음의 번민에 위안을 주는 희망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는 이 모티브로 여러 작품을 남겼는데 싸이프러스 나무와 함께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는 듯한 붓터치를 이용한 표현은 이 시기 작품의 특징을 이룬다.
반고흐는 비평가 알베라 오리에(Albert Aurier)에게
이 모티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했다.
“싸이프러스 나무는 시골 풍경의 전형입니다.
해바라기에 필적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와는 전혀 반대되는 이미지로 나에게 영감을 주는 소재이지요.”
실제로 해바라기가 아를에 머물던 시기의 그가 느꼈던 심적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면,
싸이프러스는 생 레미 시기의 그의 심리를 대변하는 매개체이다.
이 작품 속에서는 산도, 하늘도, 대지도, 모든 요소들이
살아서 꿈틀대는 사이프러스 나무에 맞추어 호흡하고 요동치는 것처럼 보인다.
불타오르는 듯한 격렬한 붓질로 그려진 나무와 무성하게 갈린 들판의 풀, 휘몰아치는 하늘 등
각각의 요소가 나름대로의 강렬함을 띄고 있으면서도
반 고흐의 억제된 색조 표현을 통하여 지극히 조용한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고흐역시 이 작품을 매우 아꼈으며 ‘내가 그린 가장 명석한 작품’이라며 스스로 평가하기도 했다.
The All-Knight Café at Arles
고흐와 고갱이 자주 가서 압상트를 즐기던 카페 드 라 가르 (Cafe de la Gare)이다.
“카페는 사람들이 자신을 파괴할 수 있고 미칠 수도 있으며,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해.
'밤의 카페'를 통해 그런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어.
부드러운 분홍색을 핏빛 혹은 와인 빛 도는 붉은색과 대비해서,
평범한 선술집이 갖는 창백한 유황빛의 음울한 힘과
용광로 같은 ‘인간의 끔찍한 열정’을 표현하고 싶어 지옥 같은 분위기를 부각하려 했지.”
-1888. 9. 8-
의도적으로 피와 같은 붉은 색과 어두운 노란 색, 당구대의 초록색‘등을 대조적으로 사용했다.
‘색채는 열렬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관적인 그의 견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L'Arlésienne Madame Ginoux with Books
고흐는 늘 고뇌하였다.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서,
살아가고 물감을 살 돈이 없어서, 동생에게 짐이 되는 죄스러움을 갚을 길이 없어서...
그래서 그의 영혼은 늘 가난했고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고흐는 자신이 늘 동생에게 신세져야 한다는 사실을 미안해했다.
언젠가 좋은 값에 그림이 팔려 테오에게 진 빚을 다 돌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편지에 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의 표현은 늘 빠지지 않았다.
편지에서 고흐는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을 ‘내 영혼을 줄게’라는 표현으로 전했다.
고흐의 그림은 고흐의 영혼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러나 테오는 형을 존경했고, 늘 걱정했고, 형의 그림을 사랑했다.
그를 도울 수 있는 것에 감사했고, 여유롭진 않았지만 돈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내 영혼을 줄게.“
“형과 나는 몸은 둘이지만 한사람이야. 형은 정신이고, 나는 육체라구.”
한편의 드라마 같은 짧은 인생을 살다 간 그의 형제들의 고통과 번민에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
The All-Knight Café at Arles (Portrait of Madame Ginoux)
고흐와 고갱은 지누 부인(드 라가르 카페 주인)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 그림으로 그들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흐는 탁자에 몇 권의 책이 펼쳐진 우아한 지누 부인을 그리지만,
고갱은 싸구려 술 압생트 병과 술잔이 놓여있고 뒤에는 고흐가 아버지처럼 좋아하고 따르는
우체부 룰랭이 창녀들을 희롱하는 모습을 그렸다.
술에 취해 탁자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종종 그림을 같이 그리는 고흐의 친구라고 한다.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고흐는 자해 사건 이후 귀에 붕대를 감은 자신의 모습을 두 점의 자화상에 담았다.
그 중 하나인 이 그림은 다른 것에 비해 더 미묘하고 성찰적인 느낌이다.
발병 후 2주가 지나 그린 이 그림은 차분하고도 기품 있는 고흐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강한 빛 아래서 자신과 침착하게 대면하고 있는 고흐는
그가 아직 훌륭하게 살아 있음을 주장하는 듯하다.
이 이미지는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신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화가이기 때문에 겪은 발작이었기를 바란다. 하루하루 내 머리는 평온을 회복하고 있다."
테오에게 이렇게 썼지만
실은 그의 불운의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고흐가 귀를 잘랐던 사건-
고흐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고갱이기에
비용을 절감하고 작품 구상의 의논생대로도 좋을 것 같아
당시 같이 춥고 배고팠던 고갱에게 함께 기거하기를 고흐의 여러 번의 요청 끝에
드디어 10월 고갱이 아를에 도착했다.
가난했지만 마흔 살 고갱과 서른다섯 고흐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고 서로를 아껴주었다.
몽펠리에로 파브르 미술관에서 쿠르베, 들라크루아의 소장품을 함께 감상하기도 하고
야외로 그림을 그리러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화기애애한 생활은 성격적인 충돌로 오래가지 못했다.
서로를 지배하고픈 욕망과 자신의 예술성을 라이벌에게 과시하고픈 욕망,
고흐의 격한 분출 등... 예술에 관해 의견이 달랐던 그들은 격렬하게 논쟁하기 시작했고,
반 고흐는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고갱이 그를 버릴 것만 같은 공포감에 점점 휩싸였다.
1888년 12월 23일 실의의 빠진 반 고흐는 날카롭게 고갱과 대립했다.
패닉에 빠진 반 고흐는 호텔을 떠나 창녀촌으로 달아났고,
왼쪽 귀를 잘라 휴지에 감싼 다음 레이첼(Rachel)이라는 창녀에게 건네주면서
“이 오브제를 잘 보관하라”고 부탁까지 했다.
한 편, 고갱은 그길로 아를을 떠났고 다시는 반 고흐를 보지 않았다.
‘노란 집’에서 같이 지낸지 약 두 달 만이었다.
동생 테오가 고갱의 연락을 받고 병원에 입원한 형을 방문했다.
1889년 1월, 화가 폴 시냑이 방문해
반 고흐가 다시 ‘노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만
잦은 환각과 발작, 망상으로 병원과 집을 번갈아 다녀야 했다.
30명의 마을 사람들은 반 고흐를 ‘빨간 머리의 정신병자’라고 부르면서
탄원서를 제출했고 경찰은 그의 집을 폐쇄했다.
그 사건 이후 반 고흐는 반복되는 극심한 정신 착란으로
1889년 4월 스스로 생 레미(Saint-Remy) 지방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찾아가 입원하게 된다.
37년간의 짧은 삶 속에 힘겹던 그를 지탱해주던 두 축이었던 고갱과 테오.
177통의 편지에서 고갱의 이름이 605번이나 언급될 정도로 고갱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고흐였다.
동료 예술가로서 존경하고 마음이 맞는 구세주이자
스승이며 형과 같은 친구라고 생각했던 고갱과의 불화는
고흐를 거의 회복이 불가능한 고통의 깊은 수렁에 빠트렸으며
자기 귀를 자르는 극단적인 사건으로 비화했다.
이것이 그의 삶에 있어서 최초의 발작이었다.
그의 짧은 인생의 참담한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생 레미 정신병원의 병실
1889. 4
“이곳으로 오길 잘한 것 같다. 동물원 같은 곳에 갇힌 미친 사람들의 생활을 직접 보노라면,
막연한 불안이나 공포가 사라진다.
그러면서 정신병도 다른 질병과 같은 병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1889-
1889년 4월말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고흐는 프로방스의 생 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찾아가 스스로 입원하여
1년 남짓 병원의 빗장이 쳐진 독방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며
감사자와의 동행 하에 야외에서 그림을 그린다.
빈센트 형에게
“형이 생 레미에 무사히 잘 도착했다니,
그리고 아를에서보다 더 편 안한 느낌이라니 정말 기뻐.
하지만 형이 그곳에 너무 오래 머물지는 않길 원해.
주변에 그렇게 많은 정신이상자들이 있는 게 그리 유쾌하진 않을 테니까.
내가 원하는 건 형의 생활을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서
한편으로 형을 자유롭게 해주는 곳을 찾는 거야.”
-1889. 5. 22 테오-
Old Man in Sorrow
“이곳 환경이 나를 말할 수 없을 만큼 짓누르기 시작했어.
이런, 어느새 참고 지낸 지도 일 년이 다됐구나. 신선한 공기가 필요해.
여긴 너무나 지루하고 슬픈 곳이란다. …
비록 마음에서 우러나와 따뜻하게 보살펴 준다 해도 다른 사람의 감시를 받으며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버리는 삶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자유를 희생하고 스스로를 사회에서 격리시키고
그리고 아무런 방해 없이 작품에 몰두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는 상태야. 이곳에서 시간을 너무 낭비했다.”
-1890년 5월-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서 감금되어 있을 때 비참한 심정으로 쓴 편지다.
테오에게 부탁하여 1890년 5월 고흐는 생 레미의 병원에서 나와
가셰 박사가 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로 떠난다.
Street in Auvers-sur-Oise
“오베르는 무척 아름답단다. 그중에서도 요즘에는 보기 드문 오래 된 초가가 그렇지.
거기에는 정말로 심오한 아름다움이 있어.
이런 곳이야말로 진정한 시골이라 할 수 있을 거야. 매우 특색 있고 회화적이거든.”
-1890년 5월-
병원에서 퇴원하고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와서 느낀
새롭고 경이로운 풍경에 대한 편지다.
“그림에 대해 좌절하지 않는 정열이 있고
자연의 색에 대한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면 말일세.
수많은 난관이 닥치더라도 예술가는 이곳에서 버틸 수가 있다네.
난 좀 더 오래 머물 생각이야.”
“자연은 처음에는 언제나 화가의 접근에 저항을 하지.
하지만 자연을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화가라면
그 정도의 저항에 쉽게 물러서지는 않을 거야.
오히려 그런 저항이야말로 승리를 거머쥐기 위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겠니?
그리고 자연과 진정한 화가는 그 근본에서 서로 일치하는 것이란다.
확실히 자연은 '손에 잡히지 않는' 대상이지만 그래도 화가는 자연을 움켜쥐어야 해.
그것도 아주 단단히 말이야. 그렇게 한바탕 씨름을 하고 나면
이제 자연도 조금 유순해지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거란다.”
Four Cut Sunflowers
고흐의 상징이자 태양의 상징, 태양과 노란 색에 미쳐버린 화가 반 고흐.
1888년 동생 테오(Theodorus van gogh 1857-1890)에 보낸 편지의 내용 중
"자냉(Goerges Jeannine)에게 작약이 있고 쿠스트(Ernest Quost)에게 접시꽃이 있다면
나에게는 해바라기가 있다."
그가 얼마큼 이 꽃에 매료되어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1888년부터 아를(Arles)의 작업실에서 해바라기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 연작은 훗날 그에게 ‘태양의 화가’라는 호칭을 안겨 주었다.
1888년에 제작된 <해바라기>는 생명력이 넘치며
마치 태양을 쫒아 절규하는 듯한 노란색으로 표현 되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향한 자신의 봉사와 고통이 부족하다고 울던 고흐가
몇 년 만에 파리에서 가장 시끄럽고 난잡한 술집에 앉아
신을 저주하는 사람들과 밤새도록 어울리던 시기로 압생트에 과하게 취한 시기이기도 하다.
압상트에 취하듯 노란 색에 미쳐있었다.
The House in Auvers-sur-Oise, Boston Museum of Fine Arts USA
“저는 계속 고독하게 살아갈 것 같습니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도 망원경을 통해 희미하게 바라보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격렬한 색채, 맹렬한 붓질과 몇 번씩 덧바른 물감, 소용돌이,
고통과 불안, 외로움 등 빈센트의 내면의 고뇌에 찬 삶의 통찰을 나타내는 이 모든 것이
그의 그림을 통하여 가슴 뭉클한 정신적, 심리적 메시지를 전한다.
“그래, 나의 그림, 그것을 위해 나는 나의 목숨을 걸었고 이성까지도 반쯤 파묻었다.”
다시 정신적 고통으로 힘들어진 때이다.
Irises, J.Paul Getty Museum Malibu CA USA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의 그림이다.
해바라기, 아이리스, 히아신스, 체리블로섬, 아카시아, 들장미, 아네모네… 등
수많은 꽃들을 모델로 삼았던 고흐는 자연과의 끊임없는 씨름 후에,
태양을 의지해서 자라나는 꽃들과 자연을 연인처럼 사랑했다.
고흐는 표면적으론 삶에 대해 부정으로 일관하는 사람 같았지만,
사실 그 속엔 누구보다도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는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Portrait of Dr. Gachet Seated at a Table Auvers-sur-Oise
정신병의 전문 의사였던 가셰 박사는 아마츄어 화가이기도 하면서
폴 세잔을 비롯한 많은 화가들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다.
피사로의 추천으로 반 고호를 돌보게 되었는데 나중엔
반 고흐를 이해하는 좋은 친구가 되었던 인물이다.
“이제 가셰 박사를 빼고는 나를 지켜 주는 것이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구나.
그만은 계속 내 친구이리라 생각한단다. 그의 집에 갈 때는 그림이 그렇게 나쁘지 않아.
앞으로도 매주 일요일이나 월요일에는 박사가 나를 불러 줄 것 같구나.”
-1890년 6월-
또한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었던 가셰 박사는 흥분하기 쉬운 성격이었다.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고흐는 이따금 둘 중 누가 더 심하게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걸려서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인지 생각하기도 해서
테오에게 “가세박사는 나보다 더 아픈 것 같애....”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가셰 박사를 모델로 그는 한 심약하고 선량한 사람의 인상으로 뛰어난 초상화를 남겼다.
이 는 그의 유명한 그림 중의 하나다.
그 이유는 빈센트 생애 마지막 즈음에 그렸고,
그 주제가 오늘날까지 Controversy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How competent was doctor Gachet?
What did Vincent mean When he wrote to Theo?
" First of all, he is sicker than I am. I think, or Shall we say just as much? "
또한 가셰 박사의 딸 마르그리트는 고흐의 마지막 사랑이기도 하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아름다운 풍광에 매혹되어 작업에 매진하고
정서적 안정을 찾아가던 고흐는
자신의 주치의의자 친구로서 신뢰했던 가셰 박사에게 거절당하자
또다시 광기에 사로잡히고 만다.
예술가로서 고흐를 높이 샀던 가셰 박사였지만 자기 딸 마르그리트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고 생활 능력이 없는 고흐와
가까워지는 것을 그대로 둘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딸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의사 가셰와 심하게 다툰 후,
가셰의 집과 자기 숙소 사이에 있는 밀밭에서 권총으로 자해하고
그 이틀 뒤 그의 불행했던 삶을 마감한다.
이 작품은 1990년 5월 미국의 미술품 경매회사 크리스티에서
경매 시작 3분 만에 8,250만달러(한화792억원)에 낙찰됐다.
구매자는 일본의 제지업자 료에이 사이또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을 통해 고흐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Sunset at Willow, -1888. 8-
“어쩌면 지금 형을 보면 못 알아보실 지도 모르겠네요.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저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더 놀라곤 한답니다.
위가 너무 안 좋아서 위를 거의 못쓰게 되면서는 큰 수술을 받았어요.
의사 말로는 이제 완전히 나았다고 하네요. 형의 그림은 굉장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답니다.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아직 돈을 받고 그림을 팔지는 않지만 다른 화가의 그림과 맞바꾸는 일은 종종 있어요.
그런 식으로 괜찮은 작품들도 꽤 모았는데, 물론 모두 상당히 가치 있는 작품이랍니다.
한 미술상은 형의 그림을 네 점이나 가져갔는데 내년에는
형의 전시회를 열어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요즘은 주로 꽃 그림을 그리고 있답니다. 한 작품 한 작품 할 때마다
좀더 생기 넘치는 색상을 표현해 보려 하고 있지요.
예전보다 훨씬 더 활기차졌고
이곳 사람들 역시 형을 좋아해요. 매일 유명한 화가의 작업실을 방문하기도 하고
그 사람들이 형을 찾아오기도 한답니다. 어떤 사람은
그림의 소재가 될 꽃을 매주 보내주기까지 해요.
그런 사람들이 계속 있는 한 이제 형에게도 힘든 시절은 다 지나갔다고 할 수 있겠지요.
앞으로는 혼자 힘으로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흐를 걱정하는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쓴 테오의 글-
Road with Man Walking, Carrige, Cypress, Star and Crescend Moon
“최근에는 옆으로 별 하나가 보이는 사이프러스나무 그림을 그리고 있네.
눈에 뜨일락 말락 이제 겨우 조금 차오른 초생 달이 어두운 땅에서 솟아난 듯 떠 있는 밤하늘,
그 군청색 하늘 위로 구름이 흘러가고, 그 사이로 과장된 광채로 반짝이는 별 하나가 떠 있지.
분홍색과 초록의 부드러운 반짝임이야.
아래쪽에는 키 큰 노란색 갈대들이 늘어선 길이 보이고 갈대 뒤에는
파란색의 나지막한 산이 있지.
오래된 시골 여관에서는 창으로 오렌지 색 불빛이 새어나오고,
키가 무척 큰 사이프러스나무가 꼿꼿하게 서 있네.
길에는 하얀 말이 묶여 있는 노란색 마차가 서 있고,
갈 길이 저물어 서성거리는 나그네의 모습도 보인다네.
아주 낭만적이고 프로방스 냄새가 많이 나는 풍경이지.”
-1890. 6-
고흐는 프로방스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그린 마지막 작품 중의 하나인 이 그림을
유명한 비평가 알베르 오리에르에게 선물로 주었다.
알베르는 [르 메르퀴르 드 프랑스] 지에 고흐에 관한 최초의 진지한 기사를 써서
그에게 많은 용기를 주었다.
"그는 위대한 화가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미술과 팔레트, 자신의 성격에 스스로 황홀해지는,
상상과 환상 속에 사는 광신적인 신봉가이다."
반 고흐의 전 생애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단 한 번의 논평이었다.
Wheat Field under Clouded Sky
“건강을 위하여 뜰에서 제작을 하고, 꽃이 피는 것을 보기도 하는 것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바다와 같은 넓은 언덕을 향하여 펼쳐져 가는 보리밭의 그림에 지금 열중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3점의 대작의 하나로, 이것도 어두운 폭풍 속에 있는 밀밭이다.
“저는 완전히 이 밀밭의 대작에 소모당하고 있습니다”
라고 그는 어머니에게 써 보내고 있었다.
그가 자살을 시도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이 작품은 색채 면에서 '까마귀가 있는 밀밭'만큼 불길해 보이지 않지만,
무서운 공백감은 불길 이상의 종언의 예고와도 같은 작품이다.
Red Vineyards of Arles
1888년 2월 반 고흐는 무절제 했던 파리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프로방스(Provence)거쳐 아를로 떠났다.
맑은 하늘아래 그의 영혼과 예술 사이에 또 다른 교감이 시작되고
그곳의 따뜻한 태양아래에서 내면의 빛을 되찾게 되었다.
이 작품은 1888년 폴 고갱과 함께 생활하며 아를의 야외에서 그린 작품이다.
‘비가 내린 뒤 석양이 땅을 보라색으로 바꾸고
포도 잎을 와인처럼 붉게 물들일 때 그린 것이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테오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선물한 그림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그가 생전에 그린 1500여 점의 그림 중에서
테오가 단 400프랑에 팔았던 유일한 작품이다.
테오는 이 작품을 1890년에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20인 전에 출품했는데,
그 때 반 고흐와 친분을 쌓고 있었던 시인 외젠 보흐의 누이이자
벨기에 인상주의 여류화가인 안나 보흐가 구입했다.
이후 이작품은 한 러시아 사업가를 통해 러시아 정부가 소유하게 되었으며
현재는 모스크바의 푸슈킨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Wheatfield with Crows
고흐가 자살하기 전 그린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그림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로 죽음의 공포와 그에 반한 삶의 의지를 그린 것이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와서는 새로운 시도로
가로로 긴 캔바스에 그려 밀밭의 광활함을 강조했다.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그렸으나
Wheat Field under Clouded Sky 그림의 평온함과는 상반된 심리상태를 보인다.
고흐의 그림은 항상 자신의 내면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세상을 향한 소통의 매개체였다.
다만 세상으로부터 적절한 응답을 못 들었을 뿐...
“그것은 폭풍의 하늘에 휘감긴 밀밭의 전경을 그린 것으로
나는 깊은 슬픔과 극도의 고독을 표현하려고 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전경의 세 갈래의 갈림길은
자살 직전 그의 절망감을 강하게 상징하는 듯하다.
, 대지가 폭풍 속에서 바다처럼 사납게 일렁이는 여기에선
요동치듯 거칠고 절박한 붓질로 그려진 어둡고 낮은 하늘과 불길한 까마귀 떼,
불안한 화면을 통하여 그는 영혼의 혼란과 고독, 슬픔을 절규하고 있다.
“앞날의 예감도 어둡다. 나는 미래를 행복한 빛 속에서 보는 것은 전혀 되지 않는다.”
끝없는 절망감은 그를 못견디게 했다.
네덜란드라는 나라는 산이 드문 나라이다.
어디를 바라보나 까마득한 지평선 끝까지 파란 논밭이 이어져 있다.
군데군데 집과 풍차와 숲이 흩어져 있고, 강물이 언제나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그런 지평선 끝에 빨갛게 타는 저녁 해가 하늘을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고
조용히 가라앉으려는 순간이었다.
“야, 저것 좀 봐라! 얼마나 아름다우냐?”
풀밭에서 공차기를 하며 놀고 있던 대 여섯 명의 어린이 중 한 아이가 외쳤다.
“어쩌면 저녁 해가 저렇게 빨갈까?”
공기가 맑은 탓인지 오늘따라 저녁 해가 유난히도 아름답게 보였다.
어린이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말했다.
“정말 아름답구나!”
“피보다 더 빨갛지?”
그러자 아까부터 숨을 죽이고 뚫어지게 저녁 해를 바라보고 있던 한 아이가,
“틀려, 저건 빨강 빛이 아니고 노랑 빛이야.”하고 나섰다.
“뭐? 노랑 빛깔이라고? 네 눈엔 저게 노랗게 보이니?”
여러 아이들은 놀란 얼굴로 그 아이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보이는 게 다 뭐냐? 정말 빛깔이 노랑인데...”
“뭐라고? 저건 누가보든지 빨강빛깔이야. 그렇지 얘들아?”
“응, 그렇고말고. 저건 빨강이야.”
어린이들은 모두 빨강 빛깔이라고 말했다.
“네 눈이 좀 이상한 모양이구나.”
“이상한 건 내가 아니고 너희들이야.
그래서 너희들은 정말 빛깔을 보지 못하고 있어.”
저녁 해를 노랑빛깔이라고 우겨대는 그 어린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저녁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어린이가 바로 뒷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가 된 빈센트 반 고흐였다.
반 고흐는 네델란드의 어느 가난하고 엄격한 목사의 집에서 칠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불행했던 인생은, 자기가 태어나기 일 년 전에 죽었던 형으로 부터 시작한다.
자신보다 1년 전에 태어난 형이 사망한 뒤 태어난 고흐는
어머니로부터 대체된 아이라는 느낌을 매번 받아야 했다.
사망한 형의 이름까지 물려받은 고흐는 일요일마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묘지를 봐야했고,
어머니에게 죽은 형의 존재를 뛰어넘는 사랑을 바랬지만, 형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진지하고 조용하고 생각이 깊었던 반 고흐는 성격이 점점 어두워졌다.
가난으로 인해 열다섯 살 되던 해에 학교를 그만 두고
목사이던 아버지를 따라 성직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제도화된 종교 사회에서의 이면의 그늘을 받아들일 수 없어
목사의 길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 후 삼촌의 도움으로 구필 앤 씨(Goupil & Cie)에 일자리를 얻어
아트 딜러로 런던에서 일을 한 적도 있다.
그의 종교적 열성은 계속되어 신학공부를 위해 평 선교사로
잠간 동안 석탄 광산마을에서 광부들과 기숙하며 선교활동을 하기도 한다.
브뤼셀에 있는 로열 아카데미 오브 아트에서 그림공부를 하면서
그림만이 구원의 길이라 생각하여
그림을 통해 하느님에게 봉사하기를 원했고, 하느님에게 인도하는 화가가 되기를 바랐다.
선생의 지도도 없이 독학과 독습으로 땅을 일구는 농부처럼 그림을 그려 나간다.
적은 돈, 적은 힘일지라도 온통 독서와 그림에 쏟아 붓는다.
“끓어오르는 내면의 불길, 어떻게 분출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나는 억지로 그 불길을 다잡고 있다.”
첫 주요 작품이 그 유명한 이다.
그때부터 동생 테오의 재정적 도움을 받으며 서신왕래와 함께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열성적으로 많은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 하지만 지속되는 가난함과
미래에 대한 어두운 현실은 결국 그에게 우울증이라는 정신장애를 가져다주었다.
1986년 파리로 옮겨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하면서 인상파의 아름다운 색채와
화려한 일본 미술을 접하게 되고 그것이 그의 화려하고 밝은 색채를 쓰는 계기가 되었다.
고갱, 쇠라, 피사로 등..인상파 작가들과 전시도 하면서 활발한 교류도 하지만
무절제한 파리생활에 지친 고흐는
1888년 2월 그동안 그린 200여점의 작품을 가지고 남프랑스의 아를로 떠난다.
아를에서의 활기찬 밝은 햇살과 풍경은 과한 음주와 흡연으로 쇠약해진 그를
흥분시키며 색깔은 점점 강열하고 밝아졌다.
고흐는 ‘노란 집’에 세 들어 고갱을 기다리며 유명한 ‘해바라기’를 연작으로 그린다.
고갱과 같이 지내며 예술에 관한 견해차이로 격렬하게 논쟁이 시작되어
마침내 귀를 자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갱은 같이 기거한지 두 달 만에 떠났고
그 충격으로 환각과 망상에 시달리다가 생 레미(Saint-Remy) 지방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스스로 찾아가 입원을 했다.
1년 남짓 정신병원에 고립 되어 있으면서 그의 작품은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포함해
소용돌이치는 특징으로 강렬한 색과 결합되어 감정을 더욱 격렬하게 표현한다.
더욱 열정적으로 꿈틀거리는 듯한 선은 별의 광채를 한층 두드러지게 하고
사이프러스와 올리브 나무의 이미지들을 떠오르게 한 곳이다.
1890년 5월, 반 고흐는 정신병원을 떠나 파리 근교의 오베르(Auvers-sur-Oise)의
닥터 가셰(Paul Gachet) 가까이 옮겼다.
그곳에서 가셰 박사의 깊은 이해로 마음의 안정을 갖는 듯 했으나 얼마가지 못했다.
비록 그가 전 인생에 걸쳐 정신적인 병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그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이러한 고통은 더욱 심각해져갔다.
능력의 절정에서 예술가의 좌절이 더해진 결과 그 당시 그의 심리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고,
오베르로 온지 두 달 만에 반 고흐는 37세인 1890년 7월27일에
밀밭으로 가득한 들로 뛰쳐나가 가슴에 리볼버를 당겼다.
'아지랑이 가물거리는 오후,
마을 위로 누런 밀밭의 대기가 한방의 총소리로 흩어질 때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사나이는 서른일곱 살의 빈센트 반 고흐였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고 얼마나 치명적인 상태인지 알지 못한 채 라부 여인숙으로 돌아와
이틀 뒤 동생 테오가 바라보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많이 아프고 짧았던 비운의 삶, 그는 그렇게 갔다!
“인생의 고통이란 살아있는 그 자체다.”
“La tristesse durera toujours(고통은 영원하다, The sadness will last forever)”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불멸의 화가이자 현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렘브란트 이후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인상주의, 야수파, 추상주의, 표현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고흐다.
불꽃같은 정열과 격렬한 필치로 눈부신 색채를 표현했으며,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빈센트 반 고흐.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색채, 거친 붓놀림, 뚜렷한 윤곽을 지닌 형태를 통하여
그를 자살까지 몰고 간 아픈 영혼의 고통을 인상 깊게 전달하고 있다.
서른일곱 해의 짧은 생을 살면서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며 늘 고독했던 그는
노동자와 농민 등 하층민의 모습과 자연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소박한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고,
영혼을 담아 그림을 완성했던 그는 그림을 통해서만 말을 할 수 있는 고독한 사람이었다.
종교적인 신념,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했던 고흐의 삶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채,
고독과 가난 속에서 온전히 예술을 위해 바쳐졌다.
“예술은, 사람의 영혼에서 솟아나오는 것”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창조하고 행동하는 것”
완전히 자신을 던져버린 채 작업을 했다. 영혼을 다해 그림을 그린 것이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의 고뇌와 열정의 강열한 랩소디이다.
그러나 정작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후에야
그의 작품들은 불후의 명작이 되었고, 삶은 신화로 남았다.
한 인간의 고뇌와 슬픔이 내 마음을 이렇게 울린 적은 없는 것 같다.
내가 고흐가 되어 울다가, 가슴이 답답하다가... 우울하다가,
희망을 가져보다가 또 절망하다가....
마치 내가 그의 처연한 인생 여정을 함께 밟아온 것처럼 마음이 같이 치달았다.
온통 고흐 생각으로 가득 차서 그의 아름답고 슬픈 영혼 속으로
빨려들 듯 휘말려 들어갔다.
어질고 연약한 그가 예술의 열정으로 얼마나 눈물겹게 그림을 사랑하였는지,
세상과 사람과 사물을 얼마나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는지....
그가 얼마나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애썼는지...
그러나 얼마나 아팠는지....
자신조차 넘치고 제어하지 못하는 감정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또한 그의 넘치는 감정 때문에
깊은 외로움에서 고통스러워하는 하는 예술가로서의 숙명.
감당할 수없이 넘치는 감정으로 인해 사람과의 관계에 극심한 절망과 외로움을 느낀 나머지
그의 삶은 더 고독해지고 더 어려워지고 더 우울해 졌다.
너무나 순수하고 연약하여 부서지기 쉬운 영혼을 가졌던 반 고흐.
그러기에 존재에 대한 격한 사랑을 견뎌낼 수 없었던 사람,
그렇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하늘의 운행과 바람의 숨결과 별의 노래를
온몸으로 느끼고 또 그려낼 수 있었던 화가.
바로 그런 진실함이 우리에게 어떤 설명할 수 없는 엄숙함으로,
처연함으로 다가오는 그. 그의 작품이 지닌 진정한 가치는
반 고흐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영혼에, 삶의 이치에, 하늘의 부름에 진실했던 작가가 아니었을까.
아침에 눈을 뜨면... 가만히 생각하면... 뻐근하게 저려오던 순간들이
곧장 내 아픔이었다.
고흐가 내 안에서 아프게 울었다.
또 다시 나는 생각한다.
그동안 미처 깨닫지 못했던,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고흐의 모습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느낀다.
‘광기의 화가’ ‘고독한 존재’였던 화가라고 흔히 생각하는 고흐가
실은 그림과 편지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그 어느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진실을 우린 알아야 하지 않을까.
미치광이 같은 광기어린 예술가가 아닌,
누구보다 미술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산 예술가인 고흐의 삶과 작품,
비록 고독에 몸부림치며 좌절과 불안이 그의 짧았던 삶을 지배한 것 같지만
그의 내면에서 고이 숨 쉬던 그만의 모습을 나는 본 것만 같다,
주어진 삶 앞에 진지하게 탐구하며 지극히 성실했던 참다운 자세,
순수했기에 적당한 타협을 싫어했던 고지식함,
순수했기에 거침없던 자기감정의 표출....
남다른 그의 과열된 열정 등...
세상이 쉽게 말하는 소위 능하지 못해서, 괴팍한 외골수여서....
그래서 주변과 부딪치며 상처를 받아야 했던 그.
순수했기에 상처마저도 남다르게 크게 받았을 고흐 아닐까!
이러한 모습들이 객관적인 시각의 평범한 타인들의 눈에는 과연 어떻게 비쳐졌을까,
그의 뜨겁고 순수했던 여린 감성을 과연 누가 알아 줬을까!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꽃을 사랑하고
푸르고 너른 하늘 밑 끝없이 이어지는 평화로운 밀밭,
높은 하늘을 향해 끝없이 솟아있는 늘 푸른 사이프러스,
수없이 반짝이는 별 밭들, 해바라기....편지 쓸 때의 그 아름답고 따뜻하던 정이어린 마음....
‘광기의 화가’라는 반 고흐,
그의 안에서 고이 숨 쉬고 있는... 바로 자연인의 아름다운 맑은 영혼이었다.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던 좌절과 기댈 데 없던 고독, 순간 엄습하던 우울, 불안을
오로지 붓 한 자루에 매달려서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흔들리던 그의 맑은 영혼을 꿈틀대는 붓질로 쏟아내던 고흐!
영혼이 아플수록 붓질은 더 꿈틀대며 휘몰리었고
더욱 더 강렬한 색채로 눈이 부신 작품들을 탄생 시켰다.
그건 살아서 꿈틀대는 그의 아픈 영혼의 외침이었다.
고통으로 부서지는 영혼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매달리듯 흔들리는 영혼을 열정적으로 쏟아 낼 때만은 그래도 환희의 순간이었고
붓 자루에 물감을 듬뿍 묻힐 때만은 행복했던 고흐.
오직 그림만이 그의 위안이요, 영혼의 안식이고 구원이고 사랑이었다.
고흐가 고흐로....‘진정한 나’ 고흐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그림을 그리면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나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하드라도 아린 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써도 써도 끝이 없다.
푸른 하늘 우러르면 이 아픈 마음 달래질까!
하늘은 저토록 푸르른데....!
2012. 3. 11. 편집 하늘 새
고갱과 뗄려야 뗄 수 없는 고흐, 같은 시대의 절친했던 동료....
내가 좋아서..그래서 또 이어졌다.
‘정열의 화가’로...강열하고 열정으로 꿈틀대는 붓질의 그림에만 몰입 된 채
피상적이고 건성으로만 알았던 고흐였는데
고흐의 흔적을 따라 쫒으며 깊이 헤집고 들어갈수록
점점 내 가슴에 부딪치며 이입되던 아픔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히곤 했다.
한 줄을 읽고는 눈물짓고 한 줄을 쓰고는... 또 울었다.
짧았지만... 방황하던 맑고 순수한 외로운 한 영혼의 대 서사시에....!
그는 아프게 세상을 떠났고
그리고 까마득한 큰 세월이 흐른 오늘날이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빈센트이지만 그래도 내 울고픈 마음의 위로라도 할 양으로
아니, 그의 아픈 영혼을 어루만져 줄 양으로
이제는 맑은 눈빛으로 환하게 웃고 있을 고흐로 생각해 보고 싶다.
어쩌면 그의 영혼은
푸른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이었다가,
희망처럼 끝없이 솟아오르는 사이프러스로,
때로는 눈부신 태양 같은 해바라기로 피였다가....
끝없이 이어지는 푸른 들의 밀밭을 부드럽게 일렁이며 스치는 바람이 되어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듯 그렇게 떠 돌 것 만 같다.
오늘도 푸른 하늘 밑
어딘가의 밀밭에서 부드러운 바람으로 스치겠지.
어느 누가 그를 품어 안고 사랑하지 않으랴!
벅차도록 길고 긴 여정 같던 고흐와 함께한 많은 아팠던 시간들,
그래서 많이 힘들었던 시간들이었다.
그래도 지금 난 이렇게 모두가 감사하다.
내가 이 엄청난 걸 해 냈다는 것이....
그런데 왜 또 눈물이 나는지...!
고흐가 사망한 그 이 후는...
1889년 4월 17일 네덜란드에서 조한나와 결혼한 테오는,
고흐가 사망한 다음 달인 1890. 8-9 화가이자 고흐의 친구였던 베르나르의 도움으로
파리에 있는 테오의 아파트에서 유작전을 개최하였다.
그런데 테오 역시 10월에 정신병 발작으로 네덜란드로 이송되었고
형이 사망한지 6개월 후인 1891년 1월 25일 테오도 요독증과 정신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23년 뒤인 1914년 네덜란드의 우트레히트에서 이장하여
고흐가 뭍혀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합장하여 안치하였다.
불우했던 반 고흐 형제들의 짧았던 삶은 이렇게 마감되었다.
“그림 그리기는 내게 일종의 구원이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비참했을 거야.”
테오는 물론, 막내 동생 코로, 여동생 빌, 어머니와 두 삼촌 등이
정신 질환이나 우울증을 앓거나 요양원 신세를 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고흐는 유전적으로 정신 질환에 노출될 확률이 높았다.
불행하고 가슴 아팠던 그의 삶은 아마도 그렇게 시작 되었던 것 같다.
고흐가 자살하기 전 마지막까지 살았던 라부 여관은
현재 고흐 박물관으로 바뀌어 있다고 한다.
1962년 빈센트 반 고흐 재단이 창설되었다.
율리아나 여왕에 의해 반 고흐 재단이 설립 된지 13년 만인 1973년 6월2일
암스테르담에 그를 기념 하는 미술관이 설립되었다.
그전까지는 바로 옆에 위치한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슈테데릭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들을 전시해 왔다.
그의 생전 작품 유화 8백70여점, 드로잉 1천 2백여점 중에서
유화 2백여 점, 드로잉 5백50점이 메트로폴리탄 등 세계 각지에 분산되어 있으나
이곳처럼 각 시대별로 고루 수집되어 있는 곳은 없다고 한다.
Tommaso Giordani (1744-1798),Caro mio ben
나의 다정한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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