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이 언더우드 선교사, 부인 부인 릴리아스, 아들 원한경 © 리폼드뉴스 |
리폼드뉴스 설립 12주년 기념으로 ‘총회와 총신대’라는 주제로 기획특집 연재를 준비했다(편집자 주)
【(리폼드뉴스)】한국에 개신교 선교사의 입국 이전인 1882. 5. 22.에 한국 근대 공식 한미 외교 관계는 한미조약이 체결된 다음 해인 1883년 5월 초대 미국공사 푸트(Lucius Harwood Foote)에 의해 주한미국공사관이 설치된 이래 시작되었다.
미국은 한국에 상주한 최초의 공사인 푸트의 직무는 자국민 보호와 미국인 선교사의 신변 보호와 그들의 사업 지원을 포함하고 있었다. 푸트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미국인 선교사인 알렌이 내한했을 때 공사관의 무급의사로 임명하여 한국에 거주할 명분을 제공해주었고 최초의 선교기지 마련에도 도움을 주었다.
공사관부 의사로 알렌을 고용한 것은 신앙의 자유가 허가되지 않은 한국에서 선교사인 알렌의 신분 보호를 위해 푸트가 임시방편적인 묘안을 낸 것이었다. 이 알렌은 1884. 9. 20.에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했다. 개신교 선교사의 최초의 내한이다. 다음해인 1885. 4. 5. 언더우드 선교사가 입국하였으며, 그해 6월 21일 의료선교사인 헤론이 입국했다.
▲ 1883 초대 주한미국 공사 푸트 ©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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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장로교선교회 이외에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 선교부에서는 1889년 데이비스(J. Henry Davies) 남매를 파송함으로서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1892년 미남장로교회의 선교부에서 테이트(L. A. Tate)를 비롯한 6명의 선교사(7인 선발대)를 한국에 파송하여 호남지역을 선교구역으로 하여 사역했다.
황해도 장연의 소래교회에서 1898년 맥켄지의 죽음으로 인해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에서 그리어슨(R. Grieson)를 비롯한 3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그의 사역을 계승했다.
1889년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부 소속의 데이비스가 입국하자 미 북장로교 선교부와 호주 빅토리아 교회 선교부 간에 협의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선교연합공의회」(The United Council of Missions)였다. 이 때 회장으로 헤론(J. W. Heron)이 선출되었다. 데이비스는 서기로 선출되었으며 언더우드, 기포드, 그리고 알렌은 창립위원이었다(Charles A. Clark, Digest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the Korea(Chosen), (Korea Religious Book & Track Society, Seoul, 1918) p. 6.).
연합모임인 「선교연합공의회」는 서너 번의 월례모임을 가진후 서기인 데이비스가 1890년 서울에서 부산으로 선교여행을 한 후에 부산에서 목숨을 잃자 더 이상 모임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1889년 10월 2일 부산항을 통해 한국 땅을 밟은 이후 5개월가량 서울에서 한국 적응훈련을 받았고, 이어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서 일하겠다“며 1890년 3월 14일 서울을 떠나 도보로 부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무리한 여행으로 폐렴과 천연두에 감염된 그는 부산에 도착한 다음 날인 1890년 4월 5일 소천했다.
「선교연합공의회」가 유명부실해지자 1893. 1. 28. “장로교 정치형태를 표방하는 「선교공의회」(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 모임을 가졌다. 이것이 곧 「장로회공의회」이다. 장로회공의회에는 장로교 모든 선교사들이 참석했다(곽안련, 「장로교회사전휘집」 (경성: 조선예수교서회, 1918) pp. 15-6.).
이때 참석한 선교사들은 이눌서, 전위렴, 최의덕(남장로교 선교부 소속), 존스톤(독립선교사), 베어드, 기포드, 마펫, 리, 소왈런, 밀러, 무어, 빈톤(북장로교 선교부 소속)이었으며, 이들 중심으로 장로교 공의회를 조직했다. 이 모임은 빈톤의 집에서 모였다.
공의회의 목적은 한국에 장로교 신경과 장로회 정치를 쓰는 연합교회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 공의회의 권한을 각 소속 선교회에 권고권은 있었지만 교회가 장로회의 규칙대로 완전히 조직될 때까지 전국교회에 대한 전권치리권을 가지는 상회 역할을 했다.
이 장로회공의회는 1893년부터 1900년까지 전체적으로 선교사들로 구성되었고, 호주선교사들과 캐나다 선교사들은 한국에 입국하면서 이 공의회에 가담하게 되었다.
1901년까지 장로회공의회에는 단 두개의 위원회만 있었다. 즉 경성(서울)위원회와 평양위원회였다. 평양위원회는 서울 서쪽과 북쪽의 모든 지역의 사역을 관할하였고, 경성위원회는 그 이외의 지역의 사역을 담당하였다. 여기서 현존하는 서북지역협의회(소위 무지역)의 근거지가 되었다.
그러나 1901년에는 두 개의 위원회가 더 조직되었다. 하나는 남서쪽 전라도 지역을 ‘전라위원회’, 다른 하나는 남동부 경상도 지역을 ‘경상위원회’라 칭하여 담당하였다. 공의회 위원회는 선교지의 지교회를 돕기 위하여 “분과(당회)위원회”(Sessional Committees)를 두어 돕게 하였다(Charles. A. Clark, The Nevius Plan for Mission Work, 박용규 김춘섭 역,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 pp. 126-7).
분과 위원회에서는 세례받기 원하는 자들을 심사. 성례를 마련하고, 징계를 시행하며, 장로 선출을 예정하는 등의 실제적인 당회의 모든 일들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장로의 선출에서는 각각의 특정한 경우에 공의회 위원회의 동의가 필요했다.
1901. 9. 20.에 선교사 중심의 “장로교 정치형태를 표방하는 「선교공의회」를 운영해 오던 공의회에 한국인들도 참여하는 합동공의회로 재편했다. 각 지역 위원회에서 총대들을 대표로 파송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라는 공식 명칭으로 설립되었다.
회장에 소안론, 서기에 부두일, 서경조, 회원으로는 선교사 25명, 한국인 장로 3명 그리고 조사 6명으로 구성되었다. 행정조직을 일곱으로 나누고 각기 소위원회를 두었다. 이 소위원회가 1907년 독노회시 7대리회로, 1912년 총회 조직시에는 7개 노회로 개편되었다. 이 합동공의회가 한국교회에 있어서 당시 최고의 결의기관이었다(Harry A. Rhodes, ed.,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p. 450-1.).
마포삼열 선교사는 1900년 마포삼열은 선교사연합공의회 산하의 평양위원회 책임자로 서울에서 실시하고 있는 신학반(Theological Class)을 정규 신학교로 격상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뉴욕의 선교본부에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내용은 한국의 교회성장과 이들 교회를 돌볼 자국인 목회자들의 양성이 시급하다는 것과 더불어 신학교를 시작할 수 있는 자금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이 편지를 받은 선교부는 이 문제를 검토한 결과 마포삼열이 요구하는 것을 접수하고 신학교 설립허가와 더불어 자금을 배정하기로 결정하였다(마포삼열 박사 전기편찬위원회, 「마포삼열 박사전기」(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교육부, 1973) p. 227.).
이렇게 하여 평양장로회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신학교는 총신대학교(합동)와 장로회신학교(통합)의 전신이기도 하다.
첫댓글 마포삼열 선교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