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쿠바의 관타나모
글,편집:묵은지
최근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쿠바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이 쿠바를 방문한 것은 무려 88년 만이라고 합니다. 국교 역시 1961년에 단교되어 이념적으로나 국가적으로도 적대국의 상태였다가 불과 작년에서야 극적으로 수교를 한 외교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서둘러 쿠바를 방문한 것은 묵은지가 생각을 해봐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는 미국이 쿠바와의 관계개선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가를 잘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쿠바의 역사를 통해서 본다면 미국이나 서방국가와의 악연(?)은 쿠바의 근대사를 배경으로 보아도 파란만장한 사건이 많았습니다. 그러고도 5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498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서방국가 사람으로서 최초로 쿠바 땅에 첫발을 디딘 이후 쿠바는 장장 400년을 스페인령으로 통치를 받기 시작하였고 쿠바에서 벌어진 1898년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으로 쿠바는 다시 미 군정 통치를 받는 미국령이 되는 신세가 됩니다. 4년 뒤인 1902년에 드디어 쿠바는 파리조약에 의해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하였으나 그마저 이후의 순탄치 않은 역사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의 과정에서 쿠바는 돌이킬수 없는 크나큰 오판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영토에 미국의 군사기지를 영구 임대하는 계약을 체결한 것입니다. 그것도 말도 안되는 헐값인 단돈 2천달러에 해당하는 금을 매년 임대료로 납부하는 방식으로 '관타나모' 지역의 117㎢의 땅을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당시, 승전국인 미국의 강압적인 요구가 따랐겠지만 쿠바는 말도 않되는 부당한 계약에 이의 한 번 제기하지 못하고 넘겨준 것은 큰 실수라 여겨집니다.
미국 군정으로부터 독립한 쿠바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내홍을 겪게 됩니다. 말이 독립이지 독립 초기에는 실제로 미국의 속국이라해도 과언이 아닌 섭정이 빈번했고 정치와 경제 등 모든 것을 장악한 미국의 눈치를 봐야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쿠바의 알토란 같은 주요산업인 사탕산업과 쿠바 경제의 중추적인 기능은 미국의 자본으로 잠식되었고 주변국의 빈곤한 경제력에 비해 비교적 부유했던 쿠바는 점점 극심한 빈부차이와 부패로 멍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쿠바를 미국 땅으로 만들자고 주장하는 1900년의 포스터
피델 카스트로가 군중들에게 혁명에 대한 연설을 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도 1,2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으로 국제 정세가 어려웠지만 쿠바 자국내에서도 계속되는 반란과 내전으로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정치적으로 집권자들의 거듭되는 독재정치 속에 사회는 혼란에 휩싸였고 빈곤에 빠진 민중들은 부패한 정권과 경제를 독점하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빼가고 있는 미국에 대한 반미 감정으로 불만이 쌓여만 갔습니다. 결국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라울 카스트로' 등의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무장 혁명을 도모하여 1953년 7월 26일, 이른바 '쿠바 혁명'을 일으키게 됩니다.
쿠바 혁명을 이끈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 레 체게바, 라울 카스트로가 앞장서서 혁명 성공의 축하 행진을 하고 있다.
육군 하사관 출신으로 쿠바의 정권을 잡고 독재 정치를 일삼은 풀헨시오 바티스타
이들 무장 혁명가들은 당시 공포정치와 부패의 온상인 독재자인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 정권을 전복시키고 쿠바를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부정부패와 폭정으로 극심한 가난을 겪어왔던 민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독재자 바티스타를 포루투갈로 내몰고, 1959년 1월 1일 이른바 '쿠바 혁명'을 성공시켜 쿠바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게 된 것입니다. 1959년 2월 쿠바 총리 자리에 앉은 '피델 카스트로'는 당장 미국에 관타나모 기지를 반환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습니다.
체 게바라는 카스트로의 질투심으로 쿠바를 떠나 볼리비아로 옮겨 활동하다 체포되어 사살됨.
오리엔테 주의 '시에라 데 크리스탈' 산지 요새에서 라울 카스트로(좌)와 체 게바라(우)의 모습(1958년).
콧방귀도 안뀌는 미국에 대해 카스트로는 1961년 단호하게 외교적으로도 단교를 하였고 미국과 패권을 겨루고 있는 이념적 적대국인 소련과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미국을 견제,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혔습니다. 또한 미국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관타나모 기지를 반환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1962년 '미사일 위기' 때는 미국을 상대로 세계의 관심을 끌기도 했습니다. 동·서 대립시대,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는 정보를 입수한 미국은 케네디 대통령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성명을 냈던 사건입니다. 자칫 실제로 세계는 핵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몰릴 위기에 처했던 사건입니다.
미국의 첩보기 U-2에 의해 항공 사진으로 찍힌 쿠바의 미사일 기지 건설 현장.
미사일 기지 건설 철회를 강력 요구하며 제3차 세계대전도 불사하겠다는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
쿠바 미사일 기지 건설 사건이 터진지 한 달여 만에 미국은 소련과의 협상에서 소련으로부터 쿠바의 미사일 기지 설치를 철회시켰고 미국 또한 더이상 쿠바를 공격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면서 이 사태는 일단락 되었습니다. 그때에도 미국은 관타나모 기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많큼 관타나모 기지는 미국에게 군사적인 위치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천연의 요새인 관타나모 기지는 쿠바 남동부에 위치한 관타나모 주에 있는 관타나모 만에 세워져 있습니다.
관타나모 해군 기지 시설 배치도
관타나모 기지는 작년 쿠바와의 수교 이전까지는 특이하게도 비수교국이며 심지어는 적대국인 나라에 있는 세계 유일의 미국의 군사기지로써 미국 헌법이나 쿠바 헌법이 아닌 미군 군법에 의해 운영되는 곳으로써 해군 대령의 지휘아래 있는 미국의 해군 기지입니다. 이 관타나모 기지의 경비는 미해병이 맡고 있는데 과거 한창 대립이 첨예한 시절에는 주변이 온통 지뢰밭으로 둘러처져 있었으나 빈번한 안전 사고로 인해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대통령의 특별 지시에 의해 지금은 전자센서로 교체 되었습니다.
미 해병대원으로 구성된 수용소 경비대의 병사가 수용소 망루에서 감시 근무를 서고 있다.
2001년 미국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 2002년 1월부터 세계 여러 곳에서 체포된 테러조직 관련자들을 이곳에 수감하기 시작하였는데 미국 본토와 떨어진 치외법권 지역이라는 이유로 수감자들에게 갖은 비인간적인 고문이 있었다고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세계 인권에 대해서는 어떤 나라보다도 민감했던 미국이 아이러니컬 하게도 인권의 무법지대를 두고 있었다니... 더군다나 수감자들 가운데는 아무런 죄를 짓지도 않은 무고한 사람들도 있었으며 유엔이나 인권단체 등에서 인권 문제로 항의가 빗발치기도 하였답니다.
관타나모 기지내 수용소 경비병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는 수용자.
취임직후 선거 공약대로 오바마 대통령은 기지를 폐쇄하라는 지시를 하였으나 어찌된일인지 의회의 동의가 없어 아직까지 실행을 못하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이 곳에 상주하고 있는 인구는 군인과 그 가족들로 대략 7~8천여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으며 이 기지내에는 군인 자녀들을 위한 초·중·고등학교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공산주의를 피해 온 30여명의 쿠바인인 탈주민이 거주하는 마을도 있습니다. 관타나모 기지를 미군들 사이에서는 흔히들 '기트모(Gitmo)'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기지내에 있는 활주로의 코드명인 GTMO에서 비롯, 악명높은 수용소의 의미로 불리고 있습니다.
기지내에 맥도날드 판매점도 있다.
작년 캐나다 유학 중에 있었던 묵은지의 막내아들과 오바마. 은근히 친근함을 과시(?)하는 듯.(ㅋㅋㅋ 사실은 밀납인형임)
관타나모 기지내 수용소에는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서의 포로와 주로 테러리스트들이 수감되어 있는데 9·11 이후에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 알카에다나 탈레반 조직원들이 대부분 이곳으로 체포되어 왔습니다. 이들은 대개 악행을 저지른 테러리스트들로써 어떤 협정이나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게 사실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대선공약 가운데 하나인 기지 폐쇄 명령으로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수감되어 있는 적지않은 재소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마땅한 곳을 찾지못한 미국이 관타나모 기지에서의 폐쇄와 철수의 실행을 어떻게 이루어낼지는 지켜 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