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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올바른역사를사랑하는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낙암 (정구복)
| 고전의 향연 - 옛 선비들의 블로그 |
| ⑬정제두 ‘하곡집’ |
#하곡 정제두 두 번 죽다 하곡 정제두(鄭齊斗 1649~1736)의 일생동안, 죽음은 늘 삶의 등 뒤에 따라붙어 있다가 삶과 그 경계를 공유하곤 했다. 그는 34세 때인 임술년(1682, 숙종 8)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스승 박세채(朴世采)에게 그간 자신의 입속에서 맴돌던 말을 끄집어낸다. 제가 수년 동안 고심하였던 것을 한번 선생님께 털어놓고 절충을 구하려 하였으나 이제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유감입니다. 제 생각에 심성(心性)의 본질에 대한 왕양명(王陽明)의 학설은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찾지 못하고서는 그대로 잠자코 있을 수 없어서 감히 대강을 말씀해 올리오니 이해해주십시오. (『하곡집』,「박남계에게 올리려던 글」) 이 글은 양명학자로서의 자신에 대한 첫 번째 공식 커밍아웃이었다. 그는 주자의 성리설(性理說)과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이 성인인 공자의 뜻을 완벽하게 풀어내지 못함을 고민해왔으며, 그 끝에서 양명학과 조우하게 되었음을 스승에게 고백한다. 그러나 이 당시까지 정제두는 아직 양명학에 대한 논리를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이때 11세 된 아들과 30세 된 동생 정제태(鄭齊泰)에게 자신이 수행해온 미완의 양명학 연구를 이어나가 줄 것을 당부한다. 그러나 죽음을 예감한 순간 쏟아낸 진솔한 언어들의 수신처는 결국 자기 자신이 되어버렸다. 죽음의 위기를 넘긴 하곡은 치열하게 양명학에 몰두한다.
#그럼에도 결국 버릴 수 없는 마음[心] 스스로 양명학자임을 표방한 뒤 정제두는 다양한 우려와 공격에 시달리게 된다. 그의 스승 박세채는 「왕양명학변(王陽明學辨)」을 지어 양명학을 비판한 뒤, 그에게 양명학을 버릴 것을 종용했다. 또 다른 스승 명재 윤증(尹拯) 역시 「변설(辨說)」을 지어 그를 꾸짖었다. 최석정(崔錫鼎)도 「변학설(辨學說)」을 지어 그의 양명학에 대한 의지를 비판했다. 민이승(閔以升)도 박심(朴鐔)도 그의 양명학에 대한 열정을 우려했다. 그러나 그는 양명학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왕양명의 학설에 애착을 갖는 것이 만약 남보다 특이한 것을 구하려는 사사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결연히 끊어 버리기도 어려운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학문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성인의 뜻을 찾아서 실지로 얻음이 있고자 할 뿐입니다.” (『하곡집』,「박남계에게 답하는 글」) 스승과 친구, 주변 여러 사람들의 회유와 질책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인의 뜻을 찾아서 실지로 얻음이 있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양명학이 보여주는 길을 선택했다. 주자학이라는 이름의 우상 뒤켠이 주는 안락함의 획득, 그 아래 무리지어 있는 대상들과의 동질감 형성, 그것은 그에게 학문적 타협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그는 ’마음이 곧 이치이다.[心卽理]’라는 양명학의 본질적 명제를 밝히는 데 투신했다. 이후 그는 양명학의 치양지설(致良知說)과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받아들이고, 『대학』·『논어』·『맹자』·『중용』 등의 유가 경전을 새롭게 해석하여 주자학의 권위에 맞서나갔다.
#존재에 대한 고민, 존재를 위한 번민 하곡 정제두의 초년기는 상실의 연속이었다. 5살 때 부친을 여의고, 16세 때는 백부와 조부마저 세상을 떠났다. 23세 때는 부인과도 영결하게 되는 상황에 내몰렸다. 또 34세 때는 그 자신조차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됐다. 때문에 그의 고민은 ‘존재의 본질’로 향했고, 주자학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목마름을 느꼈다. 그는 1668년(현종 9) 별시에 급제하였으나, 전시에는 낙방하였다. 동생 정제태가 급제한 뒤로는 모친의 허락을 얻어 경전 공부에만 전념했다. 1680년(숙종 6) 여름 김수항(金壽恒)의 추천으로 벼슬길이 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여러 차례 동지중추부사, 한성좌윤, 이조참판, 대사헌, 우찬성 등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대개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 조선은 주자학의 허울을 뒤집어 쓴 수많은 인사들이 주자를 앞장세워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크루스테스처럼 다리를 잘라내고 팔을 잡아 늘여 자신들의 곁에 무리를 늘리고 있었다. 그들은 권위주의적 폐쇄성 속에서 이른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용어로 너와 나를 가르고 무리를 지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정제두는 “오늘날 주자의 학문을 말하는 자는 주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곧 주자를 핑계 대는 것이요, 주자를 핑계 대는 데에서 나아가 곧 주자를 억지로 끌어다 붙여서 그 뜻을 성취시키며, 주자를 끼고 위엄을 지어내 자신의 사사로움을 구할 뿐이다.”라고 지적하며 1709년 8월 강화로 거처를 옮기고 본질을 찾기 위한 학문에 매진한다.
#강화에 심은 양명학의 씨앗 조선 후기 강화를 거점으로 양명학을 연구·발전 시켜온 학파를 흔히 ‘강화학파’라 칭한다. 강화학파의 다른 이름은 ‘하곡학파’로, 강화의 양명학이 하곡 정제두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증명하는 호칭이다. 그의 문하에는 많은 문인들이 배출되었으며, 그가 강화에서 양명학에 매진한 이후 강화는 조선의 가장 진보적인 공간으로 거듭났다. 아들 정후일(鄭厚一)을 비롯해 윤순(尹淳), 김택수(金澤秀), 이광사(李匡師) 등이 그의 뒤를 이었다. 이들은 강화학파의 자장 안에서 역사학과 음운학, 서예와 시문을 발전시켰다. 강화학파의 특징으로는 다양한 학문에 대한 관심을 표방하는 박학과 실천주의적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성향은 우리 문화사에서 다양한 성과로 등장한다. 글씨에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역사에 연려실(燃藜室) 이긍익(李肯翊)과 매천(梅泉) 황현(黃玹), 한학(漢學)에 석천(石泉) 신작(申綽), 훈민정음 연구에 서파(西陂) 유희(柳喜), 문자학에 남정화(南廷和), 문헌학에 남극관(南克寬) 등이 강화학파의 범주를 확장해나갔다. 영재 이건창에 의해 계승된 조선 양명학의 정신은 민족자존의 주체사상으로 구현되었고, 신채호, 박은식, 정인보 등에 의해 민족주의 사상으로 형성되어 항일운동과 국학 연구에 이바지하였다. #수습되지 못한 미완의 역작, 『하곡집』 정제두가 남긴 문집을 『하곡집』으로 호명한다. 그러나 그의 문집은 간행되지 못한 채 필사본으로만 존재한다. 필사본은 총 4종이 전하는데,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22책본,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 11책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0책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8책본이 있다. 문집이 인출(印出)되지 못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양명학에 대한 정제두의 긍정적 시선 때문이었다. 정제두의 현손(玄孫) 정문승(鄭文升)은 『하곡집』의 앞머리에 붙여 “문인으로서 이 일을 맡은 사람도 함부로 손을 대어 말속(末俗)의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아니하므로”라고 『하곡집』이 수습되지 못하였던 저간의 사정을 증언한다. ■하곡집(霞谷集)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22책본 『하곡집』은 정집(正集), 부집(附集), 내집(內集), 외집(外集)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집에는 편지글과 상소문, 잡저(雜著)와 시문이 수록되어 있고, 특히 그의 양명학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존언(存言)」과 「학변(學辨)」이 저록되어 있다. 부집에는 신작(申綽)이 완성한 정제두의 연보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연보에는 주자학적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하곡의 양명학 사상을 의도적으로 지우려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내집은 경학에 관한 독립적인 저술로 구성되어 있으나 중복되거나 빠진 부분이 많다. 외집에는 하도(河圖)와 선후천도설(先後天圖說)에 대해 다양한 그림으로 풀이한 내용들이 실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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