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 애덕의 모후 레지아 전 단장님께서 ‘레지오의 귀감이 되시는 분’으로 추천해주신 금촌성당(주임신부 김운종 안드레아) 성가정의 모후 Cu. 소속 은총의 샘 Pr. 단장 김영덕 디모테오 형제를 만났다. 그는 15년 이상 쁘레또리움 단원으로 활동하고 계시며 75세의 노익장이지만 10년 이상 젊어 보이시는 동안이다.
40년 전 레지오 입단 초기 활동은 어땠습니까
33세 때 수원 북수동성당 그리스도의 어머니 Pr.에 막내단원으로 입단하였지요. 고참 단원들의 도제식 전수로 즐겁게 기도와 활동을 하였습니다. 당시는 연도예절이 매뉴얼화 돼 있지 않았던 시절이고 장례식장 없이 가정집에서 초상이 이뤄지던 시기라 비록 외인상가라 할지라도 단원들이 입관예절과 상가돌보기는 기본, 장지참여는 물론, 삼우예절까지 도와주었지요.
레지오 교육위원과 Co. 단장을 맡아 교육에 열정을 쏟으셨다면서요
84년 7월 본당 꾸리아 단장을 맡을 당시 4~5개 군에 꼬미씨움이 하나일 때라 87년 5월 수원 천지의 모후 Re. 당연직 교육위원이 되어 방송국 아나운서를 초빙하여 말 전달기법, 교안작성, 강의방법을 교습 받고 교육위원들 앞에서 강의연습과 평가를 통해 강사로 나갔습니다. 2시간의 강의를 위하여 며칠씩 준비를 하였지요. 무엇을 많이 알아서 직책을 맡았다기 보다 직책을 맡고 기도와 공부를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는것을 믿었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필립보서 4.13)
Co. 단장 재임 중 단원들의 성화와 영적성장을 위하여, 성모신심이 깊으신 고 오기선 신부님과 이홍근 신부님, 그리고 교구 신부님들과 후일 주 교황청대사, 전국 평협회장을 역임하신 한홍순 교수, 타종교 연구가 노길명 교수, 서울, 광주 Se. 단장 등을 초빙하여 꾸준히 교육을 강화하였지요.
현재 사생활 보호의 높은 문턱으로 방문선교가 어려운데 헤쳐 나갈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렇다고 단원들이 손을 놓고 한숨만 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문이 열리지 않으면 방법을 바꾸어야지요. 입교권면 대상자가 정해지면 그 사람에 대해 면밀히 분석해서 어떤 일을 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가족관계는 어떠한지 파악하고 상대가 부담스럽지 않게 조심스럽게 신경을 써서 자주 만날 기회를 만들고 친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조급하게 행동하면 실패합니다. 완전히 친해져서 만남이 길어지고 상대가 조바심을 낼 정도로 친밀해졌을 때, 이제 내가 좋아하는 예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 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성모님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요청하는 간절하고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병원에 입원해서도 함께 입원한 낯선 형제에게 예수님을 자랑하였더니 퇴원 후 그 형제가 성당을 찾아와 교리공부를 마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레지오 단원들에게 꼭 필요한 활동은 선교입니다.
최근 ‘코로나 19’ 이후 레지오의 방향설정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머물고 있는 세상은 점점 어렵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창조물인 세상을 인간이 변질시켜 놓았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인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무한 고통을 안겨주고 있지만 속절없이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어느 성경해설 신부님께서는 “세상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세상이 악해서가 아니라 어떤 의미로는 세상이 너무 나약하였기 때문입니다. 경쟁과 다툼에 담대히 나서 사랑을 선포할 힘이 없어서, 폭력과 차별에 용맹이 맞설 결기가 없어서입니다. 나약함이 악이 될 수 있음을 알고 그 나약함을 이겨내어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원들은 성모신심을 본받아 본당에서 아무리 힘든 일도, 누가 알아주거나 칭찬해 주지 않아도 불평불만 하지 않고 잘 해내고 있습니다. 레지오 단원들은 이 세상에서의 상급이 아닌 하느님 나라에서의 상급을 바라며 오늘도 내일도 묵묵히 스스로 할 일을 찾아서 활동해야 합니다.
65년의 신앙생활 중 위기가 있었다면?
10년 전 본당 산악회에서 산행을 나섰습니다. 관광버스 안에서 갑자기 심장이 찢어지는 통증이 엄습해 숨이 끊어질 듯 통증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다행히 근처 병원 응급실에서 겨우 숨만 쉴 수 있도록 처치 받고 쫓겨나듯 큰 병원으로 보내졌습니다. 급성심근경색이었습니다. 중환자실로 들어가기 전에 담당 의사는 가족들을 급히 불러 유언을 하게 하였습니다. 죽음이 이렇게 전혀 준비 없이 급하게 맞이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후 본당신부님이 오셔서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주시고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에 맡겨드리자고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제 손엔 묵주만 들려 있었고 희미한 의식 중에도 저는 계속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인공관 4개를 심장 주위 대동맥에 삽입하는 수술을 받고서야 온전히 숨을 쉴 수가 있었습니다. “덤으로 주신 생명이니 기도와 봉사로 살겠습니다”라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에 가슴으로 의지한 성경구절 입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마지막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언제 보람을 느끼셨습니까
청년시절 금촌공소 때 혼자 생활하시는 할머니 한 분을 입교시켜 대세를 받고 선종하게 한 일은 지금도 가슴 뿌듯합니다. 지금 70대 중반이 되어 몇 년 전에 제가 청소년시절 공소예절을 바치며 살았던 금촌성당에 와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직책이 맡겨지면 “못 합니다”를 못하는 성격 탓에 Pr. 단장, 성체분배단장, 특히 몇 년 동안 활동이 중단된 ‘울뜨레아’를 본당 신부님의 재가를 받아 형제자매들과 재구성하여 활기차게 활성화 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마친 후에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분리수거하십니다.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았다면 거두어 가실 것이고 그 반대의 삶을 살았다면 뜨거운 불 속에 던져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매일 묵상해야 합니다.
<사진설명(위로부터)>
_ 수원 천지의 모후 Re. 간부 연수회(1983)
_ 그리스도의 어머니 Pr. 선서단원들과 함께(1989)
_ 전국 Re. Co.단장 영적지도자회의(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