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논단] “불교의 사회적 역할, 잘하고 있는가?”/조성택
불교평론 열린논단 : 2015년 4월 16일
0. 생각해 볼 물음들
q1. 종교의 ‘사회적 역할’ 이외에 어떤 다른 역할이 있는가?
q2. 참여불교의 반대말은?
q3. Engaged Buddhism의 번역어로서 ‘참여불교’란 용어가 적절한가?
1. ‘사회참여’에 대한 한국불교의 강박: 그 기원에 대한 역사적 분석과 성찰
1-1. 사회참여란? [어떻게 하는 것이 ‘사회참여’인가?]
type 1. 전통불교(?)적 형태
- 상구보리 + 하화중생
type 2. 정치·사회적 참여의 형태
- [나쁜] [세속적] [불의의] 권력에 저항
- 환경/생태문제 등
- 사회복지 등
1-2. 종교의 사회적 참여는 왜 필요한가?
- 종교의 사회적 유용성 >> 정말 필요한가?
- 종교적 가치의 실현 >> 정말 괜찮은가? [ex: 동성애, 낙태 등의 문제에 종교가 개입하는 것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2. 불교의 ‘사회참여’/사회적 역할에 관한 前史
2-1. 초기불교
q. 출가사문의 길 vs. 전륜성왕의 길이라는 이원적 구조에서 불교의 사회적 역할은 없다고 봐야하나?
2-2. 대승불교
q. 출가와 재가의 이원적 구조는 해소되었다고 하지만, 현실에서 그 대승의 이념이 사회적으로 실현/구현된 적이 있었는가?
2-3. 동아시아 대승불교: 근대 이전
- 삼국시대 및 고려시대
- 조선시대
q. 한국불교의 경우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적절했나?
q. 조선시대 그리고 중국의 경우 당(唐)나라에서의 불교의 사회적 역할은?
q. 승군활동은 종교의 혹은 불교의 사회적 참여/ 기여로서 적절한 예인가?
3. 근대불교: 일제강점기 한국불교의 두 가지 과제- 사회적 유용성 + 전통
- ‘근대’라는 새로운 종교 환경: 과학, 다종교, 정교분리 [권력분립?]
- 사회적 유용성: 기독교와 일본불교를 ‘새로운 불교’의 모델로서 벤치마킹
* 사회복지 + 문화(일상과 권력)
- ‘전통’이란?
3-1. 소결(1): 종교의 사회적 역할, 불교의 사회적 참여에 대한 새로운 생각
- 사회적 문제에 ‘참여’ 혹은 ‘개입’ 한다면 어떤 범위 어떤 방식이어야 할 것인가?
- 시민사회의 공공선과 종교적 선은 합치될 수 있는가?
- 종교적 가치와 신앙적 신념의 차이는 쉽게 극복 될 수 있는가?
- 모든 종교는 동일한 방식으로‘참여’해야 하는가? [세계관, 가치관의 차이는 용인될 수 없는가?]
q. 다음 중 참여불교를 실천하는 종교인은 누구일까요?
용성, 만해, 한암, 성철, 오현, 도법, 법륜, 수경, 자승, 법인, 금강, 정념 ........
q. 개인의 영성(spirituality)와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의 문제에 있어 기독교 전통과 불교 전통은 다르지 않는가?
3-2, 소결(2): 포스트모던 시대의 근대적 과제
- 근대적 과제, 문제의식으로서 ‘사회참여’
-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회참여’
그렇다면 21세기 한국사회에서 불교의 ‘참여’ 방식은 어떠해야하며, 21세기 한국사회가 불교에 기대하는 불교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가?
흥미로운 것은 늘 [세속]사회에 두 발 다 딛고 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려던 기독교는 새삼 ‘영성’이라는, 이 땅의 문법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가치를 요구받고 있으며, 불교는 [세속의] 역사 속에서 한 번도 구현해보지 못했던 ‘불교적 가치의 사회적 실현’ 이른바 불교적 용어로는 대승보살도의 진정한 실천을 요구받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불교의 소극적 사회참여를 질타하는 수사적 질문, “사회적 역할, 잘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등장하는 것은 아닐까?
별지: 졸고 “근대한국불교에서 한암의 역할과 불교사적 의의: 만해 그리고 경허와의 비교를 통해”[『한국불교학』에서 발췌]
한암(1876 – 1951)과 만해(1879-1944)의 경우
‘궁핍함’ 이란 마땅히 있어야할 것의 부재(不在)를 말한다. 궁핍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만해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었던 것은 ‘님’의 존재였다. 그러나 그 님은 존재함를 통해서가 아니라 부재함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다.
‘궁핍한 시대’란 현실이 진실이 될 수 없는 시대다. 현실과 타협하는 길이 아니라면 현실을 개혁하든가 현실을 부정하는 일 밖에 없다.
만해는 불교전통이 그 출발에서부터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보수성’ 때문에 불교만으로는 ‘궁핍한 시대’를 돌파하기 어렵다고 여겼던 것 같다. 대승의 방편과 선종의 입전수수가 있다고는 하지만 출가를 기반으로 하는 불교의 근본적인 보수성은 한 개인이 쉽게 간과하거나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만해는 자신의 시대를 전통으로부터 단절하고자 했다. 그리고 불교 내부의 논리가 아니라 사회진화론과 같은 세속의 이론과 논리로 불교유신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한편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가 ‘궁핍한 시대’인 것은 한암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적지 않게 남아있는 한암의 글 가운데 구체적 현실을 언급하고 있는 글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암의 글을 보고 있으며 한암이 만해와 동시대의 인물이라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한암의 글에는 철저하게 현실의 역사가 배제되어 있다. ‘현실역사의 배제’, 이는 의도적이며 한암 자신의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만해가 현실개혁을 통해 현실을 부정하고자 했다면 한암은 철저한 외면을 통해 현실을 부정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조성택 stcho@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