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세광은 사건발생 128일만인 74년 12월 20일 서울구치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사건을 둘러싼 의혹은 그 후 30년이 지나도 잦아들지 않고 있다.
▦육 여사는 누구의 총탄에 맞았나?
이중 가장 대표적인 의혹은 육 여사가 문세광의 총탄에 희생됐느냐 여부다. 한국 정부의 수사결과에 따르면 사건 현장에서 울린 총성은 모두 7발. 문씨는 5발이 장전되는 스미스 웨슨(일명 리볼버) 권총을 사용했고, 모두 4발을 발사했다. 3발은 경호원이나 또 다른 누군가가 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대법원은 육 여사가 문 씨의 제4탄에 맞았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당시 서울경찰청 감식계장이던 고 이건우씨는 89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탄흔을 분석하면 육 여사는 문의 총탄에 맞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수사결과와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는 발언을 했다. 문이 아닌 경호원의 총탄에 희생됐을 가능성을 처음 제기한 발언이어서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제3의 저격수 있었나?
문세광은 오른쪽(육 여사 쪽에서 볼 때)에서 총을 쐈기 때문에 육 여사는 왼쪽으로 쓰러져야 했으나 오른쪽으로 쓰러졌다. 당시 외신들은 문세광 반대편에 있던 또 다른 저격수에게 희생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화면 분석 결과 육 여사는 총성과 함께 일단 왼쪽으로 흔들렸다가 오른쪽으로 쓰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현장경호가 왜 허술했나?
문세광이 비표도 없이 승용차를 타고 식장에 입장하고, 유독 총기검색이 없었던 당시 상황도 석연치 않다. 청와대 경호실은 광복절 직전의 열린 한 국빈행사에서 경호요원들이 참석자들의 핸드백까지 일일이 검색해 민원이 생기는 바람에 사건 당일 검색을 완화했다고 인정했었다.
▦한일 수사결과 왜 그렇게 판이했나?
사건 발발 이틀 뒤 발표된 한국측 수사결과는 4개월 후의 일본측 수사결과와 판이했다. 일본 수사기관들은 문세광이 북한과 조총련 간부의 지령을 받았다는 한국측 발표를 전면 부인하면서 박정희 독재체제를 무너뜨리려는 문세광의 범행 의도를 부각했다. 일본측은 이에 따라 문의 공동정범으로 지목됐던 요시이 미키코(吉井美喜子)를 여권관리법위반 혐의로 구속한 뒤 풀어주는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
▦김대중 납치사건 희석용?
정치적으로는 1년 전 발생했던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일본에게 수세로 몰린 한국 정부가 저격 사건을 조작했다는 유언비어를 낳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문세광이 조총련보다는 친한 단체인 민단에 가까웠던 인물이라는 얘기가 나돌았다.
/이영섭기자
첫댓글 헉, 국정원 배너까쥥.., 퍼와꾸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