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고우영 형이 먼저 간 지 올해로 10년째다. 2005년 4월 27일에 우영이 형이 죽기 전까지 우리는 일산신도시 이웃 아파트에 살았다. 죽기 한 달 전인가, 집 앞 약국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의 건강을 걱정해준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날도 형은 불치의 병마와 싸우는 사람답지 않게 소년처럼 천진난만한 웃음을 잃지 않았는데 불과 한 달 뒤에 일산병원 영안실에서 영정으로 만날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내가 우영이 형을 처음 만난 것은 1983년 무렵이니 이미 32년 전이다. 그무렵 나는 한국일보사에서 기자로 일하고 우영이 형은 당시 한국일보 자매지였던 일간스포츠에 <열국지>, <박씨전>, <가루지기타령> 등을 연재하고 있었다. 그렇게 만났는데 만화쟁이와 글쟁이로서 분야만 달랐을뿐 술 좋아하는 면에서는 죽이 잘 맞았으므로 우리는 금세 십년지기처럼 가까워지고 곧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한 번은 신문사에서 문화인낚시대회를 개최한 적이 있었다. 파주 발랑지에서 열었는데, 소설가와 시인들도 왔고, 연예인들도 왔고 만화쟁이들도 왔고, 수백 명이 하루를 즐겼다. 그날 우영이 형이 가지고 온 에스키모술 맛을 잊을 수 없다. 병뚜껑으로 한 잔 얻어 마셨는데 입안이 금세 불덩이를 삼킨 듯 화끈화끈했다. 멕시코의 테킬라는 저리 가라였다.
지금도 재미있는 것은 그때 우영이 형이 한국일보를 엿먹인 일이다. 일간스포츠는 고우영 만화로 독자가 부쩍 늘었고, 고우영은 일간스포츠 만화 연재로 유명해지고 수입도 부쩍 늘었으니 그야말로 상부상조가 아니라 서로 없으면 죽고 못 사는 관계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우영이 형이 생각할 때 원고료를 올려줬으면 좋겠는데 신문사 경영진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다.
만화가의 데모를 그때 난 처음 보았는데, 우영이 형의 시위는 참으로 보통사람의 상상을 뛰어넘는 기발한 것이었다. 그때 연재하던 만화가 <박씨부인전>이었는데, 일주일 내내 주인공 박씨부인이 이 방(칸) 저 방(칸)으로 엉금엉금 비실비실 기어다니면서 방귀만 뿌웅 뿡 피식 피익 연발로 뀌어대는 것이었다. 그러니 독자들의 항의가 하늘을 찌를 수밖에. 결국 신문사는 원고료를 올려줬고 박씨부인은, 아니 우영이 형은 방귀의 대행진을 멈췄다.
80년대 중반 그 무렵 나는 서초동 꽃마을 연립주택에 살고 있었다. 하루는 밤늦도록 우영이 형과 <주먹대장>의 만화가 김원빈 형과 셋이서 청진동에서 술을 마셨다. 술도 꽤나 오르고 밤도 깊었건만 내가 택시를 잡아 두 사람을 강제로 태웠다. 그렇게 납치를 해서 끌고 간 것이 내 집이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인데 마누라에게 술상을 보게 하고, 국민(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딸도 깨웠다. 유명한 만화가를 두 명이나 끌고온 아비의 능력(?)을 과시했던 것이다. 그날밤 두 만화쟁이는 새벽까지 나와 술판을 벌이면서 내 자식들에게 사인이 들어간 만화를 여러 장 그려줘야 했다.
우영이 형은 나보다 여섯 살 위인 1939년생. 출생지는 만주 땅이다. 그는 동성고 3학년 때 벌써 인기 만화가 대열에 올랐다. <짱구박사>를 추동성이란 이름으로 그려 큰 인기를 얻었다. 이 만화는 필자도 어린 시절에 즐겨 봤다.
추동성의 만화를 즐겨 보던 까까중머리가 어느새 자라서 기자도 되고 소설가도 되고 역사연구가도 되었다.
그래도 고우영 만화를 즐겨 보다가 언젠가는 오류를 바로잡아주기도 했다. 한번은 <수레바퀴>라는 극화를 보다가 최영 장군의 본관을 창원이라고 잘못 쓴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중에 만났을 때 창원 최씨가 아니라 동주, 곧 오늘의 철원 최씨라고 바로잡아준 일도 기억난다.
고우영 형이 만화가로서 이름을 널리 떨치기 시작한 것은 1972년 1월 1일부터 18년 동안 일간스포츠에 연재한 사극 시리즈다. <임꺽정>을 비롯해 <수호지> <삼국지> <초한지> <서유기> <열국지> <일지매> <십팔사략> 등 고전을 특유의 해학으로 재해석함으로써 크나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한 성공으로 우영이 형은 만화는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란 사회적 편견을 무너뜨리며 신문만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는 단순한 만화가가 아니라 역사연구가였고, 사회비평가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도 나와는 통하는 현세의 풍류사였다.
죽기 3년 전인 2002년 대장암 진단을 받은 뒤에도 그는 “심의와 검열로 불구가 된 내 자식들을 치료하겠다”며 <삼국지>와 <수호지>의 복원판을 내놓는 등 의욕을 보였다. 죽기 얼마 전에 "나 강한 사람이야, 암도 난 못 이겨!"하던 우영이 형이었다. 혹시 멀쩡한 세포까지 모두 죽여 목숨을 더욱 단축시킨다는 항암치료를 받았기 때문일까. 우영이 형은 난치병이 더 많이 겹친 나보다는 훨씬 더 오래 살 것 같았는데 먼저 가버리고 말았다. 내가 혹시 암에 걸리면 항암치료를 거부하기로 작정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우영이 형! 먼저 죽었다고 서러워 마슈. 혹시 나 죽은 뒤 저세상에서 만나지 못하더라도 서운해하지 말고.... 까짓거 죽은 뒤에 만나든 말든 알 게 뭐야! 살아 있는 이들의 기억 속에 우리가 남아 있으면 그게 내내 이세상에 살아 있는 거지 뭐, 안 그렇수? 그것이 인생이라우! 아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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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우영만화가의 추억...
잘 읽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백짓장의 앞면과 뒷면의 차이라던데...
졸문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한국사진기자협회 회장선거에 입후보 했을때 고우영화백께서 흔쾌히 선거용 홍보물을 위해 제 개인프로필을 제작해 주셨습니다.. 지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답니다..
내일 가면 볼 수 있겠군요. 출판국에 있던 윤여영 씨도 안부 전해달랍니다.
글감사하게잘보았습니다
저는 관장님과 같은마을에사는 젊은이인대 앞으로도 조은글 많이 실어주세요
감사함니다
졸문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요일에 찾아가면 만나뵐 수 있을까요?
제가 자주들어오지못해 죄송함니다
벌써 다녀가신거지요
다음에오시면 연락주세요
이름은 우 홍명 전화번호는011 9797 6227아니면 고관장님게 말씀드려도 되구요
봄에 다시 찾아볼 생각입니다. 고 관장에게 미리 말할 터이니 한번 만나뵈기로 하지요.
네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