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대에서 발표하고서 양동, 주실, 두들 마을에 다시 가보다.

[반농]

1월 12일 금요일 맑음. 영남대 한문과에 가서 발표를 하다.

아침 10시 15분 ktx로 동대구까지 가서, 영남대 서문에 있는 온천골국밥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후 내내 대동한문학회에 참석하고, 저녁까지 회식을 한 뒤에 경주 양동 마을 뒤에 있는 안계 못 곁에 있는 팬숀에 들어가서 잤다.

오랜만에 영대에 가서 보니, 학교 건물은 대개 여전히 별 모양이 없으나, 역시 교정이 넓고 공활한 것은 좋았다. 주변에 못이 많아서 그런지 공기도 자못 맑았다. 더구나 겨울 방학이고 보니 학생들도 거의 보이지 않는데다, 학회(대동한문학회)의 참석인원도 그리 많지 않은데, 2조로 나누어 진행을 하니 더욱 한적하였으나, 나는 모처럼 아늑한 고향에 온 것 같이 오히려 정감이 느껴졌다.

“《고경중마방》 잠명의 어문학적 검토”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경대 정우락 교수가 논평을 하였고, 역시 서울에서 내려온 박종용 박사(성대 강사)는 “이퇴계의 한문 독법”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이영자 박사(성대, 안동대 강사)는 박 박사의 논문에 대한 토론자로 참석하였다. 오후에 원래 모두 4사람이 발표를 할 예정이었으나 한 사람이 불참하여 시간이 넉넉하였기 때문에, 나를 보고서 발표한 논문에 관한 이야기 말고도 딴 이야기도 좀 하라고 해서,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한학 연구의 방향” 같은 것에 대하여서도 좀 이야기를 하였다. 요지는 어려운 한문 문장을 옳게 읽고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기초를 단단하게 다지는 것(문헌학적인 기초)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한국에서 어느 분야를 공부하든지 간에 한문고전에 대한 이해가 깊어 질 때에야만 비로소 참다운 한국적인 학문 연구 방법이 확립되고, 거기에 보조를 맞추어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도 저절로 극복되리라고 하였다.

저녁 회식이 끝난 뒤에 서울서부터 차를 몰고 별도로 내려 왔던 박 박사의 차에 서울서 온 세 사람이 동승하여 양동 마을로 가서 미리 부탁을 하여 두었던 그 주변의 팬숀에 들어갔다. 역시 그 주변 마을에 살고 있는 친척 내외가 차를 운전하여 그 팬숀까지 찾아 왔는데, 저녁밥을 하여 가지고 왔다. 원래 저녁을 자기 집에서 한다고 하기에, 저녁은 먹고 갈 것이고, 아침이나 하여 주는데 경산 국밥집에서 국을 몇 그릇 사서 갈 터이니, 내일 아침에 밥만 조금하여 달라고 하였더니, 내 말을 잘못 얻어 들은 것이다. 이미 나이 80이 가까운 사람이니 이렇게 말 귀가 어두워진 것인가?

그러나 싸가지고 왔던 반찬과 양동의 특주 한 병 큰 것을 내어 놓고서, 12시 반이 넘도록 주로 박 박사와 서로 어울리어 대작을 하면서 호탕하게 대담을 하다가 돌아갔다. 이 사람은 나의 큰 이종 형님의 맏아들로 나이가 나보다 3살이 적으나, 나를 깍듯하게 “아재”라고 모시지만, 나는 그 사람을 흉허물 없이 지내는 좋은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 내가 대구에 살고 있는 동안 매우 자주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그가 술을 마셔가면서 하는 이야기를 나는 주로 듣기만 하였지만), 그가 어느 문예지에 추천까지 받은 아마추어 “시인”이라는 것, 운동권에서 매우 명성을 누리던 친척 한사람(사촌 매부인 조영래 변호사)을 10여 년 간 감싸 주다가 큰 고생을 하였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지만, 화원 교도소에까지 잡혀 가서 6개월이나 감옥살이를 한 이야기는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참으로 난세를 만나서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다.

그러한 울분이 쌓여서 그런지 누구를 이야기할 때 마다 보통 “그 눔아! 그 시끼! 마, 때려 죽여버릴까 마!”하는 소리로 말을 내어 뱉는 게 버릇 같이 되었다. 전라도 태생인 박 박사는 이러한 말투를 듣고서 매우 신기하게 여기면서, 부지런하게 대작을 하였다.

1월 13일 토요일 춥다. 향단 종가 집에 처음으로 안 체까지 들어가서 보다.

아침은 예정대로 안계 못 뒤에 있는 어제 저녁에 만났던 그 친구 집에 가서 먹었다. 이 집도 전에 자주 와 보았던 곳인데, 이전보다도 이 촌 마을에 집들이 더 많이 들어섰다. 아마 포항이 가까운 곳이니 주말용 전원주택이 많아진 것 같다. 오늘이 토요일인데, 아침부터 차를 몰고 와서 안계 못을 돌며 조깅하거나 산책하는 사람들도 제법 눈에 띈다.

아침을 먹고서, 대구에서 나를 찾아온 이 마을 후손인 화곡암과 나의 동향 후배이기도 한  신 박사를 양동으로 나가서 만나서 함께 양동 마을과 옥산서원, 독락당을 구경하였다. 양동 마을은 이전에도 가끔 와 본 편이나, 국제문화유산이 된 뒤에는 처음으로 와서 보았다. 이전 보다가 초가집이 빈틈없이 많이 들어서고, 마을 첫머리에 있던 교회는 소학교 근처로 옮겨 놓았다. 모든 집들 마다 담장을 잘 쌓고 단장을 깨끗이 하여 놓은 것은 좋으나, 초가지붕의 이엉세가 이전에 촌에서 흔히 보던 것과는 좀 다른 것 같아 보이는데다가, 너무 일률적으로 온 마을의 지붕을 한꺼번에 갈아치우는지 모든 지붕 빛깔이 한결 같이 노랗기만 하니 좀 이상하다. 2,3년 씩 갈지 않아서 좀 우중충하게 보이는 것도 끼어있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러울 터인데…

늘 와 보아도 한 번도 안 체까지 들어가서 보지 못하였던, 이 마을에서 건물 구조가 가장 큰 향단 종가의 안 체까지도 오늘은 들어 가서 구경을 하게 되었다. 종손의 아우 된다는 분 내외가 서울서 살다가 내려와서 지키고 있다고 하는 데, 이렇게 큰 집을 퇴직한 분 내외만이 와서 지킨다는 것이 참 힘들어 보였다.

무첨당 종가에 갔더니 마침 종손 지락 군이 있어, 차 대접을 받고 이야기를 좀 나누었다. 그 사람은 지금 안동의 국학진흥원의 번역팀에 속하여, 매주 한 번씩 거기 가서 번역 실무에 관련된 회의를 하면서, 주로 이 양동지역 선현들의 한문 문집을 맡아 와서 번역을 하고 있다고 한다. 매우 종손으로서 품위를 지키면서도 격에 맞는 일을 하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 더구나 그 부인인 신순일 종부도 주로 양동 마을을 소재로 한 시를 쓴다니 더욱 반가웠다. 그 시집 《양동 물봉골 이야기》을 한 권씩 얻었다.

옥산 서원에 가서는 새로 지은 서고를 구경하고, 그 서원 안에서 점심까지 얻어먹었다. 소반에 독상을 차려 주는 것을 얻어먹어 보는 것은 참 오랜만이다. “양반은 글 덕이요, 상놈은 발 덕이라는 데, 오늘 나는 글 덕을 본 것 같지지만, 박 박사 자네는 오늘 차를 몰고 왔으니 발 덕을 본 것 일세” 라고 하였더니, 이 사람이 종이를 꺼내어 그 말을 메모하였다. 전라도 광주 태생이고, 서울에서만 산 사람인데, 안동을 빼고는 경상도 일대를 별로 구경한 적이 없다고 해서 이번에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이다.

저녁 때 나의 고향 마을에 잠간 들렸다가, 대진 해변에 가서 회를 시켜 먹고 그 회집에서 하루 밤을 잤다. 회와 소주는 있는데 나는 술을 못하니, 박 박사와 대작할 사람이 없어, 어제 저녁에 대작을 하던 그 친구가 생각나서 전화를 하였더니, 흔쾌히 그 부인에게 운전을 시키면서 밤중에 찾아왔다. 이미 저녁을 집에서 먹었고, 반주도 좀 하고 해서 그런지, 어제 저녁 같이 말을 재미있게 잇지 못 하다가 먼저 들어누웠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소주를 한 3잔 쯤 하면서 좀 대작하고, 곱절로 시킨 회를 혼자서 싫건 먹었다. 오늘도 방담을 하다가 12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었는데, 미리 잠자리에 들었던 그 사람이 밤새도록 같이 덥고 자는 이불을 끓어 당기든가, 곁에 와서 어디를 쥐어박든가 해서 나와 박박사 두 사람이 다 잠을 편하게 잘 수가 없었다. 아침에 그 이야기를 하였더니, 그 부인네 말씀이 본래 그 사람의 잠 버릇이 그래서 한방에서 같이 자기가 힘 든다고 하였다. 참 독특한 사람이다.

1월 21일 일요일 맑음. 일출을 보고 영양으로 넘어가서 조지훈 생가와 석보의 두들 마을을 둘러보다.

일찍 일어나서 동해의 일출을 보고서 아침을 먹은 뒤에 일행이 영양으로 넘어 가서 먼저 주실이라는 마을로 가서 조지훈 기념관과 그 생가, 초당 종가 등을 구경하였다. 이 마을 역시 온 마을이 보존 구역으로 지정이 되어 있는지 모든 집들의 담장이 잘 보수되어 있고, 허물어진 집도 없어 참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어제 저녁 때 잠시 들렸던 우리 고향마을(나라골)은 몇 집만 문화제로 지정되어 보수되고 있지 나머지 집들은 허물어 진 채로 방치되고 있는 데가 많은 데가 많은데, 이런 잘 다듬어 놓은 마을을 보게 되니 자꾸 비교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조지훈기념관은 그런대로 아담하게 잘 지어 졌고, 전시도 볼 만하였다. 그의 생가라는 이 마을 조씨들의 가장 큰 종가 집(호은 종택)은 언제 와보아도 늘 비어 있는데, 건물도 6.25 사번 뒤에 다시 지어 별로 특징이 없어 보였다. 다만 그 집보다는 뒷 쪽 구석에 있는 초당 종가 집이 역시 비어 있기는 마찬 가지이지만, 한쪽은 뜰 기와집이 있고, 한쪽에는 초가집으로 지은 정자가 잘 보존되어 있어 매우 흥미롭게 보였다.

이전 선비들은 친구를 맞이하여 놀 때나 시를 지을 때, 흔히 이런 초당에서 산다는 것을 매우 즐겁게 자랑하였는데, 요즘에 그러한 선비들이 쓴 시를 연구한다는 사람들은 대개가 그런 말투만 보고서, 그런 시를 쓴 사람들이 실제로 한결같이 그렇게 빈한하게만 살았던 것 같이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와는 대개 반대였다는 것을 나는 요즘 자주 주장하고 있는데, 이 집을 그 실례로 들 수가 있어 즐겁다.

이 집(초당종가)는 문벌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살림도 넉넉하여, 장서가 많기로 이름난 집인데, 한국에서 개인 문집으로는 가장 권질 수가 방대하다는 정조대왕의 문집인 《홍재전서》(170 책)까지 구비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이 집은 한말에는 독립운동에 동참하기 위하여 만주로 들어갔고, 그 뒤로 맨손으로 돌아온 뒤에는 한국 정부 아래서 조지훈 시인 쪽의 집안은 오히려 크게 영달하였으나, 이 쪽 집안은 상대적으로 큰 빛을 누리지 못하였으니 매우 안타깝게 생각된다. 우리와 같은 세대의 그 집(초당) 종손은 매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용하게 교수(영남대 교육학과의)까지 되었으나, 이미 죽은 지 20년은 넘은 것 같으니 안타깝다. 나보다 여섯 살이나 위였지만 서로 말을 놓고 지내자고 해서 허교(許交)를 하고 매우 친한 사이가 되었었는데, 이 집에 더러 와서 볼 때 마다, 고인이 된지 오래된 그 친구 생각이 자주 난다.

영양 읍내로 들어가서 장터거리로 가서 국밥을 한 그릇씩 사서 먹은 뒤에, 경주 양동에서부터 이틀 동안 어울리었던 그 친구 내외는 돌아가고, 서울서 온 일행 셋은 석보의 두들 마을로 들어가서 구경을 좀 하고서 상주까지 새로 난 경북 중부 횡단 고속도로를 따라 나와서 중부고속도로 접어들다가 괴산 휴게소에서 저녁을 먹고서 서울로 올라왔다.

석보 두들은 우리 일가들의 집성촌이라 이전에도 더러 와서 보았으나, 근자에 장씨 할머니(국문 요리책 음식지미방의 저자 장씨 부인)를 기념한다는 건물을 많이 지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한번 다시 와서 보았는데, 정말 “상전벽해”라고 할 정도로 많은 건물들이 지어졌다. 이 많고 큰 건물들을 앞으로 모두 다 어떻게 활용하겠는지? 이미 예절관이니, 전통요리 체험관, 광산문학관(이문렬 문학관) 같은 것도 매우 큼직하게 지어져 있는데, 그런 것과는 별도로 마을 뒤에 있던 공지 수 천 평을 다시 헐어 완전히 새로운 아방 궁전 같은 집들을 새롭게 즐비하게 완공하여 가고 있으니 정말 놀랍다. 부디 잘 활용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