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김소월, 〈왕십리〉 전문
장맛비가 내린다. 연일 내리는 빗속에서 소월은 우울하고 쓸쓸해하였던가 보다. 가신 다음에는 오지 않고 있는 님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소월의 모든 시에는 절대고독이 들어 있다.
님은 오지 않는데 창밖에는 속절없이 비만 내린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차를 마신다. 오늘은 황차(黃茶)를 마신다. 아내가 초봄에 이 발효 차를 만들었다. 아내는 발표차를 만들기 위하여 짚을 사용했다. 메주를 띄울 때 그렇게 하듯이 찻잎 속에 짚을 넣어 띄웠다. 짚에 묻어 있는 이로운 박테리아가 찻잎으로 옮겨 붙어 발효를 도운 것이다.
발표차는 발표차대로 독특한 향을 뿜는다. 다산 선생, 초의 스님, 추사 선생도 이러한 발표차를 즐겼는지 모른다. 역사적인 기록에 ‘떡차’ 혹은 ‘청태전’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들은 모두 발효차다.
차를 마시다가 천장의 서까래들을 쳐다본다. 나는 늘 기다리며 산다. 딱히 찾아올 반가운 님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기다린다.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전화질을 하지 않는다. 만일 전화질을 하면 그들이 나를 자기의 고독도 이겨내지 못하고 엄살떠는 겁쟁이라고 흉볼지도 모른다. 소월도 그랬을 터이다. 마냥 기다리며 슬픈 고독을 시로 읊었을 터이다. 나는 소월의 시를 읽으면서 고독 이기는 법을 배운다.
기다리며 사는 사람의 귀에는 빗소리가 님의 발자국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책을 읽다가, 차를 마시다가 발자국 소리 같은 빗소리를 듣는다.
빗소리에서 신성(神聖)을 느낀다. 신은 스스로 직접 지상으로 내려올 수 없으므로 자기 대신에 비를 세상으로 내려 보내는지도 모른다.
“비는 오고/ 풀잎은 통통거린다.”
타고르가 유년시절에 배웠다는 이 노래에서도 신성이 느껴진다.
신은 비로 사람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은혜를 베푼다. 안개로 이야기하고, 이슬비로 이야기하고, 작달비로 이야기하고, 천둥 번개로 이야기하고, 홍수로 이야기한다.
꽃에서도 신성을 느낀다. 3층 석탑 앞에 상석을 놓아두었는데, 후배 소설가 임철우 씨가 작년에 나리꽃 알뿌리 둘을 가지고 와서 상석 밑에 심어주었다. 싹이 나오고 그것이 무럭무럭 자라더니 우중(雨中)에 꽃망울을 터뜨렸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으면서도 꽃대는 휘어지지도 꺾이지도 않는다. 신이 직접 올 수 없으니, 임철우를 통해 저 꽃을 보냈는지도 모른다. 신은 꽃으로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한다.
비를 맞고 있는 흰 나리꽃을 보면서 소월의 시,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를 입속에 굴린다. 그것은 외로운 자의 참을성을 표현한 것이다.
투굴 앞마당 서편에 놓은 3층 석탑과 상석, 나는 그것을 장차의 내 무덤으로 삼기로 했다.
“나 멀리 떠나고 난 다음에 여기 찾아와서, 나 보고 싶으면 이 상석 위에 꽃 한 송이를 놓아라”라고 말했더니, 임철우 씨는 미리 나리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해준 것이다.
차를 마시면서, 나 떠나고 난 다음의 세상을 생각한다. 송나라 때 시인 황정견은 세상을 멀리 내다보고 살았다. 그가 쓴 시 “사람 없는 텅 빈 산에 물 흐르고 꽃도 피고, 멀고 먼 푸른 하늘에 구름 일고 비는 온다(空山無人水流花開 萬里靑天雲起雨來)”가 그것인 듯 싶다.
나 멀리 떠나고 난 다음에도 토굴 마당에는 해마다 꽃 피고 푸나무가 무성할 것이고, 새들은 와서 지저귈 것이고, 먼 하늘에 구름 일고 비는 내리고 무지개는 화려하게 뜰 것이다. < ‘나 혼자만의 시 쓰기 비법(한승원, 도서출판 푸르메, 2014)’에서 옮겨 적음. (2019.06.0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