註: 《통감절요(通鑑節要)》는 송나라 학자 소미 선생(小微先生) 강지(江贄)가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資治通鑑)≫ 294권의 방대함을 간추려 엮은 역사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기부터 ‘통감(通鑑)’이라는 이름으로 서당의 초학(初學) 교재로 널리 통용되었다. 동양고전종합DB 내용을 옮깁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한 책은 기전체(紀傳體)를 바꾸어 편년체(編年體)로 만들어서 상하 수천 년 동안의 흥망(興亡)과 치란(治亂)이 환하게 눈앞에 나와 있으니, 진실로 역사학의 강령(綱領)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편질(編帙)이 매우 많아 두루 보기가 쉽지 않다. 후세의 군자(君子)들이 진실로 일찍이 번다한 것을 줄여 요점을 취했으나 그 사이에 상세한 것은 오히려 너무 많아서 문제이고 간략한 것은 또 너무 소략해서 문제였으니, 배우는 자들이 병통으로 여겼다.
소미선생(少微先生) 강씨의 가숙(家塾)에 ≪통감절요(通鑑節要)≫가 있는 바, 상세하고 간략함이 적당하여 양한(兩漢)과 수당(隋·唐)에 있어서는 정화(精華.알짜)가 다 구비되었고 육조(六朝)와 오대(五代)에 있어서는 본말(本末)이 모두 나와 있다. 평점(評點)을 찍어 강령(綱領)을 들고 표제(標題)하여 요점을 뽑으니, 식자(識者)들이 보배로 여겼다. 그 후 건녕공(建寧公) 묵(黙)이 회암선생(晦庵先生.朱熹)의 문하에서 수학(受學)할 적에 일찍이 이 책을 가지고 질정(叱正.꾸짓어 바로 잡음)하니, 주선생은 크게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이로부터 사우(士友)들이 다투어 서로 전하여 기록해서 더욱더 소중하게 여겼다.
지금 남산주인(南山主人) 연(淵)은 학문에 힘쓰고 행실을 깨끗이 닦아 전대(前代)의 업적을 빛나게 하였다. 그가 다시 이 책을 취하여 더 보태고 윤색(潤色)해서 여러 역사책의 표(表)와 지(志), 서(序)와 찬(贊)을 더 넣고 명공(名公)들의 논평과 음주(音注)를 더 넣어서 간결하고 명백하며 득실(得失)이 분명하니, 이것을 가정(家庭)에서 가르치는 책으로 삼았다.
객이 그를 방문하여 말하기를 “좋기는 좋으나 소중하게 잘 간직하여 집에 사사로이 두는 것이 어찌 판각(板刻)하여 세상에 공공연히 전하는 것만 하겠는가.” 하니, 주인이 웃으며 말하기를 “소미선생은 산림(山林)에서 고상한 뜻을 길러 명성이 서울의 대궐에 진동하였다. 그리하여 황제(皇帝)가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어 초빙하였으나 끝내 스스로 만족하게 여겨 도(道)를 즐거워하는 뜻을 바꾸지 못하였고, 무릇 책을 짓고 글을 씀에 또한 자신의 마음을 밝힐 뿐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구하고자 하지 않았다. 선대(先代)에 책을 지을 적에 행여 사람들이 알까 두려워하셨는데, 내가 그 책을 얻고는 도리어 사람들이 알지 못할까 두려워한단 말인가.” 하였다.
객이 굳이 판각(板刻)할 것을 청하므로 내(江鎔)가 그 말을 가상히 여겨 그 청을 도와 권하니, 주인이 “그렇게 하겠다.” 하였다. 이에 쓰노라. 嘉熙 丁酉年(1237) 良月(10월) 초하루에 迪功郞 新邵武郡南尉 巡捉私茶鹽礬私鑄銅器 兼催綱 江鎔은 삼가 序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