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굿바이
나는 친구이자 생질인 한사장과 함께 23년 전에 다녀 온 8박9일간(1993.4.22-4. 30)의 일본 여행기를 정리해서 카페에 올렸다. 우리의 배낭여행은 옛날 왜정시대에 일본 유학을 다녀 온 집안 사촌 형님들이 배낭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우리에게 자랑 삼아 들려 주신 경험담에 힘입어 실행에 옮기게 된 것이다. 형님들과 달리 일어가 딸리는 우리는 일종의 모험이었다.
경제적으로 하되 재미있게 여행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는데, 주요원칙으로는 JR PASS 1주일 짜리를 구입해서 가능한 한 철도를 이용하고, 먹는 것은 식당가에서 매식하되 일부 컵 라면, 고기통조림 등을 일정량 휴대해 가고, 숙박은 기차역 가까운 곳에 위치한 여관을 이용하기로 한 것 등이다.
잠 자리가 제일 문제였는데, 어떤 호텔을 선정하고 예약해야 할 지가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좀 싸고 편리한 호텔을 이용하기 위해 처음에는 형님들이 이용했다는 유스호스텔을 고려했지만, 계획 도중에 배제하였다. 유스호스텔은 값이 싼 만큼 땅값이 비싼 시가지 중심지나 역전에는 없었다.
따라서 유스호스텔은 기차여행을 하는 우리들에게는 부적절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렇다고 호텔을 예약하지 않고 외국여행을 떠날 수는 없었다.
마침 일본에는 기차역전 마다 올나잇 사우나가 있어 자유여행자에게는 제일 경제적이고 깨끗한 숙박소라는 정보를 얻었다. 그건 참으로 좋은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우리는 역전에서 파출소에 들려 여관을 소개받는 방법을 기본으로 하되 올나잇 사우나를 예비수단으로 삼았다.
올나잇 사우나에 대한 정보가 조금씩 더 입수되고, 어렴풋이 나마 캡슐호텔도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일단 여관 아니면 올나잇 사우나를 잠자리로 정하고 떠났지만, 사실 일본에 도착할 때까지 가장 부담스러웠던 점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별로 확인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현장에 도착했을 때의 상황이 어떨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서울에서 여행사나 일본 문화원 등을 방문해서 자료를 입수하였지만, 그들에게서도 자세한 자료를 입수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여행사의 직원들도 심지어 JR PASS의 사용범위, 제한사항 등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제일 참고가 되었던 것은 일본 교통공사에서 매월 발행하는 JTB 시각표였다. 이 책에는 각 열차 시간표, 각 지역별 관광버스 운행시간표, 선박, 호텔자료 심지어 정거장 건물 내부구조까지 실려 있었다. 그러나 이런 기초적인 자료에 신경 쓰다 보니 정작 차분하게 준비해야 할 볼거리에 대한 사전지식이 부족한 채로 떠나야 했다.
우리는 준비가 턱없이 부족했음을 절감해야 했다. 그리고 결국 어떤 면에서는 수박 겉핥기 식의 여행을 하고 돌아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로 당시 일정표를 요약해 봅니다.
93. 4. 22(목)
o 부산 - 후쿠오카 :KE 732 12:20 - 13:05
o 후쿠오카 관광:시내 일원
o 숙박(Sauna Plaza)
93. 4. 23(금)
o 하카타 - 교토(히카리 30. 06:00 – 09.00)/교토관광(10:15 - 16:30)
o 교토 – 신요코하마(히카리 52. 17:34 - 19:56)
o 요코하마 숙박(New Japan Sauna)
93. 4. 24(토)
o 요코하마 – 신요코하마(전철)/신요코하마 - 아따미 - 미시마 (고타마 401. 06.34 - 07.12)
o 후지산 관광(紅富士 Course. 09.40 – 18.10)
o 신후지 – 토쿄(코타마 자유석)/ 토쿄역 – 우에노역(순환선)
o 우에노 숙박(Dandy Sauna & Capsule Hotel)
93. 4. 25(일)
o 도쿄관광(우에노, 이케부크로, 신주쿠,긴자 일대)
o 우에노 숙박(Dandy Sauna & Capsule Hotel)
93. 4. 26(월)
o 우에노 - 우쯔노미야 (야마비꼬. 자유석)/우쯔노미야 - 니코 (니코선)
o 닛코역 - 닛코 관광지(노선버스)/니코관광(주우젠지호, 게곤노타귀)
o 닛코관광지 – 닛코역(노선버스)/니코 – 우쯔노미야(니코선)
o 우쯔노미야 – 모리오카(야마비코 47. 14:53 - 18:27)
o 모리오카 숙박
93. 4. 27(화)
o 츠나기 온천장 왕복 (노선버스)모리오카 – 토쿄(야마비코 42. 12.10 – 15.44)
o 토쿄 – 신오사카(히카리 245. 16.00 – 18.53)
o 신오사카 – 오사카(순환선)
o 오사카 숙박(다이토요 Capsule Hotel)
93 4. 28 (수)
o 오사카 – 나라관광(오사카성, 호류사, 시덴노지, 도오다이사, 가스가다이사 등 순환선으로)/오사카 – 신오사카(순환선)
o 신오사카 – 고쿠라(히카리 53. (18.06 – 20.35)
o 고쿠라 숙박(Sauna Plaza)
93. 4. 29 (목)
o 고쿠라 – 니시가고시마(니치린 1.(06.40 – 13.45)/니시가고시마 – 가고시마( JR 버스로 시내일대)/니시가고시마 – 하카타(츠바메 26. 18.57-22.56)
o 하카타 숙박(Sauna Plaza)
93. 4. 30 (금)
o 하카타 – 부산(KE 735. 14.15 – 15.05)
인사말씀
나는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지루한 느낌을 덜어드리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 글 내용을 함축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림을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인용근거를 댈 수 없었는데, 혹시 원작자의 권리를 침해한 것은 아닌지 부담스럽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일본인들을 치켜세웠다 깎아 내렸다 했습니다. 일본인들은 그들끼리는 잘해 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그들의 역사날조가 모든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아마 영원히 풀 수 없을 것입니다. 과연 이 문제를 비켜가면서 서로 잘해 나갈 수 있을지 심히 걱정됩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처음 한 사람이 괴테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스키마 때문이라고 합니다. 같은 내용을 보고도 자신의 기존 지식, 경험을 바탕으로 해석하고, 판단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어느 정도 왜곡된 또는 불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말입니다. 여행할 때 특히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향이 아주 농후 합니다.
조선시대 선조는1590년 3월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냅니다. 서인 황윤길을 정사로, 동인 김성일을 부사로 임명합니다.
그런데 일본은 그 동안 사절단을 맞이할 때마다 대마도에서부터 의례적으로 행하던 절차를 따르지 않아 조선의 사절단을 격노하게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있는 오사카에 도착하지만, 그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우리나라 국왕 선조의 국서를 수령하지 않고 자꾸 지체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신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예를 지키지 않고 오만 방자하게 굴었습니다. 돌아가기 위해 답서를 달라고 재촉해도 차일 피일 미룹니다. 드디어 답서를 받았습니다만 그 내용이 거만하여 부사 김성일이 몇 번씩 수정을 요청해서야 이를 받아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약 1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은 상반된 의견을 내 놓습니다. 황윤길은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은 눈빛에 광채가 깃들어 탐욕과 지략을 갖추었고, 전국을 통일한 직후라 자신감과 야심으로 가득 차 금방이라도 조선으로 쳐들어올 것으로 보였다."며 침략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할 것으로 보고합니다.
반면, 김성일은 "풍신수길의 행동은 과장되고 허세에 가득 차 있었다."며 "군사를 움직일 저의가 있었다면 은밀하게 움직였을 것"이라고 반박합니다. 또 "조선과 지위를 대등하게 하기 위한 허세일 뿐이다"고 정사 황윤길의 주장을 일축합니다.
조정대신들은 부사 김성일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김성일이 당시 전혀 싸울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임금이나 조정대신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것이 동인과 서인의 경쟁관계 때문에 다른 의견을 낸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렇게 판이하게 다르게 본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두 붕당의 대립관계가 영향을 미친 것일까요? 정사, 부사의 보는 눈이 각각 달라서였을까요?
당시 황윤길은 상대방을 의식한 나머지 다소 저자세로 일관했고 부사인 김성일은 체통을 지켜야 한다며 사사건건 충돌이 있었다고 합니다. 황윤길은 위엄은 부족했지만 허세보다는 내실을 중시한 것 같고, 김성일은 자존심이 강하고 의전을 중시하되 만용을 부리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후세의 평가는 그러나 김성일이 개인적 감정 때문에 황윤길과 정반대의 의견을 낸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김성일도 전쟁가능성을 인정했지만 민심혼란을 걱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김성일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변명처럼 들립니다.
나라의 위급상황을 맞아 임금과 조정대신들의 정확한 사세판단을 도와야 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절체절명의 임무이자 도리이었지 백성들의 동요문제를 언급할 계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자기의 소관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그가 만일 허위보고를 했다면 그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분명히 해두어야 할 점은 그에게 모든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조정은 왜 정사인 황윤길의 보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당시 일본이 침략해올 징후는 많았습니다. 일본이 보낸 답서의 내용자체가 선전포고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답서에는 ‘명을 공격할 터이니 조선이 앞장서고, 선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군영에 임하라’ 적혀 있었습니다.
또한 선위사 오억령이 일본 회례사(일본이 외국에서 사신이 왔을 때 답례로 보내는 사신을 말하는데, 이들은 우리 통신사일행을 따라 들어온 다음 일단 부산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조정에서 내려간 선위사의 안내를 받아 조정으로 들어 옵니다.)인 승려 게이테스 겐소를 만난 직후 왜적이 침입해올 징후가 있다고 보고했는데도 조정은 오억령이 민심을 혼란 시킨다며 파직시켜 버렸습니다. 그의 후임 심희수도 같은 보고를 했지만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준비가 없던 조정은 '전쟁은 없다'로 중론을 몰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책임은 당시 임금과 조정대신들에게 있었습니다. 이로 써 조선은 임진왜란이라는 참담한 시련과 고통을 겪게 됩니다.
나의 여행 준비가 부실했음을 말하려던 것이 너무 거창하게 확장 되었습니다. 카페에 글을 올리며 글 제목에 따라서 선호도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을 보고 좀 놀랐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심과 갈망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나 신호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나라는 역사상 또 한번의 중대한 전기를 맞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우리는 어떤 위기가 닥쳐 오더라도 슬기롭게 잘 대처해 나갈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글은 자기자랑을 하려고 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 경험담을 들려드리고, 새로운 발견들을 알려 드리고, 유익한 정보를 나눠 드리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나름대로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동기에서 썼습니다. 다른 분들의 관점을 의식하지 않고 내 생각대로 막 썼습니다. 너그러이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작가님, 감사합니다. 긴 글 쓰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일본에 대한 다양하고 풍부한 정보, 그리고 역사의식,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의 말씀들이 너무 소중합니다. 드문드문 읽었지만 시간 되는 대로 모두 읽어 보겠습니다. 자랑? 잘난척? 그런 거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설령 그랬다 한들 뭐 어떻습니까? 감사합니다.^^
회장님! 별로 잘 쓰지도 못했는데 격려해주시고 칭찬해주시니 힘이 납니다. 감사합니다.